소설리스트

193화.예비한 힘 (194/278)

예비한 힘

 문신 시술은 바로 할 수가 없었다. 당장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마을 축제가 열렸던 것이다.

 아카족 대원들이 데모시티에서 구해 온 식량과 약재 그리고 의복 들을 본 사람들은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카르와 거래한 것에 비해 그 질은 물론 양이 몇 배는 더 많았던 것이다. 거기다 하룬이 비슷한 양을 선물로 내놓았다.

 "하하하!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정말 훌륭한 거래를 하고 돌아왔군."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창고로 옮기며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이제 한 동안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네.'

 먹을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니까. 

 하룬은 대원들을 모이게 하고 용병이 된 보수를 선지급했다. 이럴 때 이들의 위상을 극적으로 올려 주고 싶었다.

 약속한 대로 100명이 1년동안 먹을 식량, 의복에 그릇이나 조리 도구, 화장용품 등 각종 생활용품을 받은 대원들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그 양이 자신들이 마수 가죽과 약초의 대금으로 받은 돈으로 구입한 것보다 더 많았을 뿐 아니라, 다양하고 질 좋은 생활용품들은 같이 따라온 가족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엄마, 이건 엄마 옷이에요."

 타킴이 피리엘에게 건네주는 옷은 지금껏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화려한 색상에 하늘거리는 재질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찢어질 것 같은 옷이지만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자신이 입어도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번 입어 보세요."

 타킴의 채근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피리엘의 모습을 본 마을 여자들의 눈이 뜨거워졌다. 비록 시커멓게 탄 얼굴이지만 옷이 날개라고 도시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은 피리엘의 모습은 그야말로 여신처럼 아름다웠던 것이다.

 "이모, 너무 아름다워요."

 "정말?"

 피리엘은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이미 짐작은 했지만 다루미의 칭찬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다루미 누나와 피체크 그리고 주루 것도 있어요."

 이제 새롭게 가족이 된 이들도 챙기는 타킴이다. 세 사람은 타킴이 준 옷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열병이 완전히 나은 주루는 부드러운 옷의 감촉이 좋은지 자꾸 옷을 얼굴에 부비고 있었다.

 "오빠, 내 거는 없어?"

 이제 열여섯 살이 되어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나이인 살케가 타킴을 채근했다.

 "왜 없겠니?"

 타킴은 타이트한 튜닉을 그녀에게 건넸다. 지금 파이린 제국에서 한창 유행하는 외출복으로 굴곡 있는 여성의 몸매를 한껏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튜닉을 가슴에 소중히 안고 집으로 후다닥 뛰어가 갈아입고 다시 나온 살케는 정말 꽃사슴처럼 예뻤다.

 "……어울려?"

 "주위를 둘러봐!"

 예상한 대답 대신한 오빠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살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을 청년들의 눈빛이 여간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뜨거운 관심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살케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후끈거리는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이건 화장품이에요. 도시 여자들이 쓰는 건데 좋은 향기가 나고 얼굴을 타지 않게 해 준대요."

 피리엘과 살케는 카르에서 마정석 세 개는 주어야 구할 수 있는 화장품을 받고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본 모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디 나도 구경 좀 해보자, 살케."

 마을 최고의 미인으로 많은 전사들의 구애를 받고 있는 가르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살케 곁으로 다가왔다.

 "향기가 아주 좋아, 언니."

 가르샤는 화장품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자신의 얼굴에 바른다면 목석처럼 자신을 몰라주는 킨툰 마을의 최고의 전사도 자신의 마음을 얻으려고 열정적인 구애를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킴, 이거 나한테 팔 수 없을까? 우리 집에 있는 프로즐리 가죽 두 장이랑 바꾸자."

 가치를 따지면 넘치고도 남았지만 타킴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가르샤 누나. 이건 제가 용병이 되어 번 돈으로 산 엄마와 동생의 선물이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선물이거든요."

 미안한 얼굴로 말하는 타킴의 말에 가르샤는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치첸도 약혼녀인 두르본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연방 침을 삼켰다. 비록 남자와 똑같이 수련하고 사냥을 해 왔지만 그 덕분에 강한 야성미와 여성미가 섞여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발산했던 것이다.

 "두르본, 정말 예쁘다!"

 "정말? 호호호!"

 두르본은 데모 시티에서 본 여자들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다, 당장 내 집으로 가자!"

 "아이!"

 두르본은 자신의 미모를 뿜내기라도 하듯 치첸의 만류에 불구하고 마을을 활보했다. 예상대로 수많은 전사들의 뜨거운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제껏 잊고 살았던 여자로서의 자긍심이 솟아올랐다.

 돌풍 용병대원을 가족으로 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처음 접하는 물건들을 즐겼다.

 "우리 다르밧도 이번 여행에 따라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무슨 소리를! 자고로 용병이 되려면 우리 체일처럼 힘도 좋고 마수 사냥도 잘해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축제를 준비하라는 북 신호가 울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라도 대원들의 가족들을 에워싸고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했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여러 개 피워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하룬과 탄과 라티카 그리고 원로들과 함께 마을 주민들의 춤과 노래를 구경하며 식사를 즐겼다. 그들의 전통 악기 소리에 맞추어 추는 춤은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무척 흥겨웠고 절로 신명이 나게 만들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밤이 깊어져서야 시작되었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거나 혼자가 된 성년의 남녀가 따로 마련한 장소에서 모여 모닥불 주위를 돌며 격정적인 구애의 춤을 추면서 서로를 유혹하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혼인을 하기 전이나 배우자의 사망으로 혼자의 몸이 된 경우에는 자유로운 연애가 인정되는 터라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정염의 시선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새로 대원이 된 에인족과 부르카족 전사들은 기존의 탄툰마을 전사들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룬이 아카족 대원들의 보수를 선지급하는 바람에 탄툰 마을에 피난을 와 있는 아카족 처녀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쏠렸던 것이다.

 혼인을 했거나 미성년인 경우에는 그 시각에 전통 춤을 전수받거나 마을 노인들에게 전설을 들으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레미는 다른 마을의 칸을 비롯해서 주술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번 여행에서 겪은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근처 마을의 주술사들은 거의 라티카의 제자들로 동문이나 마찬가지인 데다 그녀가 막내였다.

 주술사들은 막내인 레미가 겪은 모험을 들으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세상에 대한 관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난 마법이라는 걸 배우고 싶다."

 동문 중 가장 연장자이자 이미 한 마을의 칸이었던 다쿠가 자신을 꿈을 밝혔다.

 "주술도 뛰어나지만 우리 일족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싶어."

 다쿠의 말을 듣는 주술사들의 얼굴에도 다쿠와 비슷한 열망이 떠올라 있었다. 보다 넓은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해서 마수의 위협과 거친 환경으로 신음하는 일족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축제에 흠뻑 빠진 시간 하룬을 마을의 수뇌부들과 탄의 집에서 따로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다른 마을의 탄들이 이곳에 와서는 원로의 신분이 되어 수뇌부에 합류했기에 그 숫자가 열에 가까웠지만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하룬 대장이 우리 아카족을 상징하는 문신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이군요."

 탄과 원로들은 하룬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을 보면서 무척 신기해하는 한편 그에게 강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어쨌건 자신의 일족만이 새기는 문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게. 그런데 레미가 왜 이렇게 문신을 작게 새긴 거지?"

 탄과 원로들은 이제 아주 작아졌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문신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게 이미 저 크기가 될 정도로 마수의 힘을 흡수했다는 증거요."

 리티카의 말에 둘러앉은 이들의 눈이 커졌다.

 "허허! 그러니 하룬 대장은 우리 아카족이나 마찬가지요. 그보다 들었소, 탄?"

 "뭘 입니까, 칸?"

 탄은 주술사 라티카를 칸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주술사를 부르는 산악 부족의 호칭인 것 같았다.

 "하룬 대장은 레미가 새긴 열 가지 문신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오."

 "정말입니까?"

 탄과 원로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내가 직접 확인했소. 그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룬 대장은 동시에 다섯 개의 힘을 쓸 수도 있소, 물론 샤키의 눈처럼 최하급에 속하는 마수의 힘이 섞여 잇긴 하지만 말이오."

 "설……마 타키야?"

 "하룬 대장이 타키야께서 말씀하신 어둠의 일족이란 말입니까, 칸?"

 리티카의 말을 들은 탄과 원로들은 여지없이 타키야라는 이름과 어둠의 일족을 떠올렸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 것 같소이다. 전설에서 말하는 외모와는 너무 다르니까 말이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룬 대장이 우리 일족만이 쓸 수 있는 마수의 힘을, 그것도 타키야 님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누구도 오를 수 없었던 경지까지 쓸 수 있다는 것이오."

 리티카의 말에 탄과 원로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룬에게는 불편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라티카였다.

 "해서 난 나머지 열개의 문신도 하룬 대장에게 해 줄 생각이오."

 "오! 중급과 상급 마수들의 힘까지."

 "가……능하겠습니까?"

 탄과 원로들은 칸의 결심이 단단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 역시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하룬의 육체가 마수의 힘을 견디지 못할 경우였다.

 "난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소. 하룬 대장의 몸속에는 우리 일족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어둠의 힘과 비슷한 성질의 힘이 흐르고 있소. 비록 하룬 대장이 타키야께서 예언하신 어둠의 일족이 아닐 가능성은 높지만 그래도 해 볼 생각이오."

 라티카는 반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좋습니다. 저 역시 칸의 결정에 동의합니다. 하룬 대장은 우리 두르본의 능력을 단기간 내에 두 배 이상 끌어올렸습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실로 보아 하룬 대장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우리 아카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찬성합니다. 굳이 타키야께서 언급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산악 부족 최강의 전사는 우리 아카족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하하! 이제 우리 일족 중에 용병대 대장까지 있으니 아카족의 미래는 든든합니다. 비록 마수들이 난리를 치고 있지만 우리 일족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산악 부족의 머리가 되어 만년 왕국을 건설할 겁니다."

 이미 얼큰하게 술을 마신 라티카는 자신의 결정을 원로들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마음의 부담을 털어 버렸다.

 "자, 그건 그렇고 하룬 대장에게 청할 부탁이 하나 있소."

 탄이 무척 고무된 얼굴로 말했다.

 "뭡니까?"

 어쨋든 이제는 아카족의 일원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다.

 "우리 전사들을 용병대원으로 100명만 더 받아 주시오, 대장."

 "네?"

 하룬은 대원들이 마을의 어른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용병이 된 것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내내 생각해 왔기 때문에 탄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던 전사들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소. 자신들도 용병이 되겠다고 말이오."

 아직도 팽팽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한 원로의 보충 설명이었다.

 "그게……."

 갑자기 나온 얘기라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대장이 미리 지급한 보수로 인해서 지금 마을 사람들 역시 난리도 아니오. 한 사람당 받은 보수는 열 사람이 1년을 족히 쓰고도 남을 양인 데다가 카르에서도 구하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이 사람들을 자극했다오."

 자신은 그저 대원들이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인정을 받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전사들의 경우 꼭 그런 문제 때문에 난리가 난 것만은 아니요."

 "그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올해 성년이 되어 이제 갓 전사가 된 타킴이 마을의 최고의 전사 중 1명인 치첸과 대등하게 싸웠소. 불과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에 일어난 변화라고 치기에는 너무 놀라운 일이오. 그들은 이 모두가 대장과 선배 대원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했소. 전사들이 강해진다는 것은 부족의 힘이 커진다는 이야기, 나와 원로들은 우리 전사들을 대장에게 더 많이 맡기기로 결정했소."

 "그거 좋은 의견이군. 하룬 대장도 이제 우리 일족이니 아카족 전사들이 따르는 데에도 문제가 없고 얼마간의 희생은 나겠지만 살아 돌아온다면 강해질 것이고 그들이 우리 일족의 힘을 강하게 키울테니 말이오."

 기존 전사들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그들 역시 돌풍용병대원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돌풍 용병대원이 된 다른 부족의 전사들도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선발전을 통해 선발된 부족 최고의 전사들이다. 잦은 사냥으로 인해 서로의 존재를 잘 알고 있으니 자존심 때문이라도 용병이 되고 싶은것이다.

 '더구나 젊은 나이이니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욕구도 강할 테지.'

 하룬은 전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너무 많은 인원을 대원으로 받아들이기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저는 아카족 대원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야 이제 막 대원으로 받았으니 모르지만 이제까지 지켜본 아카족 대원들은 성실하고 강인하며 뛰어난 자질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그렇게 강해진 거라 믿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소. 우리 부족이라서가 아니라 본래 아카족 전사들의 용맹함과 뛰어난 사냥 실력은 산악 부족들 중에서도 으뜸이라오."

 하룬의 칭찬에 탄을 비롯한 마을 원로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많은 대원들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흐음! 보수 때문이라면 더 낮출 수도 있소. 어차피 근처 일족들이 우리 마을로 모여드는 상황이라 사냥을 하고 마을을 수호할 전사들의 숫자는 충분하니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정도 보수는 우리 용병대 자금으로 지금이라도 1,000명까지 지불할 수 있습니다. 전 다만 당장 그 정도의 인원은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탄과 원로들은 하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명 하면 되는 사냥을 굳이 100명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30명만 더 받아주시오. 다른 부족에서도 그 정도의 대원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 주시오. 대장이 원한다면 보수는 받지 않을 수도 있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사들이 폭발을 하고 말 거요."

폭발이라는 과격한 말까지 쓰는 것을 보면 지금 전사들이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이거야, 원! 완전히 등 떠밀려서 대원을 받게 생겼네.'

 하룬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마츠루트 요새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데빌 산맥을 무대로 한동안 의뢰를 수행할 테니 가용 전력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럼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하룬의 말에 탄과 원로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 현재는 많은 대원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다를지 모릅니다. 지금으로써는 확신할 수 없지만 예상하기로는 상당히 많은 대원들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떤 건마다 아카족 전체와 계약을 맺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럼 평소에는 마을에 거주하다가 일이 생기면 나가면 되는 거요?"

 "그렇습니다. 사안에 따라 10명이 처리할 만한 일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수백 명 이상이 나서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탄은 라티카와 원로들의 의견을 구했다.

 "괜찮을 거 같소. 어차피 마수들 때문에 흩어져 살던 일족들이 거점 마을인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니 전사의 숫자는 충분할 거요. 전사가 부족하면 다른 마을의 전사까지 동원하면 되지 않겠소."

 "무엇보다도 전사들이 1년 내내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되니 마수 사냥을 나가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소."

그렇게 찬성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반대를 하는 이도 있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마수들 때문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드는 상황인데 일시적이긴 하지만 한꺼번에 전사들이 빠져나가면 마을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지금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도 마을과 부족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일세. 거기에 식량이나 약초 혹은 목재와 같이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항시 충분한 수의 전사들이 필요할 테니."

 거의 대등한 의견이라 쉽게 결정이 나질 않았다. 양쪽 다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이곳을 떠날때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인데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잠깐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실 치앙 카르의 의뢰를 처리해 주고 카르를 숨겨 주는 결계 주술을 대가로 받았습니다. 만약 이 주술을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을의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주술을 알려드리는 것은 제가 한 제안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전 다만 산악 부족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폭리를 취해 온 치투족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이 보물로 여기는 주술을 대가로 받았을 뿐입니다. 이미 부르카족과 에인족 마을에는 이 주술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오!"

 "그 결계 주술을!"

 하룬의 말에 마을 수뇌부들은 크게 흥분했다. 소음과 냄새는 물론 그 모습까지 숨겨 주는 치투족의 결계 주술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식량 문제로 마츠 평원에 정착할 생각도 여러 번 했던 산악 부족들이 가장 탐내는 것이 바로 그 주술이었다.

 "그리고 식량을 비롯한 물품들은 오래지 않아 저희 용병단이 출자해서 출범시킨 돌풍 상단이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아 거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도시보다야 비싸겠지만 카르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공급하고, 마수 가죽이나 마정석은 고가에 구입할 겁니다."

 하룬의 이어진 말에 탄을 비롯한 수뇌부는 크게 만족했다.

 "하룬 대장이 오니 우리가 걱정하던 일들이 모두 술술 풀리는 구려. 안 그래도 몰려든 피난민들 때문에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그 모두를 하룬 대장이 해결해 주고 있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와 같은 늙은 전사들이라도 나설 수 있소. 사실 힘은 달리지만 경험에 따른 임기응변은 우리와 같은 노력한 전사들이 최고지."

 마을의 수뇌부들이 고민하던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방안이 나오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좋아졌다.

 "대장의 제안들 받아들이겠소. 내가 책임지겠소. 얼마 후에 있을 아카족 탄 회의에도 정식으로 이 모든 사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겠소."

 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룬을 지지했다.

 이튿날 탄툰 마을은 예정에 없던 돌풍 용병대원 선발전을 벌이느라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전사들은 예외없이 돌풍용병대에 들기를 원했지만 새로 뽑는 인원이 겨우 30명이고 서른 살까지로 나이를 제안 했기에 치열한 대련을 해야만 했다. 여러 마을에서 몰려든 상태였기 때문에 경쟁심까지 가세하며 선발전 분위기가 초반부터 과열되어 피가 난무하고 중상자가 속출했다.

 하루가 꼬박 걸린 선발전을 치른 결과 두르본의 약혼자인 치첸을 포함해서 각 마을의 전사들이 대거 포함된 최정예 전사들이 선발되어 자랑스러운 돌풍 용병대원이 될 수 있었다.

 탄은 선발전에서 탈락한 전사들을 모아 놓고 풀이 죽은 그들을 다독였다.

 "모두 수고했다! 운이 좋지 않아 이번 선발되지 않은 전사들은 실망하지 마라. 당장은 30명만 선발했지만 앞으로 계속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하룬 대장이 약속을 했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산맥의 상황으로 인해 어쩌면 중년이 넘은 전사들에게도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이번에 선발이 되지 않았다고 의기소침하지 말고 열심히 수련을 한다면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선발될 것이니 오늘의 결과를 거울 삼아 부단히 수련하라!"

 탄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비교적 성정이 단순한 전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들 말고도 라티카의 특별한 부탁으로 다쿠를 비롯한 주술사 3명도 용병대원으로 합류했다. 그들은 라티카의 제자들로 이미 다른 마을에서는 1명의 주술사로 대접을 받았지만 이번 마수 사태로 인해 이곳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그들은 막내 격인 레미가 보인 파격전인 발전과 그동안 품고 있었던 넓은 세상에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라티카를 통해 돌풍 용병대원이 된 것이다.

 사흘째가 되는 날은 탄툰 마을에 결계 주술을 치기로 했다. 칸인 라티카는 레미와 다쿠를 포함해 자신이 가르친 주술사들을 데리고 마을 주변에 결계를 쳤다. 결계를 치기 위해서 들어간 마정석 숫자가 이백 개가 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터라 그 정도는 충분했다.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밧줄을 이용해서 마을의 사면에 있는 가파른 절벽에 올라 라티카가 지정하는 장소에 마정석을 설치했다. 하루가 꼬박 걸려 만들어 낸 결계는 마을의 모습은 물론 마을에서 나는 소음과 빛까지 삼켜 버렸다.

 "후후! 이제 이곳을 침벌할 마수들은 더 이상 없을 테지."

 "그렇소, 탄. 비행이 가능한 마수들과 몬스터들도 우리 마을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을 거요. 결계 주술의 효과를 확인했으니 일족이 더 몰려들면 밖으로 마을을 확장할 수도 있게 되었소."

 탄과 칸을 비롯한 탄툰 마을 수뇌부는 밖에 나가 결계 주술의 위력을 직접 확인하고 환한 얼굴이 되었다.

 창고마다 식량이 그득하게 결계 주술로 안전까지 확보가 되었으니 최악의 상황에서도 반년은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된 것이다. 늘 마수의 침략에 마음을 졸이고 살다가 이렇게 안전해지니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질 줄 몰랐다.

 나흘째가 되는 날에는 라티카가 각 마을에서 온 주술사들을 조수로 삼아 하룬의 몸에 마수의 문신 열 개를 차례대로 새겼다. 그들 모두 중상급 마수의 문신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문신의 형태와 작업 과정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오!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문신이 반응하다니!"

 레미를 제외한 다른 주술사들이 깜짝 놀랐다. 라티카로부터 이 마수의 문신을 전수받은 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문신은 마치 살아 있는 꽃러럼 생동하며 하룬의 몸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하룬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은, 마정석 가루가 뿌려지자 이내 가루를 흡수하여 절반 크기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하룬의 전신에는 문신이 빼곡하게 새겨져 그 어느 아카족 전사보다 더 전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문신을 새긴 라티카와 주술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기대했지만 하룬은 나르스의 날개라는 힘을 아주 짧게 쓸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르스는 인간형 마수로 등에 날개가 있어서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며 공격을 하는 비행 마수였다. 그 힘을 활성화시키면 등에서 털이 없는 피막 형태의 커다란 날개가 솟으며 하늘로 날아로를 수 있었다.

 위신느를 소환하지 않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기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힘은 열 호흡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중상급 마수들의 마정석 가루가 부족해서 아직 그 힘은 쓰기 힘들 겁니다. 역시 하급 마수들의 마정석에 담긴 힘으로는 중급이나 상급 마수의 힘을 쓰는 건 무리인가 봅니다."

 라티카는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하룬은 실망하지 않았다.

 "반드시 중급 마수들과 상급 마수들을 잡아 이 문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타키야 님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내 평생의 소원이 모든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전사가 우리 부족에서 나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룬은 자신과 다섯 정령의 힘이라면 상급 마수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신을 시술받은 다음 날.

 하룬은 신규 대원들을 소집해서 마을 밖의 모처로 이동했다.

 "지금부터 배울 것은 우리 용병대의 비전이다."

 "화아!"

 "드디어!"

 느닷없는 소집에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하던 신규 대원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이미 기존 대원들 통해 수련 검식과 존재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마수의 힘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면서 문신에 흡수되어 힘을 더욱 강하고 빠르게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론 지속 시간까지 늘려준다는 수련 검식의 존재를 들었던 대원들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일단 수련 검식의 각 동작을 암기하고 능숙하게 펼칠 수 있도록 수련하기 바란다. 때가 되면 순정석을 나눠 줄 것이니, 그사이 얼마나 동작과 호흡을 잘 일치시켰느냐에 따라 앞으로 진전이 달라질 것이다. 기존 대원들은 앞으로 나와 새 대원 5명씩 맡아 수련 검식을 교정시켜 주도록!"

 하룬은 새 대원들에게 열 번에 걸쳐 수련 검식의 각 동작과 그 동작에 따른 호흡의 길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호흡의 길이와 동작을 마추지 못해 헤매던 대원들이었지만 나름 각 부족과 마을의 최고 전사로 자부하던 이들이라 기존 대원들의 상세한 조언을 받아 자세를 교정할 수 있었다. 

 탄툰 마을이 자리한 곳은 자연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곳으로 순수한 마나가 농밀한 곳이었다. 일족 중에서는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신입 대원들 상당수가 일주일에 걸친 집중적인 지도와 수련을 통해 마나 오션을 생성시켰다.

 기존 대원들 중에서 옥세르와 디온은 마나 오션에서 손까지 이어지는 마나 로드를 뚫은 곳은 물론이고 상당한 양의 마나를 축적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하룬에게도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일이 생겼다. 네 정령들이 나이아를 필두로 하나씩 각성을 한 것이다.

 하룬이 탄툰 마을의 위쪽에 있는 깊고 맑은 샘 근처에서 마나 플로를 수련하던 와중에 나이아가 자신의 의지로 그의 앞에 모습을 보였는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연한 물빛 드레스를 걸친 나이아의 모습은 진처럼 반투명한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처럼 보였다. 푸르고 맑은 눈에 연한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원 나이아의 모습에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나, 나이아, 지금 그 모습은?

 와락!

 나이아는 하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향긋하면서도 가슴을 들뜨게 만드는 체취와 함께 풍만하고 부드러운 나이아의 가슴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이지러지는 그 기막한 감각에 하룬은 눈만 돌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룬, 나…… 이제 각성했어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 그녀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체향이 흘러나왔다. 스스로의 성취에 감격했는지 그 크고 맑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는데 눈매가 웃고 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진탕시켰다.

 -설마, 인간이 된 거야?

 이건 정령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의 여자의 감촉이었던 것이다.

 -호호호!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에요. 다만 하룬을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 물질계에서도 잠시 유지할 수 있는 육신을 만든 것 뿐이에요.

 '이 세계의 나와 비슷한 걸까?'

 하룬은 그녀의 말을 통해 나이아가 자신처럼 이 세계에 일종의 아바타를 형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각성한 거 축하해, 나이아

 -고마워요, 하룬. 호호호! 이젠 언제까지라도 하룬의 곁에 머무를 수 있어요. 재미없는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 그럼 머무를 아공간을 만든거야?

 -네. 나도 오염된 정령처럼 하룬의 몸과 연결된 아공간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어요. 구경할래요? 

 각성한 나이아가 생성한 아공간은 마차 열 대 분량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이 정도면 싸가지가 처음 각성해서 만들었던 아공간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물론 지금은 싸가지의 경지가 올라가서 녀석의 아공간은 이것의 두배가 넘었다.

 -그럼 이제 최상급 정령이 된 거야?

 -저는 하룬과 운명의 실로 맺어진 존재라서 일반 정령들과는 차원이 달라 비교할 수 없어요. 굳이 비교하면 정령계에서는 비슷할 거고 이 물질계에서는 제가 훨씬 강할 거에요. 하룬 덕분에 지속적으로 정령석의 정령력을 흡수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아공간을 이용해서 수리로 정령술을 높이면 돼요.

 -정말 잘했어, 나이아!

 하룬은 이제는 완전히 인간처럼 보이는 나이아를 끌어안고 입울 맞추어 주었다. 그녀가 이런 경지를 얼마나 염원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정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노력과 열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각성을 하고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하룬이 적극적으로 입을 맞추어서일까? 나이아는 하룬의 몸에 자신을 강하게 밀착시키며 그의 입술과 혀를 뜨겁게 받아들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하룬과 나이아는 황홀한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뇌가 녹아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가 되는 듯한 극치의 열락은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 있었다.

 -하아! 키스라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인간들은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아쉬운 듯 축축하게 젖은 입술로 혀로 핥는 나이아의 염기 어린 태도에 하룬의 눈이 다시 몽롱해지며 그녀의 허리를 감은 두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지만 그들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하룬, 나 각성했어!

 라이피였다.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 밖으로 현신한 라이피는 키가 3미터에 달하고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황토색 피부의 역사力士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축하해, 라이피!

 -하하하! 고마워, 하룬!

 라이피는 각성을 하고 나서 얼마나 능력이 올랐는지 확인하려는 듯 바닥의 흙 속은 물론 멀리 떨어진 절벽으로도 스며들었다가 나오고, 일정한 범위의 땅을 움직이거나 바위를 흙으로 바꾸는 등 정신없이 움직였다.

 -칫! 조금만 더 있다가 각성하지.

 나이아가 아쉬운 듯 투덜거렸지만 하룬의 품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어 위신느와 피닉스도 각성을 했는데, 피닉스는 버처리비크 크기의 동체를 가진 불새로 성장해 있었고 위신느는 나이아처럼 완벽한 인간체로 변신해 있었다.

 -히잉! 둘이 이상한 짓 했지? 나이아 몸에서 하룬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어!

 피닉스가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멀리 날아간 사이, 위신느는 하룬과 나이아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졌다.

 -아, 아니야! 우린 아무것도 안 했거든!

 -그래, 그저 이렇게 따듯하게 안아 준 것뿐인걸!

 -아니야, 나도 이제 각성했다고. 둘 사이가 이상해. 전보다 훨씬 친밀해지고 운명의 실이 더 단단해졌어.

 위신느는 하룬이 보지 못하는 운명의 실까지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어떤 것인지 하룬도 보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난 이제 아공간에 들어가서 안을 살펴볼게요, 하룬.

 나이아는 위신느의 의심이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해. 우웁!

 막 사라지는 나이아의 뒷모습을 보던 느닷없이 입술을 들이대는 위신느의 대담한 키스에 몸이 굳고 말았다. 이제까지의 뽀뽀와는 차원이 다른 딥 키스였던 것이다. 작고 말말랑한 감촉의 혀가 입안으로 쑥 들어와 하룬의 입안 구석구석을 핥는데, 간지럽기도 하고 몸이 붕 뜨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새 위신느의 잘록한 허리를 감은 하룬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둘은 서로의 페로몬에 취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후아! 너무 근사해! 내가 상상하던 바로 그대로야!

 잠시 입을 뗀 위신느의 눈이 미지의 영역이었던 쾌감을 느낀듯 반달형으로 변해 있었고 눈빛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위신느.

 -나이와도 키스했지요, 하룬? 사실대로 말해요.

 두 손에 허리를 얹고 물어보는 위신느를 향해 하룬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은 키스가 가져온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자극에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칫! 나이아는 정말 얄미워! 내가 처음이고 싶었는데. 크음! 그래도 이렇게 좋으니까 내가 참는다. 다른 건 내가 처음으로 하고 말 거야. 하룬, 나도 이제 아공간에 들어가 볼게요. 후훗! 쪼옥!

 위신느는 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뽀뽀를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피와 피닉스가 돌아왔다.

 -내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나도 그래. 이젠 청화靑火까지 올릴 수 있게 되었어!

 둘은 하룬에게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한참 자랑하더니 아공간이 궁금한지 사라졌다.

 모두가 사라진 후 하룬은 머리를 세차게 몇번 흔들고 양 손으로 두 뺨을 세게 쳤다.

 "윽!"

 고통과 함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열정에 이끌려 연거푸 나이아, 위신느와 깊은 키스까지 나누고 말았다. 거기에 키스로 인해 영육靈肉이 하나로 녹아드는 기막힌 감각까지 느끼고 말았다.

 '정령의 몸이 아니었어!'

 아직도 그녀들의 몸이 전해 오는 체온과 체향 그리고 부드럽고 뭉클한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룬은 현실의 아리에게 강한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마을 쪽으로 향했다.

 '정령들이 각성을 한 것은 좋은데 어째 좀 위험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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