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성 공략
하룬은 아공간에 남은 식량과 각종 물건들을 아카족이 보유한 마수 가죽과 마정석 그리고 약초 들과 바꾸었다. 남은 양이 많아 부르카족이나 에인족과 거래를 할 때보다는 조금 낮은 가격밖에 받질 못했지만 다섯 정령들의 아공간의 절반은 세 부족과의 거래나 선물로 받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탄툰 마을에서 열흘이 넘게 머무른 하룬은 기존 대원 20명과 새로 영입한 93명의 대원과 함께 많은 일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츠루트 요새로 출발했다.
"일단 요새로 가면 기존 대원들과 합류해서 각자 위치를 정해 주겠지만 도착할 때까지는 옥세르가 아카족을, 티탄이 부르카족을, 그리고 토르가 에인족 전사들을 지휘해라."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세 전사는 모두 차기 탄 자리를 놓고 동료 전사장들과 경쟁을 하던 상황이었기에 인망이 높았던 것이다.
"주술사들은 다쿠가 지휘한다."
새로 들어온 3명의 주술사 중 다쿠가 가장 연장자이다. 사십 대 중반인 다쿠는 치료 분야에 뛰어난 레미와는 달리 주술, 그 자체에 정통했고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 전사들도 어려워하는 사내였다.
"맡겨 주십시오."
다쿠는 이십 대에서 삼십 대의 두 주술사를 돌아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이 차이가 있긴 했지만 모두가 라티카의 주술을 배운 터라 한 형제나 다름없었다.
"자, 출발!"
전위는 데빌 산맥의 지리에 정통하다는 에인족 대원들이 맡기로 했다. 특히 토르는 마츠루트를 다섯 번 이상 다녀온 경력이 있어 그가 길 안내를 맡았다. 후위는 아카족이 맡고 활에 능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부르카족이 중간에 위치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하룬은 데빌 산맥이 품고 있는 순수한 마나를 마음껏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발동하는 메신저 스킬로 인해 걸을 때마다 발바닥으로부터 마나가 흡수되는데 그 양이 다른 곳의 배는 되었다.
흡수된 마나는 마나 오션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태극 문양의 마나로 흘러들어 갔는데 자연의 마나와 어둠의 마나가 거의 동등한 양이었다.
'이곳은 어둠의 마나가 아주 진하구나.'
보통 악인들의 정혈을 통해 흡수되는 어둠의 마나가 이곳에서는 자연의 마나와 함께 흡수되고 있었다.
'데빌 산맥은 정말 기이한 곳이군.'
자연 속에 어둠의 마나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하룬은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곧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했다.
이제는 온전히 하룬의 몸에 자리를 잡은 두 마나는, 마나 오션에 균형을 이루어 끊임없이 회전을 하며 그 밀도를 높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쉬운 것은 마나 스토리지에 쌓일 정도로 어둠의 마나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행의 숫자는 많았지만 토르의 길 찾는 능력이 뛰어났고 개개인이 뛰어난 전사들이었기에 이동속도도 무척 빨랐다. 게다가 세 부족 간의 묘한 경쟁심으로 인해 갈수록 이동속도가 올라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규대원들은 이동속도가 갈수록 올라가는 이면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길이었다. 에인족 대원들은 데빌 산맥의 가장 외각에 위치한 산들의 허리를 타고 지나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수시로 끊어지기 일쑤였지만 오랫동안 고산 지대에 살던 산악 부족이 움직이기에는 비교적 쉬운 지형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룬이 그들에게 준 순정석 때문이었다. 하룬은 싸가지가 마정석을 정제한 것을 순정석으로 인해 이미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나름 마나를 축적하고 사용하고 있는 있었던 새 대원들은 빠르게 능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세 번째 이유는 돌풍 수련 검식에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딜런이 창안한 것으로 마나 오션을 생성하고 마나 로드를 확장하여 마나를 쉽게 축적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검식을 전수받은 새 대원들은 친한 동료들의 진전에 자극을 받아 무섭게 수련을 하고 있었다.
두 달 만에 막내인 타킴이 자신들의 성취를 뛰어넘은 것에 자극을 받았던 치첸 등 새로 대원이 된 아카족 출신들은 순정석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과 수련 검식에 목숨을 걸었다. 휴식을 할때나 야영을 할 때면 수련에 전념을 했던 것이다.
다른 부족의 전사들 역시 순정석과 수련 검식이 자신들의 능력을 올리는 열쇠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경쟁적으로 수련을 했다.
그 결과 대원들의 능력은 날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그것이 이동속도를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일주일을 이동한 하룬 일행은 드디어 요새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돌산 지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움직여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이름 모르는 산의 허리를 돌아 내려갈 곳을 찾던 일행의 눈에 삭막한 풍경이 들어왔다.
"이 근방이 바로 바크라 돌산 지대입니다."
안내를 맡은 토르의 말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산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돌산들이었다. 한낮의 열기로 인해 데워진 거대한 돌산 지대는 아지랑이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 그런데 저건?"
숨을 고르고 있던 치첸의 목소리에 놀람의 감정이 드러났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돌산 지대의 중간의 한 고개였는데 놀랍게도 성의 모습을 가진 구조물이 보였다.
"다크니스의 성이군."
먼 거리라서 성의 윤곽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성안에 세워진 첨탑과 그 꼭대기에 달린 달을 연상하게 만드는 은빛 원반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결국 또 만나게 되었군."
마츠루트 요새까지는 되도록 다크니스들과 만나지 않기를 희망했지만 성이 세워진 곳은 요지였다. 풀 하나 보이지 않는 돌산들 사이의 고개 위에 자리를 잡은 성의 규모는, 마츠평원의 성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이미 성벽까지 다 올라간 상태였다.
하룬은 일단 이동을 멈추고 대원들의 임시 수뇌부를 모았다.
"다른 길은 없나?"
하룬의 말에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바크라 돌산 지대를 관통하는 저 하프스톤 고개를 빼고는 쉽게 흘러내리는 돌들로 인해 제대로 이동할 수 있는 산들이 없습니다. 저 성이 있는 지역을 피해 돌아가려면 바라크 돌산 지대를 아예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요새까지 열흘은 더 걸립니다."
"다른 돌산에는 길이 아예 없는 거야?"
"네, 저희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더구나 시야가 훤히 드러나는 돌산에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스톤 스네이크나 포이즌 랫이 돌 틈에 살고 있어 설사 길이 있다고 해도 무척 위험합니다."
길 안내를 맡은 토르는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언뜻 보아도 정면에 보이는 두 돌산은 높고 험준할 뿐 아니라 가파른 경사를 가지고 있어 아주 위험해 보였다. 근처의 다른 산들 역시 돌과 바위밖에 보이지 않는 험준하고 높은 돌산들이었다.
"반드신 통과해야하는 길목에 자리를 잡았군."
하룬은 열흘이 더 걸린다는 말에 눈매를 좁혔다. 이미 요새에 도착했을 대원들과 그곳에서 자신을 기달릴 사람들을 생각하지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주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치첸의 말에 동의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중 아카족 주술사인 다쿠가 한 가지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무래도 성의 위치를 생각하면 산악 부족들 중 어느 한 부족이 그들과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누군가 그 말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하고 난 대부분의 대원들은 다쿠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난 다쿠 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 안 그러면 외지인이 저런 요지를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산악 부족이 아니라면 이런 고갯길을 알 리도 없지."
험준한 데빌 산맥이긴 하지만 수천 년 이상 이곳에서 살아온 산악 부족들은 빠르고 안전한 길을 찾아냈고 후대로 그 정보를 전했다.
"아마 소이친족일 겁니다."
다쿠의 말에 하룬의 눈이 빛났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레미가 일전에 설명할 때 빠져 있던 부족이었다.
"그들은 누구지?"
"열두 개의 산악 부족 중 세력이 가장 약한 부족입니다. 그들은 주로 약초를 채집하거나 화전을 하며 살아가는데 저희처럼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데빌 산맥을 주기적으로 이동하며 살기 때문에 산맥의 지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지만 이어진 다쿠의 말에 하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이친족은 다른 산악 부족들과는 달리 외지인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탓에 오래 전부터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산악 부족입니다. 그래서 우리 에인족처럼 마수 사냥을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약초 채집과 화전만으로 살아가며 다른 부족들과 교류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전 마츠 평원에 자리했던 오츠왈드 후작가와 손을 잡고 길 안내를 해 준 전력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데빌 산맥의 마수들이 준동했고 모든 부족들이 마수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부족들에게 경원시 당했고 그 후로는 다른 부족을 피해 약초를 캐서 도시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는데 최근 그들 마을을 우연히 들렀던 전사의 말에 의하면 주민 모두가 무척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간가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생필품은 물론이고 무기와 새로운 옷으로 마을 주민 전체가 혜택을 볼 수는 없을겁니다."
"배신자들!"
"자신들이 끌어들인 외부인들 때문에 데빌 산맥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후대도 똑같은 짓을 하는군."
"그놈들은 산악 부족의 치욕이야!"
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소이친족을 성토했다.
약초 채집이 주 생계 수단이다 보니 소이친족은 외지인과 교류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다크니시와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열흘 동안 돌아가느냐 아니면 저곳을 점령할 것이냐 하는거야."
하룬의 말에 대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잠시 고심하던 다쿠가 의견을 냈다.
"돌산 지대의 특성상 마수들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레미에게 들은 대로 치앙 카르에서처럼 흑마법사들이 많이 있다면 공략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시야를 가릴 엄폐물이 없는 이상 그들은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그랬다. 중간에 큰 바위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100명이 넘는 인원이 몸을 숨기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일단 저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산을 내려가서 적당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한다."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빛이 나는 무기들을 가죽으로 가리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바위 들 사이로 이동하며 산을 내려갔다. 다들 산에서 살던 산악 부족들이라 그 움직임이 은밀했고 아스라이 보이는 고갯마루의 돌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다크니스는 그들의 이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산 아래에는 넓게 펼쳐진 돌무더기가 작은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돌산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돌들이 만든 지형이었다. 그곳에서부터 고갯마루의 성까지는 돌을 양옆으로 치워 쌓은 돌벽 사이로 작은 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길이 고개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그 길로 올라가면 적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룬 일행은 숲을 벗어나지 않고 식사를 준비했다. 불을 피울 수 없어 육포와 빵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대원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하룬은 마침 모여 있는 수뇌부들에게 말했다.
"내가 정찰을 갔다 올 테니까 그 결과를 보고 결정을 하도록 하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당장 대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룬을 만류했지만 그는 더 들을 말 없다는 듯 자리가 떠났다. 그러자 레미가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우리 대장의 능력을 모르는군요. 우리 대장은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유령처럼 움직일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대장이 마음만 먹으면 침투할 수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으니 마음을 놔도 돼요. 자, 우리는 저들의 시야를 벗어난 곳을 찾아 야영을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정말인가? 새처럼 날 수 있다는 것이?"
주술사 중 1명인 데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우리 용병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야. 아이콘라드 열마리 정도는 가볍게 찢어 죽일 수 있는 엄청난 새들도 있지. 그리고 대장은 한번 도약하면 틸러스 나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고 새처럼 날 수도 있어. 정찰 정도는 대장에게는 우수운 일이야."
두르본의 말까지 이어지자 새로운 대원들은 반신반의했지만 하룬이 한 말처럼 야영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하룬은 성에서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산을 올랐다. 돌산의 상태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주르륵!
그의 몸이 흘러내리는 돌과 함께 뒤로 밀렸다.
'대부분의 돌들이 잘게 깨져 있고 불안정하게 쌓인 상태라서 웬만한 몸무게를 가진 전사들이라면 올라가기가 쉽지 않겠어.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쉽겠군. 거기에 몸을 가릴 수 있는 정도의 바위도 별로 보이지 않으니 정면으로 오르는 것은 포기해야겠어.'
그 이야기는 단숨에 성까지 올라가 전투를 치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나마 효과적인 방안은 어둠을 틈타 올라가는 것인데 지금은 두 달이 모두 만월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 또한 소용이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날아서 성으로 침투하든가 그게 아니면 누군가 성으로 들어가서 성 외각에 펼쳐져 있을 경계망을 뒤흔들 정도로 사고를 치는 방법밖에 없다.
'정찰조차 쉽지 않겠어.'
하룬은 성이 있는 고개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고개 쪽에서 보이지 않는 돌산의 후면은 거대한 바위들이 많아서 잘하면 눈에 띄지 않고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돌산의 후면으로 올라가서 정상을 거처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도 문제는 있었다. 돌산의 높이가 높았던 것이다. 자꾸 미끄러지는 돌들을 생각하면 오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골치아프군.'
머리를 굴리던 하룬은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하룬은 바로 라이피를 불러냈다.
-라이피, 이곳의 지반 상태가 어때?
-잠시만.
라이피는 잠시 돌로 이루어진 바닥으로 스며들었다가 잠시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약해. 드러난 부분뿐만 아니라 상당한 깊이까지 풍화가 진행되어 대부분의 돌들이 불안정하게 쌓여있는 상태야. 이곳 지반을 보면 적어도 10미터 정도는 위에서 굴러떨어진 돌들과 작은 바위들이 쌓인 걸로 보여.
-그럼 돌산 상단부에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거대한 산사태, 즉 바위 사태가 일어나겠지.
-저기 돌산의 중간이라면?
-이곳 지반을 고려하면 그곳이라도 3~4미터 높이에 해당하는 양의 돌들과 바위들이 아래를 향해 한꺼번에 떨어져 내릴 거야.
-일정한 방향을 선택해서 바위 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을까?
-그건 어렵지 않아.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지.
-좋아. 그럼 나중에 부탁 좀 할게.
-언제든지 불러줘, 친구. 이제는 능력이 많이 올라가서 꽤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거야 내가 더 그렇지. 이렇게 물질계에 항상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
라이피가 돌아간 후 하룬은 마음을 굳히고 이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대원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룬은 되돌아와 숙영 상태를 점검한 후 본격적인 정찰을 위해 숙영지를 나섰다. 혼자 가려고 했지만 부득불 따라붙는 이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레미와 두르본 그리고 각 부족의 전사장들이었다. 대장을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수 없다는 말에 할 수 없이 동행하기로 했다.
산기슭을 돌아 고갯마루에 있는 성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른 하룬 일행은 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예상대로 돌은 조그마한 무게에도 견디지 못하고 구르기 시작했다. 두르본을 비롯한 야키족 전사들이 람비의 힘을 끌어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에인족의 전사장 출신 대원인 토르가 가장 잘 올랐지만 그 역시 연방 미끄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여기 있어. 나 혼자 갔다가 올 테니까."
"꼭 따라갈 거예요."
"따라오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펼쳤다.
후드드득
돌들이 흘러내렸지만 하룬의 몸은 밀리지 않고 위로 쭉쭉 올라갔다. 몸무게 자체를 줄일 수는 없었지만 마나가 흡입했다가 발출하는 반동을 이용하기 때문에 몸 자체가 아래로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습에 대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치첸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려니 하세요. 나중에 선배 대원들을 만나면 수시로들을 이야기지만 대장이 하는 일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해야 한대요. 우리와는 능력 자체가 다른 분이니까요."
레미의 말에 전사들은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는 사람이 있으니 레미의 말대로 대장은 자기들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을 가져서라고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젠장! 그럼 우리는 뭘 하지?"
토르가 눈을 찡그렸다.
"뭘 하긴! 여기서 기다려야지."
순정석을 복용하고 수련 검식을 배운 후 가장 진도가 빠른 치첸은 하룬을 완전히 숭배하는 수준으로 충성심을 불태웠다. 그가 생각하기에 하룬은 타키야의 재림이었다. 치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 난 수련이나 할까?"
두르본은 검을 빼 들었다. 수련 검식을 연마하려는 것이다. 이미 마나 오션을 생성한 두르본은 두 팔로 향하는 마나 로드를 뚫는 단계에 올라 있었다. 이미 양 어깨까지는 뚫렸고 손으로 향하는 세 개의 벽만 뚫으면 마음먹은 대로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레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약초학 책을 꺼내 들었다. 아직 주술의 수준이 낮은 그녀가 하룬이나 돌풍 용병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치료술 분야였다. 헤니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 만나면 자신도 그녀에게 가르쳐 줄 것이 있어야 했다.
"그럼 우리 모두 여기서 대장을 기다리며 수련을 하자."
결국 토르와 티탄도 검을 빼 들었다.
그 시간 하룬은 올라갈수록 더 많은 돌들이 구르는 것을 감지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돌사태가 날 수도 있겠는데…….'
아래를 내려다본 하룬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원들이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은 안 하고 수련을 하려는지 검들을 빼 드는 것을 본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만든 돌사태에 대원들이 묻힐 수도 있었다.
'아무튼 도움이 안돼요.'
새로 받아들인 대원들이 자신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쁘진 않았지만 이럴 때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고민을 하던 하룬은 마나를 이용해서 허벅지까지 돌바닥 속에 묻어놓고 라이피를 소환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친구?
-자꾸 돌이 흘러내리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거야 간단하지. 내가 친구가 올라갈 방향의 돌들을 사이로 밑에 있는 흙을 올려서 길을 단단한 길을 만들게.
라이피는 돌들 사이를 흙으로 채워 단단하게 지반을 만들겠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각성을 한 라이피의 능력을 잊고 있었다.
-가능하겠어?
-당연하지. 친구 덕분에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어.
-그럼 당장 해 줘!
잠시 기다리자 위로 올라가는 방향의 바닥이 1미터 가량 쑥 꺼졌다. 밑의 흙들이 올라와 돌들의 틈을 채우자 지반의 높이가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돌 속에 묻힌 다리를 꺼내 라이피가 만든 새로운 바닥에 오르자 단단한 바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하룬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고개를 든 레미가 그를 보고 있었다. 하룬은 그녀에게 손으로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길을 만들고 싶었지만 라이피는 열심히 위쪽으로 길을 만드는 중이었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다를 강을 건널 때 썼던 것과 같은 밧줄을 꺼내 아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50미터 길이의 밧줄이 아래로 풀려 나갔다. 잠깐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 이만큼이나 올라온 모양이다.
레미는 하룬이 내려준 밧줄을 붙잡고 람비의 발을 활성화 시켰다. 전신에 힘이 차오르자 밧줄을 잡고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 밧줄이다!"
막 수련 검식을 펼치던 두르본이 낸 소리에 집중하려던 대원들은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레미를 볼 수 있었다.
"호호호! 대장이 우리만 내버려 두고 갈 리가 없지."
검을 거둔 두르본은 레미처럼 마수의 힘을 끌어 올려 밧줄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돌들이 흘러내리긴 했지만 밧줄 덕분에 몸이 밀리지는 않았다.
'으이구! 저 화상들!'
하룬은 한 사람씩 올라와야 하는데 모두 함께 밧줄에 달라붙자 그들의 무게 때문에 자신의 몸이 아래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아무튼 생각이 단순한 대원들이다.
하룬은 프로즐리의 힘을 활성화 시켜 대원들의 몸무게를 견뎠다.
하룬의 몸이 허리까지 빠지고서야 레미를 선두로 대원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레미는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라이피가 만든 길이 신기한지 연방 뛰면서 바닥의 단단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결국 대원들이 모두 올라왔을때는 하룬의 가슴이 바닥까지 빠지고 말았다.
"와아!"
"이거 어떻게 한 거지?"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 대장만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지."
뭐라고 한 소리 하려던 하룬은 자신의 상황을 전혀 감지 못하는 대원들이 순박하게 떠드는 소리에 한숨을 한번 쉬고는 바닥에서 몸을 빼냈다.
결국 하룬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라이피가 만든 길을 따라 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폭 1미터 정도의 길은 양옆에 비해 올라갈수록 그 차이가 줄어들었다. 아마도 쌓인 돌의 양이 적은 탓일 것이다.
바닥이 단단하게 다져져셔 올라가는 속도는 빨랐다. 한 시간 정도를 올랐을 때는 이미 성이 위치한 고개와 비슷한 고도를 한참 지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라이피, 대단해!
비록 라이피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지만 한 시간이나 계속해서 일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올랐는지는 몰랐다. 메신저 워킹으로 지속적으로 마나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지칠 정도였다.
-라이피, 이번에는 옆으로 길을 내줘. 높이는 양옆과 1미터 정도 차이가 나게 부탁해.
-알았어, 친구.
하룬은 자신을 뒤따르는 대원들에게 몸을 숙여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자신부터 몸을 낮추었다.
확실히 라이피의 능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아무리 쉬운 일이지만 무려 한 시간이나 정령력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룬의 경우 거의 최상에 속하는 친화력을 가진 네 정령을 한꺼번에 소환해서 한동안 정령계를 돌려보내지 않아 정령력 수치가 나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이상을 움직인 끝에 드디어 성이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라이피.
-힘은 좀 들었지만 이렇게 오래 친구와 호흡을 맞출 수 있어서 좋았어. 물질계의 대지는 물론이고 공기도 마음에 들거든. 이곳은 특히 다른 곳보다 정령력이 훨씬 높아서 우리에게는 더 좋아.
다시 몸속으로 돌아가는 라이피의 말을 들은 하룬은 이곳이 어둠의 마나뿐 아니라 정령력까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대장, 성이 잘 보이는데요."
치첸의 말대로 머리만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50여 밑에 위치한 성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성은 고개 쪽은 길고 산 위쪽으로는 극히 짧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성벽은 주변에 흔한 작은 바위들을 가공해서 쌓았고 산사태를 의식한 듯 산 정상 쪽으로는 성벽을 높이 올렷으며 폭도 넓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의 그 지구라트라는 건축물이 5층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그 외에 주거와 식사 등의 용도로 사용될 법한 몇개의 큰 건물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마츠 평원에 세워지던 성과 다른 점은 고개 정상의 좁은 땅에 세워진 탓으로 성의 넓이가 가로 10미터, 세로 40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작으며 그 때문에 독립된 주거 공간 없이, 큰 건물들이 지구라트의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계를 보는 자들이 꽤 많아요. 성안에서 움직이는 인원도 꽤 되고요."
레미의 말대로 고개 양쪽의 성벽에는 십여 명씩은 경계 병력이 있었고 성 안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덮칠까요?"
도무지 겁이 없는 치첸이다. 용맹한 것으로만 따지면 아마 산악 부족의 전사들 중 가장 강할 것이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는지 모르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두르본이 날선 목소리로 그를 윽박질렀다.
"아, 아니 그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무리라고 판단한 듯 치첸은 꼬리를 내렸다.
"흑마법사들도 있어요. 그리고 저들은 기사 복장을 하고 있어요."
레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니 지구라트의 각 층에서 나오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모자도 그렇고 틀림없이 흑마법사들이 맞았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듯 줄지어 선 이들은 검은색 바탕에 은색 원주를 가슴에 새긴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이방인이겠지?'
다크니스가 집중적으로 양성한 자들이 틀림없었다. 흑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흑색이나 어두운 색깔의 하드 레더를 걸친 전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민간인으로 짐작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실종자들이 없나?'
어쩌면 성이 완성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잠입을 해서 사정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서 휴식을 한다."
해는 벌써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질 것이다.
대원들은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라 아예 라이피가 만든 돌벽에 등을 대고 휴식을 들어갔다. 치첸은 곧 잠이 들어 코까지 골았다.
"에고, 이 마음 편한 작자야!"
두르본은 황당하다는 듯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치첸을 나무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낮게 코를 골았다. 그게 신호였을까? 모든 대원들이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황당하군.'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부족 간 그리고 대원 간에 경쟁이 붙어 잠을 줄여 가며 수련에 몰두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룬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일부러 그들을 깨우지 않았다. 어차피 성안을 살피는 것은 혼자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고개 양쪽에는 환하게 불이 피워져 있었고 경계하는 병사도 4명이나 있었지만 산 정상 쪽의 성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돌산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굳이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정상쪽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룬은 위신느를 소환했다.
-하룬, 왜 이제야 불러요. 라이피하고는 한참 동안이나 같이 있어놓고.
위신느는 하룬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투정을 부렸다.
-그래서 불렀잖아. 그런데 소리 없이 저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까?
-그거야 내가 옮겨 주면 되지요.
-그럴 수 있겠어? 내가 생각보다 무거운데.
-호호호! 걱정하지 말고 날 꼭 끌어안아요.
위신느는 하룬을 끌어안고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하룬은 경계하는 병사는 없지만 순찰은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빨리!
-힝!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일부러 속도를 늦춘 듯 그를 꽉 끌어안은 위신느가 순식간에 성벽 위에 도착했다.
-고마워. 잠시 돌아갔다가 이따 부르면 다시 나와.
-꼭 불러야 해요. 쪼옥!
나이아는(위신느를 잘못 쓴 것 같습니다.) 하룬과 포옹을 한 것이 기분이 좋은 듯 환한 얼굴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고는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성벽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 하룬은 오감에 관계된 마수의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환한 대낮처럼 눈이 밝아졌고, 많은 소음들이 귀에 들어왔다. 코로는 향긋한 수프 냄새가 맡아졌다.
'식사 시간이군.'
지구라트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 바로 식당이었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룬의 눈은 지구라트로 향했다.
'여기도 식사를 하는군.'
흑마법사들은 따로 모여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2층 한방에 모여서 빵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렸는데 그 숫자가 대여섯 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그 대화들 중 관심이 가는 내용이 있었다.
"언제 온대?"
"그거야 모르지. 그래도 조직의 고위층이 섞인 선발대가 온 것을 보면 일주일 이내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그럼 우린 그때나 교대하는 거네."
"그렇지. 팬텀 팀에게 여기를 넘기고 본단으로 가면 돼."
"빨리 왔으면 좋겠다. 여기는 즐길 것이 없어서 너무 심심해."
"허! 이 친구. 성을 지은 놈들로 그 정도 재미를 봤으면 됐지 얼마나 더 재미를 볼려고."
"그래 봤자 내게는 6명밖에 배정되지 않았다고. 워낙 무지렁이라 아무리 고통을 가해도 다크 마나가 쥐꼬리만큼도 나오질 않아서 아무리 흡수해도 레벨 하나 겨우 올릴 정도 밖에 안 되었다니까."
"그런 소리 하지마! 난 경험치만 얻고 아예 레벨도 못 올렸으니까."
"젠장! 좀 제대론 된 놈들을 배정시켜 주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노역으로 다 죽어 가는 놈들이라 다크 마나가 거의 없으니……."
"그래도 흑마법사의 길을 선택한 덕분에 벌써 4서클이 되었잖아. 어쨋든 대형 길드에도 들어가지 못한 우리 주제에 4서클이면 대단한 거지."
"그렇긴 해. 이번에 본단에 가면 제대로 일을 맡기려나. 여기서처럼 애매한 놈들 감독하는 일 말고 말이야."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이제는 명색이 4서클인데. 그러나 저러나 요즘 굉장하다지?"
"뭐가?"
"본단에서 카페를 개설해서 회원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흑마법사와 흑기사 그리고 흑전사 들을 받아들이는 인원 말이야."
"그래? 그렇대?"
거기까지 들은 하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크니스가 흑마법사들을 모으고 있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흑마법사는 짐작이 가는데 흑기사와 흑전사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룬은 그들의 대화에 주의를 집중했다.
"응. 친구들에게 들었는데 벌써 원싸우전드 프로젝트 1단계가 끝났대."
"맙소사! 그럼 우리 다크니스에 합류한 유저들이 1만 명에 달한단 말이야? 우리가 가입할 때는 겨우 400명이 되려던 때였는데."
"그러게. 우리는 그때 판단을 잘한 거야. 그만큼 유니온 체제하에서 주민들의 불평불만이 높다는 거지. 씨발! 더러운 세상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핏줄 한번 잘 타고 태어난 걸로 온갖 향략을 즐기고 사는 노블 그 개새끼들 다 때려죽였으면 좋겠다. 아무튼 열심히만 하면 조직에서 언젠가는 우리에게 노블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니까 기대를 해보자고."
"흐흐흐! 아무튼 우리가 빨리 움직이길 잘했다. 본단에 가면 우리 밑으로 줄줄이 배정되어 있을 테니까. 뭐 성행위나 유사 성행위만 못 할 뿐이지 스트레스가 풀릴 때까지 마음껏 고민하고 죽이는 데도 오히려 레벨이 올라가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어. 안 그래?"
"흐흐흐! 그렇지 현실에서는 매일 당하기만 하고 살다가 흑마법사가 되어 남들을 마음껏 죽이고 괴롭힐 수 있으니 난 요즘 살맛이 난다니까."
"흐흐! 여기 있는 흑마법사 유저들은 다 그래."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던 흑마법사들은 식사를 마쳤는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하룬은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주의를 옮겼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간 뒤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자 지구라트의 다른 층으로 주의를 돌렸다.
3층에는 인적이 없었고 4층의 중앙에 있는 방에서 나오는 대화가 들려왔다. 그 대화는 두 사람이 나누는 것으로 무척 은밀했다.
"바헬, 오늘 도착한 귀한 손님들이 무슥 가지고 온거야? 설마 노역자들과 포로들을 데리고 오라는건 아니겠지?"
굵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물었다.
"아. 그거, 아니야."
빵을 씹는 소리와 물을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헤겐 팀장이 성주로 갔던 성이 파괴되고 그곳에 파견된 흑마법사들과 전사들이 다 죽은 것은 알지?"
"알지. 헤겐 팀장이 그때 죽음의 충격으로 아직도 의식을 못 찾고 있다고 들었어. 빛의 신전의 성녀가 이끌고 온 무리가 저지른 짓이라며. 위에서는 신성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더니, 제길!"
"그런데 이번에 또 일이 생겼나 봐." 대형 흑마법진을 구성하는 중요 포인트 중 하나로 지정된 자리에 위치한 원주민 마을이 점령하기로 했던 퍼튼이 죽었다나 봐.
"퍼튼이? 그는 백마법으로 치면 마도사인 5서클 마스터잖아. 그 정도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를 상대할 자들이라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는 되어야 하는데?"
"바보, 그게 문제가 아니야. 퍼튼이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자세히 말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현실에서도 죽어 버렸대."
"에엥? 그럴 리가? 그보다 레벨이 더 높은 헤겐도 의식을 못 차리기는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데!"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놀랐는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크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쉿! 소리를 줄여. 손님들이 듣겠다."
"아, 알았어.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봐. 왜 현실에서 죽었는지."
"내가 이번에 온 손님 중 1명을 몇 다리 건너 알고 있는데 그가 해 준 말에 의하면 퍼튼이 살케 팀장과 동거를 하면서 그 여우같은 년의 추천으로 특수팀에 갔는데 엄청 뛰어난 캡슐을 받았대. 그 캡슐을 사용하면 동화율이 무려 53%까지 올릴 수 있따는 거야."
"뭐라고? 그런 캡슐이 있었어?"
"그래. 조직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해서 만들어 냈나 봐. 아직은 대량생산을 할 수 없어서 특수팀을 대상으로만 지급한다고 하더라고. 뭐, 듣기로는 그보다 상위 성능을 가진 슈퍼급 캡슐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
"에이, 씨발! 이놈의 조직은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아. 부팀장이 되어서도 모르는 것 투성이니!"
"아무튼 죽을 당시의 퍼튼의 동화율이 50%가 넘었나 봐. 어떤 세력인지는 몰라도 마수들은 물론이고 4, 5서클의 흑마법사들을 다 죽이고 퍼튼까지 죽인 거지. 퍼튼은 동화율이 높아서 '악'소리도 못내고 게임을 하다가 죽은 거고."
"후유! 살벌하네. 마도사가 되면 최강일 줄 알았더니."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조사를 벌였는데 황당한 결과가 나왔어.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 놈들이 말하길 퍼튼과 자신들을 죽인 자가 몸에 이상한 문신을 한 원주민 놈이었대. 말이 되냐? 놈은 비수와 이상한 능력을 사용해서 마법진을 파괴하고 자신들을 죽였다는 거야. 거기에 그 많던 마수들도 마수 가죽으로 방어구를 해 입은 20명 정도의 원주민들이 다 죽였다는 거야."
"원주민들이? 그럴 리가 없잖아. 원주민들 중에 위험한 놈들은 산맥 중앙에 부근 거쳐하는 몇몇 마을 놈들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래서 지금 저 위에서는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인지 알아보려고 고심하고 있어. 무식하고 거친 원주민들이기는 해도 놈들 중에는 소드 마스터에 이른 대 전사들도 있고 7서클 마법사와 맞먹는 주술사들도 있다니까."
"조직이 완성하려고 하는 광역 마법진이 가동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라게. 문제는 또 있어. 아무래도 우리가 노역을 시키려고 납치해 온 놈들 때문에 이 세계의 제국들이 나설 거 같아. 거기에 신전과 마탑까지 나서는 것 같아."
"그거야 이미 예상한 거잖아. 휴먼 가드가 자리를 잡은 파이린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더구나 신전과 마탑에서도 애지중지 하는 보물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 움직임이 너무 전격적이고 전력이 강하다는 게 문제지. 이미 조직 상층부에서는 그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안배를 해 두었는데 난데없이 막강한 전력이 움직였으니 정보 라인이 꼬리에 불이 붙은 들쥐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난리를 치는 거야."
"제기랄! 도대체 누구야? 우리 세상이 곧 오려는 판인데!"
"아무튼 이 성과 광산 개발 건을 맡기로 한 팬텀 패거리가 도착하려면 꽤 남았으니 우리도 조심해야 해. 아직 목적이나 자세한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손님들도 그렇지만 피 맛을 제대로 본 아랫놈들이 저 더러운 원주민 포로 놈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야 해. 마약 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원주민들이 더 죽었다가는 그 책임을 너와 내가 다 뒤집어쓸 판이니까!"
"제길! 그나마 원주민 놈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다 죽이면 다크 마나가 많이 나왔는데 이젠 그 짓도 못하겠네. 그나저나 팬텀 팀장이 올 때까지 이곳은 별일 없겠지?"
"특별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이곳과는 꽤 많이 떨어져 있는 곳에서 생긴 일이고, 게다가 설사 이곳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여긴 1명으로 10명을 막아 낼 수 있는 천혜의 명당자리라고. 높은 성까지 쌓았는데 어떻게 오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왠지 불안해서 그래. 마도사도 없이 5서클인 너와 나, 그리고 익스퍼트 상급 3명이 고작인 전력이라."
"그건 걱정하지 마. 오늘 온 손님들 실력이 꽤 높을 거 같으니까.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도 여기는 공략하지 못해. 일부러 길을 돌로 가득 채워 놔서 올라오기도 힘들거니와, 와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마법진을 만들어 놨잖아. 가동만 시키면 이 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지는 돌산으로 인해 돌 사이에 깔려 죽을 테니까."
"그럴까?"
"그럼 당연하지.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이번에 본단에 돌아가면 성을 완성한 보상이나 확실하게 챙겨. 우리도 공을 쌓아 언제 특수팀에 한번 들어가 보자고. 특수팀에 들어가면 정기적으로 주지육림에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잖아."
"흐흐흐!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나네. 나 정말 술 먹어본 것도 여자랑 자 본것도 한 몇 년은 되는 것 같다."
"미친! 얼마 전에도 세미롱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 버린 애들을 셋이나 데리고 진탕 놀았으면서 무슨!"
"흐흐흐! 그랬나? 그랬구나. 코원 유니온 근처의 헤븐 컴패니가 박살 나는 바람에 세미롱 공급이 4분의 1로 줄어서 그것만 보이면 치마끈 푸는 년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이번에 휴가 받으면 같이 가지고."
"그래. 즐길 때 즐기자고. 너나 나나 뒷배도 없으니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높은 데까지 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우리 같은 놈들은 돈과 여자나 즐기자고."
"야, 그만 먹어. 맛도 모르면서 계속 먹기는"
"제기랄. 그 특수 캡슐을 쓰게 되면 음식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거 아니야. 나도 빨리 공을 세워 특수팀이나 갔으면 좋겠다."
이후로는 더 이상 대화를 훔쳐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음담패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그들을 잡아 고문을 해서라도 다크니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지구라트에 몰래 잠입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운 좋게 포로로 잡는다 해도 정신계 마법이라도 익혔다면 모르되 그들에게 토설을 받아 낼 능력은 없었다.
하룬은 나중에라도 이런 쪽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며 위신느를 소환하여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원들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그가 아래쪽을 다녀온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일어나! 곧 산사태가 일어날 거야."
산사태라는 소리에 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산 위쪽을 바라보았다.
"정령을 소환해서 사태를 일으킬 거니까 빨리 피해!"
이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대원들은 급한 마음에 두 손 두 발로 기어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쳤다. 정령사인 하룬이 멀쩡히 자신들 뒤를 여유 있게 따르고 있었었지만 잠이 덜 깬 상태로 산사태라는 소리에 놀랐던 것이다.
안전한 곳까지 이동한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저 아래의 성이 무너지도록 사태를 일으킬 수 있을까?
-뭔가 강력한 보호막이 쳐져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가 일으키는 돌사태를 막을 수는 없지.
-그럼, 부탁할게.
하룬의 부탁을 들은 라이피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성의 한참 위쪽에 있는 지반들이 용틀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엄청난 양의 돌들과 바위들이 아래쪽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쿵쾅! 꽈르릉! 꽝꽝!
"흐억!"
"헙!"
대원들은 아래를 향해 굴러떨어지는 엄청난 양의 돌들과 바위들이 만드는 장관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산에서 살다 보니 산사태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힘들여 밭을 만들고 과실수를 심어 놓아도 때때로 내리는 폭우에 사태가 일어나면 한 번에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덮쳐 수많은 사장재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흙도 아니고 돌과 바위니 더욱 두려왔다.
하지만 아래로 굴러떨어지던 돌무더기들이 성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뒤로 튕기거나 제자리에 멈춰 쌓여 갔다.
'흑마법진이군.'
예상대로 흑마법진은 외부의 충격에 돌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흑마법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군.'
모르긴 해도 손등에 새겨진 문신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라도 꼭 럼프족들을 찾아가 이 비밀을 밝히고 싶었다.
하룬이 그런 생각을 하는 잠시 동안 산 위로부터 엄청난 양의 돌들과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고 결국 흑마법진이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을 넘겨버렸는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르릉! 꽈아앙!
결국 엄청난 양의 돌들과 고개에 자리를 잡은 성을 덮쳤다.
"산사태다!"
"피햇!"
경계를 하던 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란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삽시간에 성을 덮친 돌들과 바위들은 성벽을 부수고 성벽 요소요소에 자리하고 있던 병력은 물론이고 이내 성 전체를 부수고 덮어버렸다. 혹시 다크니스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칠 것을 우려했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엄청난 양의 돌과 바위가 성을 덮쳤기 때문에 지구라트를 빠져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끄억!"
"서, 성이 사라졌어!"
위에서 지켜보던 대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용을 자랑하던 성이 한 번에 사라지고 그곳에는 거대한 돌 더미들과 바위 더미들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돌먼지 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사태가 일어난 곳으로 조심해서 내려와!"
사태가 지나간 곳은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 언젠가는 또다시 위에서 굴러 내릴 돌과 바위로 채워지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조심만 하면 추가적인 사태의 가능성은 적었다.
위쪽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바닥 깊숙히 박혀 있었다.
조심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미끄러지다시피 고개까지 내려간 하룬과 대원들은 대지의 정령이 만들어 낸 참혹한 결과를 한동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돌과 바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구라트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첨탑 부분만이 부서진 채로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이 안에 있던 자들은 어떤 방법을 쓰기도 전에 몰살당했을 것이다.
"……다 죽었겠죠?"
두르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대원들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얼마 전가지 성이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그렇겠지."
하룬은 대답을 하고는 라이피를 다시 소환했다. 돌로 축성했으니 생존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 건물을 덮은 돌과 바위만 치울 수 있겠어?
-문제없어. 하지만 돌을 치우는 것보다 건물 전체를 올리는 것이 더 빠른데.
-응. 그럼 그렇게 해 줘.
각성을 한 라이피의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후 지구라트가 위로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구라트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곳곳이 깨지고 부서진 상태였다. 건물을 부수고 들어간 돌들과 바위들이 그득하게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룬은 이방인이 아닌 자들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또 검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솟아나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하룬은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조심히 내려가서 다른 대원들을 이끌고 와!"
대원들은 끔찍한 지구라트에 질려 창백한 얼굴이 되어 고게 아래로 향했다. 다행히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길은 이번 사태에도 많이 부서지지 않았다.
지구라트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하룬은 제일 먼저 4층을 살폈다. 그곳에는 이 성의 우두머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4층은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거의 박살이 난 상태로 돌들과 바위들이 가득했다. 마수의 힘을 끌어 올려 돌과 바위들을 한참 동안 치우자 엉망으로 변한 내부가 드러났다.
'죽었군!'
대화를 엿들은 바 있는 이방인들의 사체가 막 빛가루로 표현되는 자연의 마나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지 착용하고 있던 거의 모든 아이템들이 떨어져 있었다.
하룬이 아이템들을 다 챙겼을 때 거의 다 무너진 벽 뒤에서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
하룬은 무너진 벽을 황급히 치웠다. 그러자 돌무더기와 함께 드러난 손발들이 보였다. 돌무더기를 치우자 무려 11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왔다.
1명은 더러워지고 찢어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에 부상을 입었는지 얼굴과 목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원주민으로 보이는 10명은 치부만 겨우 가린 상태에서 팔목과 발목에 굵은 사슬을 매단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룬이 그들의 경동맥에 손가락을 대 보자 다행히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이 성의 우두머리가 기거하는 곳에 갇혀 있을 정도면 예사 신분은 아닐 것이다.
하룬은 죽은 흑마법사들이 떨어뜨린 물건들 중에서 열쇠를 찾아 그들의 팔목과 발목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그리고는 성수를 만들고 나이아를 소환해서 그들을 치료했다. 그나마 이들은 지구라트의 내부의 은밀한 방 속에 있었기에 부서진 벽과 일부 돌들에 의한 타박상만 입은 상태였다.
심각한 것은 그 이전에 가해졌던 고문 때문에 생긴 것들이었다.
"……으으……."
11명 중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청년이 정신을 차린듯 소리를 냈다. 마법사인 듯 그의 옆에는 부서진 마나 봉인구가 보였다. 사태 중에 떨어진 내린 바위로 부서진 모양이다.
"정신이 드시오?"
눈을 뜬 청년은 하룬을 보더니 몇 번 눈을 깜박거리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다.
"누, 누구십니까?"
"난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이오."
사내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며 생각을 하더니 조금 놀란 눈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외견상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비록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돌풍 용병대라면 혹시 고요의 땅?"
그는 돌풍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렇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의뢰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용병들이야 의뢰가 있으면 지옥까지라도 가니 말이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적당한 옷을 꺼내 주었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더니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는 하룬에게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전 니켄이라고 합니다. 흑마법사입니다."
"흑마법사?"
니켄의 말에 하룬의 눈매가 좁아졌다. 니켄이 흑마법사라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넓게 보면 이들은 같은 흑마법을 익힌 자들이 아닌가? 왜 그가 다크니스 무리에 의해 구속당해 고문까지 받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전 이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통 흑마법사입니다. 300년전 미치광이 타키닌이 흑마법의 기초를 배웠던 솔론 학파의 유일한 전승자이지요."
"타키닌!"
대륙을 거의 절단 냈던 그 흑마법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그를 배출해 낸 학파가 있다니! 충격이긴 했지만 그 역시 누군가에게 흑마법을 배웠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간이 멈춰진 것 같은 우리 마탑 안에도 데빌 산맥을 중심으로 흑마법사들의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전혀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들어가 줄곧 마탑에 갇히다시피 해서 마법만 수련을 하던 저는, 같은 흑마법사의 소문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이자들은 타키닌처럼 미친 자들이었습니다."
하룬은 그를 이해하기가 점점 더 힘들었다.
타키닌을 배출했다면 흑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를 떠 받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하룬의 의구심을 느낀 것일까?
"그렇게 이상하단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흑마법은 백마법과 똑같이 세상의 진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학문입니다. 백마법과 달리 정신적인 부분을 많이 다루기에 충분한 인성 교육과 함께 익혀야 하는 것이 바로 흑마법이지요. 오로지 강해지는 수단으로만 익히다가 뇌가 사악한 기운에 물든 자들이 미쳐 날뛰면서,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사악한 무리로 몰리기는 했지만 본래 흑마법은 지고한 학문입니다."
"그렇소?"
설명은 들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뭐, 이해를 하지 못해도 상관은 없겠지요. 아무튼 이 데빌 산맥을 장악하려는 자들은 타키닌이 그렇듯 이전에 세상을 파괴했던 자들처럼 사악한 흑마법만 익힌 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방인들까지 끌어들였는지 모르지만 그 세력이 엄청나 잘못하다가는 타키닌이 실패했던 대륙의 멸망까지도 충분히 해낼 위험천만한 놈들입니다."
뭘 얼마나 당했는지 모르지만 니켄은 다크니스에 대한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 이들에게 잡혀 이 꼴이 된 거요?"
비록 젊지만 강렬한 안광으로 보아서는 그 경지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 니켄이다. 그 경기를 묻고 싶었지만 그건 실례인 것 같아 말을 돌린 것이다.
"다른 흑마법은 어떤 마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하려고 접근을 했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다고 했지요. 제 경지가 5서클이라고 하니 환대를 하며 저들의 본단에 알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놈들이 내가 마신 차에 수면제를 탔습니다. 발바닥이라도 핥을 것처럼 굴던 놈들이 마나 봉인구를 채우더니 제가 가진 마법서며 각종 시약들을 내놓으라고 고문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타키닌의 흑마법을 배운 이방인들로, 다른 학파의 흑마법사들은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있다면 데쓰 메이지로 만들 흑마법사들이 필요할 분이라고요."
니켄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부서진 마나 봉인구의 파편을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다.
'다크니스가 타키닌이 남긴 유물을 얻었구나!'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 그 미치광이가 남긴 흑마법이라면 너무나 위험했다.
"이 미치광이 흑마법사 놈들은 흑기사와 흑전사까지 잔뜩 양성해서 대륙을 지배할 꿈을 꾸고 있습니다."
"흑기사와 흑전사가 뭐요?"
하룬의 물음에 니켄이 잠시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