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전
하룬은 아침 일찍 세 산악 부족의 수장들에게 귀환 인사를 했다.
"대장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간밤에 들었습니다. 건강해보여 다행입니다."
누구보다 라티카 칸이 그를 가장 반갑게 맞이했다. 그의 제자들이 돌풍에 들어간 후 많은 성취를 올린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이 귀환했다는 소식은 곧 아카 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룬은 대원들과의 재회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세 부족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하루를 꼬박 보내야만 했다.
그 와중에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대전사들과 포머칸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세 부족의 환대를 받으며 잠시 쉰후에 돌풍 용병대를 찾아왔다.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입니다."
"바슈라고 하오. 그리고 이들은 우리 세 부족의 대전사들과 포머칸들이오."
바슈는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턱에는 흰 수염이 그득한데 머리카락은 검다. 피부는 팽팽한데 눈은 깊고 눈빛은 맑았다.
'바디체인지를 겪은 모양이군.'
불완전하게나마 바디체인지를 이룬 바슈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다.
"반갑습니다. 이 세 분은 우리 용병대의 고문이신 딜런 경, 타니엘라 경, 미루스 경입니다."
하룬은 세 고문을 소개하자 바슈를 비롯한 대전사들과 포머칸들이 강렬한 눈빛을 세 사람에게 보냈다. 세 고문의 뛰어난 기도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대단하신 분들이군. 만나서 반갑소. 우리 일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셨다고 들었소."
바슈 일행은 하룬 일행에게 가감되지 않은 호감을 드러냈다.
"별말씀을요. 우리 역시 아카족을 비롯한 세 부족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형제와 같은 관계를 유지할 겁니다."
그때 도네이스가 여자 대원들과 함께 오미차를 준비해서 들어왔다.
사라들은 각별한 풍미를 지닌 오미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각자 호기심을 풀기 시작했다(골드런:이놈의오미차는 언제다마시나)
하룬은 대전사의 수장인 바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빌 산맥의 현재 상황이나 다크니스 그리고 향후 예견되는 일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이었다.
"흠. 그럼 앞으로 이런 성들을 계속해서 차지해야겠군요."
"그럴 수만 있다면 아카족이나 다른 산악 부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안전한 주거 공간과 풍족한 식량이 확보된다면 앞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룬 대장의 말이 맞소.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부족 간에 합의를 하지 못한 것은 물론 일족의 수가 적어 시도하지 못했소."
이전에 라티카 칸이 한 말대로 산악 부족들이 가장 염원하는 꿈은 선조들이 거주하던 영원의 땅인 타르 분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 산악 부족들에게 는 큰 기회가 될 것이오. 우리에게는 이런 성을 축조할 기술력이 없어 그저 안전한 곳을 찾아 산맥을 떠돌았는데 놈들이 우리에게 좋은 거주지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소."
"그렇습니다. 탄툰 마을의 탄께 들으니 산맥에 흩어져 사는 아카족의 숫자가 몇 만에 이른다니 몇 개의 성만 확보해도 한동안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라티카에게 들으니 우리 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제공한다고 들었소."
"네. 저희 용병대가 운영하는 상단이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산악 부족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각 부족의 탄들과 칸들의 이야기대로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와 친구가 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오.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미리 어느 정도 상대를 알고 가진 만남이었고 처음부터 호의를 가진 터라 협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약속을 중요시하는 부족인 만큼 특별히 형식이나 약속 없이 단지 구두로 이루어졌다고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바슈와 어느 정도 이야기를 끝낸 하룬이 장내를 둘러보았다. 대전사들은 딜런과 포머칸들은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심각하면서도 진지했다.
"딜런 경!"
"네, 대장!"
"이제 형제와 같은 사이가 되었으니 나가서 직접 손을 맞대는 것 어떻습니까?"
딜런은 하룬의 말에 드물게 짓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만 검의 끝을 보고자 노력하는 딜런에게 수많은 대전사들은 좋은 상대였다. 그들 개개인이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으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것인가.
"하하하! 나부터 시작하고 싶소만."
바슈가 눈을 찡긋거리며 호승심을 드러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딜런과 대전사들의 대련이 이루어졌다. 대전사들 역시 오랫동안 서로 대련을 해 왔지만 그들은 마수의 힘을 근간으로 하는 검술을 익혔기에 정통으로 검술을 수련한 딜런과의 대련은 그들에게도 중요한 기회였다.
"대장, 우리는 이들과 주술과 마법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하룬에게 전해 받은 고대 라 마법진은 현재의 마법 체계보다는 주술에 가까운 재료들을 사용한다고 했다. 지난번 첨탑에서 본 마법진도 그렇고 그들이 얻은 고대 마법진 역시 주술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그들에게 포머칸과의 만남은 무척이나 고대하던 일이었다.
타니엘라의 얼굴이 오랜만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흥미로운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는 모양이다. 미루스는 아예 이쪽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토론에 빠져 있었다. 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토론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왠지 무척 닮아 있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지구라트 앞의 작은 광장에는 삽시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전사들과 딜런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이 성내에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이다. 아카족은 물론이고 부르카족과 에인족 전사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바슈와 딜런의 대련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스스로 마나 오션을 생성했고 마수의 힘 다섯 개를 동시에 사용할 뿐 아니라 30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바슈는 아카족 특유의 실전 검술을 통해 소드 마스터 중급 이상의 실력을 드러냈다.
딜런 역시 자신이 갈고 닦은 모든 것을 드러내 바슈를 상대했다. 마치 신화시대에 존재했다는 초인들의 전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들의 대련은 세 부족 전사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고 모두가 지향하는 힘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딜런은 하룬이 준 상급 포션을 여섯 병이나 마셔 가면서 모든 대전사들과 한 번씩 대련을 했다. 딜런은 매 대련마다 최고조의 긴장과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이 익힌 검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검술은 물론 마나와 마수의 힘을 결합시킨 바슈의 무력은 그에게도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대련인 터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미친영향은 아주 컸다. 다음은 하룬의 차례였다.
'이번 기회에 메신저 검술을 완벽하게 몸에 새기자!'
하룬은 정령술이나 비도술을 쓰지 않고 마수의 힘과 순수한 검술로 대전사들을 상대했다. 이미 딜런과 많은 대련 경험이 있었고 화염 지대에서는 상급 마수들을 검술로 상대했던 하룬은 비록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해 내지는 못했지만 빠른 몸놀림과 정교한 검술 그리고 마르지 않는 마나로 대전사들을 상대했다.
대전사들은 현재 대륙의 대표적 검술인 중검류와는 달리 쾌검류에 속하는 하룬의 검술에 무척 고전했다. 더구나 하룬은 그들처럼 마수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좋구나!"
바슈가 흥에 겨워 탄성을 지를 정도로 하룬은 대단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바슈를 비롯한 대전사들은 왜 탄툰 마을의 탄과 칸이 하룬을 형제라고 불렀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들보다 더 많은 마수의 힘을 더욱 능숙하게 쓰는 하룬은 딜런보다 더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다음은 납니다!"
하룬이 세 번 무너졌고 바슈가 두 번 무너진 후 피드란 대전사가 바슈를 대신해 나섰다. 그는 딜런과의 대련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그렇게 광장에는 딜런과 하룬을 상대로 아카족 대전사들이 대련을 벌였다. 그렇게 강자들의 대련이 끝났지만 전사들은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멋진 대련을 본 전사들은 혈기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부르카족 전사 베카요. 검 전체에 빛을 낼 수 있소.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부르카족 전사장 베카가 나서자 피가 끓어오른 티노가 나섰다.
"돌풍용병대 부대장 티노라고 합니다. 좋은 대결을 부탁합니다."
이제 막 익스퍼트가 되었지만 딜런에게 검술을 지도받았고 오랜 용병 생활을 통해 터득한 임기응변까지 더해진 터라 중급이라고 불려도 무방한 티노는 베카를 상대로 멋진 실력을 뽐냈다.
"에인족 전사 아르카라고 합니다. 저 역시 검 전체에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누구든 부탁합니다."
"전 1조 조장 겨루라고 합니다.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르카가 나서자 상기된 얼굴의 겨루가 나섰다.
각 부족의 전사장들은 모두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 그렇기에 상대의 실력을 알아본 겨루가 기쁜 표정으로 나선 것이다.
졸지에 광장은 대련장으로 변해 버렸다. 대대로 승무(陞武) 정신이 강한 세 부족의 전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풍 용병대의 대원들에게 대련을 신청한 것이다.
대원들 역시 이런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딜런과 대원들은 모든 부족의 전사들과 대련을 해야 만 했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피가 튀고 촌각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날아가는 실전은 아니었지만 익힌 바가 다른 터라 서로 참조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광장의 대련은 식사 때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이틀 내내 이어졌다. 그 대련은 급기야 각 부족의 전사들 간으로 확장되었다.
마수를 상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서로의 무위를 겨뤄 볼 기회가 없었던 세 부족의 전사들은 이 기회를 통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포머칸들과 칸들 역시 흉금을 터놓고 토론을 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주술은 본래 그 뿌리가 하나였던 터라 쉽게 합일점을 찾아냈고 각 부족의 주술이 가지는 장단점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비전을 터놓고 토론을 하는 사이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을 줄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다른 체계를 가지긴 했지만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가진 마법진의 지식이 더해지자 얻는 것들이 많았다.
"진즉에 이런 기회를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부르카족의 원로 칸인 바이탈이 모두의 마음을 대신해 그 소회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오랫동안 살아왔고 이렇게 누군가가 부족 간의 매개체가 되는 일이 없었기에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동안은 부족 간에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마수의 준동으로 일족의 안위에 위협이 가해지고 세 부족의 사이에 돌풍 용병대라는 중심점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서로 격리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딜런이나 하룬과는 달리 티노를 위시로 한 대원들은 연속되는 대련 때문에 많은 포션을 마셔야만 했다. 헤니가 기지일로 인해 당분간 없는 터라 포션이 필수적이었다. 세 부족의 칸들이 치료를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치료술은 약초술과 주술이 그 근간이었기에 단기간에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던 것이다.
"허어! 이거 포션 값이 장난이 아니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아카 성의 분위기는 전과는 달라졌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과 밑바닥까지 드러낸 비전의 교환은 세 부족은 하나로 묶어 버린 것이다.
세 부족이 모인 상황이라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지고 행동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한 부족처럼 변해 버렸다. 물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는 이들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그들조차 다른 부족을 형제 부족으로 인식할 정도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하나가 된 힘으로 목표를 이룰 시간이 된 것이다. 아카 성과는 이틀 거리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두 성이 목표였다.
부르카족 전사들과 에인족 전사들은 아카 성에서 머문 며칠 동안 성이 일족들에게 얼마나 유용한 장소인지 실감했다. 때문에 반드시 성을 얻어야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깊은 골짜기 사이의 분지에 자리한 성. 산 위에서 성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들이 있었다. 성 밖의 기름진 초지를 바라보며 삼켜지는 수많은 침들 속에는 일족의 안위를 떠올리는 전사들의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다.
작전 개시는 새벽이었다. 밤 그림자의 도움으로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온 주술사들은 분지와 산자락이 만나는 곳의 은밀한 장소에서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주술을 펼칠 준비를 끝냈다.
타니엘라가 이끄는 일단의 마법사들 역시 시간이 되면 흑마법진을 깨기 위해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심해라! 디텍트 마나 마법으로 재빠르게 코어의 위치를 파악하고 각자 맡은 구역을 책임져야 전사들의 피해가 없을 것이다."
"네, 고문님!"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연락을 받고 합류한 자유 마법사 출신으로 5서클 마법사들인 피아체, 다르안, 카센, 미세린, 디고브의 뒤를 따라 각자 맡은 구역으로 은밀하게 내려갔다.
그들의 앞에는 각기 스물의 전사들이 길을 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2미터에 달하는 부족 고유의 악기를 가진 주술사들이었다.
순수하고 짙은 마나를 머금은 바이카스 나무로 만든 관악기인 로바인을 입에 문 주술사가 머금은 공기를 서서히 뱉어내자 로바인의 구멍을 통해 인간의 청령 범위를 초과하는 음파가 대기를 통해 분지로 퍼져 나갔다.
그 음파로 인해 분지의 대기가 급속하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바이 아트라 세큐윰타 달라 이쿠이타라!"
아카족 포머칸 도루체를 비롯해서 분지 외곽의 다섯 장소에 자리를 잡은 일단의 주술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대기가 잡아먹은 듯 약간 벗어난 거리에서는 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분지의 대기가 더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온도를 상승시키는 주술인 것 같았다. 그때 부르카족 포머칸 베슈트를 비롯한 다른 주술사들의 입에서 다른 주문이 흘러 나왔다. 그들의 손은 흙 속에 묻혀 있었다.
"보쿰 아쉬리아 데테트 베아티 슈람!"
그들의 주문 역시 일정한 반경 밖으로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운율을 가진 주문이 이어지자 분지 전체의 땅이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또 다른 주술사들도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에인족 포머칸인 칸타레를 비롯한 일단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며 천천히 두 손을 휘둘러 뭔가를 잡고 끌어 내리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지표면으로부터 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들의 주술은 정말 놀랍구나!'
하룬은 이제 일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표면을 냉각시키고 대기는 데운다. 그리고 가벼워져 위로 올라가려는 더운 대기를 지표면 가까이로 끌어 내려 안개를 생성시키는구나.'
놀랍게도 주술은 과학의 원리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마법의 원리는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주술의 경우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GPC에서 주술을 과학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한 모양이다. 안개는 어둠을 타고 분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삽시간에 성벽의 중간까지 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때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일단의 주술사들이 로바인의 음파에 자신들의 주문을 교묘하게 끼워 넣었다.
나른할 정도로 긴 운율을 가진 주문이 로바인의 음파와 섞이자 분지 안의 생명체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근육들이 풀리고 날 선 신경은 누그러졌다.
그런 효과를 생생하게 몸으로 감지한 하룬은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주술의 경우 대인 효과는 약하지만 광역 효과가 뛰어나구나!'
마법의 경우 범위는 협소하지만 효과가 강한 반면에 주술은 직접적인 효과는 약했지만 대신 작용 범위가 무척이나 넓었다.
'이런!'
주술에 집중하고 있던 하룬은 이제 자신이 움직일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 은신하던 커다란 바위를 벗어어나 분지 안으로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100명의 돌풍 용병대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들어가던 하룬의 발이 멈추었다. 그에 따라 대원들의 걸음도 멈추었다.
"여기서 잠시 대기하라!"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대원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행동을 멈추었다.
'가만! 될지도 몰라.'
은밀하게 성벽 주위로 이동해서 마수를 죽일 작정이었던 하룬은 문득 포러스에게 흡수한 흑마법을 떠오렸다.
'마수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내게 되어있어. 그렇게 되면 주술사들이 힘들게 펼친 주술이 깨지겠지. 내게 마나 고리는 없지만 대신 흑마법보다 더 뛰어난 어둠의 마나가 차고도 넘치지.'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룬은 제자리에 서섯 마나 오션에서 어둠의 마나를 몸 밖으로 뿜어냈다.
달의 신전에서 얻은 기연으로 인해 이제 마나 로드는 남김없이 뚫려 있는 상태라 피부를 통해서 마나를 흡수하거나 내보낼 수 있게 된 하룬이다.
어둠의 마나는 안개를 타고 분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정말 신기하네!'
외계로 내보낸 마나지만 의지가 심어진 덕분에 어둠의 마나는 또 다른 감각처럼 부딪히는 풀과 돌 그리고 대기의 감각을 생생하게 전해 왔다. 마치 다른 한 겹의 피부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있다!'
마수들이 감각으로 느껴졌다.
쫑긋!
평소와는 다른 감각을 느꼈는지 성벽 주위를 어슬렁 거리던 브롤프들이 일제히 귀를 높이 세웠다. 프로즐리의 눈이 커지고 블랙오파드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와라! 소리 내지 말고 천천히 내게로 와라!
성을 제외한 분지 전체로 퍼져 나간 어둠의 마나는 하룬의 의지를 퍼트렸다.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어둠의 마나가 전한 의지는 마수들을 유혹했다.
그르르.
프로즐리 1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수하고 짙은 어둠의 마나는 제압당한 영혼을 뒤흔들 정도로 매혹적이고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온다!'
하룬은 프로즐리를 필두로 마수들이 천천히 소리를 죽이고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감각을 어둠의 마나를 통해 느낄수 있었다. 이게 될 줄은 몰랐다.
마법 수식을 통하지 않아도,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이렇게 의지만으로 마수를 움직일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하룬의 주변으로 몰려든 마수는 수백마리가 넘었다. 하룬은 가장 먼저 도착한 프로즐리의 머릿속에 심어진 흑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흑마법사들이 녀석을 제압하고 부리기 위해서 마법진을 통해 흘려 넣었으리라. 하룬은 프로즐리의 머릿속으로 좀 더 짙은 어둠의 마나를 집어넣고 흑마력을 끌어당겼다.
혼탁한 흑마력은 순수에 가까운 어둠의 마나로 쉽게 빨려 들었고 이내 프로즐리의 머리를 빠져나왔다. 프로즐리는 이제까지 자신을 속박하던 흑마력이 사라진것을 느낀 듯 입을 벌리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자유롭게 살아가던 마수들을 속박해 수시로 견딜 수 없는 두통을 유발하던 원인이 사라지자 하룬을 바라보는 프로즐리의 눈이 유순해졌다.
'좋아!'
하룬은 프로즐리의 머릿속에서 흑마력을 빼내는 시도가 성공하자 이번에는 모든 마수를 대상으로 어둠의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모든 마수들의 회색으로 물들었을 때 하룬은 과도한 심력의 고갈로 비틀거렸다.
역시 그 힘을 발휘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꺼번에 모든 마수를 대상으로 흑마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룬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눈을 떴다. 마수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영혼에 강하게 작용하는 어둠의 마나에 취해 자리를 뜨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너희들의 주인이다! 너희들을 속박하고 괴롭히던 것은 사라졌다. 이제 복수를 해야 한다. 너희들을 아프게 하고 너희들을 속박했던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하룬의 의지가 어둠의 마나를 타고 전해지는 순간 마수들의 눈에서 일제히 흉광(凶光)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르고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는 살기가 침에 실려 입 밖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랏! 가서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뛰어넘어 너희들을 괴롭히 자들의 살을 물어뜯고 뼈를 부숴라! 복수의 시간이다!
하룬의 의지가 전해진 순간 마수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으며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된다!'
마수를 부리던 자들이 마수에게 당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자못 기대가 되는 하룬이다. 어차피 한차례 소란이 일어나겠지만 마수들을 이용해서 성벽을 지키던 자들만 처리해도 충분하다.
하룬은 마수를 어느 정도 해치운 시점에 하늘 높이 날리기로 한 신호탄을 쏘려다가 멈추었다.
'될지도 몰라.'
이제 완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어둠의 마나였다. 자연의 마나처럼 몸 밖으로 나오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받아 일정 범위 안에서는 절대로 흩어지지 않는 어둠의 마나였다.
하룬은 어둠의 마나를 더욱 넓게 확장했다. 분지를 벗어나 대원들과 전사들이 은신하고 있는 산자락까지 어둠의 마나를 확장하자 그들의 행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끓어오르는 투기로 인해 거칠게 숨 쉬는 전사들. 신호가 올라오면 메모라이징한 마법을 날리기 위해 잔뜩 긴장한 마법사들의 행동이 바로 곁에서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다.
하룬은 어둠의 마나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총대장 하룬이오! 이제 본인에게 정신이 제압된 마수들이 성문을 깨고 성벽 위에 있는 자들을 공격할 것이오. 마법사들은 준비된 마법을 예정한 곳으로 날리고 주술사들은 전사들에게 발몬의 가호를 거렁주시오. 준비가 되면 전사들은 전력을 다해 자신이 맡은 구역을 향해 돌격하시오!
-주술사들은 미리 준비한 주술을 펼치시오!
-미루스 경과 마법 병대는 흑마법진의 코어를 찾으시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하룬의 명령에 눈을 크게 떴다.
"헛!"
"무슨?"
놀라서 경악성이나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모두 하룬의 명령은 제대로 들었다.
'놀랍군 바람의 정령을 통해 전하는 걸까?'
대부분은 하룬이 정령사라는 것을 알기에 정령 마법으로 이해했지만 포머칸들과 일부 마법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의지를 전하다니! 이게 도대체 어떤 능력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된다. 지금은 전시다.
"공격 마법을 준비해라!"
"주문을 외워라!"
"돌격하랏!"
수뇌부의 은밀한 명령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각자 맡은 임무에 집중했다.
"크아악!"
"캑!"
"마수들이 공격한다!"
갑자기 성벽 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브롤프를 비롯한 마수들이 한차례 벽을 차더니 벽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꽈앙! 꽈앙!
성문에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프로즐리들이 몸통 부딪치기를 했던 것이다.
부르르.
강철로 주조한 성문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지만 경첩과 성벽은 문처럼 버티지를 못했다. 프로즐리 5마리가 한 번에 달려오는 탄력과 부풀어 오른 어깨로 성문 치기를 거듭ㅎ사자 기어코 굴고 단단한 경첩이 떨어져 나갔고 연결된 성벽의 돌들이 뒤로 밀렸다.
"푸우코 차이타레 호솥 안타!"
주술사들이 일제히 발몬의 가호 주문을 외우자 전사들의 근육 속으로 전신에서 솟아오른 잠력(潛力)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심장은 맹렬하게 뛰며 신선하고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공급했고 간이 두 배로 커지며 용기와 사기가 올라갔다. 또 다른 주술사들은 짧고 격렬한 주문을 통해 전사들의 눈에 특별한 힘을 주었다. 안개를 뚫고 제대로 앞을 볼수 있는 힘이 마수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사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후후웁! 후우웁!
주술사들의 주문이 잦아들었다. 전사들이 뜨거운 숨결을 흘리며 주체할 수 없는 힘에 몸을 바르르 떨자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가랏!"
파바밧!
전사들이 일제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미루스와 마법 병대가 크게 활약을 하고 있었다. 미루스가 이끄는 마법사들은 마나 디텍트 마법을 펼쳐 코어를 하나씩 확인하고 디그 마법으로 그곳에 묻힌 마나석을 찾아내었다.
흑마법진을 구돌하는 동력원인 마나석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전사들의 걸음을 붙잡고 있던 기분 나쁜 감각이 옅어졌다. 아직도 짙은 안개에 휩싸인 성벽 위는 흑전사들과 마수들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전사들의 전력으로는 익스퍼트 급에 해당하는 마수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크악!"
"아아악!"
곳곳에서 마수에 목덜미가 뜯기고 심장이 파헤쳐진 흑전사들의 사체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놈들!"
안개를 뚫고 빛나는 검도 간간이 보이기는 했지만 합공도 서슴지 않는 마수들로 인해 오래지 않아 오러는 사그라지고 처절한 비명이 그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
전사들은 급조한 사다리를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위에는 마수들에 잔혹하게 당한 흑전사들의 시신이 빛 모래를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마수들은 이미 성벽 위에 있던 경계병들을 몰살시키고 성안으로 뛰어내린 모양이다.
"빨리 내려가서 각 성문을 열어라!"
정문은 이미 프로즐리에 의해 무너져 있었지만 다른 성문들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아카족 전사장의 명령에 전사들이 일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가 성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대전사들이 이끄는 각 부족의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입성했다.
"마법사들은 수호 전사들과 함께 정해진 자리를 확보하라."
타니엘라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5명씩의 수호 전사의 보호를 받으며 미리 지정된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들은 지구라트가 보이는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갈 예정이다.
"매직아이!"
타니엘라는 짙은 안개를 뚫고 성안을 훑어보았다.
'제대로군!'
성안은 극도의 혼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경보를 듣고 깨어난 자들이 차례로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마수들이 덤벼들자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죽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검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자들이 늘어나자 마수들은 급격히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대전사를 비롯한 산악 부족 전사들이었다.
샤키의 눈을 통해 안개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던 전사들은 놀라고 당황한 다크니스의 무리에게는 횡액이나 다름없었다.
피육!
안개를 뚫고 신호탄이 하늘 위롤 올라왔다.
'좋았어!'
신호탄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따르는 마법사들이 미리 예정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는 신호였다.
'좀 더 빨리!'
지구라트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막 잠이 들거나 로그아웃을 했던 흑마법사들이 깨어나거나 접속하고 있었다. 타니엘라는 제대로 된 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대 마법서에 수록된 공격 마법 중 '캐논 익스플로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캐논 익스플로전 마법은 개인 마법이 아니라 단체마법으로 현 시대의 마법과는 그 체계를 달리했다.
보조 마법인 타임 어코드를 걸면 4서클의 매직 미사일 마법이 참가 인원에 따라 최대8서클의 위력을 가지게 된다.
"됐어!"
마지막 신호탄이 올라오자 타니엘라는 옆에 자리한 라티카 칸에게 눈짓을 했다.
"우레게탓 아함 트라틋!"
라티카를 비롯한 5명의 칸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자 그들의 앞에 동그란 구체의 막이 생겨났다. 그 막은 주술에 의해 자연계의 마나가 유형화된 것으로 힘을 넓게 퍼트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타임 어코드! 매직 애드!"
타니엘라의 주문이 끝나자 구체의 막에 룬어가 새겨져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치 안개처럼 넓게 퍼져 나가는 막을 타고 룬어의 크기가 커지는 동시에 윤곽이 흐릿해졌다.
'성공이다!'
주술과 마법의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타니엘라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왼손에 들고 있던 신호탄의 끈을 잡아당겼다. 신호탄이 위로 올라가며 휘황한 빛을 뿌렸다.
"매직 미사일!"
각처에 자리를 잡은 마법사들이 메모라이징한 마법 주문을 완성시켰다. 그때는 이미 라티카 칸을 비롯한 주술사들이 만든 얇고 넓게 퍼진 막이 성 전체로 그 범위를 넓힌 상태였다.
마법사들이 날린 매직 미사일들은 제각각 다른 궤적으로 다른 시간에 지구라트로 날아들었지만 어느 순간 매직 미사일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순간 타니엘라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부릅떠졌다.
'성공이닷!'
타니엘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충돌한 매직 미사일은 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숫자가 늘어날 수록 매직 미사일의 크기는 거대해졌다. 열 호흡도 되지 앟아 직경 4미터에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매직 미사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지금이요!"
타니엘라의 외침에 주술사들이 읊조리고 있던 주문을 멈추자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 지구라트를 향해 날아갔다. 정확하게 그 끝은 첨탑이 있는 5층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지구라트 밖으로 다수의 흑마법사들이 나오는 중이거나 막 나온 상태였다. 그들은 처음 보는 거대한 매직 미사일에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가 황급하게 마법을 펼쳤다.
"캔슬레이션!"
"다크 실드!"
"페이크 오브직트"
상대의 마법을 무효로 돌리는 것은 실패였다. 거대한 매직 미사일에 담긴 마나는 7서클 대마법사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여러 명이 동시에 만든 수 겹의 다크 실드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렸고 매직 미사일을 홀릴 목적으로 만들어 낸 가짜 목표물도 소용이 없었다.
우우우웅!
거대한 매직 미사일은 엄청난 음파와 함께 지구라트를 향해 날아갔다.
"피햇!"
놀란 마법사들과 흑기사들이 메뚜기처럼 지구라트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달려 나갔다.
꽈아앙!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굉음은 모든 사람의 몸을 멈추게 만들었다. 일부 전사들과 흑전사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엄청난 음파였다.
모든 사람의 눈이 안개와 흙먼지로 휩싸인지구라트로 향했다. 고대 마법인 캐논 익스플로전이 지구라트를 강타한 순간이 바로 공성전의 분수령이 되었다.
"헉!"
"미친!"
용케 직격을 피한 다크니스 무리는 구름처럼 피어났던 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완전히 무너진 지구라트의 모습이 드러나자 할 말을 잊었다. 8서클의 마법은 되어야 이 정도 위력이 나올 것이다.
"쳐랏!"
대전사들이 잠시 멍하게 있던 전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사기가 오른 산악 부족 전사들이, 얼이 빠진 것 같은 다크니스의 무리르 향해 쇄도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아악!"
"죽어!"
비명과 살기 어린 외침 그리고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나른한 안개에 잠겨 있는 새벽을 일깨웠다.
"......마법진도 깨졌다."
성주인 투르펀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얼굴에 문신을 새긴 미개한 산악 부족 전사들의 협공에 당해 죽어 가는 수하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마법진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지구라트는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고 통신조차 할 수가 없다.
"성주, 탈출을 해야 합니다."
겁 없이 달려드는 전사 몇 명을 가볍게 처리하고 달려온 부성주 달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로?"
"어디로든 한 방향을 정해 뚫어야만 합니다. 안개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로 인해 흑기사들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어 피해가 큽니다.
게다가 나타난 적들의 실력이 무척 뛰어납니다. 그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요. 믿기지 않지만 소드 마스터에 오른 전사들도 10명 이상입니다.
흑기사들이 마치 짚단처럼 죽어 가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흑전사들은 몰라도 비욘드 급 캡슐을 사용하는 흑기사들과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현실에서도 죽게 됩니다."
본단에서는 쉬쉬하지만 그들도 은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동화율이 높은 캡슐의 소지자들은 일반 게이머에 비해 현저하게 빠른 속도로 레벨 업을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가상현실에서 죽게 되면 현실에서도 뇌사하거나 의식불명 상태가 되기 십상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투르펀은 성주 친위대와 서른이 넘는 마법단의 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직도 안개로 인해 시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쓸 수 있다. 그 수량이라고 해 봐야 10장도 되지 않는다.
좌표가 있기는 하지만 이 데빌 산맥은 지구라트의 첨탑에 새겨진 마법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마나의 불규칙한 유동 때문에 텔레포트하는 도중에 죽을 확률이 높았다.
'도대체 마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마법진은 왜 깨졌고?'
6서클의 흑마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쓸 마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의 파편을 이용해서 흑마력을 흡수하고 마법서를 통해 서클 없을 한 대부분의 다크니스 마법사들은 성주 투르펀과 비슷한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이 비욘드의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경우는 오랜 시간 동안 마법을 익혀 왔기에 임기응변을 할 수도 있고 다양한 마법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고 서클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활용할 적당한 마법이 거의 없었다.
투르펀이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서른 정도의 전사들이 그들을 향해 쇄도해 왔다. 세 부족의 대전사들은 마수의 힘을 모두 활성화 시켰고 마나까지 끌어 올렸는지 무기에는 오러광이 선명하게 빛나는 상태였다.
"이놈들!"
부성주 달케의 기사단이 일제히 오러를 끌어 올리고 적들을 맞이했다. 무기에 오러를 씌우는 것은 익스퍼트 초급 경지이니 이 정도는 문제없이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꽈앙! 꽈앙!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순간 폭발음에 가까운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오러대 오러의 격돌이었지만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아악!"
"컥!"
같은 오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크니스 소속의 흑기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아 무기를 놓치거나 플레이트 메일이 부서진 상태로 튕기듯 뒤로 날아갔다. 그들 대부분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마나에 마수의 힘이 더해진 대전사들의 강격은 익스퍼트검사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했다.
흑기사들이 산악 부족의 전사들과 충돌하는 순간 형편없이 밀리는 것을 본 마법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도기능이 있는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한터라 다른 공격 마법은 별 효용이 없었다.
"다크 매직 애로우!"
"다크 매직 스피어!"
"다크 매직 미사일!"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터라 날리는 마법도 유사했다.
짧은 순간 공격 마법이 대단위로 날아왔지만 대전사들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나 혹은 무기를 휘둘러 마법을 피하거나 부숴 버렸다.
"말도 안 돼!"
자신들의 마법 공격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확인한 마법사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파죽지세로 흑기사들의 무기를 부수고 갑옷 채 썰어 버리는 무자비한 대전사들의 공격은 흑기사들까지 공포에 물들게 했다.
"어, 어떻게....?"
흑기사들 대부분은 짧게는 손가락 길이, 길게는 팔뚝 길이의 선명한 오러를 뿜어냈지만 단지 오러를 씌웠을 뿐인 상대들의 무기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유령과 같은 움직이임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이건 기사들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산악 부족들이 사용하는 마수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전사들은 오러 블레이드를 쓰지는 못하지만 무위는 소드 마스터 초급 이상이었다. 마수의 힘과 마나 오션의 마나가 합해져 발휘되는 오러는 일반 기사들의 오러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러의 밀도와 강도 그리고 절삭력에서 비교할 수 없이 강했던 것이다.
이제 성 외곽 지역은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마수들은 모두 죽었지만 놈들이 날뛴 덕분에 전사들은 손쉽게 적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구역을 깨끗하게 처리한 전사들이 성의 중심부로 모여들고 있었다. 매직 아이로 성안 상황을 살펴본 성주 투르펀이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그의 눈에 빈 공간이 보였던 것이다.
"동쪽으로 간다!"
'설마 일부러 비워 놓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안개로 인해 적들도 시야가 깨끗하지 않을 것이다. 투르펀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 야만인들이 일부러 길을 열었다고는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지구라트 광장으로 후퇴한 다크니스의 숫자는 거의 이백에 달했다. 이미 흑전사들은 남김없이 도륙당한 상태였다.
'반드시 돌아와서 복수해 주마!'
투르펀은 이를 악물었다. 아마도 죽은 흑기사들 중에는 뇌사하거나 의식불명이 되는 이들이 꽤 나올 것이다. 만약을 위해 동화율을 낮추라는 본단의 지시가 내려왔지만 동화율이 낮아지면 스스로 느끼는 실력이 약화되기 때문에 그 지시대로 행한 자는 거의 없었다.
대전사들은 흑기사들이 주축이 된 단단한 덩어리를 깰 수가 없었다. 성주 투르펀과 몇 명의 고위 마법사들이 숫자가 줄어든 흑기사들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 주었던 것이다.
"다크 핸드!"
"다크 매직 애로우!"
흑기사들의 오러와는 별도로 날아오는 마법도 위험했다. 대전사들은 한 발 두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일반 전사들은 이미 손을 놓은 상태였다.
대전사들과 함께 하는 전사들은 적어도 마수의 힘을 두 개 이상 쓸 수 있거나 마나 오션을 생성해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강자들이었다.
마침내 동쪽을 에워쌌던 전사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뚫렸다! 전속으로 탈출하라!"
"다크 실드!"
"다크 실드!"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펼치자 이백의 다크니스 무리는 검은 방패 안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그 첨단에는 부성주를 비롯한 5명의 기사들이 팔뚝 길이의 오러를 뽑아낸 채 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전사들이 공격을 해 보지만 중첩된 다크 실드를 깨기가 무섭게 다른 실드가 생성되었다. 더구나 첨단에 5명의 흑기사들이 발휘하는 오러는 대전사들도 제대로 받아 내기 힘들정도로 살벌한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화살표 모양이 된 다크니스 무리는 파죽지세로 포위망을 허물어 버리고 성의 동쪽으로 진군했다.
-단숨에 성벽을 허물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내가 신호를 하면 일제히 벽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려라!
수하들에게 메신저 마법으로 의사를 전한 투르펀은 혹시몰라 손에 들고 있었던 스크롤을 다시 품에 넣고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성벽과 30미터 정도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이상하게도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모두 도망치듯 양옆으로 빠져나갔다.
'뭐지?'
투르펀이 의아한 얼굴로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느새 끊임없이 이어지던 적들의 공격은 사라져 있었다. 실드를 유지하느라 헉헉거리는 마법사들이 살았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흑기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그들 역시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파이어 월!"
"파이어 월!"
끊임없이 들려오는 마법 주문을 들은 투르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사이로 기이한 운율을 가진 주문이 끼어들었다. 어느새 자신들을 둘러싼 화염의 벽이 생성되어 있었다.
'설마 아까처럼?'
그의 생각이 맞았다. 마법사들과 주술사들의 연합 공격이 다시 감행된 것이다. 화염의 벽은 점점 더 두꺼워지며 안쪽으로 좁혀 들어왔고 그에 따라 열기는 빠르게 올라갔다.
"스크롤! 스크롤을 써라!"
투르펀이 소리를 지르며 스크롤을 꺼내 재빠르게 찢었다.
찌익!
스크롤이 찢어지며 하얀 빛무리가 떠오르자, 이곳저곳에서 투르펀을 따라 스크롤을 찢어 하얀 빛무리가 생겨났다. 이제 텔레포트 마법이 발동되어 인근의 성으로 이동할 것이다.
"아악!"
"뜨거워! 커어억! 살려 줘!"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외곽에 서 있던 흑기사들의 몸이 좁혀 드는 화염의 벽에 닿은 것이다.
화염의 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흑기사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더니 얼마간 발광을 하다가 결국 새까맣게 타 버리고 말았다.
"스크롤이....."
투르펀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하얀 빛무리가 사그라지는 스크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의 것만 발동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스크롤이 마찬가지였다.
"레인지 쿨링!"
"레인지 배큠!"
몇 명의 마법사들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쿨링 마법을 펼쳤지만 마법은 발현되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화염을 제거하기 위해 공기를 차단하는 배큠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아아악! 살려 줘!"
외곽의 흑기사들 대부분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화염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뼈와 살이 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보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한덩어리가 되어 조밀한 상태가 깨지고 말았다. 화염의 벽은어느 순간 더 이상 안쪽으로 좁혀 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화염의 벽을 뚫고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화염을 뚫고 안쪽을 볼 수 있는 궁사들이 날리는 것처럼 화살은 여지없이 흑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의 요혈을 노렸다.
"컥!"
실드 마법조차 발현되지 않는 상황이라 피해는 엄청났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라리 화살에 맞아 죽은 자들은 행복했다. 적어도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화살과 화염을 피해 도망을 치는 이들로 인해 좁혀 드는 화염에 노출되는 이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흑기사들이나 흑마법사들 모두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레인지 레인 폴!"
투르펀이 6서클의 마법을 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웬일인지 마법은 전혀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있는 대로 짜증을 내던 투르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헉! 저건?"
화염에 잠식된 바닥에는 묘한 문양이 미스릴 가루로 그려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문양이었지만 투르펀은 그것이 어떤 마법진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마나 동결 마법진이란 말인가?'
그의 눈이 화염 밖으로 향했다. 이 정도의 범위를 가지는 마법진이라면 최소 7서클의 대마법사가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마법진을 완성했을 테니 족히 8서클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마나 동결 마법진이라면 마법의 힘으로 발화된 화염도 꺼져야 정상인데.....'
"크아아악!"
갑자기 온몸이 화염에 휩싸이자 투르펀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염 덩어리가 되어 이리저리 날뛰다가 힘없이 스러지는 모습만 보일뿐이다.
'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온몸이 활활 타는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의문이었다. 투르펀은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마법진 분야에서만큼은 대륙의 그 어떤 마법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마나 동결 마법진 안쪽 바닥에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발화 물질이 뿌려진 것은 끝내 알지 못하고 죽어 갔다.
대승이었다. 이제는 불탄 흔적만이 있는 곳에는 이방인들이 떨어뜨린 아이템들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룬은 모여든 이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승리를 선언했다.
"우리 모두에게 축하합니다! 이곳은 이제 부르카 성입니다."
와아아!
"만세! 우리가 이겼다!"
"이제 우리 부르카족에게도 제대로 된 집이 생겼다!"
하룬의 말에 사낙 부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아카족 전사들과 에인족 전사들도 부르카족 전사들과 함께 그 기쁨을 만끽했다.
주술의 매개물을 치우자 안개가 금세 걷힌 성안은 그렇게 거셌던 전투에도 불구하고 꽤 깨끗했다. 사체나 핏자국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던 다크니스들이 거의 모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부족의 전사들은 거리에 떨어져 있던 아이템들을 수거해서 한곳에 쌓았는데 작은 산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건물의 파손 정도는 경미했다.
성을 차지해서 당장 부족민들이 사용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지구라트를 빼고는 대부분이 멀쩡했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와 세 부족의 수뇌부들은 무너진 지구라트 건물 앞에 거대한 막사를 치고 회의에 들어갔다.
피해 상황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적었다. 사체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3천 명 정도로 추정되는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이런 대승을 거두고도 사망한 전사의 숫자는 200명이 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의 승리는 마법사들과 주술사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허허! 우리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 그리고 포머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의 격려와 박수를 즐겼다. 그간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했고 이번에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고 그 효용의 범위는 감히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지구라트를 치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아이템의 수량을 생각하면 미처 지구라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흑마법사들과 흑기사들의 숫자는 300명이 넘었다. 아카 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흑기사와 흑마법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대충 30~40퍼센트이니 상당한 전력을 한 번에 처리한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까지 남은 실력자들을 처리한 마나 동결 마법진과 주술사들 비전의 발화 물질의 효용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부르카족의 화살에 죽은 숫자보다 불에 타 죽은 적의 숫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긴장을 풀고 내일 새벽에 이동해야 합니다. 이곳 상황이 전해지기 전에 에인족도 보금자리를 만들어야지요."
하룬의 말에 수뇌부들은 일제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면서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최고였어!"
"그러게. 이제 우리 부족들의 미래는 환해졌어. 제아무리 마수들이 날뛰어도 이제는 안전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성을 차지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들이지만 그래도 동료들이나 후손들이 죽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