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프족과의 조우
비욘드로 돌아온 하룬은 펠을 다시 소환했지만 녀석은 출동이라고 한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몸을 씻고 엉망으로 변한 방어구를 새것으로 갈아입은 후에 다시 한 번 녀석에게 뇌파를 보내자 비로소 반응이 왔다.
-형, 드디어 깨어난거야?
-그래. 깨어났으니 연락을 했지.
-헤헤. 형이 어떻게 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많이 걱정했었다고.
정말 그랬는지 녀석의 목소리에 안도와 반가움의 감정이 가득했던 것이다.
-잘하고 있는 거야?
-헤헤. 그럼 당연하지. 나 펠은 위대한 하룬 대장의 동생이라고.
-그러니까 고스트의 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되었다고?
-응. 출동 빈도가 줄어들어서 좋기는 한데 조금 이상하긴 해. 우리가 판단한 바로는 아직도 절반 정도의 전력이 남아 있거든. 충원을 안 할 리도 없고 말이야.
-흠. 뭔가 다른 일을 획책하는 건가?
-다른 일, 뭐?
-그 음흉한 놈들이 공연히 안 움직일 리가 없다는 거지. 분명 뒤에서 무슨 다른 짓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헤헤. 타니엘라 할아버지도 그런 소리를 하셨는데 형도 같은 말을 하네.
예상은 되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 이다.
-아!
갑자기 펠이 탄성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데?
-이상한 일이 생기긴 했어. 한동안 제국에 합류를 거부한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었거든.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납치를 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참혹하게 죽여서는 그 사체를 가져가 버렸어 얼마 전 제국에서 군대와 기사단을 파견하고서야 그 일이 그쳤지만 이상한 일이었어. 그리고 귀족가의 무덤이 도굴되어 그 시신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고.
-그럼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
하룬은 펠의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다크니스의 짓이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포러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하룬이다. 뼈만 남은 시신과 사체가 필요한 무리는 흑마법사뿐이다.
-으드드득. 스켈레톤 나이트와 매지션 그리고 다크 나이트와 다크 매지션을 양성하려는 거야!
-그게 정말이야. 형?
-그래.
-하지만 다크니스는 가즈 로드에 붙잡혀 있는데. 가즈 로드가 얼마나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데.
-범인들은 골든 로드의 골든 나이트와 골든 매지션일 거야. 두 세력이 협력 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응. 하지만 골든 로드의 무력은 약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야. 놈들에게는 표획단이라는 조직이 있어. 그 포획단이 다크니스에 언데드 군단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했었어. 그런데 산악 부족들이 연합을 이루고 강력하게 대응하자 목표를 바꾼 것이 틀림없어.
-으으. 소름 끼쳐. 마법단 고문님들의 우려가 맞았네. 그 분들도 형이 한 말과 비슷한 예상을 햇었거든.
아무래도 비욘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가즈 로드가 다크니스를 강하게 압박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위험해!'
-아무래도 형이 와야 할 거 같아. 형 말을 듣고 보니 심상치가 않네. 내가 바로 그리로 갈까?
펠의 말에 하룬은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으로 보면 뭔가 심상치가 않지만 내게는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어!'
이제껏 생각만 하던 일을 이참에 할 생각이다. 놈들의 행보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아 보였다.
-아니야. 고문들도 그런 우려를 하고 있고 가즈 로드도 제역활을 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은 내가 없어도 될 거야. 부대장과 고문님들에게는 고스트를 견제하는 한편 고스트와 헤로파 상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전해줘. 난 이참에 혼돈의 땅을 다녀올 생각이야.
-아! 순수석?
혼돈의 땅이란 소리에 펠은 하룬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 그 물건이 다크니스의 손에 들어가면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난리가 날 테니 지금이라도 손을 써야지.
펠도 이미 다크니스가 순수석을 위해 혼동의 땅으로 파견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같이가!
순수석의 파편만으로도 각성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펠은 기대가 되는 모양이지만 지금의 녀석이 스페셜 포스와 함께 잇어야 한다.
-아니야. 넌 스페셜 포스의 주축이야.
펠의 공간 이동 능력은 지금 스페셜 포스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의 고스트의 활동이 좀 둔화되었지만 언제 다시 놈들이 날뛸지 모른다.
-다행이 네 정령이 각성을 했으니 걔네들이랑 같이 가면 돼.
-뿌우. 나도 가고 싶은데.
펠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같이 가고 싶다고 칭얼 댔지만 하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펠이 자랑삼아 말했듯 녀석의 부재는 엄청난 후유증을 초래했다.
-그쪽 일은 너만 믿고 있을 테니까 부탁해.
녀석의 사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공간 이동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한 말이지만 펠은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쁜 모양이다.
-헤헤. 나만 믿으라고, 형! 형이 올 때까지 스폐셜 포스는 내가 책임질게.
-그래. 몸조심하고.
펠은 언젠가부터인가 하룬에게 벨처럼 혈육이나 마찬가지로 변해 있었다.
운명이 하나로 묶여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능력이 마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위험한 순간에 자신을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한 펠이다.
하룬은 펠과의 통신을 끊고 네 정령을 소환했다.
"나이아, 위신느, 피닉스 , 라이피, 어서 나와!"
휘이익.
위신느의 바람 소리와 함께 나타난 네 정령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호호. 일찍 돌아왔네요."
"이제 드디어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거야?"
드디어 인간체로 세상을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네 정령은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자!"
"알았어요."
네 정령은 각자의 방법으로 호리병처럼 생긴 곳을 빠져나갔다. 하룬도 나르스의 날개를 활성화시켜 어렵지 않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밖에 나와 보니 네 정령이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나이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실체를 가진 인간체로서 처음 대하는 대자연의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주었기에 네 정령은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주변 경관을 보고 호흡하면서 세상과의 첫 만남을 즐겼다.
하룬은 펠의 경우로 인해 그들의 충격과 놀람을 알기에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룬이 서 있는 곳은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의 한가운데에 있는 야트막한 둔덕 위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원시림이 울창한 높은 산들밖에 없었다.
주변 경관이 아무리 좋아도 오랫동안 입으로 식사를 못한터라 배가 고픈 것 같았다. 뭐라도 좀 먹을 생각을 한 하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인간체가 된 네 정령이 음식의 맛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일단 뭐라도 좀 먹어 볼까?"
하룬의 혼잣말에 멍하니 있던 네 정령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음식! 맞아, 이젠 음식을 먹어야 해."
"어떤 맛일까?"
네 정령은 뭔가 먹는다는 행위와 맛이라는 것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초롱초롱한 네 쌍의 눈빛이 하룬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리고 있었다.
"하룬, 우린 뭘 먹을 거에요?"
"아!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하룬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네 정령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먹는 행위와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
"헤헤!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의 맛은 어떨까?"
"나도 너무 기대가 돼요, 하룬."
"나도, 나도."
"정말 어떤 맛일까?"
그들로서는 처음 음식을 맛보는 것이니 기대가 컸던것이다.
사실 펠의 경우도 인간체를 가진 후 한동안은 걸신들린것처럼 음식들을 탐했고 그 버릇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룬은 아공간을 열어 음식물들을 살폈다. 펠은 하룬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룬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아공간은 둘에게 동시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다리라고. 아주 맛있게 해 줄 테니까."
혼자였다면 육포로 간단히 해결할 생각이였지만 처음 음식을 먹는 네 친구를 위해 없는 실력이라도 발휘를 해야만 했다. 하룬은 취사도구와 식재료를 꺼냈다.
그렇게 하룬이 준비한 것은 고기 스튜와 신선한 야채와 소스로 만든 샐러드 그리고 빵과 포도주였다.
쩝! 쩝! 쩝!
네 정령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빵과 샐러드를 입에 넣고 씹어 보더니 금방 토끼 눈이 되어 허겁지겁 입안에 든 것을 씹기 시작했다.
"화아! 너무 좋아!"
"히히히."
"히끅! 너무 자극적이야."
"먹는 행위가 이렇게 줄거울 줄은 몰랐어. 너무 음 ……. 표현을 못 하겠어."
하룬은 배가 심하게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네 정령이 음식을 먹으면서 짓는 표정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처음나온 아이들처럼 아니, 실제로 그랬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놀라고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며 찡그리는 그 생생한 표정들이 하룬에게 묘한 감흥을 주고 있었다.
맛을 떠나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세상은 수많은 힘겨움을 강요하는 곳이지만 충분히 살아 갈 가치가 있는 거야.'
순수한 존재인 정령들이지만 그들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심지어 섹스를 하는 것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선이고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양한 감정을 비롯한 오감을 느낄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할 기본조건을 가진 것이다.
하룬은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기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았지만 많이 놀랐을 뿐 큰 감흥은 없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태어나게 되었지만 자신의 출생에 관여했던 자들의 안배에서 벗어나게 된 만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룬 역시 꾸준히 의심해 오고 있던 것이 사실로 밝혀졌을 뿐이다.
하룬은 빵과 물로 배를 채웠지만 전혀 부족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네 정령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불렀던 것이다. 인간은 불가사의한 존재가 맞다. 어느 순간에는 가장 강력한 욕망 중 하나인 식욕도 잊을 정도로 감정에 충실한 존재이니 말이다.
태고의 숲은 아름답지 않게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강수량이 풍부하고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숲에 자리를 튼 동싱물들은 그 종도 다양할 뿐 아니라 수도 많았따.
이곳이 후크란 산맥의 최남단인 것을 고려하면 마수들이 있을 법도 하지만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트롤이나 오우거와 같은 육상 몬스터들이었다.
하룬과 네 정령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여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물질계에 머무르면서 자연이 뿜어내는 다양한 향기와 풍광을 음미하는 네 정령은 매 순간 새로운 얼굴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가끔 사냥을 나온 트롤이나 오우거를 만나기도 했지만 높아진 자신의 경지를 시험하려는 네 정령 때문에, 하룬은 손하나 까닥할 필요가 없엇다.
나이아는 워터 볼이나 워터 밤을 사용하거나 그보다 더 위력이 강한 아이스 계열의 마법을 사용했고, 위신느는 윈드 커터나 윈드 스피어만으로 몬스터를 상대했다. 그러는 한편 하룬의 안전이나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워터 실드를 수시로 구사했다.
피닉스는 처음에 파이어 밤이나 파이어 필드를 주로 썻지만 얼마 후부터는 하룬의 조언을 받아들여 다른 식물을 상하게 하지않는 파이어 애로우를 주로 썼다. 피닉스의 파이어 애로우는 단순한 적의 몸에 박히는 데 그치지 않고 목표에 맞는 순간 폭발이 일어나게 하여 그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육상 몬스터들에게 라이피는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 라이피는 순간적으로 땅을 꺼지게 만들어 놈들을 지하로 끌어들인 다음 흙으로 놈들의 몸을 구속하고 소일 스피어를 활용해서 숨통을 끊었다.
그렇게 일주일여를 여행한 하룬 일행이 태고의 숲의 경계이자 후크란 산맥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는 네 정령이 자신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음식과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생생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인간인 하룬과 다른 점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 정령은 하룬이 잠을 청하는 시간에는 돌아가면서 경계를 하거나 순번이 아닌 이들은 하룬의 몸과 연결된 자신들의 아공간으로 가 있곤 했다.
하지만 나이아와 위신느는 피닉스나 라이피와는 달리 아공간으로 가는 법이 없었다. 그녀들은 한시라도 하룬과는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곁을 떠나기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의 곁에 있어야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것 같았다.
하룬은 여행을 하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네 정령에게 자신이 알고 경험한 한도에서 인간에 대한 것들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인간끼리 지켜야 할 규범들과 관습들은 물론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피해야 할 일들도 함께 말이다.
오늘도 일찌감치 야영을 할 장소에 도착한 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직 해도 지려면 한참이 남았지만 내일의 일정을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 몬스터 랜드가 멀리 보이는 고지였다. 내일은 몬스터 랜드와의 경계선까지 이동할 것이고 모레부터는 그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몬스터 랜드로 진입해야 하니 좀 쉬려는 것이다.
하룬과 네 정령은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여전히 인간의 관습이었다. 하룬은 그 와중에 며칠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이제 사람들과 어울려살게 되면 나랑 같이 자는 건 안돼! 그건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만이 하는 일이니까."
밤만 되면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나이아와 위신느는 하룬의 설명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동안 나이아와 위신느는 밤마다 하룬의 팔을 베게 삼아 누워 하룬의 온기를 공유해 왔던 것이다.
"히잉!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하룬이랑 같이 자고 싶다고."
"말했잖아. 연인이나 부부는 평생 병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고결한 약속을 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관계야. 너희들은 나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들이라고."
하룬의 말에 물어본 위신느나 나이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하룬을 사랑할 거야. 친구와 같은 가족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천성이 적극적이고 활기찬 위신느가 대번에 그런 소리를 했지만 하룬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항상 조용한 편인 나이아도 그 말은 인정하기 싫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들은 몸은 어른이지만 사실 이제 막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어. 사랑이란 것이 어떤 감정인지도 잘 모르잖아?"
하룬의 말에 나이아와 위신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룬의 말이 사실인 것이다. 이제 겨우 좋고 싫고 밉고 화나는 등 기본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단계인 것이다.
"더구나 난 너희들에게 친한 친구 내지는 여동생과 같은 정을 느끼고 있어. 그게 나중에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발전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래. 그러니까 조심할 건 조심하자."
하룬은 나이아와 위신느가 자신과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싫지 않았다. 본래가 정령인 나이아와 위신느의 인간체는 그야말로 여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잠시라도 마음을 풀면 어느새 그녀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방황 끝에 아리에게 온전한 마음을 준 터라 더 이상은 용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행동을 방치하면 나중에 더 힘들 것 같았다. 자신도 남자인지라 아릅답고 사랑스러운 나이아와 위신느를 거부하기 힘드니 말이다.
아무튼 한 번 주의를 준 하룬은 무거운 것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을 산책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현재 머물고 있는 고지에서는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할 정도의 거리의 초원지대였다.
몬스터 랜드라고 불리는 그 초원지대에는 수많은 동식물은 물론 숫자와 종류를 알 수 없는 몬스터들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인 혼돈의 땅이 자리 하고 있다.
순수석이 존재하는 곳. 세상이 탄생할 당시 환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 그 어느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하는 곳.
몬스터 랜드와 그 끝에 바라보는 하룬의 눈빛이 강해졌다.
'순수석은 반드시 내가 먼저 발견해야 해!'
지금도 엄청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암류가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수석의 확보가 필요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저들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당장 세상이 끝장이 날것이다.
무엇보다도 상인 연합이 의뢰한 고스트 건의 경우 남은 대원들이 제대로 수행중이라,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이곳으로 향한 것이다.
"엇!"
하룬의 귀에 라이피의 경호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라이피는 비록 인간체로 현신하고 있찌만 지속적으로 대지와 동조를 유지하고 있어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다. 작은 변화만 감지해도 흥분하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일상적인 기척과 수상한 기척을 분간할 수 있게 된 라이피는 누구보다 훌륭한 정찰 대원이었다.
"오크로 추정되는 생명체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어. 우리와는 거리는 300보 정도 떨어져 있어."
"숫자는?"
"열 아니, 백 아니야, 그보다 훨씬 많아. 그런데 발걸음이 빠르고 무질서한 것을 보니 도망을 치는 것 같아."
하룬은 라이피의 말에 눈매를 좁혔다. 그동안 이동을 하면서 오크들을 보긴 했지만 수백에 이르는 대규모 무리는 본적이 없었다.
태고의 숲 내부는 최상위 몬스터인 트롤과 오우거들이 소수 서식하기 때문에 하위 몬스터들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설마 우리의 존재를 감지한 몬스터들일까?"
"우리를 목표로 오는 것일지 모르니까 모두 전투준비 해!"
하룬의 말에 네 정령은 방어구와 무기를 점검하는 등 싸울 준비를 했다.
네 정령은 주로 정령 마법을 쓰기는 하지만 이제 인간체를 가지게 된 만큼 정령력이 소모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하룬의 조언을 받아들여 검술이나 궁술도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룬 일행의 긴장은 재차 정찰 결과를 말해주는 라이피로 인해 금방 풀리고 말았다.
"아, 알았어. 우리가 목표가 아니야. 쫓기는 쪽은 오크고 쫓는 놈들은 거대한 오우거들이야."
그럼 걱정할 것이 없다. 몬스터들 간의 다툼이다. 다툼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냥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놈들이 이쪽으로 향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개입을 할 필요도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이곳 태고의 숲을 포함한 후크란 산맥은 약육강식의 공식이 생생하게 적용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룬 일행은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지만 호기심이 강한 위신느의 눈빛이 반짝였다.
"가서 구경하고 싶어, 하룬. 같이 가자!"
"응? 구경? 왜 구경하고 싶은데?"
"재미있을 거 같아. 몬스터들은 어떻게 싸우는지도 궁금하고 지금 당장 할 일도 없잖아."
호기심에 가득한 위신느의 눈빛을 보던 하룬은 내심 그녀가 가장 빨리 인간화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못지않은 아인종들도 있지만 인간은 유독 호기심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룬은 전형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감정의 폭이 워낙 좁았던 것이다.
"나도 궁금해. 같이 가요, 하룬."
곁에 있던 나이아도 그렇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피닉스와 라이피도 이제야 관심을 보인다. 트롤이나 오우거를 상대해 봤지만 몬스터들끼리 싸우는 것은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나무 위로 이동하자."
구경을 할 거라면 굳이 지면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대지의 정령인 라이피도 허공이 아니라 대지의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를 매개로 하여, 땅만큼은 아니지만 대지의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룬 일행은 키가 10미터에 육박하는 나무꼭대기로 올라가 몬스터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빠르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방해물이 많은 지상과 달리 나뭇기지의 탄력을 이용하면 지상보다 오히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나무 꼭대기로 이동한 덕분에 하룬 일행은 빠르게 고지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꽈지직! 꽈앙! 우지근!
끄아악! 꽤애액!
하룬 일행은 거대한 나무들이 부러지며 다른 나무들과 부딪혀 소음과 끔찍한 비명이 가득한 곳이 눈에 들어오는 곳까지 접근했다.
"자, 자이언트 오우거?"
왠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하룬의 눈이 커졌다. 눈에 들어온 오우거의 덩치가 상상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굵기와 키가 8미터는 족히 되는 나무들과 거의 비슷한 덩치를 가진 오우거 다섯 마리가 거무튀튀한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4~5미터의 키를 가진 일반적인 오우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놈들이 바로 자이언트 오우거로 적어도 1,000년 안쪽으로는 목격한 이가 없는 거대 몬스터가 출현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건?'
직경 1미터가 넘을 것 같은 엄청난 몽둥이를 휘두르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라이피의 말대로 오크는 아니었다. 일반인들이 오크로 오인하고 있는 럼프족 전사들이었다.
자이언트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의 재질이 뭔지는 몰라도 풀 스윙을 하면 거대한 나무들이비명을 지르며 부러졌다.
'어! 쫓기던 게 아니었나?'
럼프족 전사들은 일방적으로 쫓기는 것이 아니었다.
'싸우기 좋은 위치로 유인한 건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나무 때문에 잘 파악하기 힘들지만 럼프족 전사들이 서 있는 곳은 구릉이었고 자이언트 오우거는 그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한마리씩 불리된 것을 보면 하룬의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럼프족 전사들은 표범을 연사케 만드는 민첩하고 빠른 움직임과 자이언트 오우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렬한 투기로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럼프족 전사들의 검과 도는 주로 자이언트 오우거의 발목을 포함한 하체로 고정이 되어 있었다. 전사들은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놈들의 하체를 공격했다. 이미 오우거들의 하체는 피범벅이 되어 잇었다. 하지만 트롤만큼은 아니어도 오우거 역시 강력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잇는 놈들이라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잇었다.
거대한 몽둥이는 직접 럼프족 전사들을 노리기보다는 시야를 방해하는 나무들을 부러뜨리고 있었다.
빠각! 우지끈!
기민하게 움직이는 럼프족 전사들이었지만 놈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으로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지막지한 타격에 쓰러지는 나무들도 강력한 위험 요인이었던 것이다.
"아악!"
"내 다리! 으윽!"
넘어진 나무에 깔리거나 그 때문에 오우거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럼프족 전사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럼프족 전사들이 하나 용맹하게 싸우던 럼프족 전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섯 마리의 오우거 주번에는 반경 수십 미터의 공터가 만들어졌다. 부러지고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공터의 끝 쪽에는 럼프족 전사들이 서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힘을 내라! 놈들은 우리 캠프의 위치를 알고 있어. 놈들을 놓치면 더 많은 전사들이 죽게 된다."
10명의 전사들이 사기를 올리며 자이언트 오우거를 공격했다. 그들은 바람처럼 표홀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몽둥이의 궤적을 피해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호오, 특이하네.'
그들의 검과 도는 특이하게도 빛나는 검은색 오러 광을 발하고 있었고 그 궤적에 들어오는 거대한 목표에는 제법 큰 상처들이 나기 시작했다.
"끼요요오!"
"죽어랏!"
10명의 전사들이 자이언트 오우거에게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히자 사기가 오른 나머지 전사들이 일제히 놈들을 공격했다.
끄아아아아!
푸우우웅! 휘이이잉!
그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놈들이 휘두르는 거대한 몽둥이는 강력한 바람과 함께 사방에서 쇄도하는 럼프족 전사들을 노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익스퍼트 급에 이른 기사들의 그것처럼 빠르고 민활했기에 자이언트 오우거도 쉽사리 그들을 상대하지 못했다.
"호옷!"
자이언트 오우거를 상대로 성공적인 공격을 하고 있는 전사들을 보던 하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까만 색깔의 오러가 존재했던가?'
놀랍게도 럼프족 전사들은 공격할때 검은색 오러를 무기에 씌었던 것이다.
검은색 오러는 처음에 흑마법사나 흑기사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럼프족 전사들의 오러는 다른 점이 많았다. 흑기사의 오러는 칙칙하고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데 반해 럼프족 전사들의 오러는 색상이 밝을 뿐 아니라 청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놀랍군. 문신의 힘을 쓰는 산악 부족과는 달리 이들은 일반 전사들까지 오러를 쓰고 있어.'
하룬은 럼프족 전사들이 오러를 사용하는 장면에 크게 감탄했다. 익스퍼트 기사들처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오러를 쓰기에 더욱 혀율적이었다.
'호오! 엄청난 실력이군'
하룬의 시선은 혼자서 자이언트 오우거 한 마리를 상대하고 있는 럼프족 전사에게 고정되었다.
그 전사는 투구가 날아간 모습이어서 머리의 뿔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뿔을 본 하룬은 왠지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전사는 대검에 검은 오러를 주입한 상태로 새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자이언트 오우거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도약력이 얼마나 좋은지 키가 8미터에 달하는 놈의 머리를 비록한 상체까지 공격하고 있었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지 못한 상태지만 몸놀림이나 검술의 위력을 보면 딜런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다.
'저 친구는 한동안 괜찮겠군.'
눈을 돌려 다른 곳으로 살펴보던 하룬의 표정이 어느 순간부터 굳기 시작했다.
하룬은 럼프족 전사들이 지금 당장은 우세해 보이지만 큰 위험에 직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이언트 오우거들의 광란에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지는 바람에 겨우 격리시켰던 놈들이 공터를 통해 연결되었다. 마치 다섯 장의 꽃잎이 벌어진 것처럼 공터는 서로 연결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로 인해 럼프족 전사들이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 되어 버렸다. 직경이 1~3미터에 이르는 거목들이 쓰러져 있었기에 럼프족 전사들의 임작에서는 이동을 하거나 공격을 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장애물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럼프족 전사들은 처음과는 달리 민첩한 몸놀림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언트 오우거들은 꽤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 네 마리가 네 방향을 맡아 럼프족 전사들을 상대하는 사이 한마리는 거추장스러운 나무들을 밀거나 부러뜨려 공터를 넓히고 있었다.
결국 럼프족 전사들이 자이언트 오우거를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공세를 늦추었다.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도망을 쳐야 할지 아니면 장애물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끝을 볼지 고민하는 사이 자이언트 오우거들은 끔찍한 짓을 하고 있었다.
가공할 힘으로 럼프족 사체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한곳에 모은 다음 그 큰 손을 이용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놈들은 럼프족 전사들이 쓰던 무기까지 모아 한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철기의 쓰임새를 아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크기가 작고 가슴이 튀어나와 암컷으로 추정되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옆에는 직경 3미터가 넘는 고깃덩어리들이 몇개나 있어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엇다.
놈은 추격을 하면서도 저것을 챙겨 온 모양이다.
"다들 놈들을 공격해라!"
검에 검은색 오러를 덧씌운 전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렸다. 그들은 거대한 나무들을 징검다리 삼아 빠르게 자이언트 오우거들을 향해 쇄도했다.
나머지 전사들도 선봉을 따라 용감하게 오우거들을 향해 달려갔다.
한눈에도 상대가 되지 않는데 무모하게 공격을 결행하는 것을 보면 이곳을 벗어나선 안 되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끄아아아!
몽둥이를 높이 치든 오우거들이 일제히 피어를 지르며 억센 팔을 휘둘렀다.
"저런!"
하룬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최상위 몬스터 답게 놈들의 피어가 럼프족 전사들의 몸을 굳게 만들었던 것이다.
휘이이익.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쿠아앙! 빠악!
"끄악!"
가장 앞서 공격을 하던 럼프족 전사 하나가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몽둥이를 피하지 못하고 받아 치다가 곤죽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파악!
시커먼 몽둥이에 얼마나 강한 힘이 들어있는지 럼프족 전사의 대검은 박살이 났고 몸은 터져 버려 사방으로 육편이 날아갔다.
구경만 하려던 하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럼프족은 예전에 오크로 오인하고 가죽까지 벗겼던 적이 있었다. 오크의 일종이 아니라 이종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 럼프족 전사들이 곤죽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럼프족 전사가 떨어뜨렸을 것이 분명한 검 하나를 발견하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손에 익어 정이 들었던 박살은 다크 프린스와의 싸움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이제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기에 아무거나 쓸 생각이었다.
다시 그 자리로 올라온 하룬은 그 짧은 사이에 10명도 넘는 전사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을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저놈들을 공격해!"
하룬은 정령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의 탄력까지 이용한 하룬의 몸은 새처럼 날아 사체들을 수거 하고 있는 오우거를향해 쏘아져 갔다.
우룩……!
몸을 굽히고 사체를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던 자이언트 오우거는 민감한 오감을 가진 듯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하룬을 보고 경호성을 지르려고 했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솟아난 터라 길이가 거의 3미터에 달하는 빛나는 검을 쥔 하룬은 놈의 둔머리를 노렸다가 놈이 상체를 일으키자 목표를 바꾸어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푸욱!
'뭐가 이렇게 빨라. 이런!'
하룬은 급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이언트 오우거의 놀라운 움직임에 목표물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두번째로 노렸던 심장부위도 찌르지 못했다. 놈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복부 한가운데를 찌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몬스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위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복부에 검이 찔린 자이언트 오우거는 광기가 터진 듯 사나운 눈길로 하룬을 노려보며 기만하게 손을 뻗어 옆구리에 차고 있떤 검은 몽둥이 손잡이를 쥐었다.
하룬은 검이 자이언트 오우거의 몸에 박히는 순간 목표를 놓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지만 힘을 거두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본래 검신의 반 정도만 남기고 깊숙이 박힌 검에 힘을 가해 아래쪽으로 향하게 했다. 놈의 허벅지까지 베어 버릴 참이었다.
싸악! 끄륵!
잘못 생각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몸 안에서 소멸되고 만 것이다.
'어떻게?'
하룬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혹스러운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따. 놈의 가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손바닥 길이만큼 가른후에는 거친 저항을 만나 멈추고 말았다.
'근육을?'
가죽이 문제가 아니다. 분명 근육을 수축시켜 검의 진로를 방해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아니지만 오러가 깃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근육의 수축으로 배 속을 헤집으려는 검의 진로를 막아 버렸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검을 쥐고 있는 하룬의 머리를 향해 시꺼먼 몽둥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타앗!
하룬은 할 수 없이 검을 놓으며 그 순간 그네를 타듯 놈의 허벅지 사이로 날아갔다.
휘이잉! 꽈아앙!
착지하는 순간 메신저 점핑 스킬을 펄쳐 근처에 있는 부러진 나무 위로 날아오른 하룬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벌써 놈의 몽둥이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것이다.
아공간에서 무기를 빼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제길!'
시간이 없는 관계로 하룬은 할 수 없이 비수를 꺼냈다.
끄아아아아아아!
분노한 오우거의 포효는 심혼을 옥죄어 왔다. 몸의 변화를 알아차린 하룬은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어떤 식으로든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덩치만 큰 몬스터가 아니라 마나까지 익숙하게 사용한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다.
잠시 눈을 주변으로 돌린 하룬은 둘이 한 놈씩을 맡아 싸우고 있는 네 정령들의 낭패한 꼴을 볼 수 있었다.
피닉스가 펼친 파이어 밤에 몇번이나 직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는 걸치고 있던 거대한 가죽 치마와 몸 일부에 난 터럭만이 시커멓게 타 버렸을 뿐 말짱한 모습이었다.
위신느가 던진 거대한 윈드 커터는 상대의 몽둥이에 맞아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나이아의 아이스 랜스 역시 그 상대가 휘두른 몽둥이에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고 보니 놈들의 몽둥이에는 희미하게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선방을 하고 있는 것은 라이피였다. 피닉스와 짝을 이루었던 라이피는 순간적으로 상대가 내딛는 바닥을 무너뜨려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구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피가 무너뜨려 만든 구덩이의 깊이는 놈의 가슴 어름에 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놈은 양손을 뻗어 땅을 짚고 구덩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룬은 자신이 상대하던 놈을 버려 두고 막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자이언트 오우거를 향해 어둠의 비수를 던졌다.
'놈의 정혈을 다 빨아들여라!'
다른 비수들은 다 부서지고 귀속아이템인 여섯 자루의 비수들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룬은 어둠의 비수를 던진 직후 복부에 검을 꽂은 채 자신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자이언트 오우거를 향해 블리츠 대거를 던졌다.
슈욱! 지지지직!
후아아앙!
자이언트 오우거는 시퍼런 뇌전을 흘리는 블리츠 대거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하룬 대신 비수를 향해 몽둥이의 궤적을 틀었다. 하지만 블리츠 대거는 하룬의 의념에 따라 궤도를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쿠오오우!
마치 작은 새처럼 몽둥이를 피해 날렵하게 날아오는 비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자이언트 오우거가 거대한 왼손을 들어 눈과 이마를 막았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근육을 수축시켰는지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거의 10미터에 육박하던 자이언트 오우거의 덩치가 순간적으로 20퍼센트가량 줄어들었다. 그러자 배에 꽂혀 있다가 조금씩 밀려 나오고 있던 검의 손잡이가 아래로 툭 떨어져 대롱거릴 정도로 놈의 살 밖으로 빠져나왔따.
하룬은 오우거가 몸 내부의 근육을 의도적으로 조절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놈의 근육을 생각하면 가죽의 질김이나 단단함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비수에 오러가 담겨 있긴 하지만 오러블레이드가 아니다.손등이나 팔뚝에 맞아 봐야 큰 상처를 줄 수 없다.
블리츠 대거가 놈의 팔뚝에 막 닿으려는 순간 마치 상류로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위로 솟아 올랐다. 그러곤 포물선을 그리며 놈의 뒤통수로 향했다.
'꽂혀라!'
블리츠 대거는 절삭력이 아니라 뇌전을 전하는 통로가 필요할 뿐이다. 어디든 박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푹!
'성공이다!'
블리츠 대거는 살점이 두툼한 오우거의 목덜미에 박혔다. 그곳은 근육이 아니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끝부분이 겨우 박힌 것에 불과하지만 하룬의 의도는 성공했다.
곧 하룬의 어퍼 오션과 블리츠 대거 사이에는 시퍼런 선이 나타났따.
지지지직! 지지지직!
츠즈즈즉! 츠르르르.
순식간에 자이언트 오우거의 몸이시퍼런 뇌전에 휩싸였다.
자이언트 오우거는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부르르 떨기만 했다. 거대한 몸이 시꺼멓게 타 버린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따. 어퍼 오션에 자리한 뇌전뿐 아니라 마나 오션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떤 뇌전의 마나까지 몽땅 흘러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따.
눈을 돌려 보니 어둠의 비수를 맞은 자이언트 오우거의 몸이 빠르게 말라 가고 있었다. 놈이비수의 손잡이를 잡고 어떻게든 빼려고 해 보지만 어둠의 비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따.
어둠의 비수와 블리츠 대거로 인해 전황은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럼프족 전사의 수장으로 짐작되는 이가 한마리를 맡았고 네 정령이 두마리를 맡자 다른 럼프족 전사들은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부상자들을 돌보는 한편 전장을 주시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 얻은 극강의 혼을 시험해 볼까?'
하룬은 휘황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석 비수를 나이아와 위신느가 상대하고 있는 자이언트 오우거에게 던졌다.
자이언트 오우거는 두 정령의 우터 볼과 윈드 커터 공격을 침착하게 받아 내는 와중에서도 놀라운 감각과 순발력으로 극강의 혼을 감지하고 서둘로 피했지만 비도지존의 유물은 하룬의 의념과 이어진 아이템이다.
휘리릭.
극강의 혼은 살아 있는 것처럼 자이언트 오우거의 손발 짓을 피해 두꺼운 가슴에 깊이 박혔다.
푸욱!
쿠아아아아앙!
극강의 혼이 박히자마자 자이언트 오우거는 미친 듯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럼프족 전사들이 혼비백산해서 비틀거릴 정도였다.
투욱! 투욱! 퍼억! 퍼억! 파앗!
극강의 혼이 박힌 자리를 기점으로 폭발과 함께 기괴한 소리가 들리더니 빠르게 그 폭발 범위가 확장되고 있었다. 자이언트 오우거는 몽둥이를 들지 않는 손을 뻗어 단검을 뽑아 내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상체 대부분이 폭발과 함께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후드득.
자이언트 오우거의 상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곧 놈의 거대한 머리통과 하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자이언트 오우거 두 마리와 럼프족 수장은 순간적으로 전투를 멈추고 하룬과 네 정령에게 홀린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가 곧 다시 전투를 재개했다.
'훅! 저게 극강의 혼이 가진 능력이야!'
하룬의 눈이 커지며 환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극강의 혼은 생각이상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을 파괴하는 것에 더해 대상을 폭발시켜 버리는 엄청난 옵션을 확인한 하룬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돌아와!
세 비수는 하룬의 의념에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가장 먼저 돌아온 극강의 혼은 이제 자기 자리를 아는 듯 암기 벨트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다음으로 돌아온 어둠의 비수는 그 조그만 몸속에 가득 채워 온 어둠의 마나를 하룬의 몸속으로 밀어 너헝ㅆ다. 얼마나 흡수를 한 건지 그 과정은 한동안 이어졌다.
블리츠 대거는 두 비수보다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온전히 하룬의 마나가 되어 버린 뇌전의 마나는 하룬의 의념에 반응해서 빠르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상당한 양이 지면과 대기를 방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낸 것의 7할은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이한 성질의 마나가 뇌전의 마나와 함께 흡수되고 있었다.
'이건!'
바로 어둠의 마나였다. 흑마법사들이나 마수들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나를 왜 자이언트 오우거가 가지고 있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어둠의 비수를 통하지 않고 어둠의 마나가 왜 자신의 몸으로 곧바로 흡수된단 말인가.
하룬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뇌전의 마나와 함께 들어오는 어둠의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기에 그 상황에서도 마나 플로의 경로를 통해 순환시켜서 마나 오션으로 보냈다.
위이잉!
갑자기 몸속에 진공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마나 오션으로 들어간 어둠의 마나가 기존에 있던 것들과 합해지는가 싶더니 빠르게 그 세력을 키웠다. 그러자 자연의 마나가 심하게 위축되더니 강력한 흡입력을 발생시켜 몸 안에 퍼져 있던 자연의 마나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균형을 위한 건가?'
그러고 보니 펠의 안식처에서 자연의 마나를 알게 모르게 많이 흡수했던 것이다. 조화를 위해 마나 오션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몸 안 곳곳에 퍼져 있떤 자연의 마나가 워낙 많았기에, 위협을 느낀 어둠의 마나가 동류의 마나를 흡수한 것 같았다.
태극 문양을 이루어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두 마나간의 차이가 발생하자 부족한 쪽에서 부족한 양만큼 끌어들이는 모양이다. 하룬은 마나가 마치 지성을 가진 존재처럼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기이하게 생각되었지만 알아서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양태에 안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깊이 침잠되어 있던 하룬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몸안에 집중하고 있던 의식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다.
'엄청나게 늘어났군'
하룬은 이번에 받아들인 어둠의 마나로 인해 마나 오션의 마나가 배는 더 늘어났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마나와 자연의 마나는 물론 뇌전의마나마저 평형 상태를 이루기위해 부족한 부분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다행히 그사이 치열했던 전투는 막을 내렸다.
네 정령이 힘을 합치자 자이언트 오우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버렸다.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릴일은 아니었지만 네 정령이 인간체로 처음 싸웠기 떄문에 어느 정도는 자신의 힘을 시험했던 것이다.
럼프족 수장이 상대하고 있던 다른 한 마리 역시 다른 럼프족 전사들이 가세하고 동료들이 죽어 버리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