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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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다음 날은 기대하던 청룡 영화제 시상식 날이었다.
어젯밤에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어쨌든 오늘은 공식적으로 윤 엔터의 배우들이 대부분 시상식에 참석해야 했다.
물론 특별히 초청작이 없는 수연은 집에서 쉬게 되었지만 말이다.
“요. 친구. 어젯밤은 평안했나?
밤새 아버지가 술잔을 기울이시던데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지?”
몸단장하는 동안 태준이 넌지시 물었지만 민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자신은 그냥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온 것이 다였으니까.
다만 윤 대표가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는 이야기에 민수도 조금은 짠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자신도 딸이 남자 친구를 데려오면 그런 마음이 드려나?
하지만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조금 극성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었다.
윤 대표가 확실히 유별나긴 하다.
“글쎄….
특별한 건 없었는데.”
민수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별일은 없었다고 대답하자 태준은 흐흐 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밉살맞아 보인 민수는 태준에게 자기 일만은 아니라고 충고했다.
“지금은 그렇게 웃고 있지만, 너도 겪어야 할 일 아냐?
원래 애인 집에 처음 찾아가면 대부분 그런 분위기 아닌가?”
“후후. 어림없는 말씀이지.
난 이미 수연이네 아버지랑 연락하는 사이라고.
이 말은 즉 진작에 허락을 맡은 상태란 거지.
난 자네처럼 그렇게 대책 없진 않거든.
미리미리 찾아뵙고 점수도 많이 따 놓았지.
장인어른이 낚시를 참 좋아하시더란 말이야.”
태준의 말에 민수는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럴 때 보면 상당히 용의주도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지금 그걸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잖아?
오늘도 기자들이 어지간히 들러붙을 걸?
설아가 폭탄 선언하는 바람에 자네에게 대상에 관하여 묻는 기자보다 열애설에 관하여 묻는 기자들이 더 많겠구만.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큭큭. 어쨌든 잘 해보시게.”
태준의 말이 맞았다.
민수도 어젯밤에 민 여사를 통해 열애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으니까.
그리고 그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것이니 기자들의 관심이 뜨거울 것이다.
정민수와 윤설아의 열애.
솔직히 겉으로 보기에는 민수 쪽으로 무게추가 조금 기우는 건 사실이었다.
설아의 됨됨이나 능력, 외모 이런 걸 다 떠나서 민수는 아시아에서 핫한 스타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아직 배우로서는 괜찮은 배우 정도로, 가수로서는 떠오르는 스타 정도로 인정받는 설아와는 인지도의 수준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도 있었다.
남자 배우의 연애와 여자 배우의 연애.
이 부분에서는 민수에게 특별한 손해가 없었다.
특히 민수의 국내 팬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애당초 제대로 된 로맨스 연기를 선보인 적이 없는 민수에게 열성적인 여성 팬들은 많지 않았으니까.
다만 문제가 된다면 해외의 여성 팬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요즘 관심이 뜨거운 배우인 것만은 사실.
취재 열기도 아마 평범하지만은 않으리라.
게다가 어젯밤에 올라온 “세라가 신곡에서 언급한 그 남자가 바로 정민수?” 라던지 “자작곡으로 로맨틱한 사랑 고백.” 따위의 기사들 때문에 더 그럴 것이고.
“하. 덕분에 대상에 대한 건 완전 잊어버렸어.
윤 배우 말대로 오늘은 좀 시달릴 수도 있겠는데.
어이없지만 새벽에 기사를 보니 가요제 소식보다 내 열애설 기사가 더 많더라고.
내가 인기가 많긴 하다는 건데.
이걸 참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도 반응은 봤는데 나쁘지 않던데?
남자들은 널 많이 응원하더라고.
사실 네가 젊은 여성들을 몰고 다니는 조 녀석 같은 배우는 아니니까.”
태준은 이렇게 말하며 저쪽에서 꽃단장 중인 은우를 가리켰다.
그리고 민수도 이 발언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 은우가 스캔들이 나면 자신이 나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도 확인했지만, 남자들의 그 반응을 응원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까.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처럼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하면 설아 같은 미인과 사귈 수 있는 거냐며 놀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대마법을 구사해 설아를 홀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심지어 자신이 “존버”해서 결국 “떡상”했다는 이해 못 할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이게 정말 응원 맞나?
민수도 이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나? 하지만 그걸 응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물론 진짜 진지하게 응원해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분명히 있긴 했는데….”
태준은 떨떠름해 보이는 민수의 반응에 킥킥대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 적어도 욕은 아니잖아?
연예인이 열애설 나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몰라서 그래?
하긴. 네 팬들의 성향이 그래서 그런지 재미있는 글이 많긴 하더라.
어쨌든 뭐 그 정도면 응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 한국 팬들은 그나마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일본인가?
일본은 분위기가 좀 다를 수 있으니까.
거기는 여성 팬들이 대부분이라…..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민수도 사실 일본 쪽의 반응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연애에 크게 실망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뚜렷한 움직임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시상식이었으니 말이다.
단장을 마친 배우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시상식장에 등장했다.
민수는 아예 대놓고 설아와 같이 입장했고 말이다.
덕분에 달려드는 기자들의 취재에 진땀을 빼야 했다.
그래도 대놓고 같이 움직인 데다가 대충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었더니 그렇게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에휴. 난리는 난리네요.
뭐 이것도 한철이겠지만요.”
자신의 지정석에 착석한 설아는 기자들의 폭풍 질문에 조금 질린 표정이었다.
물론 그건 민수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대상에 대한 질문보다 열애설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을 거라는 태준의 예상은 정확했다.
잠시 숨을 고른 민수는 이제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작년이나 재작년에야 자신의 테이블에 원로 배우가 있어서 이쪽으로 배우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이번에는 당연히 자신이 움직여서 인사를 다녀야 하리라.
아마 은우가 한 선배 배우와 같이 민수의 자리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분명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하. 민수 형님.
아까 욕보시던데요?
여기 이분은 누군지 아시죠?”
“그럼. 안녕하세요. 지성철 선배님이시죠?”
은우가 넉살 좋게 웃으며 한 남성 배우를 소개하자 민수도 마주 웃으며 남자에게 인사했다.
지금 눈앞에 지성철은 당연히 민수도 익히 알고 있는 선배 배우였다.
애초에 민수가 인사를 하러 가려고 했던 인물 중 한 명 이기도 했으니까.
이제 중년의 나이로 넘어가는 지성철은 인성이나 실력 모든 면에서 인정받는 배우였다.
이번에 민수나 태준과 함께 대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배우이기도 했고.
다만 은우와 함께 온 거라지만 선배가 자신의 테이블로 다가온 건 조금 의외였다.
원래 이런 작은 것에도 자존심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배우라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성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배우가 아닌 건 아니었고 자존심이 낮은 건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오. 날 알고 있었어요?
반갑네요. 민수 씨.”
“그럼요. 잘 알고 있었죠.
제가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요.”
성철은 민수가 웃으며 자신이 가서 인사를 하려고 했다는 말에 조금 기꺼운 듯 보였다.
“그랬군요.
민수 씨도 너무 꽁꽁 싸매고만 있지 말고 배우들이 나오는 모임이나 행사에도 나오고 하세요.
얼굴이나 익히게요.
연기도 사람이 하는 건데 서로 잘 알고 지내면 좋은 거잖아요.”
“네. 선배님.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좀 경황이 없어서요.
앞으로는 그러겠습니다.”
민수가 고분고분 웃으며 그러겠다고 하자 그럼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성철이 떠나갔다.
성철을 떠나보낸 민수는 이제 자신이 인사를 다니려고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과 태준이 인사를 하러 가기도 전에 자꾸 다른 배우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처음에 은우가 성철을 데려온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소희와 같이 연기했던 여배우 김지연, 그리고 리온과 같이 드라마를 찍었던 조명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사하러 갔던 은우는 태준보다도 선배인 박혜인 배우까지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민수는 이게 뭔가 싶어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도 이상하다는 듯 으쓱하며 뚜렷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으니 민수로서는 그저 찾아오는 배우들과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한편, 먼저 인사를 하러 갔다가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온 성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민수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예의 발랐기 때문이었다.
수틀리면 들이받는 스타일이라더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굳이 민수를 찾아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지금 민수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훨씬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저기 모여있는 배우들처럼 민수를 투자자 겸 배우로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었으니까.
다만 워낙 극단적인 신비주의라 다른 배우들과의 접점이 전혀 없는 민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몸소 움직인 것이었다.
특히 연예계의 마당발인 은우가 곁에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행동하기가 편했고 말이다.
역시 소문만으로는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하더니 직접 본 민수는 소문과는 조금 다른 사람같이 보였다.
뭐, 완전히 엉뚱한 말이 돌아다닐 리는 없으니 제작사와 한판 붙었다느니 기자들에게 대놓고 뭐라고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예의와 분별력은 충분해 보였으니까.
“정말 모임에 나오려나?
저런 녀석이 하나 있으면 재미있을 거 같긴 한데.
진짜 은우한테 부탁해서 데려오라고 해 볼까?
액션도 저렇게 잘하는데 축구도 잘하려나 모르겠네.”
성철은 자신의 축구 모임에 민수가 오면 재미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쉽게 그렇게 되기야 하겠냐 만은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진성이나 윤숙과 같이 있을 때야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거였지만 자신들끼리 있는데 다른 배우들이 이곳에 모이다니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글쎄. 그렇게 본다고 내가 뭐 아나?
나도 좀 신기하긴 한데?
내가 없는 2년 사이에 강호의 도의가 많이 변했나 보구려.”
민수는 시답잖은 말을 꺼내는 태준을 무시하고 다른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인사하러 갔다가 다른 배우들을 달고 왔으니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을까 싶어서였다.
“명준이야 형보다 후배잖아요? 올 만했죠.”
“아. 명준 씨는 그렇지?”
“지연 언니는 개인적으로 민수 선배님 팬이래요.
영화사에 엿 먹이는 장면이 그렇게 멋있었다나?
예전에 그쪽 영화사하고 뭔가가 있었나 봐요.”
“음….그래요? 그건 또…. 참….”
“성철이 형은 그냥 민수 형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해서 오신 거고요.
혜인 선배는 그 뭐냐? 미래의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나 어떻다나.
좀 웃기긴 하지만 뭐 그러시던데요.”
“끙… 그건 좀.”
“그건 재미있네. 미래의 투자자라.
우리 정 배우가 이제는 투자까지 해야 할 기세야.”
그 밖에 배우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이유는 다양했다.
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들을 대충 종합해 보면 이 사태의 원인은 윤 엔터 배우들이 잘나가고 있다는 것과 이 배우들을 시상식이 아니면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거였다.
특히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민수는 더욱 그랬다.
“결국 안면을 트고 싶다는 거네. 배우들이.
하긴 지금까지 너무 집에서만 지내긴 했지.
흠….”
“사실 좀 그렇지?
나도 별로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넌 좀 심하잖아?”
“그래요.
나중에 제가 나갈 때 같이 좀 가죠.
제가 좋은 분들이 계신 곳으로만 잘 안내할 테니까요.”
인맥도 힘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잘나가는 배우가 무조건 왕이라는 이곳이지만 그래도 인맥의 힘을 무시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야 대부분 소속사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와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당발인 은우가 같이 다녀 준다면 그 효과가 탁월하긴 할 것이다.
“그렇긴 하네.
앞으로는 좀 다니기도 해야겠어.
그럼 역시 그런 건 은우한테 부탁하면 되는 건가?
나중에 모임 나갈 때 나도 같이 가자고.”
은우는 민수가 부탁하자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도 은근히 선배들에게 민수나 태준과 친분을 다지고 싶다는 압박을 받는 것이 좀 지겹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배우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시간이 지나 시상식이 그 화려한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