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33)

해결사 (2)

“애가 그 꼴을 하고 나가는 데 승규, 그 새끼는 도대체 뭘 한 거야!!!”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윤정 씨가 막무가내일 때는 아무도 못 말리는 거.”

“꽁꽁 묶어서라도 말렸어야지! 아니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도 말렸어야지! 무조건 말렸어야지! 구십억이 뉘 집 개 이름이야? 회사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짧아진 머리카락을 제대로 감추지도 않고 외출했다가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혔다. 이미 냄새를 맡고 집 주위에 진을 치고 있던 그들이었다.

다행히 자세한 기사가 나가는 것은 막았지만, 사진 유출까지는 막지 못했고 이제 한윤정이 쇼트커트를 했다는 사실은 전 국민이 아는 뉴스가 되었다.

“하- 미치겠네.”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확인한 이동주 대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몰래 사귀고 있던 남자 동료 배우 이름과 한윤정이 쇼트커트를 한 이유에 관한 추측들이 리스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똥오줌 못 가린다고 해도 그 꼴로 그 새끼 집에 가면 어떡하냐. 편의점도 아니고. 아- 진짜. 아, 근데 도대체 모자는 왜 안 쓴 거야? 마스크는 썼으면서.”

“머리를 잘라서 몰라볼 줄 알았대요.”

이동주는 눈을 감았다. 법무법인 해결에서 분명 헤어스타일 바뀐 것을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서지우 변호사의 능력밖에 없었다.

“서 변호사는? 아직 싱가포르래?”

“연락 없는 거 보니까 아직 싱가포르에서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닐까요?”

“해결에 전화해 봐. 언제 도착하시냐고 묻고, 진짜 급하다고 돌아오시면 바로 미팅 좀 하자고 해.”

“예.”

---*---

“변호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변호사님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텐데 변호사님 덕분에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변호사님, 이따가 저녁에 오리온 펀드 측하고 식사하는 자리에 오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서울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바로요?”

“네.”

“아, 이거 아쉬워서 어떡하죠? 오리온 펀드 측에서 더 아쉬워할 것 같은데. 저희야 들어가서 한잔하면 되는데, 오리온 펀드 대표가 서 변호사님을 너무 좋아해서···.”

“로렌스에게는 좀 전에 참석 못 할 것 같다고 잘 말해두었습니다.”

“아, 그래도, 솔직히 이번 투자 딜은 변호사님이 다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저희는 한 게 없어서···. 오늘 밤에 카지노도 가고 제대로 대접하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오리온 펀드도 언리얼 VFX 팀의 역량을 보고 투자하는 겁니다. 저는 합당한 보수를 받고 중간자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아, 역시 깔끔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쁘신 일 있으신 거 같으니까, 더 붙잡지 않을게요. 대신 서울에 돌아가서는 꼭 시간을 내주십시오. 저희가 한잔 제대로 사겠습니다.”

100억짜리 투자 딜을 마무리한 서지우는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창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한윤정과 로네나 사이에 체결된 모델 계약서의 빈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한윤정 쇼트커트 사진이 인터넷에 뜨는 바람에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지금 비행기 타면 내일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거야. 바로 케이 엔터 사무실로 갈 거니까. 윤 변도 내일 아홉 시까지 참석해.”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케이 엔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언제 오시느냐고 궁금해했습니다.

“방금 이동주 대표한테 미팅 요청하는 메일 보냈어. 혹시 모르니까 전화로 한 번 더 확인해주고.”

-네. 아, 그리고 로레나 측에서 사실확인 이메일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벌써?”

-네.

아무리 30억짜리 제품 광고 모델의 헤어스타일 변호가 중요하다고 해도 대응이 빠르다. 마치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빠르네. 로펌이 어디야?”

-홍콩 클리포드 샌즈입니다.

로레나답게 영국계 대형 로펌이다.

“알았어. 로레나 측에서 왔다는 사실확인 이메일 나한테도 보내주고, 윤 변호사는 나랑 8시쯤에 먼저 좀 만나. 상황이 바뀌어서 다른 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고.”

딸깍.

전화를 끊은 서지우는 곧바로 로레나 측에서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제목만 ‘사실확인’일 뿐, 내용에서는 이미 계약 해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

---*---

“뭐라고? 계약서에 허점이 있다고?”

홍콩섬, 자르뎅 하우스 31F.

전 세계 10대 로펌 중 하나인 영국계 클리포드 샌즈의 사무실을 찾은 로레나의 사내 변호사 에드워드 리는 파트너 변호사 해리 에반스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허점이 있다니?”

“허점이 있어.”

“해리, 똑바로 말해. 너희 로펌에서 초안을 잡은 계약서야. 그런데 허점이 있다고?”

“에디, 흥분하지 말고 들어. 영국법상 모델이 고의로 자른 게 아닌 경우까지 포함해서 위약금을 요구할 수 없어. 모델의 잘못이 아닌 제삼자의 잘못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짧아진 경우에는 손해를 청구할 수 없다는 말이야.”

애초에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작성된 부분이었다.

영국법상 관련 없는 제삼자의 원인으로 인해 잘린 머리카락에 대한 손해를 청구할 수 없었기에, 계약서상의 문구는 얼핏 그러한 경우에도 위약금을 청구할 수 있을 것처럼 해석되도록 교묘하게 작성되었을 뿐, 사실상은 청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작성한 거야. 기억 안 나? 실제로 청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국법을 잘 모르거나 실력이 변변치 않은 변호사가 상대편에 붙는다면 위약금 조항에 상당한 압박을 느끼도록 초안을 잡은 거라고 그때 설명했잖아.”

해리의 부연에 에드워드는 그제야 전에 비슷한 설명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아, 그때 말했던 게 이거야?”

“응.”

“잠깐 그러면 한윤정이 쇼트커트를 한 이유를 모르면 위약금을 청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계약 파기는?”

“계약을 해지할 수는 있어. 34조 1항에 따라 원인에 상관없이 모델의 헤어스타일이 합의한 기준에서 사전 합의 없이 변경되었을 경우, 로레나는 계약해지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다만, 위약금을 청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그렇지.”

“남은 계약금 지급 의무는?”

“그건 계속 유효하고.”

그렇게 되면 사장이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만약 한윤정이 고의로 머리카락을 자른 거라면?”

“그걸 증명할 수만 있다면 구백만 달러 위약금을 전액 청구할 수 있지.”

에드워드 리는 상황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고 해리 에반스의 의견을 구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모델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의미는 제삼자의 원인에 의해 잘린 머리카락이 아닌 확률이 높아.”

“동감이야.”

“증명하는 게 문제인데···.”

해리 에반스는 자신의 책상에서 미리 준비해둔 프린트물을 꺼내 에드워드 리에게 건네 후 멈췄던 말을 계속했다.

“우리 한국 사무실에 있는 변호사에게 알아본 거야.”

프린트물에는 한윤정, 동료 남자 배우 그리고 여자 후배에 관한 소문과 한윤정이 갑자기 쇼트커트를 한 이유에 대한 추측성 글들이 담겨 있었다.

“이것들이 사실일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 로레나 측에서 이걸 공식적으로 확인하겠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배우 생명에 타격이 있을 거기 때문에, 이걸 언급하면 저쪽에서도 웬만하면 합의하자고 나올 거야. 조사해보니까, 한윤정이라는 배우가 일 년에 광고로 벌어들인 돈이 지난 3년간 연평균 천팔백만 달러 정도 되더라고. 드라마랑 영화 출연료를 포함하면 더 되겠지. 설마 당장 구백만 달러를 아끼겠다고 직업을 날리지는 않겠지.”

에드워드 리의 질문에 해리 에반스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에드워드는 해리의 계획을 눈치챘다. 스캔들을 공론화시키겠다는 협박성 협상카드로 위약금을 청구할 계획이다.

“그렇지. 그런 우매한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 흐흐. 그래서, 그러면 먼저 뭘 해야 하지?”

“일단 로레나가 현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할 겸, 클리포드 샌즈에서 정식으로 상황에 대한 해명을 구하는 이메일을 하나 보낼게.”

“오케이. 그러는 게 좋겠네. 그다음에는?”

“아마도 모델이 고의로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 아니라는 식의 변명성 답변일 올 거야.”

“그러면?”

“그게 로레나한테는 협상카드가 되는 거지.”

“협상카드?”

“응. 그 이메일을 받고 로레나는 모델이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가 개인적 신상에 얽힌 것이라 들었다는 답변을 하면서 35조 2항에 따라 계약을 해제하고 위약금을 청구하는 거야.”

“흠. 좋은데. 만약 진짜 고의로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 아니라면? 그랬다가는 역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거 아니야.”

“에디, 너도 알다시피 그럴 확률은 무지 낮아. 설사 진짜 그렇다고 해도, 내 생각에 모델 측에서 절대 소송까지 안 갈 거야.”

그랬다가는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보다 한윤정이 소문의 삼각관계에 얽혀있었냐는 사실관계 확인에 포커스가 맞춰지게 될 것이고, 그때는 정말 이제 갓 서른 넘은 여배우의 연예 생명에 큰 타격이 있게 된다.

“하긴 그렇겠네.”

“그리고 만약 저쪽에서 믿을법한 증거를 내면, 그때 가서 합의하자고 하면 돼. 기존에 준 계약금하고 올해 모델료 백오십만 불만 돌려받을 수만 있어도 괜찮다는 것이 로레나 입장 아니었어?”

“맞아.”

“그렇다면 처음에 좀 세게 나가는 게 협상에 좋을 거야.”

“오케이. 그러면 클리포드 샌즈에서 케이 엔터테인먼트 측에 이메일을 보내라고.”

엔터테인먼트 쪽에 경험이 많은 해리 에반스였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표정에 로레나의 사내 변호사 에드워드 리는 만족스러웠다.

잘하면 이번 일로 회사에서 포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서울, 케이 엔터테인먼트.

클리포드 샌즈로부터 받은 이메일을 두고 대표실에 침묵이 흘렀다. 법적인 부분을 잘 모른다고 해도 로펌을 통해 서신을 보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이동주 대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조카가 머리에 껌을 붙여서 그랬다고 하면 안 될까요?”

한윤정 담당 매니저인 김승규 실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가,

“윤정이가 조카가 어디 있어? 외동딸인데.”

“아, 맞다. 그렇지. 음- 그럼 케이크 촛불에 태워 먹었다는 설정은 어떨까요? 많이들 그렇게 태워 먹잖아요.”

“누가?”

“제 동생도 지난달에 자기 생일 케이크에···.”

“그건 네 집식구나 그러는 거고.”

“아닌데, 그런 실수 많이 하는데. 그렇지 않나요, 변호사님?”

“야, 입 다물어. 넌 그냥 조용히 듣고 있다가 윤정이한테 가서 설명이나 잘해. 누가 못 막아서 이 사달이 난 건데?”

“아, 제가 자른 것도 아닌데 대표님은 왜 저한테 화풀이를···쩝.”

괜스레 면박만 당한다. 이동주 대표는 솔직히 김승규를 이 미팅에 참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윤정을 24시간 감시해야 하는 그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렀다.

“서 변호사, 어쩌지?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해? 진짜 머리라도 붙이고 아니라고 싹 잡아뗄까?”

“아니요. 그랬다가 괜히 일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건 너무 하수지?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까···. 클리포드 샌즈면 진짜 큰 로펌 아니야?”

서지우는 클리포드 샌즈의 해리 에반스 변호사가 보낸 이메일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다. 정중하면서도 압박이 느껴지는 짧은 글. 아주 신중하게 고른 단어들이다. 로레나 사(社)의 의도와 다음 수가 느껴진다.

저쪽에서는 이미 한윤정이 자발적으로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그 이유가 실연이라는 것을 99% 확신하고 있다.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 수가 없을까? 위약금 지급만 피할 수 있으면 계약금 정도는 돌려줄 의향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제 남은 수는 그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로레나 측에서 한윤정 씨가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를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네요.”

“하아— 젠장.”

“그렇다면 우리도 강하게 나가죠.”

“강하게? 어떻게···?”

“클리포드 샌즈에 답변 이메일은 저희 쪽에서 보내겠습니다. 대표님은 기사를 내보내 주세요. 한윤정 씨가 삼십 억짜리 계약을 포기하고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필승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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