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각성
압구정 로데오거리 끝자락,
통유리창을 너머로 도산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들어진 3층 건물이 바로 법무법인 해결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소속 변호사가 고작 세 명밖에 없는 초소형 로펌이 사용하기에는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국내 최고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전문 부티크 로펌’이라는 타이틀에는 걸맞은 사무실이다.
“변호사님, 케이 엔터에서 성공보수 20억 들어왔습니다.”
“알았어.”
이전에는 고급 브런치 카페가 입주했던 빌딩이었다. 2년 전, 법무법인 해결이 들어오면서 기존 인테리어를 많이 활용하여 공간이 휑하게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바리스타만 없을 뿐 실제 카페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휴게실 안으로 비서가 들어와 짧게 보고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케이 엔터 일 벌써 합의됐나요? 까다로울 것 같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대표 변호사님하고 일하면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참 신기하다. 분명 까다로운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결되고 나면 간단한 분쟁이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치열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클리포드 샌즈 같은 명망 있는 국제 로펌의 파트너가 있지도 않은 조항을 언급하며 계약을 해지하려 하다니···.
누가 들으면 해당 변호사가 약을 먹었다고 하거나 아니면 이야기에 MSG를 너무 많이 쳤다고 할 법한 사례이다.
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
후배 최신일 변호사의 질문에 윤정도 변호사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응, 그렇게 됐어.”
“잘됐네요. 근데, 케이 엔터 이동주 대표는 거칠다는 소문도 많이 들리던데, 로펌 보수 지급은 깔끔하네요.”
“서 변호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아시는 거지.”
“아-.”
간략한 설명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법무법인 해결에 조인한 지 이제 고작 1년 조금 넘은 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1년간 서지우 대표 변호사 곁에서 일을 배우며 느꼈던 것들이 있다.
최신일은 선배 변호사의 답변에 짧은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정말 그만두는 거야?”
“네···.”
“어디로 간다고?”
“뉴욕이요.”
“흠, 좋은 일이기는 한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잘···모르겠어요. 근데,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선배님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혜경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독특한 놈들을 뽑아서 그러는 걸까?
해결의 막내 변호사 자리에 들어오는 변호사들은 늘 오래가지 못했다.
국내법상 법무법인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려면 최소 세 명의 지분 파트너 변호사가 필요하므로 입사와 동시에 지분을 얻게 되고,
연봉과 성과급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강보다도 높았으며,
베네핏 역시 IT 대기업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물론, 그에 합당하는 업무 강도를 요구했지만, 신입들이 사직서를 내는 이유는 늘 다른 데 있었다.
「사실 만화가가 저의 진짜 꿈이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려고요.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혹시 비트코인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정확한 액수를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이번에 제법 큰 수익을 냈거든요.」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변호사님 혹시 사주 애플리케이션 써보신 적 있나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제 법률 자문 서비스도 어렵게 변호사를 찾아가지 않고 쉽게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겁니다.」
지난 5년간, 세 명이 그만두었고 이제 네 번째가 나간다.
이번 막내의 이유는 여자였다.
여자친구가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입학하게 되자, 여자친구 집안에서 최신일에게 결혼하고 함께 뉴욕에 가서 공부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할 이유가 있나. 최 변 인생인데. 우리야 좀 더 같이 일하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가기 전에 진하게 한잔하자고.”
“네.”
최신일의 퇴사에 관한 대화가 끝나고 휴게실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단지,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 쉼표 같은 것이었다.
“근데요, 변호사님.”
“어.”
“서 변호사님이 세 번 결혼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많이 알려진 사실도 아니었다.
“지난주에 김앤강에 들어간 동기랑 술을 마셨는데, 거기 파트너 변호사한테 들었다고···.”
“맞아. 결혼하셨었어.”
설마 했는데, 진짜라는 대답에 후배 변호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누가 봐도 미혼인 것 같은 대표 변호사가 결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횟수에 더 당황스러웠다.
물론 돈 많고 잘생긴 서른여섯 살의 로펌 대표 변호사가 일찍 결혼했을 수는 있다. 아무리 완벽한 남자라도 피 끓는 어린 시절 호르몬에 지배되어 우매한 선택 한 번 쯤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오히려 그런 거라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세 번이라니······.
세 번···.
그 냉철한 서지우 변호사님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이혼하셨다니, 믿기 어려웠다.
“아······.”
“왜? 놀랐어?”
“네.”
“세 번 결혼하셨어. 그리고 세 번 이혼하셨고.”
“어쩌다가···.”
“남녀 사이의 일을 어떻게 알아.”
“그렇기는 한데···.”
“어떻게 저렇게 냉철하신 분이 결혼이라는 걸 세 번씩이나 하고 또 세 번 다 실패하셨냐고?”
“네.”
“나도 몰라.”
“아······.”
윤정도 변호사도 자세히는 모르는 듯했다. 물론 안다고 해도 대표 변호사의 사생활을 이제 곧 퇴사할 후배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인물도 아니었다.
“근데요.”
“뭐 또?”
“대표 변호사님 결혼하신 분 중의 한 분이 MJ 미디어 회장님 따님이라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윤정도는 살짝 고민했다. 비밀이 아니기는 했어도 굳이 확인해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똑똑똑.
아까 송금을 보고했던 비서가 다시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변호사님, 서 변호사님 찾으시는 손님이 오셨는데요.”
“변호사님 오늘 출근 조금 늦으신다고 했는데. 약속하신 분이야?”
“아니요.”
“그럼, 회의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해.”
“안 그래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계속 서 변호사님 방에서 기다리시겠다고.”
“대표님 방에서요?”
“네.”
누구지? 누가 감히 주인도 없는 방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야?”
“MJ 미디어 전략기획부 여혜린 상무님이라고···.”
비서가 말을 끝내기 전, 도도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똑 부러지게 생긴 여성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윤 변.”
“아···. 안녕하세요, 형수님.”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윤정도의 입에서 예전 호칭이 나와버렸다.
그렇다.
그녀가 바로 서지우의 첫 번째 아내, MJ 미디어 회장의 막내딸이었다.
---*---
조선 팰리스 호텔, 33F.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서지우가 커튼을 젖히자, 이제 막 시작하는 봄날의 햇살이 스위트룸 안으로 쏟아졌다.
“하아—암.”
침대 위의 여자는 햇볕을 피해 돌아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그 바람에 가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침대 시트가 내려간다.
“이러면 곤란한데.”
여자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코끝을 찡긋거렸다.
“정말 이렇게 가버릴 건가요?”
“이미 출근이 많이 늦어서.”
“그렇게 나오면, 나 자존심이 너무 상할 거 같은데.”
“그쪽도 연애할 상대를 만나려고 어제 거기 있었던 건 아닌 거 같은데.”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
어젯밤 서로의 몸속 깊숙한 곳까지 허락했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다.
“아무리 원나잇이라고 해도 어떻게 나 같은 여자를 여기 홀로 두고 출근할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누워있던 그녀는 이제 침대 위에 앉았다. 침대 사이로 그녀의 길고 매끈한 다리가 빠져나왔고, 훤히 드러난 상체는 그녀의 구불구불한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머리카락이 간신히 가려주고 있다.
“혹시 내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룻밤을 목적으로 만남을 갖다 보면 가끔 질이 좋지 않은 부류를 만날 때가 있다. 서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동의하에 갖은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피해자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는 싸구려들이 있다.
지금 침대 위에 그녀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저 작별 인사 없이 떠나려는 게 아쉬워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내가 착각했나? 그쪽도 만족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언제 불만족스럽다고 했던가?”
여자는 시트에서 나와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꿇고 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늘씬한 몸, 175cm는 족히 되어 보인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도망치듯 가는 거 아닌가? 아무리 원나잇이라고 해도 난 모닝 섹스 없이는 안 보내주는데.”
서지우와 마주 선 그녀는 야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그의 넥타이를 끝을 잡았다.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이다.
어젯밤, 바(bar)에서 처음 봤을 때는 화려한 외모에 화류계 여성으로 착각했었다. 어차피 ‘참을 수 없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만남. 성격만 괜찮다면 화류계 여성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몇 마디 나눠보니 아니었다.
미국교포로 현재 미국계 투자회사에 파견 나와 있는 여자였다.
‘참을 수 없는 욕구’는 사라졌으나,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같은 그녀의 나신을 보고 있으니 양복을 다시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든다.
‘아니지. 그럼 안 되지. 괜히 복잡해지면 곤란하잖아.’
이성적으로는 지금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띠리링- 띠리링-
다행히 품 안의 전화기가 그를 구한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지금 사무실에 여혜린 씨가 와계십니다.
‘여혜린’이라는 이름에 서지우의 머리는 곧장 차가워진다. 그는 다시 만날 일 없는 눈앞 그녀의 입에 열정적인 키스를 남기고 호텔방을 나섰다.
---*---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문서의 내용을 지울 수 있는 능력.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원본 문서의 해당 문구를 손으로 문지르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울 수 있다.
원본의 문구를 지우면 존재하는 모든 사본의 문구도 같이 지워진다. 그리고 그 문구를 보았던 사람들의 기억도 지워진다.
그러니까 단순히 문자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해당 문구의 존재를 지우는 능력이다.
다만,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데에는 차이가 있다. 해당 문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없었길 바랐던 사람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래 걸린다. 그래도 결국은 모두 잊어버린다.
솔직히 변호사라면 한 번쯤 꿈꾸는 능력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거나 손만 되면 기억이 보이는 사이코메트리 능력도 좋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증명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문서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민사 변호사에게 있어서는 ‘S급 스킬’과도 같다.
그러면 나는 이 ‘S급 스킬’을 어떻게 갖게 되었냐고?
그걸 설명하려면 먼저 내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