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은 인연 (1)
“오랜만이네.”
여혜린,
나의 첫 번째 아내.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주름 하나 없는 얼굴, 짙은 눈썹 아래 깊이 박힌 큰 두 눈에는 도도함이 서려 있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8년 전 뉴욕행 비행기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장의 힘을 어느 정도 빌렸다고 해도 웬만한 이십 대 중후반 여성들은 그녀 옆에서 나이를 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근 7년 만에 보는 전 부인에게 하는 인사치곤 너무 삭막하지 않아?”
그녀의 이런 성격을 좋아했다. 사실 지금도 좋아한다. 7년 전, 그렇게 헤어지지만 않았다면.
“잘 나간다며? 사무실이 진짜 근사한데.”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첫 만남이었다.
나는 로스쿨을 갓 졸업한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녀는 말 안 듣는 재벌집 말괄량이였다.
변호사시험 합격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따기 위해 올라탄 비행기 옆자리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한참 반항기 많았던 그녀는 결혼하라는 재벌 아빠의 성화를 피해 친구가 있는 뉴욕으로 도주 중이었다.
훗날 물어보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도피였다. 비행기 좌석 예약도 친구 지인의 카드를 통해 예약하는 둥 (그래서 일반석이 앉게 된 것이고) MJ 그룹 비서실의 추격을 피하려고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유독 흥분했던 그녀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내게 상기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6년 반 만에 나타나서 개업 축하라도 해주려는 거야?”
“축하해, 로펌 차린 거. 언젠가는 자기 로펌을 가질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독립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고마워, 당신 덕이야.”
“내 덕? 혹시 아직도 그 일로 꽁해있는 거야?”
“꽁해? 아니. 개업 축하를 해주러 왔다기에 그냥 한 말이야.”
여혜린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봤다.
외모는 8년 전 그 시절과 같을망정 눈빛과 몸짓은 달라졌다. 이젠 정말이지 대기업 회장에게 총애를 받는 딸의 모습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스물아홉 살 말괄량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로펌이라며? 법무법인 해결? 이름이 독특하네. ‘저희가 당신의 분쟁을 해결해주겠습니다’가 로고인가? 멋진데.”
“왜 온 거야?”
“후훗, 꽁한 거 맞네.”
“6년 반 만에 나타나서 친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우리 친구가 아니었던가?”
6년 반 전, 협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걸어 나온 가정법원 앞에서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자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이혼한 아내와 친구처럼 지낼 생각은 없는데.”
“흠···여전하구나.”
뭐가? 고집 센 게? 궁금하지도 않다. 궁금해야 할 필요도 없고.
“한 번 더 묻게 할 건가? 내 시간당 레이트(rate)가 80만 원이라서.”
“높네. 그 또래 김앤강 파트너들도 그것보다 높지 않은 것 같은데. 성공했구나, 서지우.”
“···.”
“사실 의뢰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의뢰?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MJ 미디어는 김앤강을 주로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음···조금은 민감한 사건이라서.”
그녀에 대해서는 더 궁금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참 묘하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있는 여자다.
“정말 내가 당신이 의뢰하는 사건을 맡을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온 거야?”
“응. 조금 전까지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으니까.”
“착각이야.”
“보수는 요구하는 대로 줄게.”
“더 하기 싫어지네.”
“좋아. 알았어. 그래도 얼마나 민감한 사건이기에 근 7년 만에 전화도 없이 찾아와 이렇게 부탁하는 건지 들어봐 줄 수는 있지 않아? 적어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이 아니었던가? 원하면 상담 시간을 차지해도 좋아. 거절할 때 하더라도 들어보고 거절 주면 안 될까?”
“······.”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그녀는 나의 침묵을 동의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저지른 추잡한 만행을 그 집안 관점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몇 주 전에 우리 회장님이 송하 엔터테인먼트 대표랑 술자리는 했어. 거기에 그쪽 대표가 신인 배우와 가수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그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록 그녀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 편을 들고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으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니었으나, 8년 전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형사 사건이네. 이런 사건은 김앤강에서 더 핸들을 잘할 텐데.”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솔직히 우리 아버지이지만 나도 부끄러워. 나이 먹으면 정신 좀 차리나 싶었는데···.”
“그런데도 그 밑에 있네.”
“너도 그랬잖아.”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튀어나오기 전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혜린, 정말 내가 당신 아버지 사건을 수임할 가능성이 1%라도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 여기를 찾아온 거야?”
“다시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했어.”
“착각했네.”
“그래? 아쉽네. 이름도 마음에 들고 사무실도 마음에 들어서 고문 계약을 체결할까 생각했는데.”
“회장님 사건 잘 해결하길 바래.”
“진심이야?”
“그냥 한 말이야.”
“후훗, 알았어. 아, 오늘 내가 해준 이야기는 대외비인 거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하긴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런 급은 아니지.”
“잘 가.”
그녀는 방을 나가기 전, 나를 보며 왼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아는 표정이다. 그녀가 목적을 달성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서지우는 궁금했다.
이혼한 지 6년 반 만에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성추행 사건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얼마나 그녀의 집안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찾아온 것이다.
‘원하는 게 뭐였을까?’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결코 내가 수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찾아온 것이다.
‘왜? 도발하려고?’
아니, 사람 열받게 할 목적으로 굳이 이런 짓까지 할 만큼 치졸한 여자는 아니다. 적어도 이혼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왔지? 사건을 맡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6년 반 만에 나타나서 자기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자기 딸보다 어린 여자들을 추행했다는 사실을 나한테 알려 줄 이유가 도대체······. 설마······.’
똑똑똑.
답을 알아낼 것도 같은 순간,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네.”
“변호사님, 박선후 변호사님이 오셨어요?”
“박 변이? 지금?”
“네. 급한 일이라 약속을 미리 잡지 못해서 죄송하다면서, 의뢰하실 사건이 있다고 하시는데요.”
“의뢰? 알았어. 들어오라고 해.”
“네. 아 참- 변호사님.”
“응?”
“오전에 다녀가셨던 MJ 미디어 상무님 말입니다. 그분 비서가 나가면서 저희 쪽 보수 계좌를 물어보길래 알려줬더니, 방금 그쪽 사무실에서 오늘 상담받은 비용으로 80만 원을 송금했는데, 이거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사건 파일을 열까요?”
역시나 다른 목적이 있었다.
내가 자기 아버지를 상대로 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변호사 윤리 규정상 한쪽으로부터 먼저 의뢰를 받은 변호사는 다른 쪽을 대리할 수 없다. 이해관계에 충돌이 생기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르면 의뢰를 거절했기 때문에 상대방 쪽 의뢰를 맡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건의 내막을 들었고 그에 대해 상담 보수까지 받은 상태라 논란이 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나한테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서지우는 점점 더 욕심 많고 주도면밀한 제 아버지를 닮아가는 듯한 그녀가 한편으로는 가증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했다.
---*---
“변호사님, 그동안 잘 계셨어요? 사무실 진짜 좋네요.”
“처음인가, 이 사무실?”
“예.”
여혜린이 다녀가고 몇 시간 뒤, 로펌 초장기 멤버였던 후배 변호사가 찾아왔다. 만화가가 꿈이라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녀석이었다.
같은 날 둘이 약속도 없이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성공했다며?”
“아, 아닙니다. 몇 년 동안 삽질하다가 작년에 처음으로 네이버와 계약하고 유료 연재 시작했습니다.”
“그게 성공이지. 법전만 보던 사람이 몇 년 만에 다른 일로 돈을 번다는 게 쉽나.”
“여기서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푼돈입니다.”
“나중에는 더 버는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헤헤.”
“그렇게 되길 응원하겠어.”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박선후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변호사님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공교롭게도 여혜린이 언급했던 이야기와 같은 사건이었다.
MJ 그룹 회장과 송하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술자리에 동석했던 배우 지망생, 즉 MJ 그룹 회장의 성추행 피해자가 바로 박선후의 사촌 동생이었던 것이었다.
“잠깐.”
“네, 변호사님.”
“혹시 직접 변호하려고 했었어?”
“아니요. 그런 거는 아닌데···. 사실 사연이 조금 복잡합니다.”
피해자는 박선후 변호사의 숙부 딸이었다. 하지만, 박선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아,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곧바로 박선후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변호사를 찾았다.
문제는 그 변호사가 사건을 합의로 종결하기 위해 피해자를 압박했던 모양이었다.
“피해자가 원하는 건 뭔데?”
“애가 많이 어립니다. 그날 수치심을 많이 느껴서 정신적인 충격이 큽니다. 이제 고작 스물셋밖에 되지 않은 애를 어떻게···.”
“상대는 MJ 그룹 회장이야.”
“······.”
“싸울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변호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선후.”
“네, 변호사님.”
“변호사 그만두고 만화가가 된 거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내 밑에서 배운 것까지 다 까먹은 거야?”
“그건 아니···.”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 상대가 먼저 찾아와서 선수를 치는 거잖아.”
“네? 그게 무슨···.”
“혹시 상대방 변호사 만난 적 있어?”
“네. 이전 변호사가 무슨 말을 해놨는지 합의가 다 된 것처럼 이야기하길래, 제가 김앤강의 황재수 변호사하고 MJ 미디어 상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MJ 미디어 상무? 혹시 그 상무라는 사람이 여자야?”
“예, 이름이 여혜린이라고 했던가?”
역시···.
서지우는 그제야 그녀가 사무실을 떠날 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됐다.
“박 변호사,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상대는 대한민국 최대 미디어 그룹 회장이야. 싸울 거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그리고 최고의 변호사가 필요할 거고.”
“그래서 변호사님에게 의뢰를 드리려고···.”
“미안하지만 어물거리는 사이에 그 기회는 이미 날아갔어.”
“네?”
“오늘 아침에 MJ 상무가 우리 사무실을 다녀갔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박선후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의 대리인 선정을 방해하기 위해 종종 쓰는 방법이다.
기대하고 찾아온 박선후는 절망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