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은 인연 (3)
상대는 대한민국 재벌이다. 그것도 언론 재벌.
비록 당일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는 사실과 그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지망생들의 증언이 있을망정, 성추행 혐의 관련해서 영상 같은 확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이대로 소송에 가면 승소할 확률은 6~70%였다.
평범한 변호사라면 정의로운 판사를 만나길 기대하며 도전했겠지만, 서지우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핸들하는 재판의 운명을 6~70% 확률에 걸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증거가 필요했고, 그보다 먼저 피해자의 결의 확인이 필요했다.
“변호사님, 말씀드렸던 제 사촌 동생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른 체형에 귀여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가진 사촌 동생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눈에 봐도 마음고생이 심한듯했다.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은 의뢰인의 행동을 한동안 관찰한 서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가 차갑다.
“그날 그 자리는 왜 갔어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의뢰인은 옆자리의 사촌 오빠를 힐끔 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장님이 가자고···.”
“어디를?”
“······.”
“매니지먼트 사장님이 가자고 하면 그냥 무작정 따라가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그냥 되게 높으신 분 만나러 간다고···.”
“높으신 분? 그게 다예요? 그래서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까지 치장하고 간 건가요?”
“그건···사장님이 예쁘게 하고 오라고 해서···.”
술자리에 불려간 당일, 그녀는 셀카 몇 장을 SNS에 올렸고, 마치 광고 촬영하러 가는 것처럼 태그를 달아놓았다.
있어 보이고 싶은 심리.
“사장님이 높으신 분 만나러 가니까 예쁘게 하고 오라고 해서 그냥 따라갔다?”
“······네.”
“못 믿겠는데.”
냉철한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거짓말을 계속하면 당장이라도 구속할 것 같은 표정이다.
겁에 질리기 시작한 의뢰인은 자꾸 사촌 오빠를 쳐다봤고, 그럴 때마다 그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잘만 보이면 앞으로 배우 하는 데에 도움을 많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그 말을 왜 그렇게 부끄럽게 해요?”
“······.”
“알고 있었죠?”
“네?”
“그런 자리라는 거?”
“아니에요. 진짜 몰랐어요.”
“거짓말하는 의뢰인은 대리하지 않습니다.”
“진짜···에요. 진짜 몰랐어요. 진짜루···.”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나머지 박선후가 그녀를 두둔하고 나섰다.
“진짜 몰랐던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제가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그 순간 서지우의 싸늘한 두 눈이 그를 향했다. 감히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박선후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박은영 씨.”
“······네.”
“그날 그 자리에서 여정남 회장 옆자리에 앉았죠?”
“······.”
“술을 따랐나요?”
“······네.”
“여 회장의 따라준 술도 마시고?”
“······.”
“여 회장이 은영 씨 가슴도 만지고 허벅지에 손도 올리고 혹시 다리 사이에 손도 넣었어요? 그 자리에 얼마나 있었죠? 한 시간? 두 시간? 그래도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걸로 들었는데. 그 시간 동안 그냥 다 받아준 거예요?”
거침없는 질문에 수치심을 느낀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좋아요. 갈 때는 몰랐다고 치죠. 그런데 도착하고는 왜 바로 뛰어나오지 않았죠? 감금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거 같은데. 왜 자리를 안 나왔어요? 설마 그때까지도 몰랐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여 회장이 은영 씨 몸을 만지고 나서야 그게 그런 자리였는 줄 알았다고 하려는 거는 아니죠? 혹시 갈등했던 거 아니에요? ‘눈 딱 감고 한번만 견디면 인생 필 수 있다’ 같은 생각을 했던 건 아닌가요?”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흑흑흑.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워서···어떻게 할 줄 몰랐고···그래서 그냥···시키는 대로···흑흑흑. 진짜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흑흑흑.”
그녀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들이 떨어졌고 아픈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수치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스물세 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어린 사촌 동생의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박선후는 가만히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아는 서지우는 생각 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박은영 씨.”
의뢰인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본 서지우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의 톤이 바뀌었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냉철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좀 전과는 다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의뢰인은 겨우 힘을 내어 대답했다.
“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소송으로 가면 앞으로 지금과 같은 일을 수십 번도 더 겪을 거예요. 경찰이 물을 거고, 검찰을 물을 거고, 상대방 변호사 물을 거예요. 1심에서 물을 거고, 2심에서 물을 거며, 어쩌면 3심에서도 물을 겁니다. 그러는 동안 상대방 변호사는 박은영 씨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흔들어 놓을 겁니다. 박은영 씨를 몸 팔아 성공해 보려다가 실패한 싸구려 창녀쯤으로 취급할 거고, 박은영 씨 가족은 사기꾼 가족으로 만들려고 할 거예요. 그리고 더 우울한 건 그렇게 열심히 싸워 이긴다고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결과에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그나마 박은영 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은영 씨를 꽃뱀 취급할 거고요. 대한민국에서 배우가 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지겠죠.”
“······.”
“반면에 저쪽에서 제시한 합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1~2년 안에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진짜 배우 데뷔를 시켜줄 수도 있어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물론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건 소송에 이겨도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3억이라는 제법 큰 돈도 생깁니다. 그래도, 소송으로 가시겠어요?”
서지우는 그녀에게 그녀가 가려는 길이 얼마나 고된 길인지를 설명했다.
그녀가 상상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는 힘든 길.
벌써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워한다면 결코 버텨내기 어려운 길.
겁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하려는 선택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려 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변호사님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아니요.”
“그럼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바보 같다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해요.”
“역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의뢰인에게 서지우는 응원 아닌 응원의 말을 건넸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그의 생각이었을 뿐.
“그 나이 때는 어쩔 수 없어요. 멍청하고 무모한 건 젊음의 고유 특성이기도 하니까.”
신기하게도 위안이 된다. 멈췄던 눈물샘이 다시 흐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고마움이다.
“하겠습니다. 소송할래요.”
그녀의 잘못은 없다.
서지우는 그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물세 살의 아둔함과 무모함을 이용한 돈 많은 늙은 변태와 그 옆에 기생충 같은 매니지먼트 사장의 범죄일 뿐.
다만, 어쭙잖은 정의감에 휘둘려 섣불리 소송을 걸었다가는 송두리째 인생을 빼앗아버릴 수 있는 상대였기에 신중한 서지우였다.
“진심···.”
재확인하려던 서지우는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해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아버님 말씀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 같으면 바로 사임합니다.”
“네.”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어쩌면 부녀관계를 끊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네!”
그녀는 힘주어 대답했다.
“박선후?”
“네, 변호사님.”
“합의서 초안 가지고 왔지?”
“네.”
의뢰인에게 백신을 놓은 서지우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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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해결에서 서명날인된 합의서 초안을 받은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는 MJ 미디어 상무실을 찾았다.
“이걸 해결에서 보내왔다고요?”
“네, 오늘 오후에 받았습니다.”
기어코 서지우가 개입했다는 사실에 여혜린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
“이러면 이해충돌 아닌가요? 분명 내가 먼저 가서 의뢰를 요청했는데.”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그 정도를 변호사법 윤리규정 위반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슈를 만들어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합의서 초안을 보내온 상황에서 굳이 이슈를 만들어서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황재수 변호사의 의견이 정확했다. 애초에 합의로 조용히 끝내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서지우는 이렇게 쉽게 갈 사람이 아닌데···.
“합의서 초안은 검토했어요? 수상한 점 없나요?”
“합의서 문구는 굉장히 깔끔합니다.”
“깔끔한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희 의도를 잘 고려해서 작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저희 측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지도 않고 비밀유지 조항도 변호사가 연대책임을 지게 되어 있고요.”
일반적으로 변호사는 의뢰인을 대리하여 사인을 하지 의뢰인과 연대책임을 지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보안 유지가 중요한 사안에 한에서는 변호사의 공동 책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법무법인 해결에서 보내온 합의서 초안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완벽했다. MJ 미디어 측에서 수정할 부분이 하나 없다.
하지만, 여혜린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이 부분은 괜찮은 거예요?”
“어디 말씀이시죠?”
“전문이요.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읽히는데.”
“아, 이 정도는 인정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겁니다. 애초에 상대방에게 합의금 3억이나 주겠다고 제시하는 행위 자체가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솔직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합의 고려하지 않는 게 맞죠.”
그럴 수 없기에 이런 합의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의미였고, 그에 대해서는 여혜린도 더 할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만약에 이 합의서가 체결되고 난 이후에 저쪽에서 변심하면 어떡하죠? 합의서가 유출돼도 괜찮냐는 말이에요.”
“그렇게 돼도 회장님 입장은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왜죠?”
“일단 법무법인 해결의 대표 변호사가 합의서에 공동으로 서명했기에 3억 합의금에 대한 반환은 그에게 직접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의서 비밀 유지 조항 위반으로 해결과 피해자 측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도 있고요.”
“돈이 문제가 아니죠.”
“성추행 소송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합의서를 저쪽에서 작성해 온 것이고, 이렇게 서명날인을 먼저 해서 보냈기에, 유출되면 저쪽에서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당연히 언론은 피해자 측을 비난할 거고 소송이 길어질수록 상대방 측은 견디기 힘들어질 겁니다.”
논리 있는 의견이다.
일단 3억이라는 돈을 받게 되면 피해자에게 꽃뱀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 합의라는 행위 자체가 성추행을 인정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동시에 상대의 신뢰도를 깎아내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애써 합의를 하려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황 변호사님 조언대로 할게요.”
“아, 근데 한가지.”
“뭐죠?”
“상대방 변호사가 회장님이 직접 서명날인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황 변호사님이 대리인으로서 대신하면 안 되나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더니, 변호사가 공동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기에 저 자신을 대표해서 제 서명날인이 들어가야 하다 보니까, 제가 회장님 대리인으로서 두 번 서명날인하는 꼴이 되는 것이 저쪽에서는 싫은 모양입니다.”
“흠- 알었어요. 회장님 서명날인은 제가 받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여기서 제 서명란에 사인하고 드리겠습니다.”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는 일말의 우려 따위 없이 해결에서 보내온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인감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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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압구정동, 법무법인 해결 사무실.
똑똑똑.
“네.”
“변호사님, 김앤강에서 서명날인된 합의서 보내왔습니다.”
“이리 줘.”
“그리고 방금 김앤강 황재수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합의서 내에 기재된 합의금 송금 계좌가 틀린 것 같다고 확인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부러 없는 계좌번호를 기재했다.
왜? 애초에 합의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냐, 내가 처리할게.”
“예.”
비서가 나가자 서지우는 퀵으로 보내온 서류 봉투 안에서 서명날인된 합의서를 꺼냈다.
여정남 회장의 서명과 인감도장이 찍힌 합의서 원본.
이것만 있으면 된다.
서지우가 원본의 서명란을 문지르자, 본인과 의뢰인의 서명날인한 부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