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33)

완전기억능력 (2)

면접을 보고 집에 돌아온 아리는 옷을 갈아입은 뒤, 오빠의 몸부터 살폈다.

닦고 치우고 정리하고 나니, 또 새벽 한 시.

그제야 조금 전 보고 온 면접이 떠올랐다.

*

「“그런 능력을 갖고도 로스쿨 성적이 이것밖에 나오지 않은 건 본인이 게을러서예요?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어서예요?”

대표변호사라는 남자의 말투는 예의가 바른 듯하면서도 공격적이었다. 기다림에 지쳐서였을까 아니면 모든 걸 다 갖춘 듯한 남자의 배려심 없는 행동이 가슴 속 응어리를 건드려서였을까, 면접 내내 주눅이 들어있던 아리의 눈빛이 달라진다.

애초에 붙을 걸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허무맹랑해도 술집에 나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보여서 온 것뿐이니까.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손에 걸리는 아무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 하필 이게 걸린 것뿐이니까.

까짓거 안되면 떨어지면 그만이지 뭐.

죽으면 그만이지 뭐.

“사정이 있어서요.”

“무슨 사정?”

“집안이 가난해서요.”

아리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떨리던 것이 이제 단단하다. 그걸 눈치챘는지, 면접 보는 남자는 곧바로 말을 잇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본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 그런 능력을 갖고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이 있지?”

그렇다고 그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리도 더 이상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면접관님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셨나요?”

아리는 알지 못했지만, 서지우에게도 사연이 있다. 그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육시설에서 보냈다. 쓰레기까지는 아니었어도 아버지는 지독히 무능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그를 버리고 다른 가정을 차렸다.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나?”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다면 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 같네. 나는 김아인 변호사의 집안 사정과 열심히 할 수 없었던 사실의 상관관계를 물었을 뿐인데.”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김아인이 아니었기에. 김아인은 그녀와 같은 능력이 없었기에.

그래서 아리는 그녀의 대답을 했다.

“모든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녀의 능력의 한계는 그녀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가족이었다.

평생 오빠밖에 몰라 자신은 뒷전이었던 엄마. 평생 자신을 버러지처럼 바라보던 쌍둥이 오빠.

가난한 집안에 들어오는 모든 돈은 쌍둥이 오빠의 비싼 학비와 품위유지비로 들어갔고, 그녀는 오빠를 변호사로 만들려는 엄마의 꿈에 조수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자신만 빼고 둘이 식사하러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오빠가 변호사가 되고 나면 조수의 의무도 끝이 나고 자신의 꿈을 찾아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둘은 죽지도 않고 ‘망령’이 되어 여전히 그녀의 날개를 붙잡고 있었다.

속내를 들켜버렸다고 생각한 아리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았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이네. 모든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 부작용도 있고···.”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뿐. 남자의 계획은 다르다. 이제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좋아요, 김아인 변호사.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게요. 그렇다면, 내가 그 한계를 덜어주면 김 변호사의 그 특별한 능력을 우리 <해결>을 위해 백프로 발휘해줄 수 있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로펌 스타팅은 월 세후 930만 원이고, ‘막내’ 파트너의 경우, 평균적으로 월급에 3~400%에 해당하는 금액이 연말 성과급으로 지급되어 왔어요. 물론 그해 매출에 따라 달라지고 개인의 능력과 기여도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만.”

“네?!”

“대형 로펌들 기준은 알고 있을 테니까, 우리 로펌의 스타팅이 김앤강과 견줘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 거예요. 연봉 상승률도 김앤강과 같아요. 연차가 쌓일 때마다 월 세후 180만 원씩 올려줍니다. 물론 개인의 능력과 기여도에 따라 늘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게나 많이···.”

속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유학은 보내주지 않습니다. 인력풀이 타이트하다 보니까, 1년씩 공석을 둘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유학이라는 게 파트너가 되기 전에 보내주는 건데, 우리는 입사와 동시에 바이인 옵션을 주기 때문에 파트너가 되기 위한 명목뿐인 유학이 필요 없어요. 물론 본인이 가고 싶다면···.”

“유학 가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갈 수도 없고···.”

“그럼 다행이네.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설마 채용된 건가?

“저기···.”

다시 줄어든 목소리 볼륨.

“크게 좀 말해줄래요? 나는 조금 전 모든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 모습을 원하는데.”

“네···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뭐지?”

“저···저 그럼 채용된 건가요?”

“나는 합격. 근데, 우리 회사에 다른 파트너가 있어요. 그 사람하고 면접을 봐야 하니까, 시간이 괜찮으면 내일 오후에 다시 와 줘요.”

“아···. 알겠습니다. 또 오겠습니다.”」

*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 로펌 스타팅은 월 세후 930만 원이고, ‘막내’ 파트너의 경우, 평균적으로 월급에 3~400%에 해당하는 금액이 연말 성과급으로 지급되어 왔어요. ··· 연차가 쌓일 때마다 월 세후 180만 원씩 올려줍니다.」

대표변호사가 언급한 금액이 떠나질 않는다.

‘그래, 어차피 죽으려던 목숨이다. 까짓것···.’

아리는 아인의 방 책장에 꽂혀있는 법전과 법 관련 서적들을 자신의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야, 뭐야. 확실하다매? 아, 이 새끼, 나 이미 처제한테 말해놨어.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 하 참, 야, 안 뽑아도 되니까 면접만 봐. 면접 보는 게 그렇게 어렵냐? 너도 파트너잖아. 그런 힘도 없어? 아- 진짜, 이게 뭐야? 우리 처제가 얼마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미안하다, 미안해. 일이 좀 꼬였어. 어젯밤에 대표님이 누구를 뽑았더라고.”

-아, 이 새끼, 사람 꼴 이상하게 만드네.

“미안해. 내가 술 열 배로 살게.”

-됐어, 이 새끼야. 끊어.

딸깍.

동기와 통화를 끊은 윤정도의 미간에 주름이 파인다.

서지우에 대한 존경심이 어마어마한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력서만 비교했을 때는 한소희가 압도적으로 더 실력이 좋은 지원자였다. 그렇다고 김아인의 이력이 평균 이하라는 건 아니다.

그 역시 상위 20% 안에 드는 지원자였지만, 한소희와는 비교할 수 없다.

똑똑똑.

“네.”

비서가 들어왔다.

“차량 준비되었습니다.”

“김아인 변호사는?”

“이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아, 회사에 타이레놀 있지? 나 그것 좀 챙겨줘.”

술 때문인지, 아니면 채용 문제 때문인지, 골머리가 아프다.

윤정도는 비서에게 타이레놀을 받아 챙긴 뒤 차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갔다.

---*---

법무법인 해결 건물 앞.

춘천에 사는 이중기 작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차가 대기하고 있고, 그 옆에는 두 번째 면접을 보러 온 김아인 변호사가 서 있었다.

평생 수염 한 가닥 나지 않은 것 같은 하얀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 얼굴이 작고 비율이 좋아서 그런가, 키는 170 조금 넘는 거 같은데 더 커 보인다.

정도는 심드렁한 얼굴로 김아인을 쳐다봤다.

“안녕하십니까?”

목소리마저 중성적이다.

“타.”

인상이 나쁜 건 아닌데, 아니 살짝 어두워 보이기는 해도 생김새 자체는 좋은 편이다. 그저, 선배가 자기가 추천한 지원자를 제치고 뽑은 사람이라 괜히 심통이 나는 것뿐이다.

“차장님, 가평휴게소 들렀다 갈 거니까, 조금 빨리 가주세요. 어르신이 또 꼬장 부리면, 또 언제 보내주실지 몰라. 가기 전에 뭐라도 조금 먹고 가야지, 안 그러면 당 떨어져.”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윤정도는 차를 타자마자 눈을 감았다.

어차피 펌의 대표인 선배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기에, 굳이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사실 그럴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극구 반대한다면 서지우가 충돌을 감내하면서까지 고집을 피우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렇게 말없이 50분쯤 지나고 차가 가평휴게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윤정도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김아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펌은 어떻게 알고 지원했어요?”

“네? 아···아는 친구한테 듣고···지원했습니다.”

“연봉이 높아서?”

“네? 아···네.”

“연봉이 높다는 거는 일이 힘들고 많아서 그렇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죠?”

“···네.”

별로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실망스러웠다. 심통은 났어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기에,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말을 나눠봐도 그러한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 변호사님이 면접 때 뭐 물어봤어요?”

“법 조항을 물어봤습니다.”

“법 조항?”

“네, 기재법 3조를 물어봤습니다.”

김아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어젯밤 밤새워 법전을 읽었다. 다 외지는 못했어도 어제보다는 준비되어 있다.

“기재법 3조? 그걸 왜 물어보셨지? 그게 다예요?”

“그리고 판결문 하나를 주시면서 외어보라고···.”

선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윤정도는 고개를 기울였다.

“으응? 외어보라고 했다고?”

“네.”

“외어보라고? 뭐 혹시 기억력이 좋아요?”

“아···네. 좋은 편입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고작 그것 때문에?

20~30년 전이라면 몰라도 몇 초안에 검색이 가능한 세상에서 기억력?

차라리 정보 서치 능력이 훨씬 더 가치 있을 텐데. 기억력이 좋아서 뽑았다고?

“허, 참 나.”

“······.”

윤정도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기가 나왔는데, 주판 잘하는 친구를 뽑겠다는 꼴이 아닌가.

고작 기억력 좋은 것 하나에 한소희 변호사 같은 인재를 놓치는 건 우매한 짓이라고 판단된다.

“알았어요. 대표님이 채용 확정된 거라고 말한 건 아니죠?”

“······네.”

“일단 돌아가서 대표님하고 좀 더 상의해보고 통보할게요.”

“···알겠습니다.”

여태껏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반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오늘 만나러 가는 분은 이중기 작가님이에요. 이름은 들어봤죠?”

당연히 들어봤다. 유명한 소설이 한둘이 아니었고, 작품 활동을 안 한 지 몇 년 됐지만, 여전히 그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며 해외에서도 잘 팔리고 있다.

“네.”

“그분이 <영화사 청아>라는 제작사에 드라마 시나리오를 써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오늘 4회분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계약서 체결과 함께 받으러 가는 길이에요.”

“아, 네.”

“지금 가는 곳이 춘천의 한 암자인데, 그분이 옛사람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괴짜 같은 면이 있어서 요새도 컴퓨터 안 쓰고 육필로 쓰세요. 계약서도 자신이 원고 마감할 때까지는 안 쓰겠다고 하셔서 오늘 원고 받으면서 체결하기로 해서 우리가 가는 거고.”

“아, 네.”

김아인을 채용하는 데 반대표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더니, 옆에 있는 그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윤정도는 그런 남자였다. 마음 약한 남자. 좀 전까지 심드렁했던 말투가 조금 친절해졌다.

“미팅이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같이 들어갈래요? 아니면 차에서 기다려도 나는 상관없는데.”

잠시 망설인 아리는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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