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3)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 (1)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 딜은 말도 안 되는 딜이야, 이 사기꾼 새끼야.”

그의 말이 맞다.

그는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그와 체결한 합의서에서 중요한 부분을 지웠다.

그러니까 사기꾼이라고?

그 주장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이 사건의 백그라운드를 설명하자면, 지금 나한테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이 자는 거짓 장부와 허위 하도급 계약서로 내 의뢰인을 속여 해외 콘서트 프로모션 계약을 따냈고, 애초에 제대로 프로모션을 할 의사도 없었던 그는 대충하는 척만 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파산신청을 냈다.

업계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기도 했지만, 워낙 이런 일에 ‘프로’인 인간이라 처음부터 바지사장을 앞에 두고 법적인 책임을 회피할 장치들을 이곳저곳 잘 깔아놓았다.

형사처벌을 묻기 힘든 상황이었고, 긴 비용과 시간을 들여 성공한다 한들, 처벌의 강도는 내 의뢰인이 입은 손해와 고통에 비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의 개인재산 중 하나를 찾아 압류해두었기에 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좋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말엔 동의한다.

그러나 사기꾼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진실을 감추고 허위 정보를 이용해 상대를 기망하려고 했다면 사기가 맞다. 하지만, 진실이란 실제 일어났던 일을 의미한다.

나의 삭제 능력은 행위자의 기억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해당 일이 벌어진 것을 전부 지워버린다.

즉,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을 뿐, 현재 이 세상의 관점에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다.

혹시 ‘도신’이라는 영화를 아나?

오래된 홍콩영화인데, 기억을 잃은 도박꾼이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악당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카드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 갖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어떻게 카드를 바꿔치기하는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

변호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용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느냐’다.」

우리가 하는 게임은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다. 알고 있다 한들 증명해내지 못하면 그건 하찮은 주장일 뿐.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그렇게 억울해할 거면 체결 전에 좀 더 꼼꼼하게 보시지 그러셨어요.”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변호사지.

---*---

“여기 맛이 변했네.”

점심시간.

최근 자주 가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윤정도가 투덜거리자, 같이 간 비서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요? 저는 모르겠는데. 맛있는데.”

“뭔가 맛이 깊이가 떨어지고 저렴해졌어. 유 과장은 어때? 모르겠어?”

“변호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괜히 그런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솔직히 모르겠는데요.”

짬이 찬 유이헌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아니야, 바뀌었어. 원산지 표시 봤어? 지난달까지 고춧가루 빼고 전부 ‘국내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중국산이 몇 개 끼어있더라고. 맛집이라고 소문나니까 이제 하나둘씩 바꾸는 거지. 그리고 원산지 표시판 옆으로 뭘 많이 올려놨더라고 잘 보이지 않게, 그런 게 다 꼼수야.”

정도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지적했다.

“아- 역시 변호사님이시네요. 그런 것도 다 보시고. 저는 그냥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의라서 상관없는데.”

<해결>에는 두 명의 비서가 근무했다. 한 명은 4년 차 유이헌 과장이고, 다른 한 명은 1년 차 이창현 사원이다.

정도의 추리에 감탄한 이창현이었지만, 여전히 그것들이 왜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지. 가격이 같잖아. 재료를 싼 거 쓰면 가격을 내려야지.”

“아—.”

“뭐가 ‘아—’야?”

“여기 올 때는 변호사님이 늘 사주시니까···.”

“그러니까 가격은 내 알 바 아니다? 이 새끼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 아-.”

정도는 자기보다 여섯 살 어린 이창현에 헤드록을 걸고는 주먹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김아리, 사실 아까부터 남자들 관계를 공부하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던 그녀다.

“김 변은 어떻게 생각해? 이 새끼가 한 말이 웃겨, 안 웃겨?”

그녀는 처음 와보는 식당. 당연히 그냥 던진 질문이다. 점심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어색해하는 것 같아, 끼워주기 위해 그냥 건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뭐라고 하지? 이럴 땐 어떤 식으로 해야 남자다운 거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을 사방을 굴리던 그녀는,

“하하. 이 새끼, 존나 웃기네. 하하하”

··· ··· ···

순간 얼어붙은 분위기.

삼 초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하하하. 김 변은 가끔 보면 말이야. 진짜 반전이야. 어떨 때는 진짜 조용하고 샌님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또 상남자 같고. 팔색조야, 팔색조. 안 그래, 유 과장?”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한 식구가 되었다고 여기면 뭐든 좋게 보려는 경향이 있는 윤정도였다

징징- 징징-

“잠시만, 여보세요.”

-식사 중이야?

“아, 네. 이제 막 하고 나온 길입니다. 미팅은 잘 끝내셨어요? 좀 늦으셨네요. 식사는요?”

서지우로부터 온 전화.

-이왕 부산에 내려온 김에 위원장님 좀 뵙고 가려고 하는데, 오늘 광현에 합의서 사인하러 가는 날이잖아. 혼자 가도 별문제 없겠어?

“아, 그럼요. 그냥 사인만 하러 가는 건데요.”

-그래, 그럼. 부탁해.

“넵,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뵙고 맛있는 것 잡수고 천천히 올라오십시오.”

딸깍.

“대표님이신가요?”

“응. 부산에서 영화제 위원장님 만나고 올라오신다네. 혹시 오후에 다른 스케줄 있는 건 아니지?”

“YGP 합의 관련해서 광현에 가시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건 내가 가기로 했어. 하긴 본인 스케줄을 모르실 양반이 아니지. 아, 김 변.”

“네.”

대표변호사님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정도가 부르자, 김아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후에 바빠?”

“아니요.”

“그럼 이따가 세 시에 광현에 나랑 같이 갈···악!”

쿵!

“괜찮으세요, 변호사님!”

윤정도가 넘어졌다. 뒤에서 따라오던 김아리를 돌아보며 말하다가 보도블록의 턱을 미처 보지 못했다.

---*---

“한 변 때문에 꼴이 이게 뭐야! 아침부터 내가 YGP 박 대표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광현을 상대로 말프랙티스 소송 걸겠대. 400명이 넘는 대형 로펌이 고작 3명 있는 사무실도 감당하지 못하냐며 길길이 날뛰었어. 어떡할 거야?”

말프랙티스(Malpractice), 전문직의 업무상 과실을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로 변호사의 대리 행위에 과실이 있을 때 의뢰인은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다야? 그러기에 처음부터 내가 그냥 합의하자고 했잖아. 잘하고 있었는데, 상대방 변호사를 잘 아는 것처럼 괜히 끼어들어 가지고 이게 뭐야?”

“······.”

“펌에서 하도 에이스라고 해서 같이 한번 일해볼까 싶어서 허락했더니···쯧.”

“아직 합의서 체결 전이니까, 상대방 변호사를 만나서 제가 한 번 더···.”

“됐어! 뭘 더 망쳐놓으려고···. 됐고, 그냥 오늘 합의서나 체결이나 실수 없이 마무리 지어. 나는 오후에 YGP 엔터 들어가서 박 대표를 달래야 하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오늘 처리해. 알았어?”

“······네.”

한소희는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짓누르며 IP팀 파트너 이세훈의 사무실을 나왔다.

본인이 한 짓.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평생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를 돌아갈 수 있다면 며칠 전으로 돌아가 다시 협상하고 싶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정말이지 지는 건 너무 싫다. 특히나 여성 혐오자인 그런 남자한테는.’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기고 싶다.

---*---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김 변, 난데.

“괜찮으세요, 변호사님?”

-응, 괜찮아. 엑스레이 찍은 거 나와봐야 알겠지만, 심각한 거는 아닌 거 같아.

크게 넘어진 거는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춘천의 산에서 삔 그 발이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간 정도는 정밀 검사를 받는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고민 끝에 그는 YGP 표절 사건 합의 체결을 아리에게 부탁했다. 이미 양측이 확정한 문구의 합의서였기에 그가 보기에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근데, 말이야. 다른 게 아니고, 김 변이 광현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제가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냥 가서 계약서 문구만 확인하고 초안하고 일치하면 서명날인만 하고 오면 돼. 내가 유 과장에게 말해뒀거든, 유 과장이 지금 파이날 버전 계약서 초안을 줄 거야. 할 수 있지?

“아···.”

-왜?

“아니요. 그게···.”

-긴장하지 마. 어려운 거 아니야. 서류 보고 초안하고 동일하면 사인하고 오면 돼. 그게 끝이야. 나도 웬만하면 밀어볼까 했는데, 상대방 변호사가 워낙 깐깐해서 말이야. 솔직히 개인적으로 껄끄러운 것도 좀 있고. 그러니까, 김 변이 수고 좀 해줘. 오케이?

“아···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다녀와서 전화 줘.

“네···.”

전화를 끊은 아리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

엄마의 병원비를 내고, 오빠의 간병인 비용을 감당하려면 감내해야 한다.

그녀가 처한 늪에서 빠져나오려면,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

법무법인 광현.

[변호사님, 해결의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합의서 초안 2부 준비해주세요.]

정말 들어가기 싫다.

이미 승패가 갈린 게임에서 승자에게 메달을 걸어주러 들어가는 기분이다.

한소희는 비서가 준비해준 합의서 초안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문 앞에 멈춰 섰다.

회의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사람은 서지우도 아니고, 윤정도도 아닌, 자기를 제치고 뽑힌 신임 변호사였다.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꽃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금 신임을 혼자 보내? 그것도 나를 까고 뽑은 신임을? 하!’

부득이하게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그녀는 알 턱이 없었고, 그렇기에 서지우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받아들였다.

게다가, 합의서 체결 미팅에 와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해결의 신임 변호사는 부산스럽게 어딘가와 통화 중이다.

물론 양측이 문구에 동의했고 체결의식만 남겨둔 것이지만, 엄연히 아직 사인 되지 않은 서류.

신사적으로 플레이한다면 승패를 시인하고 그대로 게임을 끝내겠지만, 한소희는 신사적으로 플레이할 마음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나를 개무시한다 이거지? 그럼 할 수 없지.’

한소희는 방으로 돌아가 문구가 미세하게 다른 (하지만 합의 내용이 많이 달라지는) 다른 버전의 합의서 2부를 뽑아 들고 해결의 신임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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