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3)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 (3)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예상한 대로 한소희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마지막 순간, 저희 클라이언트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저작권 수익과 비용은 그렇다 쳐도 정신적 손해 배상금으로 2억 원은 좀···많긴 하죠. 변호사님도 동의하시죠? 많은 거.”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준비해둔 변명을 쏟아냈다.

“그래서 제가 계약서 수정을 요청했고, 체결은 다른 날 하자고 했는데. 김아인 변호사가 자신에게 수권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검토하고 서명·날인 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김아인 변호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우리 변호사에게서 들은 사정과는 다른데.”

“왜 다르지? 혹시 <해결> 내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요?”

그녀는 한점 거짓이 없다는 표정으로 서지우를 바라봤다.

고문을 한들 진실을 털어놓을 눈빛이 아니다. 자신이 한 말 중에 거짓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표정이다.

서지우는 그런 그녀 잠시 관찰한 뒤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우리 김아인 변호사가 자신에게 수권이 있다고 말했다 했죠?”

“네, 그랬어요.”

“한 변호사님은 변호사 된 지 얼마나 됐나요? 3년? 4년?”

“4년이요.”

“죽 광현에서 일하셨나요?”

“네.”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녀의 이력서를 봤기에 이미 알고 있다.

“광현에서는 1년 차 변호사에게 그런 큰 권한을 주나요? 사전에 수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조율한 합의서 조항을 마지막 순간에 파트너 변호사에 상의 없이 독단으로 수정에 동의하고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모르죠. 그건 펌마다 문화가 다른 거 아닌가요?”

“광현의 실무를 물었습니다.”

“모르겠어요. 여기도 부서마다 문화가 다르니까.”

“한소희 변호사님은 1년 차 때 그런 권한을 받아본 적이 있나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때는 워낙 많은 사건을 배당받아서. 그게 왜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몰랐네요, 김아인 변호사가 1년 차라는 사실을.”

“그래서 진짜 수권이 있는 줄 알았다?”

“네.”

그녀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 당당해졌다. 코너에 몰릴수록 단단해지는 타입. 변호사한테는 꼭 필요한 특성이다.

“그 말을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요?”

“믿든 안 믿는, 결과는 <해결>의 변호사가 위계나 협박 없이 자율적으로 합의서에 사인을 한 거죠. 그리고, 솔직히 연차에 상관없이 변호사라면 본인이 사인하는 서류가 무엇인지 정도는 확인하는 게 맞지 않나요?”

“위계가 없.었.다? ‘내가 밑장빼기를 한 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없었던 일이다.’ 그런 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좋아요. 진실이 뭔지 확인하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김아인 변호사한테는 그런 수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계약은 무효고 우리는 원래 포지션을 고수합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저희는 <해결> 내부의 수권 관계는 모르겠는데요. 알 이유도 없고. 설사 진짜 수건이 없었다고 해도 표현대리니까, 저희한테는 해당이 없네요. <해결>과 <해결>의 의뢰인 사이의 문제지.”

그녀는 한 방이라도 먹였다는 듯 의기양양한 어조로 <해결>의 대표변호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였지만.

“알겠습니다. 정히 그렇게 나오신다면···.”

서지우는 말을 더 길게 하지 않고 광현의 사무실을 나왔다.

---*---

사실 이기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질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남자니까.

다만,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이렇게 나대면···.

띠리링- 띠리링-

-법무법인 해결입니다. 여보세요?

“유 과장.”

-네, 변호사님.

“오늘 당직인가?”

-예.

“잘됐네. YGP 표절 사건 관련해서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위임장 원본 있잖아.”

-네, 자료실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거 내 방 책상에 올려놓고 퇴근해.”

-예,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소희는 지금 ‘도신’ 앞에서 감히 ‘밑장빼기’를 한 거다.

---*---

늦은 밤, 법무법인 해결의 사무실.

아리는 병원 일을 해결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피해자의 보호자에게 뺨까지 맞은 그녀였지만, 붉어진 뺨보다도 합의서 체결이 그녀의 마음을 훨씬 더 무겁게 했다.

*

「“김 변, 너무 걱정하지 마. 1년 차 때는 누구나 다 실수해.”

“죄송합니다.”

“솔직히 저쪽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야. 어디서 지금 계약서 바꿔치기를 해. 그것도 이미 사인한 거를 가져가서 제멋대로 폐기하고 다른 걸 가져와서 사인하게 해? 와-, 진짜 어디 쌈마이 조폭 변호사 사무실도 아니고, 참나-.”

“그래도 제가 꼼꼼하게 잘 봤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만약, 저쪽에서 계약서가 무효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기는 하지. 일단 우리가 우리 의뢰인에게 원계약서 초안대로 체결되었으면 받을 수 있었던 손해 배상금을 물어주고, 우리는 광현하고 소송해야겠지.”

“<해결>이 물어줘야 한다고요? 손해 배상금이 2억 원이던데···. 그럼, 일이 복잡해지는 거 아닌가요?”

“뭐 그렇게까지 나오면 복잡해지지. 바꿔치기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그럼 어떡해요?”

“어이, 김 변. 너무 걱정하지 마. 서 변호사님이 해결하실 거야.”

“대표님이요?”

“응. 김 변, 우리 로펌 이름이 뭐야?”

“해결···이요.”

“그분 호(號)가 ‘해결’이야. 그니까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가 쉬어. 어머님 아프시다며?”」

*

윤정도가 그녀를 달래보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자괴감을 덜어내진 못했다.

오후에 광현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 수백 번도 더 플레이된다.

한소희가 새로 서류를 가져왔을 때, 한 번만 더 보고 사인했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이 자기 탓만 같다.

‘법전만 외웠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이러다가 큰 사고를 칠 수도 있어, 김아리. 감옥에 가고 싶어?’

아리는 사표를 들고 대표변호사의 사무실로 갔다.

크고 캄캄한 사무실.

그녀는 ‘일신상의 이유로 그만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는 짧은 문장들이 적힌 종이를 책상 한가운데에 놓아두고 돌아선다.

바로 그때.

“그게 뭐야?”

“헉···오셨어요. 저는 오늘 안 오시는 줄 알고······.”

서지우는 우물쭈물하는 후배 변호사를 지나쳐 자기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방금 그가 놓은 종이를 집어 들어 내용을 읽는다.

“‘일신상의 이유로 그만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피식-

웃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변호사가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직서에 서지우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디 먼데 가나?”

“···아니요.”

“아니면 다른 로펌에서 제의가 왔어?”

“네?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럼 이건 뭐지?”

“그건···.”

그녀는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왜 사고치고 그만두게? 이런 거 한 장 내 책상 위에 던지고 나가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

“그런···의도는 아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왜 그런 사기 능력을 갖고도 성적이 좋지 않은지 알겠네.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네. 멘탈도 약하고.”

“······.”

“면접 때 능력의 한계니, 뭐니 했는데, 가난은 핑계였나?”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 남자 예의 바른 척은 다 하면서 말에 아주 독한 가시가 있다.

그리고 그 가시는 자꾸 어린 시절 봉인해두었던 그녀의 또 다른 자아를 건드린다.

“이번은 일은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책임? 무슨 수로?”

“손해 배상금은 제가···.”

“돈? 김 변 돈도 없잖아.”

아리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닌데, 우리 펌의 명예는? 광현이랑 소송이 붙으면, 그딴 얕은수에 당하는 허술한 변호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소문일 날 텐데. 그건 어떡할 거지?”

“그건······.”

분하지만 할 말이 없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기할 거야?”

“······.”

“김.”

“···네.”

“김이 왜 그 여자한테 당한 줄 알아?”

“······.”

“게임이 끝난 줄 알고 먼저 돌아섰기 때문이야. 그러다 뒤통수를 맞은 거고. 근데, 이 바닥은 말이지, 그런 놈들이 많은 곳이야.”

게임 벨이 울려도 달려드는 놈들.

글러브 안에 쇳덩어리는 넣어오는 놈들.

심판이 안 보는 사이 귀를 무는 놈들.

지는 게 죽기보다 싫은 놈들이 하는 게임이 바로 변호사게임이다.

“페어 게임? 그딴 거 없어. 김 변이 살아온 세상처럼 애초에 체급도, 리밋도 없는 경기니까.”

법은 만인에 공평한 거 아니었던가?

근데 페어 게임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내가 당한 거라고?

그래서 내가 당하고 산 거라고?

대표변호사의 말이 여러 의미에서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뒤통수 맞고 살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맞을 때마다 도망치지 마. 습관이 습성이 되니까.”

서지우는 그녀가 올린 사표를 바닥에 던졌고, 그녀는 그것을 주워 사무실을 나왔다.

비참했다.

비참했지만, 조금 전 그의 사무실을 들어왔을 때는 달라진 것이 있다.

아리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두지 않는다.

---*---

‘막내’가 나간 후, 서지우는 잠시 그가 나간 곳을 바라봤다.

분명 잠재된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잘만 다듬으면 잘 할 수 있는 놈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서지우는 책상 위에 놓인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퇴근 전 유이헌 과장이 놓고 간 의뢰인의 위임장 원본이다.

서지우는 봉투에서 위임장을 꺼내 그 위에 적힌 서명과 도장을 삭제했다.

이제 진짜 수권이 없게 되었다.

---*---

다음 날, 법무법인 광현.

“한 변, 이거 확인했어?”

“무얼 말씀이시죠?”

“방금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랑 통화했는데, 자기네는 계약서를 체결할 수 있는 수권이 없다고 얘기하길래···.”

“아— 어제도 찾아와서 저한테 그 소리를 하더니. 많이 다급한가 보네요.”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끝까지 들어 봐. 수권이 없다고 하면서 위임장 사본을 확인하라고 해서 방금 확인했는데···.”

서명날인이 되어있지 않다.

“서명날인이 안 되어 있다고요?”

“응.”

어떻게 그런 일이···.

법원에서 받은 위임장 사본이다. 그렇다는 말은 법원이 도장도 안 찍힌 위임장을 받고 <해결>을 대리인으로 인정했다는 말인데···.

“하— 이러면 그 계약도 무효잖아. 아, 진짜 이번 케이스는 일이 왜 이렇게 꼬이냐. YGP 박 사장한테 뭐라고 말하냐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끝나지 않았다.

짜증이 난 한소희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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