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여자잖아
「7년 반 전, 뉴욕의 아파트.
“나 네 아이가 갖고 싶어.”
“그런 거 갖고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나 농담 아닌데. 네 아이가 갖고 싶어. 갖게 해줘.”
“말했잖아. 난 아이 갖을 생각이 없다고.”
“그건 날 아직 몰랐을 때 이야기고. 멋질 것 같지 않아?”
“뭐가 멋져?”
“멋진 엄마가 될 것 같지 않냐고? 너는 당연히 멋진 아빠가 될 거고. 그러니까 해줘.”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되고 싶은 적도 없고.”
“그거 트라우마야.”
“······.”
“해줘.”
“뭘?”
“음. 알면서.”
그녀는 어느 날 뜬금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반대했지만, 아이는 생겨버렸고.
그리고 아이는 사라졌다.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신뢰하지 않을 뿐.」
*
“이미 계약된 작품이야.”
“우리 지우 이제 거짓말도 하는 거야? 언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변호사라며.”
그랬던 적이 있다.
순수했던 시절.
“거짓말 아니야. 계약됐어.”
“내가 듣기에는 작가님이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녀의 표정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무시해버렸겠지만, 여혜린은 그럴 수 없는 여자다. 대한민국 엔터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여성이고, 무엇보다도 무시하면 할수록 얼굴을 들이미는 타입이었기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고 계약 체결이 안 된 건 아니야. 이미 <영화사 청아>와 이중기 작가님이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가정하에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어. 계약금도 이미 받은 상태고.”
“‘가정하에’라는 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잖아. 계약금이야 뭐 언제든지 돌려줄 수 있는 거고.”
“내 말뜻을 못 알아들어나 본데, 양측 다 이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없어.”
서지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관심 끊으라는 경고다.
“그러면 나도 가정 하나 해도 될까? 만약에 내가 작가님을 설득했다면? 그러면 <해결>은 누구 편이 되는 거야?”
현재, 해결은 <영화사 청아>와 이중기 작가를 동시 대리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된다면, 서지우는 어쩔 수 없이 이중기 작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의 반대급부는 영세 제작사를 등친 로펌으로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것.
거기다, 만약 이중기 작가를 빼낸 회사가 MJ 엔터테인먼트고 MJ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이 서지우의 전 부인인 것까지 소문이 나면···.
“누구 편이 될 일 없어.”
서지우가 아는 이중기 작가는 돈이나 명예 때문에 계약을 파기할 사람이 아니다.
“그럴까?”
근데 왜 이 여자는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거지?
느낌이 좋지 않다.
“서지우.”
“···.”
“사람은 변해. 너랑 나도 그랬잖아.”
*
「7년 전, 뉴욕의 아파트.
“도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데?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도 않았잖아.”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던 거랑 생긴 아이를 지우는 거랑은 다른 이야기야.”
“그래서 좀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이 때문에 나랑 헤어지겠다고? 나랑? 아이가 그렇게 소중해? 나 보다도 더?”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생명이라고.”
“나는 생명이 아니고?”
“말 돌리지 마. 생명을 죽인 건 너야.”
“낙태할 권리는 여성에게 있다고 늘 말한 거 너야.”
“권리를 사용할 때는 신중해야 해. 남용했을 때는 책임을 져야 하고.”
“너는 다른 줄 알았는데, 너도 똑같구나.”
“한번만. 한번만이라도 상의했으면 좋았잖아.”
“상의했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아.”
“그럴 거면 왜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 건데?”
“안아달라고. 안아달라고 말했어. 누군들 마음이 편한 줄 알아? 내 몸이라고, 내 몸 안에서 자라고 있던······.”
그렇게 말해도 안아줄 수 없었다.
“서지우, 너 변했어.”
“아니, 네가 변한 거야.”」
---*---
비슷한 시각, 춘천의 암자.
두 고래는 벌써 소주 두 번째 짝으로 넘어갔다.
“네에? 그게 서지우 변호사님 이야기라고요?”
“흐흐흐. 몰랐지?”
“서 변호사님도 아세요?”
“읽어봤으면 지도 알겠지.”
이중기 작가가 현재 쓰고 있는 드라마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는 서지우의 두 번째 결혼 이야기가 모티브였다.
김아리는 완벽해 보이는 대표 변호사가 세 번이나 결혼했던 적이 있다는 말에 술이 확 깰 정도로 깜짝 놀랐다.
“네에! 세 번 결혼하셨다고요? 몇 살인데요?”
“서른 댓쯤 됐나? 날 처음 만났을 때가 서른 살이었으니까, 그쯤 됐을걸. 아닌가 서른여섯인가?”
“헉. 그런데 세 번씩이나···.”
“그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그 남자가 세 번씩이나 결혼했다니···.’ 김아리는 문득 한소희가 여성 혐오자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우리 대표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친하지. 그놈이 원래 술을 안 먹어.”
“아—.”
“한 두잔 하기는 하는데. 잘 안 먹어. 그래서 내가 어느 날은 붙잡아놓고 오늘처럼 소주를 짝으로 쌓아놓고 너 이거 나랑 다 먹기 전에는 못 간다고 했더니, 놈이 소매를 척 걷어붙이더라고.”
“원래는 잘 드세요?”
“응. 잘 마시더라고. 알고 보니까 그놈이 몇 년 전에 제 아버지 간 이식을 해준 적이 있더라고, 그래서 과음을 안 하는 거였어. 아무튼, 그래서 내가 사연이 궁금해서 계속 술을 먹이면서 물어보니, 그놈도 참 나만큼이나 기구한 인생을 산 놈이었어. 그래서 그날 이후 둘이 진정한 벗이 됐지.”
“아—.”
김아리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더욱 궁금해졌다, 서지우의 사연이.
“그놈, 애비, 애미가 살아있는데도, 어렸을 적 보육원에서 살았다는 것도 몰랐지?”
“네에에?! 진짜요?”
“완벽해 보여도 슬픔이 많은 놈이야.”
“진짜 그렇게 안 보여요. 강남에서 태어나서 강남에서만 산 사람처럼 생겼는데···.”
“아니야. 밑바닥 출신이야. 나처럼. 진짜 보면 말이지. 생긴 거부터 인생까지 나랑 참 비슷한 놈이야.”
“아···그건 좀 아닌 것···.”
“그거 알아? 나한테는 세 명의 여자가 있었던 거?”
“그건 별로 안 궁금···.”
“그때가 바야흐로···.”
나이 드신 분들과 잘 어울리는 그녀였다. 평소 같았으면 노인의 넋두리에 장단도 맞춰가면 들었겠지만, 그녀는 대화의 주제가 서지우에 머물렀으면 한다.
“할아버지, 술잔 비었어요.”
“어, 그래.”
“근데, 그래도 우리 대표 변호사님이 할아버지를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 당연하지. 그놈 내가 없었으면 지금 그렇게 못 됐지.”
“아—.”
“그놈이 김앤강 나와서 오갈 때 없는 걸 내가 키웠어.”
“에이-.”
“진짜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변호사가 아니시잖아요.”
“내 사건들 합의하면서 그놈이 받아 간 돈이 얼마인데, 아직 거기 압구정에 있지, <해결> 사무실.”
“네.”
“좋트나?”
“진짜 좋아요. 완전 예뻐.”
“거기 기둥 하나는 내가 세워준 거나 마찬가지야.”
“아, 진짜요?”
“예끼, 그럼 내가 너 같은 신삥을 불러놓고 거짓말을 하겠냐?”
“제가 할아버지가 같은 분은 좀 만나봐서 아는데, 거짓말까지는 아니래도 약간 MSG들을 치시더라고요.”
“MSG?”
“근데 귀여워요, 그런 할아버지들이.”
“이 새끼가···.”
“헤헤, 작가님 또 짠.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응? 응.”
작은 글라스 잔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둘.
아리가 노래까지 부르며 재촉하자, 이중기는 방금 마시고 내려놓은 잔을 다시 집어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손뼉까지 치며 응원을 아리는 소주잔을 들어 빈 잔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서지우에 관해 물어보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그러면 우리 대표님은···.”
“잠깐.”
“?”
“너 이 새끼 왜 나를 자꾸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데?”
“네?”
갑자기 정색하고 묻는 이중기. 순간 아리는 자신이 말실수한 건가 의문이 든다. 근데, 이상하다. 그녀는 분명 아까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 죄송요. 제가 또 좀 친해지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서. 기분 나쁘셨어요, 작가님?”
“왜 그렇게 부르냐고?”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작가님이라고···.”
“아니, 지난번에 나랑 술 마실 때 앞으로 다른 걸로 부르기로 했잖아.”
“네?”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그럼 오빠라고 불러야지.”
기억난다. 지난번 암자에서 단둘이 술을 마실 때, 쓰러지기 직전, 그렇게 부르기로 했던 거. 술김에 한 농담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눈이 다 감겨가는 상태였기에 기억하실 거라 생각지 않았는데.
“제가요?”
“그럼 내가 그랬을까?”
“아이- 설마. 그리고 만약 제가 그런 말을 했으면 술에 취해서 한 농담이겠죠. 제가 왜 작가님을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남···.”
‘···잔데.’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중기가 진지한 얼굴을 말을 가로챈다.
“자네 여자잖아.”
“네?”
“내가 몰랐을 줄 알고?”
---*---
법무법인 해결.
여혜린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서지우는 일에 손이 잡히지 않았다.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된 인연이라서 그럴까, 아무리 냉철한 그라도 그녀의 등장에 신경을 전혀 안 쓰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자꾸 건드리는 재주가 있는 그녀다.
「그러면 나도 가정 하나 해도 될까? 만약에 내가 작가님을 설득했다면? 그러면 <해결>은 누구 편이 되는 거야?」
왜 ‘설득했다면’이라고 했을까? 왜 ‘설득한다면’이라고 하지 않고 ‘설득했다면’이라고 했을까?
‘설득했다면’이란 이미 포기했을 때, 바꿀 수 없는 현재를 가정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혜린이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그럴 리가. 절대 포기할 여자가 아니다. 원하는 걸 얻겠다고 제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여자다. 포기했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면······.
‘설득했다면’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상황이 있다. 그건, 이미 ‘설득했다’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상대방을 떠보고 싶을 때 그렇게들 사용한다.
“설마···.”
서지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새벽 한 시.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서지우는 ‘막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다.
띠리링- 띠리링-
---*---
다시 춘천의 암자.
“그럼 약속하신 거예요.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이거 왜 이래.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데요. 좀 전까지만 해도 묻지도 않는 서 변호사님 과거에 대해서 저한테 다 얘기하셔놓곤.”
“어허- 그거야, 서지우 그놈은 그런 거 상관할 인물이 아니니까 그랬던 거지. 그리고 그건 일종의 칭찬이었어. 남자가 오죽 잘났으면 그 나이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장가를 갔겠어? 나는 이 나이를 먹도록 한 번도 못 했는데. 응?”
여전히 안 미덥다.
그래도 초이스가 없다.
이미 알아버렸다.
“대신 자네도 나랑 약속했어. 자네의 사정을 언젠가 나한테 꼭 이야기해준다고.”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조건.
“알았어요.”
“좋았어. 그럼 또 다른 벗이 생긴 기념으로다가 거국적으로 한 잔···.”
띠리링- 띠리링-
“뭐야? 이 오밤중에.”
혹시 병원이나 오빠를 돌봐주는 간병인에게서 온 것이 아닐까 해서 재빨리 전화를 들어본다. 근데,
“대표님인데요?”
“서지우 그놈이? 이 시간에 왜? 혹시 여기 내려온 거야?”
아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직 마시고 있는 거야?
“네? 네.”
-계약서는?
‘아, 맞다. 계약서.’ 오자마자 이중기 작가가 다음 회차분 각본을 주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다 읽고 나서는 작품의 큰 줄거리에 관해 대화를 가졌고, 그 후로는 대표 변호사의 인생사로 넘어가다 보니까, 옆에 두었으면서도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눈에 훤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뻔하다. 윤정도도 늘 이런 식으로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많았으니까.
-그럼 지금 사인해 달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 전화기를 옆에 둔, 아리는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이중기 작가에게 내밀었다.
“작가님, 대표님이 계약서에 먼저 사인하시래요.”
“응? 술 마시다 말고 무슨 계약서에 사인을 해? 내일 해, 내일.”
“안 돼요. 빨리 사인해주세요.”
“이런 것도 효력이 있는 거야?”
“빨리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그냥 이대로 일어나서 서울 가요.”
둘의 대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서지우에게도 들린다.
“알았어, 알었어. 어디? 여기 사인하면 돼?”
“거기는 <청아> 대표님이 사인하는 데고요. 여기요.”
“몰라. 나는 원래 계약서 같은 건 안 봐. 그리고 그런 거 안 보려고 니들 쓰는 거잖아. 하-참 귀찮기 시리.”
휘릭- 이중기는 계약서 내용도 확인도 하지 않고 빈칸에 멋진 사인을 휘갈겼다.
“됐지? 자, 이제 술 좀 마시자.”
“됐어요.”
계약서에 사인을 받은 아리는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고 사무실에 있는 서지우에게 보고했다.
“받았습니다, 변호사님.”
-잘했어. 그럼 적당히 마시고 올라와. 그리고 내일은···.
출근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이중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이건 또 무슨 계약서야? 아까도 퀵으로 뭘 보내와서 사인해서 보냈더니만, 이것 또 다른 거야?”
서지우는 퀵을 보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