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의뢰인의 최우선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서 변호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여혜린의 사무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영화사 청아>의 공국현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평소 존댓말을 사용하는 공 대표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저도 사정을 알아보려 이제 막 MJ 엔터테인먼트에 왔습니다.”
-서 변호사님, 지금 나오는 기사를 보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을 <이블린 스튜디오>에서 다 가로채고 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작가님께서 이중계약을 하신 건 아니겠죠?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표님, 혹시 넷플릭스로부터 계약금이나 그 외 다른 투자지원을 받은 적이 있나요?”
-투자지원이요? 그런 거 없죠. 거기는 워낙 계약서 체결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곳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계약서는요? 최근 저희가 검토한 계약서나 그 외 다른 계약서 체결한 것이 있나요?”
-계약서? 없어요. 아, 논의 시작하기 전에 NDA(Non-Disclosure Agreement: 비밀보안유지) 조항이 포함된 MOA(Memorandum of Agreement: 합의각서)를 체결한 적은 있지만···.
그건 서지우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서 변호사님.
“네,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미 기사가 다 뜨고 있고 벌써부터 우리 쪽 손해가 큽니다. 작가님 쪽이든, MJ 쪽이든, 원인이 밝혀지고 나면, 제가 고소할 겁니다. 아시겠죠?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공국현이었다.
착오 따위로 그런 기사가 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둘 중의 하나가 지금 자신을 상대로 장난질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아는 그였다.
-제발, 작가님 쪽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요. 그렇게 되면 정말 싫지만, 저희는 다른 변호사를 찾을 겁니다.
서지우의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였고, 충분히 이해가 가는 위협이었다.
“알겠습니다. 좀 더 알아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딸깍.
---*---
“이게 그 계약서인가요?”
사무실로 돌아온 서지우는 정도와 막내를 회의실로 불렀다.
“응.”
“하-, 어르신도 참 헤드에 이렇게 버젓이 <이블린 스튜디오> 로고가 박혀있는데, 이걸 어떻게 안 보시고···.”
그런 양반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고집쟁이 노인네. 서지우는 이중기 작가를 탓할 생각 없다.
자기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중기 작가의 그런 점을 핑계로 손절할 생각은 전혀 아니다.
“지나간 일 이야기해봤자 의미 없고, 어떻게 생각해?”
짧은 시간 서류를 꼼꼼하게 살핀 아리는 조용히 했다.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안다.
“이렇게 되면 이중계약인데, 착오였다고 항변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방금 윤 변이 말했잖아. 계약서 윗면에 버젓이 <이블린 스튜디오>의 로고가 박혀있는데,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냐고?”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착오.
법원이 믿어줄 리 없다. 설사 믿어준다 해도 과실이 중대하다고 판결을 내릴 확률이 높다.
“그러면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하면 어떨까요? 받은 시각이 점심 직후였으니까, 반주를 한 상태였다고 하거나, 잠을 잘 못 주무셔서 수면제를 먹었던 상태였다고 하거나.”
정도 역시 비슷한 전략을 떠올렸다.
“증인이 있어. 배달인.”
“퀵서비스야 잠시 같이 있었을 거고, 작가님의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을 테고.”
“약은 원래 드시지 않는 분이고, 반주는 실제로 하셨다고 하나···.”
증인석에 섰을 때, 자신이 심신미약의 상태였다고 인정할 양반이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작가님을 법정에 세우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
“그럼 어떻게···. 설마 혹시 <이블린 스튜디오>를 고소하시게요?”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과 관련해서 딱히 공격할 만한 포인트가 없다.
<영화사 청아>와 이미 계약 관계에 있다는 말을 서지우에게서 듣고 돌아간 이후에 손해를 일으켰으니, MJ 엔터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주장해볼 수는 있겠지만,
여혜린이 그런 사실을 들은 적 없다고 발뺌을 한다면 (그녀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다) 사실상 판사가 누구 말을 믿느냐에 달려있게 된다.
또한, MJ 엔터가 뒤에서 <이블린 스튜디오>를 컨트롤하고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법적으로 둘은 엄연히 별개의 법인이기에 둘을 묶기부터 쉽지 않다.
이것저것 공격할 수 있을 만한 포인트를 짚어보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한동안 회의실에 침묵이 흐른다.
더 이상 생각할 만한 포인트가 없을 때, 서지우는 ‘막내’를 바라보면 물었다.
“김은 의견 없어?”
“네?”
“아이디어 없냐고?”
대표 변호사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 아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근데, 잘 모르겠지만, <이블린 스튜디오>의 계약 조건이 작가님한테는 훨씬 좋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리의 의견에 정도가 끼어들었다.
“작품만 본다면 차라리 <청아>를 설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에이- 안 돼. <청아>가 가만히 안 있지. 그리고 잊었어? 우리가 <청아>도 대리하고 있는 거? 만약에 우리가 <청아>를 버리고 작가님하고 <이블린>으로 가면, 말프랙티스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저쪽에서 화살을 우리한테 돌릴 수 있어.”
“아···.”
선배의 말에 아리는 곧바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법전을 왼 게 고작인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아니. 사실 나도 그게 걸렸어.”
서지우가 말을 꺼냈다.
“네?”
“계약서 조건이 <청아> 쪽보다 훨씬 좋아.”
“아무리 그래도···.”
서지우는 정도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내의 의견이 망설이던 그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사실, 사무실에 복귀하자마자, 원본 계약서의 서명을 지울 수도 있었다. 어차피 계인도 되지 않았고, 지우면 과거가 바뀌고, 끝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최우선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중기 작가의 관점에서 <이블린 스튜디오>의 계약 조건은 분명 <영화사 청아>의 계약 조건보다 좋았다.
만약 <해결>이 이중기 작가와 <영화사 청아>를 동시대리 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영화사 청아>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이블린 스튜디오>와 가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해결>은 <영화사 청아>의 변호사이기도 하다. <영화사 청아>의 최우선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 가십니까?”
“<영화사 청아>에. 공 대표님을 만나러.”
그러고 나서 다시 여혜린을 찾을 예정이다.
---*---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이블린 스튜디오>의 허유나 대표와 차동균이 회의를 하고 있다.
“이사님, 도환이는 우리랑 하기로 결정했고, 그 외 캐스팅도 빨리 진행하고 있어요. 괜찮죠?”
“이제 이건 우리 거야. 허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고 진행해. 차 비서.”
“네, 이사님.”
“내일 춘천에 내려갈 거니까, 이중기 작가님을 정밀하게 조사해놔. 뭘 좋아하시는지, 뭐가 약점인지. 어찌 됐건 작가를 설득해야 글을 쓸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똑똑똑.
바로 그때, 서지우가 나타났다.
“이사님,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가 찾아오셨습니다.”
“또? 하하, 그렇게 급했나? 서지우답지 않은걸. 들어오시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잠시 뒤 서지우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숨기지 않는 여혜린.
그녀답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단둘이 논의할 것들이 있는데.”
“음.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에 관한 내용이라면 그냥 해도 돼. 어차피 <이블린 스튜디오>가 계약당사자니까.”
다시 한번 요청하려던 서지우는 그만둔다. 그녀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서지우 처지에 있어서는 이편이 시간 절약도 되고 낫다.
“좋을 대로.”
“오랜만이네, 그 말. 그래서 용건이?”
“이중기 작가님이 MJ 엔터와의 계약을 존중하는 데 조건이 있어.”
여혜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하기 직전이다
“무슨 조건?”
하지만, 서지우의 다음 말이 그녀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이블린>은 제작에서 제외, MJ 엔터는 <청아>를 제작사로 위임하는 거.”
“그게 무슨 말이죠. 작가님은 이미 우리와 계약을···.”
서지우는 끼어들려는 허유나를 바라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눈빛이 너무 차가워, 순간 그녀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그나마 서지우의 그런 모습을 잘 아는 여혜린만 침착을 유지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꼼수로 계약을 빼앗아 왔으니까.”
“법정에 가서도 그렇게 주장할 거야? 우리가 꼼수를 썼다고? 잘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법원에 가는 걸 피하고 싶을걸?”
“누가? 내가? 무슨 근거로? 정식으로 체결된 계약서를 들고 있는 건 난데. 실망인데, 서지우. 조건이라고 하길래, 나는 <청아>를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거면 해줄 수 있지, <청아>가 이번 프로젝트를 빼앗겨도 망하지 않고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게 투자지원을 해준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여혜린이 끝나길 기다린 서지우는 조용히 품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해 유심히 내려다보던 여혜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아버지 여정남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그녀가 서지우에게 준 비자금 계좌들과 오프쇼어 페이퍼컴퍼니 목록이 담긴 USB 메모리.
그 안에는 MJ 엔터테인먼트를 포함한 MJ 미디어를 괴롭힐 수 있을 만한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애초에 MJ 미디어를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이 조건이었기에, 서지우는 여정남만 걸고 넘어갈 수 있는 자료만을 검찰과 언론에 넘기고 나머지는 덮어두었었던 것이었다.
“이게 뭐지?”
“몰라서 물어? 그럼, 여기서 한번 열어볼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허유나와 차동균에 반해 여혜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워졌다.
“두 분은 나가주시겠어요?”
이제 말투도 달라졌다.
허유나와 차동균이 서둘러 나가자, 여혜린은 USB 메모리를 들고 서지우 앞에 다가섰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알잖아, 나 지기 싫어하는 거.”
“차라리 <청아>에 다른 프로젝트를 넘기라는 건 어때? 그거라면···.”
“그건 이기는 게 아니지.”
“내가 아는 서지우가 언제부터 이렇게 치사한 남자가 됐지?”
“당신이 말했잖아, 사람은 변한다고.”
할 말을 마친 서지우는 그대로 돌아서 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분을 이기지 못한 여혜린이 소리쳤다.
“앞으로 이걸로 내 목에 족쇄라도 채울 건가?”
“그거 당신이 준 거야.”
“···.”
“아, 그리고 당신 목에 족쇄 채워 끌고 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아. 내일 아침까지야. 제작사 <청아>로 바꿨다는 기사 띄우고 <청아>와 체결할 제작 계약서 보내.”
---*---
다음 날 아침,
유명 포털 사이트, 메인 기사들···.
「MJ 엔터테인먼트, <영화사 청아>와 프로젝트 MOU 전격 체결」
「이중기 작가 신작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청아>에서 제작한다.」
「여도환,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캐스팅 물망. <청아>와 의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