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여자
몇 주 뒤, 월요일 아침.
<해결>의 변호사들은 주간 회의하기 위해 대회의실에 모였다.
“언리얼 VFX 팀 투자건, 싱가포르 오리온 펀드 변호사로부터 2차 인스톨먼트하고 어덴덤(Addendum: 부속계약서) 수령했습니다.”
“2차 인스톨먼트 언리얼에 바로 전달해. 어덴덤은 검토하고 나랑 이따 오후에 회의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꿈쟁이 스튜디오>에서 요청한 호단샤 판권 문의는 어떻게 됐어?”
“호단샤에서 답변이 왔는데, 원작가가 되게 조심스러운 성격이라고 하네요. 제작사 대표를 만나서 이야기해보기 전에는 어떤 계약 사항도 논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꿈쟁이 스튜디오>에는 전달했고?”
“오늘 회의 끝나고 하려고요.”
“이 팀장님한테 전달하고, 호단샤는 누구한테서 연락이 왔어? 사카구치 상?”
“네.”
“그럼, 사카구치 상한테 연락해서 혹시 북미 제작사와 체결된 2차 판권 계약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혹시 계약서 사본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봐.”
“안 주지 않을까요?”
“그러면 대략 상대가 누군지, 계약 주요 텀(term: 조건)은 어떤 게 있는지 문의해. 혹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윤정도와의 용건이 끝나자, 서지우는 ‘막내’에게 묻는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는 어떻게 되고 있어?”
“MJ랑 <청아> 사이 투자 제작 계약서 마무리돼서 앞으로 연출 하도급 계약서랑 배우들 출연계약서 검토 요청 들어올 예정입니다.”
“오케이. 들어오면 검토하고 회의하자고.”
“네.”
“그리고 그게 라스베가스 로케이션 촬영이 있을 거야. 해당 지역 관련법하고 어쏘리티(authority: 당국) 컨택 리스트 준비하기 시작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미리 보고 있는 게 낫지, 촬영 들어가서 현장에서 묻기 시작하면 그때는 시간이 없어.”
“네? 아······.”
스펀지처럼 빨아드리고 있는 아리였지만,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니, 해당 지역 관련법이니, 어쏘리티 컨택 리스트니 전부 다 생소한 그녀는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조로록 흐른다.
“이따가 나한테 와. 무슨 케이스 파일을 봐야 하는지 알려줄게.”
옆에 있던 정도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정말 친절한 선배다. 서지우가 오피스 아빠 같다면 윤정도는 오피스 엄마 같다.
“왜 문제 있어?”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서지우는 다음 토픽으로 넘어갔다.
“이중기 작가님은?”
“5, 6회차분 대본 어제 <청아>에 넘겼습니다. 7, 8회차분 수정 중이라고 하시는데, 느낌상 이미 끝냈고 9회차분 집필 중이신 거 같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다. 그리고 이상하게 ‘막내’가 다녀오면 이중기 작가 쪽 일은 술술 잘 풀린다. 때로는 어린이 같고 때로는 괴팍한 노인 같은 그 양반을 잘 다룬다. 아직 경험이 매우 부족하지만,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케이스를 ‘막내’에게 맡긴 이유였다.
“그래도 자주 확인해. 그렇게 쓰다가도 글이 막히면 어디로 도망쳐버리는 노인네니까.”
“넵,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 했나?”
공식적인 업무는 다 끝났다.
하지만, 아리는 한 가지 물을 것이 남아있다.
바로 물어야 할지, 아니면 대표 변호사에게 따로 물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윤정도가 선수를 쳤다.
“김 변, 잠시 대표님하고 단둘이 의논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라스베가스 로케 관련해서는 내가 김 변 사무실로 갈게.”
“네···, 알겠습니다.”
아리는 인사를 하고 나갔고, ‘막내’ 파트너가 나가자 정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변호사님.”
“왜?”
“파이낸셜저널 양예슬 기자가 연락을 해왔는데요.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제작 관련해서 <영화사 청아>와 MJ 엔터테인먼트를 이어준 숨은 공신이 <해결>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인터뷰를 요청해왔어요.”
“그래?”
“네.”
“하지 뭐. 윤이 해.”
“그게···.”
“왜? 나를 요청해?”
“딱히 그런 거는 아니데. 전화를 끊고 기자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왠지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제작은 핑계인 거 같고, 대표님하고 형수···아니 MJ 엔터 여혜린 대표의 관계를 물어보려고 요청하는 것 같아서요. 연예매체도 아니고 파이낸셜저널 작가가 연락한 것도 좀 걸리고요.”
아무리 거침없는 여혜린이라고 해도 자신의 과거가 기사화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블린 스튜디오> 허유나 대표를 통해 나온 말이 뻔했다.
“하고 싶으면 해.”
“에이- 제가 인터뷰를 왜 하고 싶어 하나요, 선배님도 참. 게다가 선배님 과거 얘기를 묻는 거라면 더 하기 싫습니다.”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알려진 사실이잖아.”
“그렇기는 해도···.”
“해. 우리 사무실 광고도 되고 좋지 뭐.”
자신의 이혼 경력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서지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벌써부터 기자들이 기웃거린다는 것은 언젠가 터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럴 거면 괜히 이상한 타이밍이 아닌 지금 터지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다.
“음···알겠습니다. 그럼 좀 더 생각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할 말을 마친 서지우와 정도는 대회의실을 나와 각자 방으로 향했다.
---*---
회의를 마치고 나온 아리는 자신에 방에서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쳤다.
그녀가 <해결>에서 처음 맡은 케이스.
하루에도 수십 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 사건 하나가 그녀를 붙들어준다. 책임감을 갖게 해준다.
변호사가 꿈이었던 적은 없어도 하던 일을 두고 도망가는 사람은 아니다.
‘분명 사인이 되어있었는데······.’
아리는 MJ 엔터가 이중기 작가한테 퀵서비스로 보낸 계약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분명 전에는 이중기 작가의 사인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근데 또 <이블린 스튜디오> 허유나 대표의 사인은 남아있다.
‘이거 말고 다른 원본이 또 있는 건가?’
분명 사건이 이렇게 발전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중기 작가가 그 계약서에 확인도 하지 않고 사인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는데, 이제 그 사인이 없어졌다.
기억이 삭제되지 않은 아리는 혼란스러웠다.
변호사가 아니기에, 자신이 혹시 무언가를 착각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해도 있었던 사인이 사라진다? 그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리는 면접 때 프린트에서 사라진 문자를 떠올렸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작가님이 그런 잉크로 사인을 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정도한테 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윤정도 변호사는 사인을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마치 아리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런가,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 남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완전기억능력 소유자다.
완전기억능력은 흔히들 말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와 다르다. 포토그래픽 메모리는 한번 본 것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능력이지만, 완전기역능력, 아이덱틱 메모리(eidectic memory)는 경험을 기억하는 능력이다.
아리는 단순히 문서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날 이것에 대해 서지우, 윤정도와 함께 회의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날 서지우가 입은 옷, 사용한 향수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표님께 여쭤봐야겠어.’
윤정도와의 회의를 마치고 3층에서 내려오는 서지우를 본 그녀는 잠시 뒤 대표 변호사실의 문을 노크했다.
---*---
똑똑똑.
“네.”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응.”
대표 변호사의 짧은 대답에 아리는 들고 들어온 계약서 원본을 조심스럽게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뭐지?”
“제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영화사 청아>가 넷플릭스랑 계약하지 않고, MJ 엔터테인먼트가 런칭하는 OTT 플랫폼 오리지널 시리즈로 들어가게 된 이유가 애초에 이 계약서에 이중기 작가님이 사인을 하셔서 그렇게 된 거 아닌가요?”
‘그걸 기억하고 있다고?’
서지우는 혼란스러워지려는 표정을 감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당연히 면접 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그래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몇 주 전, 여혜린을 만난 담판을 짓고 온 서지우는 계약서의 이중기 작가 사인을 삭제했다.
잘 마무리가 된다면 모두에게 윈-윈이었고, 혹시라도 여혜린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이중기 작가 사인을 삭제해버리면, 이중계약의 문제는 사라지니까.
99% 잘 해결되거라 예상했지만, 혹시나 다른 변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적인 차원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자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진짜···요?”
“MJ 엔터가 작가님에게 이 계약서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이 작가님이 계약서에 사인하지는 않았어. 단지, 계약 조건이 넷플릭스 쪽보다 훨씬 나았기에 재협상을 한 것이었고.”
“······.”
그녀의 정신상태에 데미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살짝 죄책감이 든다. 서지우의 말투가 평소보다 온화해진다.
“뭔가 착오를 한 모양인데. 작가님한테 확인해봐. 그런 일이 있다면 큰일이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이제 김아리의 표정이 혼란스럽다.
분명 서지우는 기억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더 물어볼 거 있나?”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아리는 계약서를 챙겨서 대표 변호사실을 나왔다.
서지우는 그녀가 나간 이후에도 한참 동안 그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어쩌다 일어난 요행이 아니었다.
그가 뽑은 막내 변호사는 분명 삭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 기억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연구해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완벽한 서지우도 어떻게 테스트를 해봐야 할지 모르겠다.
본인의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능력이 통하지 않은 상대를 연구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김아인···.”
띠리링-
-네, 변호사님.
“유 과장, 김아인 변호사 인사기록 좀 가지고 와봐.”
-네, 알겠습니다.
“김아인 변호사가 제출한 서류들 크로스체크 다 했나?”
-네, 다했습니다. 학교 졸업증명서랑 성적표, 가족관계 증명서 다 확인했습니다.
“알았어. 아, 김아인 변호사 아버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있다고 하셨지?”
-네.
“어머니가 어디 병원에 있는지, 병명이 뭔지도 좀 알아봐 줘.
“네, 알겠습니다.”
딸깍.
혹시 유전이라면 일단 가족들부터 알아보는 게 현명하다. 서지우는 김아인의 가족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