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구매
「8,910,860원」
건강보험료를 제하고 팔백구십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 첫 월급으로 들어왔다.
아리는 계속해서 금액을 확인했다.
비록 자격도 없는 그녀가 변호사 흉내를 내고 받은 돈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죄책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일억 원이라는 큰 금액을 사이닝보너스를 받았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돈은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빌렸던 돈을 갚느라 금세 수중에서 떠나갔다.
이 돈은 달랐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양복 좀 맞추려고요.”
“누구 양복?”
“제 양복이요.”
“아가씨가 입으려고?”
“네.”
강남의 고급 헤어샵에서 일하게 되면 연예인들에서부터 화류계 사람들까지 다양한 부류를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일반사람들을 잘 알지 못하는 정보들까지 얻을 수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오빠의 양복을 대충 집에서 수선해서 입고 다녔던 아리는 좀 더 자신의 몸에 맞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서 동대문 광장시장을 찾았다. 예전 헤어샵에서 일할 때, 트랜스젠더 바(bar)에서 일하던 고객이 알려준 곳이었다.
“어떻게 맞춰줘?”
“최대한 남자답게 보일 수 있도록 이요. 그렇다고 오빠나 아빠 양복 훔쳐 입은 것처럼은 말고요.”
“공연용이야?”
“아니요.”
머리를 밤톨처럼 깎은 늙은 재봉사는 할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목소리는 분명 할머니인데, 겉모습은 할아버지다.
“홀복이야?”
“아니요.”
“그럼 그냥 입고 다닐 거야?”
“네.”
“하루종일?”
“네.”
“그럼 좋은 원단을 써야겠네. 이건 25만 원이고, 이건 35만 원.”
지난 한 달 동안, 서지우와 윤정도가 입는 것들을 유심히 관찰한 그녀.
그들이 입는 슈츠는 한눈에 봐도 지금 할아머니가 보여준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은 것들이었다.
편하지도 않은 양복에 욕심이 생긴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들과 비슷하게 입어야 하기에···.
백화점이나 강남 비스포크 양복점을 찾으면 똑같은 것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테니.
아리는 좀 더 좋은 원단을 요청했다.
“자, 이건 55만 원, 요건 65만 원, 그리고 이건 진짜 제일 좋은 제일모직 울 120수 원단 85만 원.”
여자인 그녀가 봐도 85만 원짜리 원단은 때깔부터가 다르다. 고급스러운 은은함이 있고 만졌을 때 무슨 동물의 털을 만지는 느낌마저 든다.
“더 고급스러운 걸 원해? 그럼, 여기 보고 골라, 그러면 주문해서 맞춰줄 수도 있어.”
그녀도 안다.
헤어샵에 오던 ‘선수’들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카나리 원단이네, 로로피아나 원단이네 하면서 고객이 해준 양복을 서로 자랑하던 것을.
무엇이든 언제나 그 윗급이 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이 검정색 원단으로 한 벌하고, 이 줄무늬 들어간 감색 원단으로 한 벌해서. 두 벌 맞출게요.”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는 85만 원짜리 양복도 충분했다.
“제일모직 원단으로 두 벌 하겠다고?”
“네.”
“돈이 많아?”
“네? 아, 네···뭐.”
“갑자기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펑펑 쓰면 나중에 내 꼴 나.”
“아···. 일할 때 꼭 필요해서요.”
“좋겠네. 이런 비싼 양복 입고 일하는 직장도 있고. 자, 그러면 수치 재봐야 하니까, 여기 서.”
그녀는 거울 앞, 할아머니가 가리킨 곳에 섰다. 할아머니는 능숙한 손길로 어깨, 가슴, 허리 등의 수치를 쟀고, 엉덩이, 허벅지, 밑위 등을 쟀다.
“보기보다 몸이 여성스러운데. 어떻게 주사 맞을 거야?”
“네?”
“호르몬제 맞을 거냐고?”
할아머니는 그녀가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 아니요.”
“그럼 어떻게? 최대한 티가 안 나게 하면 돼?”
“네! 네, 그렇게 해주세요.”
할아머니는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어느 종이에다가 수치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와이셔츠는? 와이셔츠는 필요 없어?”
“필요해요.”
“몇 개나?”
“다섯 장이요. 아니 혹시 모르니까 여섯 장이요.”
“그럼 골라.”
할아머니는 다양한 모양의 와이셔츠 사진들이 꽂혀있는 사진첩을 꺼내 보여준다.
뭔가 조금씩 달라 보이지만, 아리에 눈에는 정말 다 똑같아 보인다. 숨은그림찾기다.
“뭐가 다른 건지···.”
“다 달라. 카라 모양도 다르고, 소매도 다르고, 단추도 다르고, 등 뒤에 플릿도 다르고.”
그제야 다른 점이 보이기는 하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와이셔츠를 다르게 입는다고 달라 보일까?
남자들이 여자 립스틱 색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아···.”
“잘 모르겠으면 내가 알아서 잘 골라주고.”
“네, 너무 화려하지 않게요.”
“알았어. 그럼 요거랑 요거로 해서 여섯 장 맞춰줄게. 원래 한 장에 5만 원인데, 내가 4만 원에 해줄게.”
“감사합니다.”
“자, 다 됐어. 그럼 일주일 뒤에 가봉하러 와.”
“일주일 뒤예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아리는 쇼핑 가방에서 오빠의 양복들을 꺼냈다.
“이것들도 수선해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 잰 수치대로?”
“네.”
“한 벌당 5만 원. 원래는 1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많이 구매하니까 특별히 싸게 해주는 거야.”
“고맙습니다.”
“알았어. 가 봐.”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혹시 아시면, 구두 맞추는 곳 좀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그동안 휴지를 말아 넣어 신고 다녔다. 쌍둥이 오빠의 발 사이즈가 남자치고는 작은 편이라, 덜거덕거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딱 맞는 게 아니었다.
확실하게 하려면, 발에 맞는 남자 구두가 필요했다.
“알지. 여기서 길 건너서 동문시장 쪽에······.”
---*---
이 주 뒤,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주신 파일에서 관련 네바다주 주법 찾아서 정리해 두었고요. 네바다주, 클라크 카운티, 라스베이거스시 정부 관련 부처 리스트업도 해놨습니다.”
“벌써?”
“네.”
“재빠르네. 그럼 서버에 올려. 내가 한번 보고 확인해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서 변호사님 드리면 돼.”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응.”
“그리고 언리얼 VFX 팀 투자건···.”
서버에 있는 사건 파일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들이고 있는 아리. 그녀가 맡은 건은 아니었지만, 보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려는 순간, 비서팀 유이헌 과장이 휴게실로 들어온다.
“두 분 다 여기 계셨어요?”
“응. 유 과장도 커피 마시려고?”
“아니요. 저는 아까 냉장고 넣어놨던 단백질 셰이크 좀 가져가려고요.”
“유 과장 요새도 아침에 달려?”
“네.”
“퇴근하고 운동하고?”
“네.”
“두 시간씩?”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몸에 엄청나게 투자해. 김 변, 몰랐지? 저 친구 ‘멘즈피트니스’ 핫가이 출신이야.”
“그게 뭔가요?”
“몰라? ‘멘즈피트니스’는 뭔지 알지?”
“그게···.”
“그것도 몰라? 그 정도는 다 아는 거 아니었나? ‘멘즈피트니스’가 뭐냐면, 남성 잡지인데, 주로 헬스나 건강, 패션 같은 기사나 정보를 주로 싣는 잡지.”
“아, 네.”
“거기서 ‘핫가이 컨테스트’라고 매년 사회 각 분야에서 몸 좋은 일반인들을 뽑는 게 있거든. 유 과장이 작년에 거기 나가서 우승했잖아.”
몰랐던 사실이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다는 것까지는 보이니까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연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 진짜요? 유 과장님 옷태가 남다른 줄은 알았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진짜.”
“장난 아니야. 벗으면 온몸에 잔근육이···.”
“아···.”
“언제 한번 사우나 한번 같이 가서 봐봐.”
“네엣?!”
사우나를 같이 가자는 말에 아리는 순간 두 눈이 동그래지고 목소리 톤마저 올라갔다. 얼굴마저 빨개지려 한다.
“왜 이렇게 놀라? 사우나 한번 가보라는데.”
“왜 사우나 싫어해?”
“네? 아니요! 싫어하긴요! 좋아해요. 엄청.”
싫어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순간 당황한 나머지, 남자라면 당연히 사우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호기롭게 말해버렸다.
그게 나중에 사건을 일으킬 줄이야.
“그래? 잘됐네. 언제 한번 같이 가자고. 신사역 근처에 내가 가는 데가 있는데 괜찮아.”
“네. 그러죠. 하하. 하하.”
다음 말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는 아리.
유이헌은 그런 그의 달라진 패션을 알아보곤 대화를 이어갔다.
“김 변호사님 정장 새로 하셨네요? 구두도 새로 사신 거 같은데···.”
“아, 네.”
“되게 잘 어울리세요. 원단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그래요? 그냥 기존에 입던 양복들이 조금 오래되어서···.”
“뭐랄까, 김 변호사님 몸에 좀 더 딱 맞는 느낌이라고 하나 할까?”
정작 조금 전까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정도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그래? 새 양복이야?”
“네···.”
“아, 첫 월급 타고 산 거구나?”
“네.”
“하긴, 나도 변호사 첫 월급 타고 양복하고 구두부터 쫙 빼입었지. 그러고 돈 좀 더 모아서 BMW M3 뽑았고.”
“첫 월급은 부모님 내복 사다 드리는 게 국룰 아닌가요?”
유이헌 과장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복 안 입어. 난 식사 한번 사고 '땡' 했지 뭐. 김 변은? 김 변은 부모님께 뭐 해드렸어? 내복?”
아무것도 해준 거 없다. 해주고 싶지도 않고. 이미 많은 돈이 그녀의 요양비와 치료비 등으로 들어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리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아-참 김 변호사님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했던가? 그럼 뭐 잘 해드렸겠네.”
‘막내’ 파트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정도는 곧바로 주제를 바꾸었고, 잡담을 나누던 유이헌도 셰이크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머쓱해진 정도는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아리에게 내밀었다.
“어때?”
휴대폰 화면에는 어느 육감적인 여성의 사진이 떠 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다.
“누군가요?”
“저번 주에 클럽에서 만난 아가씨인데, 스물일곱인데 필라테스 강사. 몸매 죽이지?”
정도는 자랑하듯이 친절히 그녀의 피드들을 자신의 손으로 스와이프해가며 아리에게 보여준다. 사진들이 온통 몸매를 부각하거나, 장착하고 있는 명품을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고, 간혹 골프 치는 모습도 보인다.
“예쁘시네요.”
“성형을 좀 한 거 같기는 한데···.”
아니, 성형을 많이 했다. 샵에서 일할 때 많이 보고 들어서 안다. 얼굴만 한 것이 아니라 가슴, 엉덩이까지 했다.
“몸매는 찐인 거 같더라고.”
“아···네.”
“진짜 예쁘지 않아?”
“예뻐요.”
섣불리 예단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리의 경험상, 이런 부류는 두 종류였다. 연예인을 준비하는 지망생이거나 아니면 화류계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인 거 같아.”
“네? 뭐가요?”
“내 운명.”
아······.
“알아. 이제 만난 지 두 주도 안 되는 거. 근데 느낌 와. 진짜 사랑은 그런 거잖아, 원래. 한눈에 필이 팍 오는 거. 영화 「세렌디피티」처럼.”
여자 보는 눈에 있어 윤정도는 허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