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3)

무고는 큰 범죄다

조선 팰리스 호텔, 32F.

“진짜 연락처 가르쳐주지 않을 거예요?”

어젯밤 퇴근 후, 서지우는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 어나니머스 (Bar Anonymous, 서지우가 즐겨 가는 논현동 스피크이지 타입 술집)에 들렀다.

클라이언트가 중요한 계약서를 백데이트로(backdate: 날짜를 소급하여) 작성하는 바람에 무효 처리가 될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삭제 능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젯밤 일은 어젯밤 일로 기억하고 싶은데.”

“어젯밤 일이 오늘 밤에도 일어날 수도 있고, 내일 밤에도 또 일어날 수 있는데도?”

최근 들어 ‘삭제 능력’ 사용이 잦아서 그런지, 아니면 여혜린부터 시작해서 이중기 작가까지 신경 쓸 일이 많아져서 그런지, ‘부작용’ 컨트롤이 잘 안 되는 느낌이다.

서지우가 바 어나니머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익명성 때문이었다.

사장이 어떤 식으로 가게 홍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바 어나니머스를 찾는 부류는 인종, 나이, 직업에 있어 다양했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익스클루시브 멤버십까지는 아니어도 소개를 받지 못하면 찾아가기 힘든 장소 역시 그러한 익명성 존중에 한몫했다.

물론 심플한 칵테일 한잔에 3만 원 이상 가는 고가의 가격이 어쩌다 한번 왔던 사람은 다시 오게 힘들게 만드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익스클루시브’하게 되는 바였다.

“어젯밤은 어젯밤일 뿐이야. 또 오지 않아.”

어젯밤 ‘연인’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보지만, 고집스러운 그녀는 계속 서지우의 이름과 연락처를 요구한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예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서지우.”

“설마? 가명은 아니겠죠? 전화번호는? 아니면, 인스타라도.”

“010-7717-....”

“공일공 칠칠일칠···.”

그녀가 불러준 번호를 끝까지 반복하기 전, 서지우는,

“연락해도 답장 안 할 거야.”

라고 분명히 말했다.

더는 예의를 갖출 수 없다.

계속 요구해서 주었을 뿐인데 그것을 또 다른 초대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고, 이 순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또 다른 오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였다.

“뭐라고요?”

자존심이 상할 때로 상한 여자는 서지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연락해도 답장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하! 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그럼 지금 나 이용한 거예요?”

“이용?”

“이용한 거네. 하룻밤 욕정해소용으로.”

바에 다양한 사람들이 오다 보니 각기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온다. 그중에는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있다. 아니, 사실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꽤 많다.

서지우도 알고 있었다. 그곳에 그쪽 업계 여성들이 많이 온다는 것을.

딱히 그것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서로 예의만 지켜주고 암묵적인 룰만 따라준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면, 그건 마찬가지 아닌가?”

“뭐라고요?”

그런데 간혹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부류들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 이 여자처럼.

“혹시 나 어디서 봤어요?”

“아니.”

“봤잖아요.”

“그런 적 없는데.”

“아— 진짜. 솔직히 말해봐요. 나 술집에서 일하는 거 알았죠? 그래서 다가왔고, 여기 데리고 온 거잖아요. 그냥 하룻밤 섹스나 하고 튀려고.”

정확하게 말하면 가만히 있는 서지우에게 다가온 것도 그녀였고, 조용한 데로 장소를 옮기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좋을 대로.”

“좋을 대로? 하아- 진짜, 갑자기 열 받네. 사과해요.”

“사과?”

“나 술집에서 일한다고 지금 무시했잖아.”

“내가?”

“이름도 안 주고 전화번호도 안 주고. 내가 술집애라서 그런 거잖아? 맞잖아?”

서지우는 잠시 말없이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 쿨다운을 하라는 의미였고, 그의 차가운 눈은···

“술집에서 일하는지 몰랐고, 일한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당신의 이름이 뭐였던, 직업이 뭐였던, 나는 어젯밤 당신을 선택했고, 그리고 1분 전까지만 해도 그 선택에 후회 없었어.”

가끔 실제로 그런 효과를 발휘한다.

“난 어젯밤 그곳에 애인을 만들거나 친구를 만들려고 간 게 아니야. 하룻밤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지. 나는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유감이네.”

그렇다고 그의 어법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유감? 유감! 당신, 나랑 친한 오빠가 강남서 경찰이야.”

“누구? 나도 강남서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뭐?···당신 경찰이야?”

괜히 해본 거짓말이었는데, 강남서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남자의 말에 살짝 당황하는 여자.

“아니, 변호사.”

“변호사? 흥, 변호사면 다야?”

“지인 중에 강남서 경찰을 안 다는 말은 왜 한 거지?”

“그건···.”

씩씩거리는 여자. 남자가 당당하게 나오니까, 되려 주눅이 든다.

“자, 지금부터 행동을 잘해야 할 거야. 잘못하는 순간, 공갈 협박이 될 수도, 무고가 될 수도 있으니까.”

서지우는 전화기의 녹음 기능을 켰다.

“하려던 게 뭐야? 신고? 그럼 내가 있을 때 하는 걸 권하겠어. 할까?”

“!!!.”

서지우는 스피커폰으로 112를 눌렀다.

띠리링- 띠리링-

-안녕하십니까, 강남경찰서 김욱관 경찰관입니다. 현재 위치 강남구 테헤란로 348, 조선 팰리스 호텔로 확인되었습니다. 전화하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수고하십니다.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라고 합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여성이 경찰관님께 신고할 게 있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여성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고 신고 내용이 무엇입니까?

전화기에서 경찰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협박하려 했던 여자는 도리어 겁을 먹고 서지우에게 달려들어 전화를 뺏으려 한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방금 그쪽 목소리도 경찰 시스템에 다 녹음되었고.”

“······.”

긴 침묵.

-여보세요? 여보세요?

“바쁘신 데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괜찮으신 건가요? 출동을 요청하시는 건 아니신가요?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긴급상황이 생기면 112로 즉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딸깍.

완전 패배.

여자는 고개를 떨궜다.

“내가 술집 여자라서 우습게 대하는 건가요?”

서지우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마지막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그쪽이 술집 여자라서 우습게 대한 적 없어. 그래도 한가지 충고하자면, 무고는 큰 범죄야.”

---*---

논현동,

소위 ‘쩜오’라고 불리는 가게.

“젬마 언니, 아까부터 누구랑 문자를 그렇게 해요?”

“응? 아. 내가 사실은 지난주에 <바운스>에서 남자를 하나 만났거든. 근데 변호사다.”

“괜찮아요?”

“볼래?”

“볼래, 볼래.”

젬마라는 여성은 휴대폰에 저장된 남자와 찍은 사진을 같이 일하는 동생에게 보여준다.

“잘 생겼는데요.”

“괜찮게 생겼지? 키는 한 178, 177. 자기 말로는 180이라고 하는데 구라인 거 같고. 근데 얼굴은 귀엽게 생겼어.”

“나이는?”

“서른넷이래.”

“서른넷치고는 어려 보이는데.”

“그렇지? 실제로도 어려 보여.”

“변호사라고요?”

“응. 그런 큰 로펌은 아니고 압구정에 소형 로펌에서 일한대. 그런데 파트너 변호사래.”

“파트너 변호사면 높은 거 아니에요? 며칠 전에 광화문에 있는 로펌에서 온 변호사들 방에 들어갔는데, 파트너 변호사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되게 높은 사람처럼 이야기하던데.”

“파트너면 일반 회사 이사급 되는 건가 봐.”

“오, 잘해봐요, 언니.”

“안 그래도 좀 만나보려고, 근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센스가 좀 없어.”

“응? 센스?”

“응. 매일 문자 주고받는데, 자꾸 아저씨 개그 같은 걸 친다. 그리고 혼자 크큭 거리고. 조금 센스 없는 아재 손님 같은?”

“아- 그건 좀 깬다.”

“그렇지? 그래도 몇 번 더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좀 뜯어먹고 쌩깔라고.”

“아, 좋겠다, 언니. 나도 연애하고 싶다.”

“너도 해.”

“이 일 시작하고 나서는 만나는 부류가 전부 손님 아니면 호빠 선수들만 만나다 보니까. 제대로 된 애들 만날 기회가 없어요.”

젬마는 가게 동생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그 남자와 계속 카톡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니까 클럽이나 카페 같은 데서 일반인 남자들 좀 만나.”

“그런 데서 헌팅이 들어와도 전 꼭 이상한 놈들만 꼬여. 힝. 저 근데 옛날에 샵에서 일할 때도 그랬어요. 꼭 호빠 선수들만 집적대.”

“야, 그럼 너 이번 주말에 나 이 남자 만나는 데 따라 나올래?”

“진짜? 에이- 둘이 만나는 데 내가 가서 뭐 해.”

“친구나 후배 한 명 데리고 나오라고 하지 뭐.”

“진짜? 아, 아녜요. 그러다 진상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그렇게 가리면 일반인 못 만난다. 그래도 변호사잖아.”

“그런가? 어떻게 올 거야, 말 거야? 올 거면 지금 물어보고.”

“이번 주말? 오케이! 갈게요. 언니만 괜찮다면.”

“나야 좋지. 단둘이 만나기도 조금 어색하니까. 그럼 너는 나랑 같은 휘트니스에서 필라테스 가르치는 동생이라고 한다.”

“나 필라테스 모르는데.”

“그냥 그렇다고 해. 거기라고 알겠냐.”

“알았어요.”

“잠깐만. 바로 묻는다.”

까톡. 까톡.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주고받는 메시지들.

잠시 후.

“됐다. 이번 주 같이 인천에서 라운딩 뛰기로 했어. 괜찮지?”

“언니, 나 아직 골프 안 배웠어요.”

“아직 안 배웠어?”

“네. 아직···힝.”

“알았어. 그럼 할 수 없지 뭐. 그럼···그냥 술 먹고, 클럽이나 또 가지 뭐. 아님, 호텔 라운지 같은 데도 좋고.”

“좋아요!”

“야, 너 골프 배워. 요새 돈 많은 남자는 다 골프장 다녀.”

“안 그래도 마담 언니가 자꾸 배우라고 그래요. 그래야 큰 손님 소개해준다고.”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새 양복과 새 구두로 위장한 김아리, 몸짓이나 걸음걸이에서 이제 제법 남자의 자태가 나온다.

혼자 있을 때 나름 연구,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

“김 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이스라떼를 만들고 있는 그에게 정도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응, 굿모닝.”

“김 변, 이번 토요일에 뭐해?”

“토요일에요?”

할 일이 언제나 많다. 하지만 밝힐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머니 뵈러.”

“아, 병원에 가는구나···. 효자네, 효자야.”

효자라는 말에 아리는 괜히 뜨끔하다.

“토요일 저녁에 뵈러 가는 거야?”

“네?”

“오전이나 오후에 뵙고 오면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시는데요?”

아리의 질문에 정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탁을 던진다.

“나랑 2:2 데이트가자.”

“네에?! 데이트요?”

“응. 데이트.”

“그때 보여준 그 필라테스 강사 있잖아? 경이 씨. 그녀가 같이 일하는 동생을 데리고 나온대. 원래는 골프 치러 가자고 해서 내가 내 친구를 불렀었는데, 그 새끼가 갑자기 안 된다고 해서. 펑크가 나게 생겼어.”

“저 골프 못 치는데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더 잘됐어. 거기도 동생이 골프를 못 친대. 그래서 그냥 술 마시러 가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가자. 응? 동생 나이가 어려서 김 변이 딱이야. 그때 나 도와주기로 했잖아? 응? 가자, 응? 김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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