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33)

소개팅

“이모님, 죄송한데요. 혹시 토요일 저녁에 저희 오빠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늦어도 열 시까지는 돌아올게요.”

마지막 순간까지 ‘이걸 내가 나가는 게 좋은 생각일까’하는 망설임이 들었지만, 이미 한 약속이었기에 깰 수도 없었다.

토요일 저녁, 아리는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남성복을 입고 압구정으로 향했다.

“뭐야, 김 변, 지금 토요일 저녁 데이트에 양복을 입고 온 거야? 그것도 넥타이까지?”

‘제가 가진 옷이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집안 어르신 중요한 자리가 있어서···.”

라고 대충 둘러댔다.

“집안 어르신 중요한 자리? 그런 말 없었잖아.”

“네? 아, 저도 깜빡하는 바람에···.”

“누구 장례식이라도 있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다.

“네? 아, 네.”

“누구?”

“아···큰할아버지의 아들의···아···동생이요.”

“큰할아버지의 아들의 동생이면···오촌당숙?”

“예.”

“그래···?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

“예? 아, 갑자기···.”

“그랬구나, 혹시 괜히 내 부탁 때문에 일찍 나온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마워. 와줘서.”

“예.”

“야, 그래도 이 날씨에 넥타이까지는 좀 심했다. 그건 좀 풀러. 안 더워?”

넥타이를 풀어 주려는 그의 손이 가슴 위쪽으로 다가오자, 아리는 본능적으로 부분을 방어했다.

“뭐야? 누가 죽인데? 왜 그래?”

“네? 아, 그게···이게 좀 비싼 거라서···죄송해요.”

“뭐?”

순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리를 바라보던 정도는 금세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알았다. 김 변 패피구나?”

“네?”

“패션피플. 패피. 맞지? 누가 김 변 옷이나 액세서리 건드리는 거 극혐이지? 주말에 옷장 바라보면서 행복해하고? 맞지?”

“아···네, 네, 맞아요.”

“하긴 김 변 몸이 예쁘기는 하지.”

“네에?!”

“양복 입은 태부터 다르더라. 알았어. 존중. 안 건드릴게. 그래도 그 넥타이는 좀 빼면 안 되겠니? 내가 다 답답한데.”

“아···죄송해요. 넥타이가 오늘 룩에 완성이라서.”

아리는 오해를 이용해서 상황을 모면한다.

“룩? 무슨 룩? 장례식 룩?”

“···네.”

“와우- 그 정도야? 오케이, 노타치. 패션에 그 정도로 진심이라면.”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나는 그냥 개인적으로 넥타이가 불편해서, 답답하고. 근데 뭐 김 변이 상관없다면, 아참- 우리 호칭.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이름 부른다.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김 변, 아니, 아인이 너도 그냥 나를 형이라 불러. 그게 싫으면 선배라고 해도 되고.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자 들어가자 그럼.”

사전 조율을 마친 정도와 아리는 압구정에 있는 고급 이자카야 안으로 올라갔다.

---*---

압구정, 이자카야 텟페이.

정도, 아리와 마찬가지로 인경과 윤하 역시 미리 가게에 도착해 사전 조율을 하고 있다.

“젬마 언니, 오기로 한 오빠들···.”

“너 미쳤어. 가게 예명을 부르면 어떻게.”

“아, 미안해요, 언니. 깜빡했어요. 습관이 돼서···.”

“조심해. 그리고 좀 친해지기 전까지는 오빠라고 하지 말고, ‘누구누구 씨’라고 하고. 우리 가게 손님들 만나는 거 아니다.”

“알았어요.”

“진짜 조심해라.”

“알았어요. 근데 언니, 본명을 말해도 되는 걸까요?”

“야, 그럼 소개팅에 본명 대지, 예명 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너, 그럼, ‘안녕하세요, 전 젬마에요.’, ‘전 하이디예요.’ 그럴래?”

“그런 건 아니지만, 본명을 얘기했다가···.”

“너 그거 피해의식이야. 네가 말하지 않는 이상, 너 술집에서 일하는 거 아무도 몰라.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나 내 옆에 앉았던 손님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데도 못 알아봤다고. 우리 일하는 가게 조명하고 일반 이런 데 조명하고 틀려. 화장도 다르게 하고 왔고. 오늘 만나고 다른 데서 만나도 절대 못 알아봐. 그리고, 야, 너 그렇게 특징적인 얼굴 아니야.”

“언니이!”

“예뻐, 예뻐. 단지, 너 같은 애들이 여기 강남에 많아서 그렇지. 너 코 그거 <다이아>에서 했지?”

“언니,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거기 선생님 특징이 코끝을 꼭 그렇게 동그랗게 잡아.”

“대박.”

“그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냥 일반인이야. 삼성동 역에 있는 작은 필라테스 전문 짐에서 일하는 강사들. 알았지?”

“알았어요. 혹시 필라테스 관련해서 물으면 언니가 대신···.”

“쉿, 저기 온다.”

때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온 정도와 아리.

눈에 너무 띈다. 한쪽은 힙합이고 다른 한쪽은 넥타이까지 맨 정장.

직원의 안내를 기다리던 중, 인경이 손을 들어 위치를 알려주자, 정도는 그들이 앉아 있는 코너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리는 조용히 숨을 들여 마시고 그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소개팅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나가고 싶다.

그녀가 그날 거기에 간 이유는 선배 파트너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비(非) 변호사인 그녀가 <해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정도의 서포트가 절실했기에.

그녀에게는 그날 그 자리도 직장생활의 연속이다.

“오빠, 여기.”

“아. 미안. 먼저 와 있었네.”

“아냐. 우리가 일찍 왔어. 잘 있었어요?”

“응. 경이는?”

“그럭저럭. 아, 그리고 여기는 나랑 같은 짐에서 일하는 동생, 윤하.”

“안녕하세요.”

“와- 예쁘시다.”

“고맙습니다.”

동행인의 소개를 먼저 받은 정도가 옆에 있는 아리를 봤다. 여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쭈뼛거리고 있자, 정도는 후배의 어깨를 툭 치며 그의 소개를 대신했다.

“여기는 제가 아끼는 후배, 김아인 변호사. 같은 로펌에서 일해요. 인사해, 인마.”

“아···안녕하세요, 김아인입니다.”

여전히 15도 숙어진 고개.

그늘이 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왔지만, 또 막상 상황에 처하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근데, 후배분이 부끄럼을 많이 타시나 봐요.”

“응, 같이 일하다 보면 안 그런데.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낯을 많이 가려. 야, 김아인, 고개 좀 들고 똑바로 인사해.”

“아···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는 아리.

이제 그녀의 눈, 코, 입이 조명 아래 명확히 드러난다.

“어! 아리 언니?”

---*---

「3개월 전,

논현의 한 오피스텔.

“어! 아리 언니?”

그날도 오늘처럼 우연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돈을 꿔서 가까스로 병원비를 감당하고, 시간이 날 때면 닥치는 대로 알바를 뛰어서 잎에 풀칠하던 중이었다.

이른 새벽 야식 배달을 뛰고 있던 나는 1년 전 같은 헤어샵에서 잠깐 같이 일했던 윤하를 논현의 한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풀메이크업에 머리 세팅까지 한 그녀에게서 술, 담배 냄새가 풍겼다.

이 근처 오피스텔에 사는 여성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

단번에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었다.

“어···윤하야.”

“언니! 어떻게 지냈어요?”

“응? 뭐, 그냥.”

“샵 그만뒀어요?”

“응···.”

“그랬구나? 그럼 지금 뭐 해요?”

방금 주문한 배달 음식을 전달했음에도 윤하는 그런 질문을 했다. 원래 조금 생각 없이 말하는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웃어넘겼다.

“배달 일 하는 거예요? 왜요? 언니 원장 선생님이 좋아했잖아요. 실력도 좋았고.”

“집에 무슨 일이 좀 있어.”

“아— 그렇구나.”

“그럼 나 갈게. 근무 중이라서···.”

“언니, 잠깐, 잠깐. 전화번호 알려줘요. 언제 같이 밥 한번 먹어요.”

“밥···?”

고작해야 한 6개월 같이 일했을까? 내 꼴을 보고도 밥 먹자고 하는 윤하의 의도가 의아했지만, 요청을 거절하기도 그래, 그냥 주고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윤하로부터 전화가 왔다.

피했다.

또 전화가 왔다.

또 피했다.

그랬더니 문자가 왔다. 시간 편할 때, 꼭 연락 좀 달라는 거였다.

“나 사실 언니한테 꼭 밥 한번 사고 싶었어요.”

“?”

“나 샵에서 일할 때, 다른 언니들이 나 능지 떨어진다고 무시하고 왕따하고 그랬는데도, 언니는 나랑 밥도 먹어주고 도와주고 그랬잖아요.”

“네가 그랬나···.”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배달 일 뛰어야 할 정도로?”

“응···.”

“왜요? 무슨 일인데요?”

“누가 좀 아파.”

“누가? 엄마?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

“아, 그렇구나.”

“······그래서 말인데···.”

사실 만나러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이제 주위에 돈을 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난이란 게 그렇다. 마치 늪에 빠진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거라면 지푸라기라도 부여잡게 된다.

“혹시 여윳돈이 있으면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네? 돈이요? 나···돈 없는데.”

“한 백만 원만이라도 빌릴 수 없을까? 꼭 필요해서 그런데···.”

“미안해요, 언니. 진짜 돈이 없어요.”

수백만 원짜리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그녀였지만, 정작 빌려줄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잠깐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동료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나도 잘 안다. 내 부탁이 비이성적이었다는 걸.

“미안.”

“아녜요.”

“······.”

“······.”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집에 누워있는 인간의 기저귀 살 돈조차 없었으니까.

“언니.”

“···.”

“언니, 혹시 돈 필요해요?”

그리고 한 일주일 뒤,

오빠의 개불 같은 고추에서 흘러나온 오줌을 닦아내고, 방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다 깬 어느 새벽,

윤하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니]

[내가 지금 여기 마담 언니한테 물어봤는데]

[언니가 매력 있게 생겨서 나이 상관없을 것 같대요. 뽀샵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절대 아니라고 실물이 훨 더 예쁘다고 했더니, 언니더러 가게 한번 나오래요.]

[울 마담 언니 꽤 좋아요. 아는 손님도 많고.]

[그러니까 언니 편할 때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아, 그리고 내가 마담 언니한테 언니 사정 말했더니, 진짜 이 일 할 맘 있으면 마이킹 3천까지 당겨줄 수 있대요.]

거짓말하지 않겠다.

그날 난 바닥을 뚫고 저 어두운 심연까지 가라앉아 있었고, 살려만 준다면 악마가 내민 손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당장, 삼천만 원 아니 삼십만 원이라도 생긴다면 까짓것 술 좀 따른 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처럼, 눈앞에 다른 선택이 놓여졌다.

같은 날이었다, 오빠의 휴대폰에서 우연히 <해결>의 면접 요청 문자를 보게 된 것이.」

---*---

“아리 언니? 아리 언니가 누구야?”

우연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당신의 뒷덜미를 잡는다.

마치 여행을 준비하며 쌈짓돈을 거의 다 모은 순간, 세상에 제일 미운 인간이 엄마를 데리고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한다든가 하는 것처럼.

“그게 누구죠? 저는 김아인인데요.”

언젠간 이런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왔을 때는,

“아···. 아리 언니 아녜요?”

“하- 존나, 여자 같이 생겼다고 지금 저 놀리시는 건가요?”

뻔뻔해야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