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33)

신데렐라도 12시까지는 있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정도는 김아인이 제출한 이력서의 가족관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리’라는 이름의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하하하하. 놀라셨죠? 이 친구가 조금 상남자가 같을 때가 있어요. 하하하. 회사에도 가끔 이래요. 선배 앞에서 아무 때나 육두문자를 날리고. 하하하하. 김 변, 아무리 그래도 숙녀분들이 계시는 데 조심해야지.”

“아, 그러시구나. 반전 매력이 있으세요. 안 그러니, 윤하야?”

아리의 말로 인해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정도가 애쓰자, 그의 파트너 인경도 덩달아 말수가 많아졌다.

욕 한 방이 세긴 세다.

흠칫한 놀란 윤하는 그날 저녁 ‘아리’라는 이름을 두 번 다시 들먹이지 않았고, 여자 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

이자카야 텟페이, 여자 화장실.

“언니, 근데 김아인 변호사라는 오빠 진짜 좀 여자 같지 않아요?”

“요새 여자 같은 남자들이 한 둘이니? 화장했나 보지.”

“제가 아는 어떤 언니랑 너무 닮았어요.”

“야, 너 저런 머리하고 다니는 여자 봤어?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이런 자리에 왜 여자 후배를 데리고 나와.”

1차가 끝날 무렵, 여성들은 화장을 고치러 가게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리’라는 이름을 다시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여전히 의아함이 남아있던 윤하는 화장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참고 있던 말을 털어 논다.

“아니, 제가 그 언니를 이삼 개월 전쯤에 우연히 만났었거든요. 그 언니가 원래 좀 보이쉬한게 있는데···.”

“변호사야?”

“아니요.”

“그럼 아니네.”

인경은 핸드폰을 꺼내 <법무법인 해결> 홈페이지를 열어 파트너 탭을 누르자, 세 번째 파트너 변호사로 ‘김아인’이 나온다.

“자, 봐. 김아인 변호사. 그 아는 언니가 트랜스야?”

“아니요.”

“로펌이 사기꾼 회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닌 여자를 남자 변호사로 속이고, 그것도 파트너 변호사 자리를 주겠어?”

상식적으로 그럴 일은 불가능이다.

“그렇기는 한데···.”

“그냥 비슷한 사람인가 보지. 그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똑같이 생긴 존재. 그걸 뭐라 그러더라, 도, 도, 아, 그래! 도플뱅어. 도플뱅어인가 보지.”

“그런가···.”

“아무튼 그 얘기 꺼내지 마. 아까 욕하는 거 봤지? 평소에도 얼마나 여자가 같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듣자마자 여자 앞에서 욕을 뱉겠냐? 양아치들도 아니고, 그래도 변호사 오빠들인데.”

윤하는 인경의 핸드폰 위에 뜬 웹사이트를 사진을 본다. 또 그렇게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의구심이 완전히 떨쳐내지지는 않는다.

“근데 원래 나오기로 한 오빠는 이 오빠 아니지 않았나요?”

“응, 아니었어. 야, 이제 근데 어디 갈까?”

“우리 클럽 가는 거 아니었어요?”

“클럽 가기에는 너무 이르잖아. 야, 그러지 말고 우리 실내골프 갈래?”

---*---

같은 시각, 이자카야 안.

스포츠브라 밑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검정 와이셔츠였으니 망정이지, 밝은색이었으면 색이 비칠 뻔했다. (물론 그랬으면 안에 하얀색 붕대로 감고 흰색 티셔츠를 입고 왔겠지만.)

“더워?”

“네, 조금.”

“그러길래 넥타이를 풀라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풀라는 말에도 후배가 꿈쩍하지 않자, 정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케이, 노타치. 아, 김 변 진짜 패션에 진심이었구나. 아, 근데, 파트너 어때? 내가 보기에는 예쁜 거 같은데. 약간 성형한 티가 좀 나기는 하지만.”

“네···뭐···.”

“‘네, 뭐’가 뭐야?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안 든다는 거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에 든다고 했다가는 괜히 애프터가 있을 거 같고, 그렇다고 안 든다고 하자니 괜히 까다롭게 구는 것 같고.

“잘 모르겠습니다.”

“김 변.”

“네.”

“혹시···김 변 모쏠이야?”

사람이 참 좋기는 한데, 간혹 이럴 때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모쏠이라는 추측을 하는 거지?

“아닙니다.”

“아닌 거 같은데. 여자 앞에서 버럭 화를 내는 것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땀을 흘리는 것도 그렇고.”

“아닌데요.”

“이 형한테 솔직히 말해 봐. 썸 같은 거 말고, 여자랑 정식으로 사귀어본 적 있어?”

“네, 있습니다.”

“진짜야? 언제? 말하는 투가 아닌 거···.”

“섹스도 해봤습니다.”

괜히 혼자 상상하고 이상한 걸 가지고 놀리기 시작할까 봐, 강력한 단어를 날렸더니 효과가 있다. 오히려 정도가 멋쩍어했다.

“아, 그래? 뭐 또 그렇게까지 세게 나오셔. 아무튼 오늘 끝까지 같이 노는 거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가 안 돼?”

“열 시까지는 들어가 봐야 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벌써 아홉 시인데.”

“네, 그래서 여성분들 돌아오면 인사하고 가려고.”

“안 돼.”

“저도 안 되는데요.”

큰 눈을 끔벅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 정도는 그가 진심임을 그제야 인지한다.

“뭐야, 진짜야?”

“네.”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는데요.”

“야, 신데렐라도 12시까지는 있어.”

“안 되는데요. 열 시까지는 꼭 들어가 봐야 합니다.”

“왜? 무슨 일이 있는데?”

오빠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집에 돌아가실 시간이다.

“장례식장에 돌아가 봐야 합니다.”

“장례식장? 그 오촌당숙인가 하시는 분?”

“네.”

“왜?”

“그게···저희 집안하고 좀 많이 친했던 분이시라······.”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정도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는데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누군가의 죽음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미간이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였지만, 이내 수긍한다.

“알았어. 그럼, 가야지 뭐.”

“죄송합니다.”

“아, 일이 또 이렇게 되냐.”

때마침, 화장실에 갔던 여자들이 돌아오고 아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인경과 윤하 역시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으나, 그런 면에 있어서 눈치가 빠른 윤하가 아리와 함께 1차에서 빠지기로 하면서 대충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가 봉합되었다.

인경과 정도는 실내골프장으로 향했고, 윤하는 ‘김아인’ 변호사와 함께 택시를 잡으러 대로변으로 향했다.

---*---

압구정 골목.

윤하와 함께 걷고 있는 아리. 윤하가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의심이 완전히 가신 거 아닌 것 같다.

“회사가 이 근처라면서요?”

“네.”

“변호사 일은 어때요?”

“어렵습니다.”

“일 많아요?”

“네.”

“그렇구나···.”

“···.”

자꾸만 끊어지는 대화를 윤하가 계속 이어보려 하지만, 반보 앞에 걷고 있는 상대는 절대 답을 길게 하지 않는다.

“변호사 오빠.”

“···.”

“오빤 내가 별로죠?”

“그런 건 아닙니다.”

측은지심이 들게 만드는 질문에 아리는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말투로 답해버렸다. 시종일관 쌀쌀하게 굴어서 윤하가 기분이 상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살짝 든다.

일이야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래도 마음씨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그럼 우리 커피 한잔만 하고 가요?”

그걸 잡아 아리를 붙들려고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장례식에 가야 해서요.”

“들었어요. 30분만, 아니 15분만. 그것도 안 돼요?”

“안 됩니다.”

윤하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고양이 표정을 지어도 보지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다.

“알았어요. 그러면 전화번호라도 주세요.”

“윤하 씨.”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제가 지금 연애를 할 형편이 안 됩니다. 윤하 씨가 별로라서가 아니라, 제 사정이 지금 누구라도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

단칼에 끊어버리는 모습에 입만 벌린 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택시!”

아리는 앞에 선 택시를 올라탔다. 그러고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뭐야, 저 오빠···.”

---*---

“이모님,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늦기는 뭘. 일은 잘 봤고?”

“네. 여기요. 택시비.”

“아이쿠, 뭘 이런 걸 챙겨줘. 오늘 수당도 넉넉히 보내줬으면서.”

“아니에요. 택시 타고 들어가세요.”

“고마워.”

“제가 고맙습니다. 근데 종종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리 좀 부탁드릴게요.”

“응. 미리 말만 해줘. 솔직히 병원에서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들 상대하는 것보다 이 일이 훨씬 나아.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말실수. 미안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쉬어.”

“네.”

좋은 사람을 구했다.

호스피스 케어를 하시던 분이었는데, 아주머니가 들어오고 나서는 오빠 관련해서 아리가 할 일이 없어졌다.

그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만 하면 될 뿐.

아리는 옷을 벗고 샤워실로 향했다.

초여름 날씨치곤 덥기도 더웠지만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속옷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아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바라봤다.

‘좀 더 남자다워야 해.’

근육이 없는 팔다리를 만지며 다짐한다.

진심이다.

어렵사리 잡은 동아줄을 어설프게 놓칠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세에에엣, 네에에······.”

---*---

월요일 아침, 회의 후, 아리는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는 정도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변호사님, 토요일은 죄송해요, 그렇게 가버려서. 인경 씨와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살짝 미안했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억지로 끌려간 것이었지만, 갑자기 간다고 했을 때 정도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회의 내내 신경이 쓰였다.

끝나고 휴게실로 불러 듣고 싶든, 듣고 싶지 않든 신나게 후기를 말해줄 줄 알았는데,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는 곧장 자기 방으로 향했다.

“말도 마.”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하— 솔직히 나도 살짝, 아주 살짝 느낌은 있었거든.”

지난 토요일, 아리와 윤하가 빠지고 둘은 실내골프를 치고 클럽에 가는 대신 호텔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다만, 관계가 끝나고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인경의 전화기에 들어온 메시지를 정도가 봐버린 것이었다.

“술집 같은 데서 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고 과거에 잠깐 그랬다고 하면, 넘어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근데, 하···.”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아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 진짜 기분이 엿 같네.”

“괜찮으세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러지? 나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어. 와- 그런데···.”

꽤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자꾸 감정이 격해져 말이 끊어진다.

“솔직히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아니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구라 치지 말라는 거야. 그래서, 또 내가 너는 술집에서 일하는 게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고, 이런 식으로 영업하냐고 화를 냈더니. 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하고는 나가버리더라. 하 참.”

아리는 듣는 거 말고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미안해, 김 변. 아마 같이 온 동생이라는 애도 술집애인 것 같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 진짜 기분이 왜 이렇게 엿 같냐.”

말은 거칠게 해도 그 순간에는 나름 진심이었던 로맨티스트 윤정도였다. 비록 술집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게 더 안타까운 모습이다.

“김 변, 오늘 끝나고 시간 돼?”

“네?”

“아무래도 한잔해야겠어. 이런 얘기 어디 가서 할 수도 없고, 김 변이 오늘 좀······.”

띠리링- 띠리링-

“아침부터 누구야? 여보세요.”

아리에게는 다행히도, 그날 저녁 또 술자리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법무법인 해결>의 윤정도 변호사님이신가요?

“네, 제가 윤정도 변호사인데요. 누구시죠?

-강남경찰서 여성범죄수사부 김용주 형사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정도에게는 다행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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