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수정 요청
여혜린으로부터 각본 수정 요청을 받은 이중기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그 아줌씨 뭐야? 도대체 뭔데, 왜 내 앞에서 계약 조항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트집인 건데? 너 똑바로 일 안 할래? 자꾸 이러면 나 안 써. 다 엎는 수가 있어.”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는,
“김아인 변호사~ 나랑 한잔하러 갈까요~.”
‘막내’ 변호사를 데리고 사라졌다.
“변호사님, 작가님 또 왜 저러시는 거죠?”
“그 온 세상이 다 제 것인 줄 아는 여자가 가서, 들쑤셔놨나 보지.”
“그럼, 이제 어떡하죠? 작가님, 한번 수틀리면서 진짜 방법 없지 않습니까.”
사실이다.
고집쟁이 노인네. 제대로 삐치면서 방법이 없다.
그렇게 고집부리다 제작사에 토해낸 계약금이 수억 원이다.
“김 변호사가 잘 달래겠지.”
“김 변호사가요?”
“어르신이 한눈에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 봤어?”
“아니요. 제 이름 불러주시는 데 1년 걸렸죠. 그랬네요. 유독 김 변호사를 좋아하시네요. 왜일까요?”
“모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분명 호감이 가는 인상이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근데, 형수···아니, 여 대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춘천에 직접 찾아간 거 보면 앞으로 이런 일들이 왕왕 벌어질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표정에 정도와는 달리 서지우는 담담한 표정이다.
“그래도 일이 더 크게 벌어지기 전에 선배님이 한 번 조율하는 게···.”
정도가 조심스럽게 건의해보았으나, 그 역시 고집쟁이이다.
“내가 왜?”
---*---
압구정동, 유명 삼겹살 가게.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며? 도토리만 먹여서 사육했다는 돼지고기로.”
“어, 잘 아시네요.”
“거기 암자에도 유튜브 다 나오거든. 저기요, 여기 목살 2인분하고 삼겹살 1인분 좀 가져다줄래요.”
“와- 작가님, 이런 데서는 되게 친절하시네요.”
“원래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친절해. 내가 무슨 괴짜인 줄 아나.”
“괴짜 아니셨어요?”
“어허- 시끄럽고. 술 할 거지?”
“아, 안 돼요. 저 들어가서 일해야 해요.”
“나하고 있는 게 일이야.”
“안 돼요. 진짜예요. 저 써야 할 신청서도 있고, 검토해야 할 계약서도 있고······.”
아리가 손사래를 치면 자꾸 거절하자, 이중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너 근데 변호사 자격은 있는 거냐?”
“작가님! 쉿!”
“그럼, 나랑 지금 술 마시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되는 거야. 여기요, 여기 소주 가져다주세요.”
“아, 진짜 안 돼요. 저 잘리는 꼴 보시고 싶으세요?”
“어허, 그거 되게 겁이 많네. 기다려봐.”
띠리링- 띠리링-
아리가 같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반항하니, 이중기는 회사에 있는 정도에게 전화를 건다.
-네, 어르신.
“정도야.”
-네, 말씀하세요.
스피커폰으로 되어있지 않는데도 볼륨이 워낙 커서 상대방 목소리가 잘 들린다.
“오늘 내가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기념으로다가 압구정에서 고기 좀 먹고 술 한잔하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지금부터 김아인 변호사를 내가 빌려도 되지?”
-아, 네, 그럼요. 김 변! 사무실은 걱정하지 말고 작가님 기분 좀 풀어드려!
“느그 대표가 물어도 네가 그렇게 전해. 알았지?”
-네, 그러겠습니다. 아, 근데 압구정 어디인가요? 이따 저녁에 저도 조인할까요?
“됐고. 너는 그냥 일하다가 퇴근해.”
딸깍.
“이러면 됐지?”
“힝- 이러면 곤란해요. 저도 일을 배워야 한단 말이에요.”
“어허- 너 나 무시하냐? 나도 엄연히 <해결>의 의뢰인이야, 이놈아. 나 같은 의뢰인이 어디 구하기 쉬운 줄 알아? 의뢰인 접대도 변호사의 일이야. 아주 중한 일.”
“그런 뜻이 아니라···. 힝.”
“자자- 그러지 말고 오늘은 나랑 맘 편하게 한잔해. 나, 자네랑 한잔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여 혜린인지 저 혜린인지는 핑계고.”
환갑에 가까운 어른이 그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난처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는 <해결>의 VIP 의뢰인.
아리는 큰 숨 한번 들이마시고 두 손으로 술잔을 받는다.
짠-
캬하-
“여기요. 소주 한 병 더 주시겠어요. 미소로요.”
“미소가 뭐야? 그런 소주도 나왔어?”
“미지근한 소주. 헤헤.”
“하하하. 역시! 이래서 내가 자네한테 한눈에 반했잖아. 여기요, 그러지 말고, 미소 한 짝 가져다주세요.”
---*---
느지막한 시각,
당직인 유이헌 과장이 서지우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신가요?”
“없어. 아, <꿈쟁이 스튜디오> 건 파일 좀 가져다줘. 서버에는 미팅 때 적어둔 메모가 없네.”
“케이스 폴더에 스캔해두기는 했는데···.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퇴근해. 수고했어.”
“네. 아참, 저녁 드시러 간 윤 변호사님은 아무래도 이중기 작가님하고 김아인 변호사님이 계시는 자리에 가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돌아오기는 글렀네.
“그래, 알았어. 나갈 때 내가 잠그고 갈게.”
“네, 그럼.”
로펌이라는 곳이 그렇다.
각자의 스케줄대로 맡은 일은 하는 곳이다.
유이헌 과장이 해당 파일을 두고 돌아가자,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징징-
[혜린: 어디야?]
오랜만에 조용히 일 좀 하나 했더니.
서지우는 핸드폰 설정을 무진동으로 바꾸고 화면이 바닥을 향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조금 전 유이헌 과장이 놓고 간 파일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혜린: 할 말이 있어. 10시쯤에 논현동 바에서 볼까?]
추가로 들어오는 문자를 보지 못한다.
---*---
압구정, 이베리코 돼지고기 전문점
<하몽하몽>.
“선배님, 오셨어용?”
저녁 시간, 정도는 식사도 할 겸 이중기와 막내가 마시고 있는 식당에 들렀다. 막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한 짝은 끝낸 모양이다.
“뭐야, 벌써 취한 거야? 얼마나 마셨는데?”
“저 원래 빨리 취하는데. 빨리 취하지만 오래에에에에-. 헤헤.”
“네놈은 왜 왔어? 오지 말라고 했는데.”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이중기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여분의 술잔이 오기 전에 술병을 들고 있다.
“아, 왜 그러세요, 어르신. 둘이 마시는 거보다는 셋이 마시는 게 좋고, 셋이 마시는 거보다는 넷이 마시는 게 좋잖아요.”
“그럼 그놈은 왜 안 왔어?”
“그놈? 아, 선배님이요? 아시잖아요, 바쁘신 거.”
“바쁜 척하기는···.”
“작가님! 제가 선배님 몫까지 마시겠습니다.”
“술도 못 하는 게 어디서 호기는···.”
“아, 진짜, 어르신, 저 어디 가서 술로는 이런 취급 안 당합니다. 술의 정도, 윤정도입니다.”
“야, 네놈이 술 처먹고 내 원고 홀라당 다 잃어버렸잖아.”
“아, 그때는 제가 진통제하고 함께 복용해서···.”
“시끄러워. 고수가 언제 장비 탓하는 것 봤어?”
“아- 진짜 자꾸 이러시면 저도 더는 안 봐 드립니다. 오늘 저랑 한번 제대로 붙으시겠어요?”
“어쭈구리. 야, 내가 얘랑 한 짝을 이미 비웠거든. 지금부터 시작해도 너는 나한테 안 돼. 그래봤자, 동네에서 술 좀 마셨다 수준이지.”
“아- 또 사나이 가슴에 불을 댕기시네요. 작가님, 제가 대학 때 우리 학교에서 술로 유명했습니다. 저도 짝으로 마셨어요. 지금은 나이가 좀 들어서 조금 힘들어도, 하면 또 합니다.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야! 어디 어른 앞에서 나이를. 됐고, 말이 기네, 술이나 받아.”
“얼른 주십시오!”
정도가 호기롭게 옆에 있던 물잔을 들어 가져대자, 이중기는 소주 세 병을 따 정도 앞에 놓으며 말했다.
“후래자 세 병인 거 알지?”
“네?!”
그 후로 세 시간 뒤,
빈 소주병이 두 짝을 넘어 세 짝을 채워간다.
주위의 사람들이 신기해서 힐끔힐끔 쳐다볼 지경.
호기롭게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시작한 정도는 좀 전부터 자동차 대시보드에 놓는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를 까닥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중기와 아리도 얼큰하게 취했다.
“근데요,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우리 대표 변호사님이 쌀쌀맞게 하면서도 은근 작가님을 되게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크크큭. 그놈이 날 좀 좋아하지.”
“왜요?”
“왜? 날 좋아하면 안 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벌써 한마디하고 관계 정리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한테는 안 그러잖아요.”
“말했잖아. 그놈이 힘들 때, 내가 돈 좀 벌어다 줬다고.”
“진짜 그게 다예요?”
“왜? 뭐가 더 있는 거 같아?”
“네. 그냥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갖지만은 않아서···.”
“그러는 너는 그놈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여기서 잘하고 싶어서···.”
아리는 말을 얼버무린다. 술 때문에 얼굴이 발개진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중기는 정도의 상태를 한번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멋진 놈인데. 마음은 주지 마.”
아리는 순간 흠칫하고 옆에 있는 정도를 힐끔 본다. 다행히 완전히 잠들어있다.
“여자한테는 아주 나쁜 놈이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아리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여자임을 밝히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기에.
“맞아요! 저는 아주 나쁜 남자에요. 그러니까 주미 씨가 절 혼내주세요!”
“뭐야, 이 새끼. 가게에 있는 술은 다 처먹을 것처럼 그러더니만, 두 시간 만에 취해가지고는.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셔야겠다. 이놈 이거 더 놔뒀다가는 불판에 머리를 박겠어.”
이중기 작가의 서울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고, 서지우에 대한 아리의 궁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서지우는 하려던 업무를 전부 마치고 나서야 전화기를 돌려 시간을 체크했다.
11:12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여혜린
1개의 (문자) 메시지]
[혜린: 할 말이 있어. 10시쯤에 논현동 바에서 볼까?]
세 시간 전에 들어온 문자.
잠깐 망설인 서지우는 답장을 하지 않고 가방과 재킷을 챙겼다.
일방적인 약속.
그곳에 갈 생각이 아니다.
그 심리를 이미 알고 있었을까, 논현동 바에서 보자던 여혜린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내 문자를 보고 무시한 거야? 아니면 일하느라 못 본 거야?”
서지우 역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안다.
“안 돼.”
“뭐가?”
“이중기 작가님 계약서 조항 변경해달라고 온 거 아니야?”
“호호호. 그새 텔레파시가 통했나?”
“꿈 깨. 누구라도 그 어르신 글에는 손 못 대니까.”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항이 들어있는 거구나? 네가 만든 거지?”
서지우가 드래프트(draft)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가 제일 우선의 계약서.
유명 작가였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서지우가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문구들이었다. 혹시라도 제작사나 투자사와 충돌이 생겼을 때, 작가의 권리가 절대적으로 우선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MJ 엔터테인먼트가 참여해서 진행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런 조항들에 여혜린이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영화사 청아>랑 계약이 된 상태에서 MJ 엔터테인먼트가 억지로 가져오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지우가 작성한 계약서에 그대로 바인딩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걸 몰라도 7, 8회차 중국 관련 장면들만 수정할 수 있게 도와줘.”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작가님 글에는 아무도 손 못 대.”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어. 계약을 버리는 수밖에.”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파기하면 다시 넷플릭스로 갈 거라고? 그럴 수 있겠지. 근데, 3년 뒤에나 그럴 수 있을 거야.”
“가처분 신청하려면 해. 2주도 안 돼서 넷플릭스랑 다시 계약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겠지. 실력 좋은 서지우 변호사님이니까. 근데, 너도 내가 한 말 제대로 못 들었구나. 나 계약 파기한다고 안 했어.”
“···.”
“버린다고 했지.”
재벌가 인물의 문제는 가끔 법보다 자신들이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거랑 돈으로 뭐든 얻어낼 수 있다고 자만한다는 거다.
지금 여혜린은 후자를 하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