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수색
도쿄 출장 후 첫 번째 월요일.
대표변호사의 외부 미팅 스케줄 때문에 매주 월요일에 있는 오전 회의가 미뤄졌다.
정도는 커피 한잔하자는 핑계를 대며 ‘막내’를 휴게실로 잡아끌었다.
“한 건 했다며?”
“네?”
“다 들었어. 아침에 고재경 대리하고 통화했거든. 김 변이 완전 멋있었다면서?”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고재경 대리가 완전 반한 거 같던데. 여자친구 있냐고까지 묻더라.”
<꿈쟁이 스튜디오>의 고재경 대리는 아리에게 홀딱 반했다.
외모도 그녀의 취향이었지만, 원작가 앞에서 구글 번역기 같은 말투로 만화 대사를 외는 변호사라니.
‘씹덕’의 기질이 있는 그녀에게 ‘그’는 완전 취향 저격이었다.
“혹시 그 자리에서 김 변이 했다는 대사가 출장 가기 전에 원서로 보던 만화책에서 나오는 거야?”
“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렇네요. 헤헤.”
“아무튼 대단해.”
대단한 정도가 아니다.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수준이다.
사흘 만에 일본어를 습득했고, 동시에 콘도 마에다의 만화들을 전부 외운 것이었다.
솔직히 서지우의 삭제 능력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만한 능력이다.
“대단하지.”
정도와 아리가 일본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는 사이, 휴게실 안으로 서지우가 들어왔다.
“어, 변호사님. 외부 미팅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가는 길에 전화로 해결됐어.”
“아- 아, 커피 하실래요?”
“됐어. 내가 해.”
서지우는 에스프레소머신으로 다가갔다.
“이야- 오랜만인데요. 변호사님이 누구 칭찬하는 거. 김 변, 그 정도로 대단했던 거야?”
“나는 그거 말한 게 아니었는데.”
“어, 그거 말고 김 변의 활약한 게 또 있었어요? 조 대리는 그것만 말해주던데.”
순간 서지우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바뀐다.
표정이 없으면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라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을 뿐인데, 장난기 서린 소년의 얼굴이 된다.
그가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건지 단박에 알아차린 아리는 그때 생각에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
「이틀 전,
도쿄 나리타 공항, 검색대.
“You, mister, can you come this way?”
(거기, 신사분, 잠깐 이쪽으로 오실까요?)
“Me.”
(저요?)
“Yes.”
(네.)
“Why me···?”
(왜 저를···?)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리스크가 터졌다. 어제 출국 시 인천공항에서 문제없었고, 나리타공항 입국 시에도 아무런 제지 없이 나왔기에,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여겼는데···.
공항 직원의 호출에 바짝 긴장한 아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서지우를 바라봤다.
절대 도와줄 표정이 아니다.
남자끼리는 그런 거 안 도와준다.
아리는 콩닥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달래며 보안 직원을 따라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이 가방, 당신 건가요?)”
흔한 검정 짐가방.
태그를 보니 아리의 것이 맞다.
방금 검색대 위에 올려놓았던 거다.
“(왜 그러시는 거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영어를 쓰던 아리는 조금이라도 상황을 쉽게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구글 번역기 톤의 일본어를 사용했다.
보안 직원들은 아리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살짝 반응했지만, 태도가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몸수색 좀 하겠습니다. 벨트 풀어 주시고 재킷과 조끼도 벗어주세요. 구두도 벗어주십시오.)”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이는 보안 직원이 명령조로 말했다.
“(네?)”
“(문제 있나요?)”
“(아, 아니요. 문제는 없는데···.)”
문제 있다.
여자니까.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타인의 여권으로 (비록 친오빠의 것일지언정) 여행 중이었다.
여권법 위반이다.
“(주머니에 있는 것들도 다 빼내 주십시오.)”
“(왜 그러시는 거죠?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러는지 먼저 알려주시면···.)”
“(지금 협조를 안 하시겠다는 겁니까?)”
모자에 하얀 장갑을 낀 남자 직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리를 쳐다봤다.
“(아, 아닙니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당장 공항을 빠져나와 가까운 항구로 토낀 뒤 헤엄쳐 한국에 돌아가는 상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다.
재킷과 구두를 벗은 아리는 조심스럽게 조끼를 벗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 이쪽에서 서서 팔다리를 벌려주세요.)”
아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심은 땀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맺힌다.
먼저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온몸을 스캔한 직원은,
“(몸수색하겠습니다.)”
라는 짧은 경고와 함께 아리의 몸을 톡톡톡 건드려가며 수색하기 시작했다.
소매부터 시작한 그의 손이 점점점 아리의 가슴에 가까워졌다.
급격히 동그래지는 아리의 눈.
그 순간 수치심 따위는 없다. 극도의 긴장감만 있을 뿐.
멈칫.
흉부를 톡톡 치고 내려갔던 손이 허리에서 잠시 멈추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사가 묻는다
“(왜?)”
“(아···.)”
뭔가 다른 감촉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
보안 직원이 다시 만져볼까 고민하는 순간.
“(뭐야? 당신 남자 좋아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에게 짜증을 냈다.
“(어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그녀의 과감한 도발이 위기를 모면시켜준다.
아리의 말에 기분이 살짝 상한 보안 직원은 이제 손을 내려 하반신을 수색했다.
하지만.
고비(?)가 하나 더 남았다.
발목에서부터 사타구니 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손.
찔끔.
긴장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톡, 톡, 톡톡······.
아리는 몸에서 힘을 빼기 위해 미세하게 몸을 떨어본다. 그 순간!
톡.
사타구니에 찬 그 ‘물건’이 보안 직원의 손끝에 살짝 닿았다.
흠칫!
순간 깊게 찌그러지는 직원의 이마.
‘아, 기모찌 와루이.’
시발, 손에 닿았다!
더러운 것에 닿았다는 듯이 직원은 손을 털며 팻다운(pat down: 수상을 물건을 위해 몸을 톡톡 치며 수색하는 행위)을 끝내고, 상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물건은 없다는 의미였다.
“(다 끝났습니다. 다시 입으셔도 됩니다.)”
아리는 일부러 더 여유를 부리며 구두와 양복을 다시 챙겨입고는 당당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말해줄 수 있나요? 이게 다 뭐 때문에 그런 건지?)”
그제야 공항 보안 직원들은 아리의 가방에서 발견한 동그란 환이 담긴 봉투를 끄집어내며 묻는다.
“(이게 뭡니까?)”
앗! 그건···.
청심환이었다.
혹시나 필요할까 해서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부치는 짐가방 안에다 넣어두었던 것인데···.
이번엔 캐리어에 안에 집어넣는 바람에 이 사달이 생겼다.」
*
“푸하하하. 뭐야? 청심환 때문에 몸수색을 당한 거야? 하하하. 그래서 뭐래?”
정도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라 긴요. 청심환이 뭔지 어떻게 설명해요. 그래서 뭐 ‘약이다’ 그랬다가. 무슨 약이라고 묻길래, ‘일종에 신경안정제 같은 거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또 처방전 보여달라고 그래서 아주 고생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냥 보내 줬어?”
“네, 결국에는 또 누가 들어오고, 나가고. 나중에는 한국말을 좀 하는 직원이 들어와서 설명해줘서 해결됐어요. 청심환을 알더라고요. 일본어로 ‘큐신’인가 하는 약하고 비슷하다고 설명해줘서 나올 수 있었어요.”
“푸하하하.”
“웃지 마세요. 비행기 못 타는 줄 알았다니까요.”
“웃기잖아. 청심환.”
깔깔거리며 웃는 정도와는 달리 아리는 다시 생각해도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혹시나 해서 그걸 차고 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변호사님은? 너 그러고 있는 동안 변호사님은 어디 계셨어?”
“서 변호사님요? 변호사님은 혼자 게이트 앞에 가 계시던데요.”
“아, 진짜? 크크큭. 선배님 답네.”
아리는 입을 빼쭉 내밀고 에스프레소머신 앞에 있는 서지우를 힐끔 봤지만, 표정에 변화 하나 없다.
그러고는 다 내린 커피를 들고 휴게실 밖으로 나가며 윤정도에게 일에 관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금요일 날 아무 일 없었어?”
“아, 있었어요. 공 대표님이 전화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안 그래도 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왜?”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제작 스케줄 때문에 MJ 엔터하고 마찰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사건의 연속.
원래 로펌은 그런 곳이다.
“그래? 그럼, 5분 뒤에 둘 다 회의실에서 봐.”
---*---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서지우 변호사입니다.”
회의를 끝내고 서지우는 <영화사 청아>의 공국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 변호사님, 이건 완전히 노골적이야. 제작을 지연시키려는 의도로밖에 안 보여. 잘하고 있는 걸 왜 갑자기 중단하냐고. 혹시 선생님하고 여 대표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결국 여혜린은 제작에 올스톱을 걸었다.
다른 핑계를 댔지만, 이중기 작가가 대본을 수정하지 않으면 제작을 멈추겠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7,8회 차 각본에 있는 중국 관련 장면들 때문에 그런다는 거는 저도 대충 알겠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촬영 개시 몇 주 남겨놓고 이러면 정말 OTT 런칭에 어떻게 맞추겠다는 건지 참. 솔직히 서 변호사님도 중간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게 괴로우시겠지만, 이거 저희는 완전히 고래 둘 싸움에 새우가 된 느낌입니다.
공 대표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으니,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방석일 것이다.
그래도 해외 출장이라고 배려해서 월요일까지 참고 기다려준 것이 고맙다.
-처음에는 이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여혜린 대표 장난이 아니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이럴 바에는 돈은 좀 적게 벌어도 차라리 넷플릭스랑 하는 게 나을 뻔했어요. 서 변호사님, 서 변호사님 중간에서 어떻게 해결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요, 이 드라마 정말 잘 돼야지, 안 되면 우리 해주, 해경이 길거리에 나 앉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
골치 아프게 된 건 <해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계약이 체결되었으니 로펌의 할 일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 관련해서 현지 법 자문이나 계약 검토 정도만 남았을 뿐, 이제는 작가와 제작사, 투자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한국에 둘도 없는 두 고집쟁이가 만나는 바람에, 게다가 둘 다 서지우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나서야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만나서 조율하겠습니다.”
---*---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이사님, 스케줄이 타이트해서 며칠 만 차질이 생겨도 OTT 런칭에 맞추기 힘든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
차동균의 보고에 여혜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도 안다. 자칫 더 큰 손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번 기 싸움에 지면 작가에게 자꾸 끌려다닐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해결>에서는 연락 없어?”
“네.”
끄응.
“어쩔 수 없잖아. 중국을 포기할 수도 없잖아.”
“제가 알아보니까, 해당 부분이 심의에 걸릴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심의에 걸리는 것보다 중국 시청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요새 더 무서워. 한번 바이럴 걸리면 가짜 뉴스가 확 돌아버리니까.”
“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올스톱 명령을 내렸지만, 그녀도 마음이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안 되겠어. 지금 <해결>에 전화해서···.”
똑똑똑
-대표님, <해결>의 서지우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전화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