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33)

항복

여혜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중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비단, 콘텐츠뿐만이 아니라 재화, 용역 등에 있어서도 세계 모든 기업이 진입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물건을 팔려면 당연히 그 나라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당연하다.

어느 구매자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판매자의 물건을 사고 싶어 할까?

다만,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국가가 개입해서 검열이라는 것을 한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어린이 동화의 곰 캐릭터가 국가의 우두머리와 닮은꼴이라고 비교된 이후로는 중국 내 해당 캐릭터의 영화 상영을 금지하고 언급이나 이미지 포스팅이 제재를 받는다든지.

물론, 그것을 문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희화화하는 것이 너무나 거북해서 검열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행위로 받아들인다고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검열의 잣대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설사 이번 드라마에서 해당 작품을 수정한다고 해도 다른 작품에 어떤 장면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OTT 플랫폼 진출 자체가 정부에 의해 제재당할 수 있다.

이번에는 몇 장면이지만, 다음번에는 한 편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 제 손을 묶다 보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프로파간다를 만들게 된다.

그 어느 분야보다도 자유로운 사상을 가져야 하는 예술 산업에서 그런 식으로 옭아매어지면 결코 더 크게 될 수 없다.

서지우는 그게 더 큰 리스크라 판단했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송 기자님, 기사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

「‘차이나 머니’에 빠진 K엔터테인먼트···중국 눈치 보는 제작사들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피식-

태블릿 PC에서 유명 포털 실시간 인기 기사들을 확인하던 여혜린은 웃음이 났다.

“경고도 서지우답게 하네.”

어제 서지우와 한판 설전을 벌이고 생각이 많았던 여혜린이었다.

아직도 왜 해당 장면들의 악당들을 중국이 아닌 다른 국민으로 수정할 수 없는지,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나오면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MJ야.」

사실이다.

싸움을 계속하면 그 누구도 제작 못 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자신도 무릎 깊숙이 들어온 상황. 계속하면 MJ도 다리를 잘라야 할 것이다.

이중기 작가의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걸 인정한다.

그녀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쓴 계약서야. MJ라도 이길 수 없어.」

“후— 그래, 이번에도 네가 이겼어, 전남편.”

띠리링- 띠리링-

-네, 이사님.

“<청아> 공 대표한테 연락해서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계속 진행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것도 전해. 앞으로는 절대 멈출 일 없을 거라고.”

---*---

“아······.”

이전에 김아인을 만난 적은 없었다.

피해자 진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찾아간 적은 있었지만, 사고 직후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대신, 동생 김아리를 몇 번 만났다.

<법무법인 해결>의 회의실에서 ‘김아인’ 변호사를 만난 나중혁 형사는 처음부터 말문이 막혔다.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는 그와 만난 김아리와 다르면서도 같았다.

“왜 그러시죠?”

자신을 본 나중혁 형사가 살짝 당혹스러워하는 리액션을 눈치챘지만, 아리는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럴수록 더 뻔뻔해야 한다.

이미 한번 비슷한 경험을 겪은 그녀였기에 떨지 않는다.

“아, 아닙니다.”

“용의자를 찾았다고요?”

상대가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자, 나중혁은 곧바로 당혹함을 떨쳐버리고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네, 단서가 나와서 좋은 거기는 한데,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장부상으로 그자가 그날 해당 차량을 렌트한 것으로 되어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서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오빠와 엄마는 불법 렌트 차량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으나, 가해 차량의 위협적인 운전을 피하고자 차를 돌린 것이 그만 도로 옆 구덩이에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해당 사고는 국도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다만, 가짜 번호판을 단 불법 렌트 차량이라 당시 누가 운전했는지를 검거하지 못했고, 가해자 차량도 그 후 자취를 감쳐버렸기 때문에 사건은 미제로 남겨졌었다.

그런데, 최근 유명 자동차 커뮤니티에 빌라 지하 주차장 빌런으로 올라온 사람이 불법 렌터카 딜러 사기꾼으로 밝혀졌고 그가 가짜 번호판들을(오빠 사고 때 가해자 차량이 달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번호판을 포함하여) 사용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오빠의 뺑소니 사건이 수사 재개가 된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사건 당시 목격자도 없고, 피해자인 어머니 문정숙 씨와 김아인 씨가 안타깝게도 사고 직후 오랫동안 의식이 찾지 못하셔서 제대로 된 진술도 받을 수 없었고요.”

그래서 경찰도 CCTV 하나만 가지고 수사를 하고 있었다.

“네.”

“그래서 제가 오늘 김아인 씨를 찾아온 것도 사건 관련해서 당시 정황을······. 그전에 언제 의식이 돌아오신 건가요?”

며칠 전 김아리를 찾은 이유는 사실 별거 없었다.

그저 수사가 재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피해자들 상태를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당시 경찰서를 찾아와 애원했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자기가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응원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김아인이 깨어났다니···.

기대하지 않은 소식에 나중혁은 살짝 놀랐지만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다.

사건이 재개되고 피해자도 깨어났으니, 진술을 받아낼 수 있을 거고, 잘하면 가해자를 지목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찾아왔다.

그런데 그를 보고 있으니 문득 의문이 든다.

피해자가 깨어났다고 하길래, 어느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거나, 아니면 집에서 간호를 받고 있을 거로 예상했는데, 자기 앞에 서 있는 ‘김아인’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걸음걸이는 멀쩡하다 못해 당당했고, 얼굴에서는 윤이 났으며,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몇 달 전 사고로 사경을 헤맨 것 같은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물론 뇌사도 아니고 식물인간이니, 그럴 수 있다.

몇 년 혹은 몇십 년 만에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는 기적은, 많지는 않아도, 간혹 일어나니까.

그리고 그때 담당 의사에게서 김아인 환자의 의식불명 관련 명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좋다.

기적이 날 수도 있고, 기적이 일어났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다.

‘그런데 왜 찾아오지 않았지?‘

이제 막 깨어난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멀쩡히 사회생활을 그것도 이렇게 좋은 로펌에서 일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면, 자신이 당한 억울한 사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왔을 법도 한데···.

왜 먼저 찾아오지 않았을까?

“사고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아서요.”

“네?”

“그게 궁금해서 물은 신 거 아닙니까? 제가 언제 의식이 돌아왔는지?”

“아···네.”

“돌아온 지는 몇 개월 되었습니다. 의식이 없는 동안 동생이 잘 돌봐줘서 그런지, 재활이 빨랐습니다. 좀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집안 사정이 그럴 수 없어서, 일을 빨리 찾아야 했고요.”

“아···예.”

추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척척 정보를 주니, 나중혁은 별로 할 말이 없다.

“사고에 대한 기억이 나질 않으신다고요?”

“네. 전혀 나질 않네요.”

“그날 엄마를 모시고 차를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전혀···. 동생한테 들어서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그게 제 기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사하시는 데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아, 그러시군요.”

납득할 만한 이유. 나중혁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용의자가 나타났으니까 얼굴을 한번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죠.”

“그럼 경찰서에 한 번 나와주시겠어요? 기억이 나질 않으시더라도, 절차상 진술서를 작성하는 게 향후 수사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가 좋으실까요?”

“음, 제가 평일에는 일이 좀 바빠서.”

“다음 주 토요일에 제가 주말 당직입니다. 오전에 오시면 제가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원경찰서라고 하셨나요?”

“수원중부경찰서, 2층 교통범죄수사팀입니다.”

“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법무법인 해결> 나온 나중혁은 멋진 건물을 다시 돌아봤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김아인 씨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김아리 씨는 왜 전화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딱히 어떤 점을 꼽지는 못하겠지만, 이상하게 뭔가 목 뒤의 털을 건드리는 느낌이다.

---*---

“전화도 안 받고, 혹시 여기 있을까 해서 와 봤는데, 내가 맞았네. 역시 우리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건가?”

퇴근 후, 논현동 <바 어나니머스>에 들른 서지우를 여혜린이 찾아왔다.

“현명한 선택이었어.”

“망하면 네가 책임져.”

“회생 신청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마치 다 책임져줄 것처럼 내 결정이 틀렸다고 하더니, 망하면 고작 회생 신청해주겠고?”

“틀렸다고 말한 적 없어. 이길 수 없다고 말했지.”

후훗.

나이가 들어 건방져졌지만, 그게 정말 잘 어울린다.

여혜린은 순간 이 남자가 아직 자신의 남편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네가 도와주길 바랐을 뿐이야.”

“도와줬잖아.”

“들었어, 춘천에 내려갔다 왔다고.”

“정보가 빠르네.”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 고문 로펌이 되는 거는 어때? 고문료는 원하는 대로 줄게.”

서지우는 여혜린을 지긋이 바라봤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자,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여자.

“MJ 엔터에서 자문료를 받는 것보다, MJ 엔터를 상대로 의뢰를 받는 게 돈벌이가 더 돼.”

“하하하. 거절도 참 못되게 한다. 내가 그렇게 널 아프게 한 거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마음은 진지하다.

“착각하지 마. 개인적인 감정이 남아서 그런 거는 아니니까.”

“미안해.”

“······.”

여혜린의 입에서 사과라니. 서지우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전에, 그녀가 일어서 준다.

“외로워 보여. 근데, 미안.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약속이 있어서.”

거짓이 아니다.

조금 전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그녀를 알아보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좋은 시간 보내.”

“소개해 줄까?”

“아니.”

“왜?”

“헤어진 사이라도 전부인 새 남자친구랑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 없어.”

피식-

여혜린은 서지우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그와 다시 이어질 일을 결코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대답이다.

“그래도 청첩장은 보낼게. 찢든지 오든지 네 마음이지만.”

“좋을 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