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이의 남편이 될 뻔했던 남자 (1)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중혁아, 49번 국도 사건 검찰에 보냈어?”
“아니요. 아직 안 보냈습니다.”
“왜? 거기 피해자가 기억상실증 걸려서 더 나올 것도 없잖아?”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좀 더 조사하면 뭐가 나올 것도 같기는 한데···.”
“그게 뭔데?”
“그건 저도 잘···.”
문제는 뭐가 석연치 않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다.
“야, 그럼, 그냥 송치해. 이미 오래 끌었어. 용의자가 다른 혐의로 조사받을 때 이 건도 같이 검찰에서 하는 게 낫지, 그거 끝나고 이거 들이밀면 받는 압박감이 약해.”
“그렇기는 한데···.”
나중혁은 자꾸 김아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간절했던 그 얼굴.
용의자를 잡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에 사고 동영상을 올리고 하소연을 했던 여동생.
나중혁은 그런 그녀의 간절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나만 더 체크하고 올릴게요.”
“뭘 더 체크해? 체크할 게 있어?”
“여동생을 한 번 만나보려고요.”
---*---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굿모닝이야.
“할아버니! 할아버니가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이제 막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중기 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뒷이야기가 떠올랐어.
“네?”
-오늘 아침에 여기 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데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다음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오! 잘됐네요.”
-그러니까 가서 전해. 16부작도 좋고, 시즌 2도 좋으니까, 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일단 보내준 대본들은 보류해. 몇 가지 수정할 거니까.
“넵! 그렇게 전할게요.”
-그럼 또 연락할게.
“네, 들어가세요.”
딸깍.
좋은 소식이다.
작가의 대리인 처지에서도, 작품의 팬 처지에서도 꼭 잘됐으면 좋겠다.
아리는 전화기를 책상에 올려놓고 다시 거울을 봤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여자인 것이 들통나면 모든 걸 다 잃는다.
아리는 이마의 잔털 하나까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징징-
“어, 뭐 까먹은 게 있으신가?”
이중기 작가가 다시 전화를 건 줄 알고 전화기를 들어본다. 근데 들어온 전화나 메시지가 없다.
징징-
다시 들리는 진동 소리.
다른 전화기다.
아리는 서랍을 열고 다른 전화기를 확인했다.
얼마 전부터 집에 놓고 다니는 본인 명의로 개통된 전화기였다.
[안녕하세요. 수원중부경찰서 나중혁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아리 씨 오빠 되시는 분이 서로 찾아왔는데, 사건 당일 기억이 없으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그렇게 되면 형사처벌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괜찮으시다면 한번 만나 뵙고 오빠분의 상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요? 보시면 문자 주십시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날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왜 보자는 거지?’
아리는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눈치챈 걸까?’
그럴 리 없다. 그걸 그 형사가 의심할 이유도 없고.
‘근데 왜 날 보자는 거지? 목격자도 아닌데.’
여러 가능성을 짚어본 아리는 사고 직후 자신이 간절하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한 것이 그가 더 집요하게 나오는 이유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돌봐야 할 환자가 둘이나 생겼는데, 돈이 없었다. 보험금은 수술비로 한 번에 나가버렸고, 사방에서 빌리기 시작한 돈은 수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흘러나갔다.
아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가해자와의 합의금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해자가 잡히질 않고 있었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담당 형사에게 간절히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아리는 서랍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답문을 보냈다.
[안녕하셨어요, 형사님.]
[제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평일에는 곤란하고, 혹시 주말에 괜찮으실까요?]
직접 만나서 이제 다 괜찮아졌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변호사님.”
이중기 작가님이 연장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알리고 싶은 아리는 유이헌 과장을 보자마자 서지우의 행방을 물었다.
“대표님 출근하셨나요?”
“네.”
“방에 계시나요?”
“네, 근데.”
막내 변호사가 더 듣지도 않고 대표 변호사실로 들어가려 하자, 유이헌 과장이 잡는다.
“손님이 와계십니다.”
“아. 이 아침에요?”
“네. <오리온 펀드> 관련해서 일이 터져서 아침 일찍 엄재일 대표님하고 장 이사님이 와계십니다.”
“아···.”
“급한 일인가요? 그럼 제가 방에 쪽지 넣어드릴게요.”
“아닙니다, 그렇게 급한 일은. 제가 회의 끝나면 직접 말씀드릴게요.”
그 고집쟁이 이중기 작가를 설득했다는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건 관련 회의 중에 끼어들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윤 변호사님도 같이 들어가셨나요?”
“네.”
그렇다면 큰일이라는 건데···.
해당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아리는 닫힌 대표 변호사실 방문 뒤에서 오고 가는 대화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
한편 닫힌 대표 변호사 방문 뒤에서는······.
“이게 변호사가 주고 간 제안서인가요?”
“네, 괜찮은 오퍼니까 받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봄에 <오리온 펀드>와 체결한 계약서상의 추가 투자금은 없을 거라고.”
“인수합병과 상관없이 법적으로 계약이 유효하다고 말씀하셨나요?”
“물론입니다. 서 변호사님이 조언해 주신대로 우리가 <오리온 펀드>와 체결한 계약은 인수자에게도 바인딩(binding: 법적구속력) 된다고 말했는데도······.”
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왔다.
“ 변호사가 정확하게 뭐라고 하던가요?”
“<오리온 펀드>의 재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인수를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좋은 투자처들만 가려내고 있는데, 우리랑 체결한 계약은 장기적으로는 비전이 있어 보이지만, 당장은 자기네들한테 매력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체리 픽킹을 하겠다는 것 같은데요.”
체리 픽킹(Cherry picking).
회사를 인수하는 데에 있어 알짜배기 자산이나 계약들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행위를 칭한다.
이 같은 행위는 악용될 수 있기에 대부분 국가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으나, 여느 법이 그렇듯이 우회할 수 있는 전략은 많다.
회사를 분할한 다음 한쪽으로 알짜배기 자산과 계약을 몰아주고 다른 한쪽에는 실패한 투자나 채무들만을 주고 나서 전자를 고가에 팔고 후자는 파산시켜버리는 것이 가장 흔하고 심플한 방법이다.
이렇게 단순한 방법이 법에 안 걸리냐고?
걸린다. 다만, 실제는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훨씬 더 복잡하게 관계를 만들어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한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이미 소송을 해도 주체가 없거나 자산이 이미 다 사라진 이후라서 실익이 없게 된다.
“그래서 기존에 지급한 분할금과 향후 지급할 분할금을 <언리얼 VFX팀>의 지분으로 바꿔주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고 기존 분할금을 당장 회수하는 절차를 밟을 거라고···.”
<언리얼 VFX팀>, 엄재일 대표와 그의 팀이 5년간 고생으로 일궈놓은 회사.
아직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기술력을 인정받아 드디어 투자를 받았고 앞으로 2, 3년 후에는 흑자를 기대해볼 만했다.
운만 트여준다면 5년 후에는 상장도 가능할 만큼 영상 특수효과 부분에 기술력을 가진 회사다
<언리얼 VFX팀>과 <오리온 펀드>가 체결한 계약은 총 100억 규모의 투자계약이고, 총 5회차 나눠 투자금을 분할 지급하게 되어 있으며, 계약 종료 시, 투자금으로 지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옵션이 들어 있었다.
현재 2차 분할금까지 들어와 있는 상태인데, 문제는 해당 계약을 레버리지(leverage: 담보)로 국내에서 대출을 받아놓았다는 점이었다.
추가 분할금 지급이 되지 않으면 대출을 막을 수 없고, 그러면 디폴트가 나서 도산 절차에 들어가거나 공격적인 인수합병에 취약하게 된다.
“지금 저쪽에서 하려는 것은 위법입니다. 중재에 가도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해보든가요. 계약서에 싱가포르 중재 조항이 포함된 건 알고 계시죠? 그리고 중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추후 분쟁이 생길 경우, 영국 법원에서 소송하게 되어 있고. 그걸 다 끝내려면 5년? 6년? <언리얼 VFX팀>이 그걸 다 견디어 낼 수 있겠어요?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오리온 펀드>가 당장 다음 분할금 지급을 하지 않으면 대출 상환에 문제가 생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라고 의 변호사가 말했다.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좋은 패를 들고 있지만, 자본금이 없어서 죽어야 하는 경우다.
도 <언리얼>이 몇 년 안에 황금알을 낳는 회사가 될 거라는 분석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언리얼>의 현 자금 사정을 압박해서 지분을 취득하려는 셈인 것이고.
문제는 <언리얼>에 대한 평가가 공통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투자자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어떡하죠, 서 변호사님?”
의 사내 변호사가 주고 갔다는 제안서를 유심히 들여다본 서지우는,
“제가 하고 직접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 주십시오. 사실 저번 미팅 때도 변호사님이 계셨으면 했는데, 약속 시간도 되기 전에 찾아와서는 자기네 말만 하고 돌아갔었어요. 변호사님께서 꼭 좀 해결해주십시오. 저희 상황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큰 프로젝트가 없어서요. <오리온>의 추가 분할금이 꼭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인데, 이사진들하고 이야기해보았어요. 만약 저쪽에서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최악의 경우 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사 지분의 거의 50% 가까이 되는 양을 넘기게 되는 건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걸 변호사님께 알려드리는 겁니다.”
부담을 잘 느끼지 않는 서지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의 중압감이 느껴진다.
“잘 알았습니다. 제가 연락해보겠습니다. 어제 회의를 주도했다는 의 사내 변호사가 누구였나요?”
“로건 폴슨이라는 변호사였습니다.”
Logan Paulsen···.
“지금 로건 폴슨이라고 하셨나요?”
“네. 키는 한 180cm 정도 됐고, 금발 곱슬머리를 가진 백인 남자였습니다.”
그가 맞다.
태이의 남편이 될 뻔했던 남자.
사람의 인연이란 참······.
---*---
싱가포르,
사무실.
“로건 씨, <언리얼>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야? 벌써 결정을 내린 거야? 생각보다 빠른데.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쪽 상황이 더 다급했던 모양인데. 알았어. 안 그래도 계약서 초안 잡고 있었어.”
“그전에 그쪽 변호사가 로건 씨랑 통화하고 싶답니다.”
“그래? 그러지 뭐. 언제?”
“싱가포르시간으로 내일 오전 10시에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알았어. 기다리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아, 제임스.”
“<언리얼> 측 변호사가 누구야?”
“미스터 ‘지우 서’라고 합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로건의 이마의 깊은 주름이 파인다.
“이름이 뭐라고?”
“JIWOO SEO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그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인연 참···개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