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에는 나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몇 주 전,
로스앤젤레스의 한 퓨전 일식당.
넷플릭스(Net-flick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라나 나카지마는 친구 태이 민을 만났다. 태이는 로펌 <데이비스 앤 마이어>의 시니어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까워?”
“응. 너무 재미있거든.”
몇 개월 전, 올라나는 한국의 한 영화사 제작사에서 흥미로운 피치(pitch: 투자 유치를 위해 프로젝트 홍보를 하는 행위)를 들었다.
한국의 유명 작가가 쓰고 있는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 대한 피치였다.
그냥 듣기에는 조금은 뻔한 로맨틱코디미물이라 여겼는데, 몇 주 뒤 1회차, 2회차 스크립트 번역본을 받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너무 재미있는 것이었다.
“1회차, 2회차밖에 안 읽어봤다며? 시작이 좋은 작품들은 꽤 많잖아. 텐션을 끝까지 유지하는 게 관권이지.”
“유지해.”
“읽어봤어?”
“응. <영화사 청아>의 해외 팀 팀장에게 부탁해서 나머지 각본을 다 구했어. 아직 수정 중이라고 하던데, 일단 구한 것들을 번역해서 읽어봤거든.”
“히트 감이야?”
“메가 히트 감이야. 너 나 촉 좋은 거 알지? 내 20년 커리어에 메가 히트라고 한 것 중에 안 된 게 몇 개나 있어?”
“없지.”
“그렇다니까.”
“그렇게 좋아?”
“응. 캐릭터들이 살아있고, 이야기도 도대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게 흥미로워. 매력적이라 계속 보고 싶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로맨틱코미디라며?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있다니까.”
“네가 그렇게 설레발을 떠니까, 조금 보고 싶어지네.”
“읽어볼 테야?”
“됐어. 러브스토리가 러브스토리겠지.”
“왜에?”
“이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까, 그 이야기가 다 그 이야기 같아.”
“그렇기는 한데, 사랑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는 거야. 아무튼 아주 아까워.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계약할 걸 그랬어.”
“그렇게 아까워?”
“응. 안 그래도 요새 코리안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 괜찮은 프로젝트들을 구하기 쉽지 않은데. 이건 잘하면 넥스트 ‘크래쉬 랜딩 온 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올라나는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민태이도 올라나의 계속되는 칭찬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그거 진짜 잘 됐다고 하지 않았어?”
“잘 돼? 그냥 잘 된 정도가 아니야. 메가 울트라 히트작이었어.”
“오버는.”
“진짜야.”
“그 정도면 진짜 아깝겠네.”
“진짜 진짜 진짜 아깝다니까! 아까부터 그 말을 하고 있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그 프로젝트 관련해서 그 한국 영화사랑 MOU(양해 각서) 작성했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런데, 존이 양해 각서 가지고는 권리 주장을 해볼 여지가 없다고 해서···.”
“그래?”
“그래도 네가 한번 봐볼래? 비공식적으로? 보고 네 생각에 끼어들 여지가 있으면 내가 위에 한 번 이야기해 볼게.”
잠시 고민한 태이는 친구 올라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오케이.”
“굿!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양해 각서 사본이랑 스크립트 보내줄게.”
“스크립트는 필요 없다니까. 네가 그러지 않아도 읽을 게 내 책상 위에 산더미야.”
“진짜 딱 2화까지만, 아니, 1화 엔딩까지만 봐봐. 아마 다음 화를 안 볼 수가 없을걸.”
결국 올라나는 스크립트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이것저것 케이스 파일들을 보던 민태이는 머리도 식힐 겸 올라나가 보내준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스크립트를 읽어내려가 시작했고,
올라나의 예언대로 그녀는 끝을 보기 전까지 스크립트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유는 스크립트가 재미있어서는 아니었다.」
---*---
<법무법인 해결>, 대표 변호사 사무실.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이었나?”
이혼 후에도 그녀와는 편하게 지냈었다.
애초에 일주일도 가지 않은 결혼이었기에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녀는 <타일러 앤 로즈>에서 나왔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김앤강>에 입사했다.
한동안은 이메일도 자주 주고받으며 친구처럼 지냈다.
그녀가 한국에 나올 일이 있거나 내가 LA에 갈 일이 있으면 연락해서 같이 밥도 먹고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일하는 <데이비스 앤 마이어>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클라이언트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로펌이었기에 말이 통했다.
그러다 3년 전쯤 그녀를 한국에서 만난 이후로 연락이 뜸해졌다.
딱히 계기나 사건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둘 다 바빠졌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적어도 그게 내 생각이다.
“좋아 보이네.”
“너도.”
“오는 비행기에서 봤어. 론 실버가 하는 큰 프로젝트에 법률 자문을 맡기로 했다며.”
“응.”
“축하해.”
“고마워.”
그녀는 3년 전과도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늙었다는 말도 아니고 얼굴을 고쳤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달랐다.
이제는 정말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 같은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나오는 저 표정.
그녀는 3년 전 갑자기 인사를 하러 찾아왔을 때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온 거는 아닌 것 같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응. 맞아. 사실 다른 데 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친구처럼 인사를 건넨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우리 회사 커피도 맛있는데.”
농담을 던져봤지만,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결심을 이미 내린 모양이었다.
“재미있더라.”
“?”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그게 제목인가?”
정말로 그것 때문에 그녀가 다시 나를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못 했을까?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아니라도 충분히 언젠가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중기 작가가 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그녀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그녀에게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이중기 작가의 대리인으로서, 이제 막 크랭크인에 들어간 작품의 대본이 관련 없는 미국 로펌의 변호사한테까지 전달된 경로가 순간 궁금했을 뿐.
깊게 추궁하려고 던진 질문도 아니었고, 그저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에 튀어나왔다.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내 과거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창작거리가 돼서 세상에 까발려지는 거 불쾌해.”
그 순간, 며칠 전, 여혜린이 내게 해준 말이 오버랩되었다.
「나는 싫은 것 같아. 너랑 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는 거.」
“그런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난 누구에게도 그날 우리가 라스베가스에서 한 일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는데.”
나도 없다, 한 명을 제외하곤.
그 한 명이 하필이면···.
“과거를 지우고 싶은 사람도 있어, 서지우.”
여혜린이 옳았다.
나의 이야기에는 나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
“방금 서 변호사님 방으로 들어가신 분이 두 번째 부인이세요?”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턱 밑에서 찰랑이는 단발이 잘 어울리는, 자유분방하고 귀여운 여자를 상상했는데.
방금 대표 변호사실로 들어간 여성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자애로울 것 같았다.
“응. 형수님 많이 변하셨네.”
“변호사님도 잘 아세요?”
“아니, 5년 전에 뵙고 못 뵀지.”
‘그런데 ‘형수님’이라는 말이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오지?’ 의아했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원래 두 분이 그럼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신 건가요?”
“아니, 방금 말했잖아. 5년 전에 뵙고 못 뵀다고. 내가 왜 형수님하고 연락을 하고 지내. 나 그런 놈 아니야.”
“아니요. 서 변호사님하고 저분하고요.”
가끔 말귀를 참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눈치도 없고.
“아, 서 변호사님이랑 둘째 형수님? 아, 형수님이라고 자꾸 부르는 건 좀 그런가? 근데, 또 ‘민태이 씨’ 이렇게 부르기도 좀 그래서.”
“그래서, 서 변호사님하고 민태이 씨하고 계속 연락하고 지내신 거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부부 사이 일을.”
“헤어진 부부 사이겠죠.”
“뭐야?”
“뭐가요?”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팩트를 확실하게 집고 가네. 몰라, 나도. 3년 전에 우리가 다른 건물에 있을 때, 잠깐 왔다 가셨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모르지, 나야, 두 분 사이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리는 닫힌 대표실 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몹시 궁금했다.
너무나 궁금해서 귀를 가져다 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안에서 두 분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몰라.”
“근데, 김 변.”
“왜요?”
“김 변은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아······.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안 읽으셨어요? 궁금하지 않나요? 두 주인공의 뒷이야기?”
정도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리고 눈이 커진다.
“궁금해! 존나 궁금하지. 아, 그렇네. 선배님하고 민태이 씨 이야기였지! 완전 까먹고 있었어!”
그는 로코매니아였다.
“그러게 지금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설마 갑자기 찾아와서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울레리오~’ 하는 걸까? 그럼 대박인데.”
“············그건 아닐 것 같은데요.”
“아니겠지? 그래도 그거면 완전 멋진 전개 아니야?”
“아니요. 별론데요.”
“야, 뭐야, 너. 로코도 잘 모르면서.”
---*---
서지우의 사무실.
“그만뒀으면 좋겠어.”
민태이의 요구는 옛정에 기댄 부탁이 아니었다.
“이해는 가지만 불가능이야.”
그녀는 이미 서지우가 그 같은 대답을 할 거라 예상했다.
“알아보니까, 네가 그 작가의 대리인이자 에이전트 같은 사람이라고 들었어. 맞아?”
“사실이야.”
“그럼 네가 우리 이야기를 판 거야?”
민태이는 팔았다는 동사를 썼다. 돈을 받고 팔았냐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니야. 말했듯이 그런 의도로 어르신에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굳이 설명하자면 실수였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와서 프로젝트를 망칠 수는 없어.”
“실수?”
실수라고···.
힘이 들어간 턱이 그녀가 지금 어금니를 물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짧게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내가 사과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그건 내 과거의 너도 존재했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너와 나의 개인적인···.”
“넌 그때도 그랬어.”
그녀는 물었던 이빨을 풀었다.
“좋아.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할 거야.”
“뭘 하겠다는 거야?”
“방금 말했잖아. 나는 누가 내 과거를 가지고 장사하는 꼴은 싫다고.”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지우 변호사님, 법원으로부터 송달받겠지만, 미리 알려드리죠. 제 클라이언트가 <영화사 청아>와 를 상대로 한국법원에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조만간 이중기 씨를 상대로 저작권법 위반에 따르는 손해배상 청구도 제기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