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33)

민태이의 진심 (2)

필라델피아, 컴캐스트 센터.

포시즌스 호텔.

창밖으로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는 서지우의 마음이 무겁다. 당장 눈앞의 표절 시비를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징징- 징징-

“응.”

-가처분 취소소송 기일 잡혔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일입니다.

“내가 출정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MJ 엔터 여혜린 대표님한테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비행기 안이라 연락이 안 돼서 저한테 연락하신 거 같은데, 더 이상 황재수는 걱정 안 해도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답게 잘 해결할 줄 알았다.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법원의 결정을 받아야 할 때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알았어. 제일 중요한 건?”

조지 왱커(George Wanker).

서지우가 지금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유.

-알아냈습니다. 출판사 이름은 <다이아몬드 퍼블리싱>이고요. 주소는 노스 헨더슨 로드 150-B입니다. 그리고 조지 왱커의 본명은 알렉산더 세르게이입니다. 방금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조지 왱커는 필명이었다.

게다가 가처분 신청서에 기재된 주소는 로펌의 주소.

어렵사리 원작을 구해 미국 출판사에 연락해보았지만, 이미 출판 계약이 완료되고 권리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다른 출판사로 넘어간 상태였다.

평소대로 하자면, 다른 출판사의 연락처를 얻은 후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움직였겠으나, 서지우는 먼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는 민태이의 얼굴을 보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고 싶었기에.

“수고했어.”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 대표님도 그렇고, <청아> 공 대표님도 궁금해하십니다. 언제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거냐고.

할 거다. 좀 더 확실한 카드를 확보한 다음.

“내가 돌아가서 한다고 해.”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딸깍.

전화를 끊은 서지우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한국은 캄캄한 저녁이었지만, 이곳은 이제 곧 하루가 시작된다.

서지우는 합의서와 사과문 초안을 브리프 케이스에 챙겨 호텔 방을 나섰다.

---*---

151-B 노스 헨더슨 로드,

<다이아몬드 퍼블리싱>.

“살다 보니까 별의 별이 다 일어나네. 내가 그걸 쓴 지가 10년이 넘어. 내가 쓴 거 중에 제일 잘 된 거기는 한데, 그래도 거의 절판된 거나 다름없지.”

-그 책 영화 판권 팔렸다고 하지 않았어?

“팔릴 뻔했다가 막판에 잘 안 됐어.”

-그래도 출판권 찾아오기를 잘했네.

“그니까. 안 그랬으면 이전 출판사하고 또 나눴을 거 아니야.”

-그래서 얼마를 받았다고?

“만 달러.”

-뭐? 진짜? 그런데 그거 진짜 괜찮은 거야? 너는 그게 표절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며? 그냥 명의만 빌려주는 거라며?

“알 게 뭐야.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내가 갈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근데 진짜 변호사더라고, 그것도 진짜 큰 로펌에. 아무튼 언제 한번 술이나 먹자고.”

알렉산더 세르게이(a.k.a. 조지 왱커)는 그저 명의를 빌려준 것뿐이고, 그 대가로 민태이로부터 만 불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이제 막 친구에게 자랑을 마쳤을 때 그의 허름한 사무실로 한국에서 온 변호사가 들어왔다.

“누구시죠?”

간판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않는 외관을 보고 들어왔다.

내부는 더하다.

출판사라고 등록되어 있지만, 직원이라고는 사장이자 작가인 알렉산더 세르게이 하나밖에 없었고, <다이아몬드 퍼블리싱>에서 출간한 책들은 전부 그가 여러 다른 필명으로 써낸 삼류 소설들이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이중기 작가님을 대리하고 있는 로펌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어로 말할 때나 영어로 말할 때 차이가 없는 그다. 짧게 소개를 마친 서지우는 영어로 된 명함을 세르게이 앞에 내밀었다.

출판사 사장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명함을 유심하게 살핀 후 퉁명스러운 말투로 다시 물었다.

“누구요?”

“이중기 작가님이요.”

“그게 누군데요?”

“당신이 고소한 사람.”

“내가요? 나는 누구를 고소한 적이 없는데.”

“그러면 문제가 되는데. 누군가 당신 명의를 도용해서 한국 법원에 명령을 신청한 거니까.”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놓고도 서지우가 하는 이야기가 무언인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진짜 만 달러만 받고 끝인 줄 알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그것도 한국에서 찾아올 줄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서지우는 쓸데없이 그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게, 서류 가방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꺼냈다. 영문으로 되어 있고 맨 앞 장에는 필라델피아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처럼 작성되어 있다.

“자, 당신이 이름도 모르는 내 의뢰인을 표절 작가로 매도하고 이미 수십억 원이 투입된 제작을 중단시켰습니다.”

“그게 무슨···?”

“왜 놀라죠? 여기로 당신이 사는 이곳으로 문제가 넘어오지 않을 줄 여겼나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

그를 찾아온 변호사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 당신 이름으로 된 가처분 신청이 내 의뢰인을 상대로 들어왔고, 나는 그걸 해결하러 지금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와 합의를 볼 생각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이 체크를 드리죠.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나는 곧장 이곳을 나가 이 서류를 이곳 필라델피아 법원에 제출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수백만 달러짜리 소송의 피고가 되는 겁니다.”

알렉산더 세르게이는 혼란스러웠다.

몇 주 전 한 동양 여자 변호사가 찾아와 현금 일만 불을 제시하며 명의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그냥 돈을 준다기에 그냥 그러라고 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위임장에 당신 사인이 되어 있는대도?”

“그것만 해주면 만 불을 준다고 해서 그런 거예요. 돈이 정말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

서지우는 민태이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짓까지 하며 한국에 찾아왔을까.

조금만 파보면 들통날 이런 짓을.

“알았어요. 그렇다면 그 여자 변호사가 당신의 명의를 도용해서 한국에서 소송을 했다는 건가요?”

“네. 전 진짜 뭘 하는 줄 몰랐어요!”

거짓말이다. 표절 소송을 건다고 고지했고, 성공률은 낮지만, 잘하면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다고도 말했다.

솔직히 양쪽 다 거짓말은 했다고 볼 수 있다.

민태이는 진짜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세르게이는 그녀가 그의 이름으로 소송할 거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이자와 더 길게 실랑이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믿어주죠. 그래도 당신의 사인이 들어간 위임장이 한국 법원에 들어가 있어서, 여전히 나는 당신을 고소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몰랐다는 거를 이곳 미국 법원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고, 아마도 당신이 만난 그 여자 변호사는 아니라고 증언하겠죠. <데이비스 앤 마이어>가 얼마나 큰 로펌인 줄은 알죠? 잘나가는 로펌의 변호사와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르게이 씨, 돈 많아요?”

“······.”

“법률 비용만 어마어마할 텐데···. 그리고 한국에서 이러한 행위는 사기죄에 해당하죠.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 법원에서 지면, 한국으로 송환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서지우의 몰아치는 언변에 세르게이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고소, 로펌, 법률 비용, 송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받은 일만 달러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그였는데, 갑자기 그 상상이 종착지가 감옥으로 변하고 있다.

사실 조그만 깊게 생각하면 자기 앞에 갑자기 찾아온 한국 남자의 말 중에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으나, 그는 그럴 여유도, 그럴 지능도 없다.

당장 변호사가 자기 명의로 소송을 하는 데 돈을 줬다는 사실만 말해도 무죄를 항변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 물론 민태이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증언할 거고, 그러면 증명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현금 일만 불에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명의를 파는 그런 놈일 뿐.

“자,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이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나와 합의할 생각이 있다면, 이 체크를 드리죠.”

서지우는 체크를 가리켰다. 똑똑히 볼 용기는 없고, 슬쩍 곁눈질해보는 세르게이. 체크에는 공이 다섯 개가 그려져 있다.

“하겠어요.”

그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렵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렇게까지 쉬울 줄이야.

서지우는 준비해간 가처분 취하서와 사과문 등을 꺼냈고, 세르게이는 여전히 내용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가 내미는 서류들에 사인을 갈겼다.

그렇게 절차를 끝내고, 서지우는 약속대로 수표를 건넸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원(Won)? 이게 뭐죠?”

“한국 통화예요.”

“한국 통화? 그럼 이게 얼마죠?”

“십만 원.”

“그러니까 그게 얼마···?”

“오늘 자 환율로 아마 79달러 97센트일 겁니다.”

그제야 자기가 변호사한테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세르게이가,

“뭐? 이게 무슨 개똥 같은···. 당신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너 변호사는 맞아? 이딴 식으로 사인하게 만들어 놓고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소리를 쳐보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다투면, 넌 이제 로펌 두 개를 상대해야 할 거야. 돈 있어?”

소용이 없다. 애초에 플리볼러스 리티게이션(frivolous litigation: 근거 없는 소송)을 목적으로 명의를 팔아 돈을 챙긴 거 그였으니까.

“이 사기꾼 새끼···.”

“그냥 길 가다 네 거지 같은 몰골을 불쌍히 여긴 사람한테 동냥 받았다고 생각하고, 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어디 가서 좋은 스테이크나 사 먹으면 돼.”

---*---

필라델피아, 컴캐스트 빌딩.

포시즌스 호텔.

띠리링- 띠리링-

-미스터 서, 미스 태이 민이라는 분이 밑에 찾아오셨는데요.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녀가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한 걸 다 얻었지만 체크아웃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똑.

“어서 와.”

“여기 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그제 인천공항에 있었던 거였구나.”

서지우가 문을 열어주자, 민태이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말했잖아. 1주일 안에 가처분 명령 취소될 거라고.”

“그래도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

서지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이름도 없는 작가에게 돈을 줘가면서 이런 근거 없는 소송을 하는 이유.

서지우가 아는 민태이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삼류 변호사가 아니었다.

아무런 이득도 없고, 의미 없는 짓.

들통이 난다면 변호사 자격을 잃을 수도 있는 짓.

아마 그녀는 본인 로펌에도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저질렀으리라.

왜? 도대체 왜?

정말이지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면 절대 할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 때문이야.”

“?”

“너는 그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르는구나.”

“······.”

“나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이렇게 비참한데. 너한테는 그저 하룻밤 실수였던 거야, 그렇지?”

서지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이중기 작가의 문제도, MJ 엔터의 문제도 아닌,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