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다리기
“우정민 의사 되시죠?”
“네, 제가 우정민인데요.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전화한 <법무법인 해결>의 최성태 부장이라고 합니다. 문정숙 환자에 관해 여쭈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최성태 사무장은 은평중앙병원을 찾았다.
우정민은 교통사고 후, 김아인과 그의 모친 문정숙을 진단 치료한 신경외과의사였다.
“그러니까 문정숙 씨가 애초에 치매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사실 치매라고 하면 노년기에 발생하는 퇴행성 뇌 질환으로 여러 가지가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정숙 씨 같은 경우는 사고로 인해 급격히 나빠지기는 했지만, ‘알츠하이머병’이 그 원인입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사고가 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되셨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신가요?”
“네. 사고 당시 뇌를 다치시기는 했지만 그게 현재 문정숙 씨가 앓고 있는 노인성 치매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사고 전에 문정숙 씨를 진단해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사고 이전에도 깜빡깜빡한다든지, 가끔 말을 더듬는다든지 하는 증상은 있었을 겁니다. 단지, 사고의 후유증으로 단계별로 왔어야 할 퇴행이 한꺼번에 왔다고 말씀드리는 수밖에요.”
“그럼, 혹시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안타깝지만 없습니다. 뉴스에서 치매 치료제가 나왔다고는 하는데, 아직 국내에서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고, 설사 승인이 조만간 떨어진다고 해도 효능이 얼마나 있는지는 의문이에요. 아마도 치매 초기라며 어느 정도 퇴행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문정숙 씨 같이 이미 많이 진행된 환자들에게는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최성태는 서지우가 궁금해할지 모르는 것들을 꼼꼼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가 질문을 마쳤을 때, 의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교통사고 범인이 잡혔나요?”
“왜 물으시죠?”
“아니요. 얼마 전에 김아인 씨가 다녀갔어요. 그 뒤로 수원경찰서인가에서 형사님이 다녀가셨고, 그리고는 오늘······.”
최성태가 나타난 거다.
안 그래도 너무 자세하게 설명을 잘해주길래 약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는 최성태가 교통사고 관련 소송 때문에 찾아왔다고 추측한 모양이었다.
“아, 네. 가해자가 잡히기는 했는데, 피해자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해서요.”
“그러시겠죠.”
“수원경찰서에서 찾아왔다고 하시는 형사님이···?”
“나중혁 형사님이요. 그때도 그분이 자세하게 물으시길래 조금 놀랐는데, 오늘 사무장님도 상당히 꼼꼼하게 물으시네요.”
“법원에서 이것저것 물을 수가 있어서요. 협조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혹시 제 소견서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사실, 몇 주 전에 김아인 씨가 나타나셔서 깜짝 놀랐거든요.”
“왜 놀라셨죠?”
“물론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만, 그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1~2주일 뒤에 의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김아인 씨의 경우처럼 수개월 뒤에 깨어나는 건 기적에 가깝죠. 그런데 너무나 멀쩡해 보이시더라고요. 의식이 돌아온 지 5~6개월 되었다고 하던데, 그런 것치고도 운동신경이나 언어능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 같더라고요.”
본디 친절한 사람인 것도 맞지만, 우정민이 최성태에 협조적이고 소견서 제공에 의욕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김아인에 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의학적으로 김아인을 좀 더 조사해보고 관찰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후 바로 찾아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MRI하고 몇 가지 조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간혹 의식회복 후에 다른 증상 등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돌아가서 저희 변호사님하고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네, 네. 의사로서의 제 소견이 그렇다는 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전하겠습니다.”
“네, 그럼, 조심히 들어···.”
“아, 한 가지만 더. 혹시 좀 전에 말씀하신 그 수원경찰서 형사분한테서 혹시 명함을 받으셨나요?”
“명함이요? 잠시만요. 아, 여기 있네요.”
“제가 사진 하나 찍어갈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근데 왜 그러시나요?”
“요새 가해자 변호사 사무실에서 형사 사칭해서 조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확인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아- 네.”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경장 나중혁」
최성태는 핸드폰으로 우정민 의사가 건네준 명함의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병원을 나왔다.
---*---
엄연히 가을이지만, 여전히 한낮에는 날씨가 덥다. 이러다 어느 순간 겨울로 바뀌어버리겠지만, <해결>의 사무실 안에는 여전히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온다.
“변호사님, 아이스크림 드시고 하세요.”
자기 방에서 일하고 있는 정도를 아리가 불렀다. 정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를 따라 휴게실로 갔다.
“웬 아이스크림?”
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바가 널려져 있고, 비서팀 이창현 사원과 송무팀 박창오 대리가 미리 와 있다.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 드시면 돼요.”
“김 변호사님이 쏘셨어요.”
“안 그래도 단 게 당겼는데···. 잘 먹을게. 근데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좀 더워서요. 우리나라 날씨도 이제 동남아 날씨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가을이 없어요.”
“유 과장님?”
“안 드신대요. 유 과장님 원래 군것질 안 하시잖아요.”
“걔도 참···. 무슨 낙으로 사는지 모르겠어. 사무장님은?”
“외부 출장 중이세요.”
“무슨 사건?”
“모르겠어요.”
“서 변호사님이 또 뭐 시켰나? 근데 김 변은 더워서 아이스크림까지 사 온 사람이 무슨 재킷까지 입고 있어?”
“네? 아-.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게 나와서요. 그런 기분 아세요? 더운데 또 에어컨 바람을 직접 쐬는 거는 싫은 거.”
“전혀 모르겠는데. 더우면 에어컨 바람을 쐐야지. 쐬기 싫은 건 또 뭐야? 창현이 너는 알겠어? 박 대리는?”
정도의 질문에 둘 다 잘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어, 모르세요? 그런 기분?”
“그런 기분이 뭐야? 더우면 덥고 추우면 추운 거지. 더운데 또 에어컨은 싫다는 게.”
“아, 있는데 그런 기분···.”
바로 그때, 휴게실 안으로 유이헌 들어오며 아리의 맞장구를 쳐준다.
“그런 기분 있는데.”
“아, 과장님은 아시는구나!”
“네.”
“뭐야, 둘. 어라, 그러고 보니 유 과장도 재킷을 입고 있네. 원래 몸에 근육이 많으면 추위를 덜 타는 거 아니야?”
“적당한 체온을 유지해야 근손실이 덜 해서요.”
“뭐? 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유 과장 심각하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운동 중독으로?”
“제가 병원에 가는 것보다 윤 변호사님이 짐(gym)에 가는 게 더 먼저일 것 같은데···.”
“어허, 왜 이래, 유 과장. 이래 봐도 이 와이셔츠 밑으로 다 근육이야. 창현아, 여기 만져봐. 딱딱하지.”
“물렁물렁한데요.”
“이 새끼들이.”
“그 정도로 물렁물렁하면 김 변호사님한테도 팔씨름 지실 것 같은데.”
“하- 참. 이 새끼들이 진짜 무시하네. 어이, 김 변, 붙어. 내가 지면 이번 야유회 때 내가 집에 있는 조니워커 블루 가지고 온다. 김 변은 지면 뭐 가지고 걸 거야?”
“네?”
아이스크림 먹다 말고 갑자기 팔씨름 대회가 열릴 판국이다.
당황스러운 아리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하지만,
“저는 김 변호사님한테 한 표 겁니다.”
“저도요.”
“이 새끼들이 진짜···. 야, 니들 다 죽었어. 니들도 걸어. 뭐 걸 거야?”
“내일 오전 커피 걸겠습니다.”
“저는 그러면···.”
갑자기 판이 커진다.
학창 시절 팔씨름은 잘했다.
여자애들한테 진 적은 없었고 마른 체형 남자애들을 이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성인 남성과 붙어서 이긴 적은 없다. 그럴 수밖에. 성인 남성과 팔씨름할 일이 없었으니까.
“유 과장은 뭐 걸 거야?”
“음, 저는 야유회 때 아침 샌드위치 걸겠습니다.”
“오케이! 콜! 김 변, 자, 붙어. 커먼커먼!”
도발에 불이 붙은 정도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손을 내민다.
이제 피할 수 없다.
잠시 고민한 아리는 왼손을 내밀었다.
“제가 사실은 왼손이 더 세서.”
“뭐야? 하-참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 보려고? 아, 오케이, 오케이. 왼손 콜. 원래 진정한 챔피언은 왼손 오른손을 가르지 않는 법이지. 자, 됐지?”
정도는 아리가 내민 왼손을 잡았다.
“뭐야? 왜 이렇게 노려봐? 김 변, 무서워.”
찌릿!
“힘 빼. 처음부터 이렇게 힘주면 반칙이야.”
분위기가 팽팽해지자, 유이헌이 맞잡은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알았어요. 제가 심판 볼게요. 자 두 분 다 힘 빼시고요. 준비-.”
살짝살짝 흔들면서 힘을 뺀다, 그러고는 맞잡은 두 손의 힘이 빠졌다 싶은 순간,
“시작!”
외쳤다.
*
「20년 전,
체육 시간.
“아리야, 여기서 왜 울고 있어?”
“오빠한테 맨날 팔씨름을 져서요.”
“뭘 그런 거 갖고 울어. 오빠는 남자잖아. 이 선생님이 알기로는 우리 반, 아니 학교 전체에서 아리를 이기는 여자아이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너무 분해요. 그럼 여자는 맨날 남자한테 져야 하는 거에요?”
“뭐? 하하. 다른 종목에서는 이기지.”
“그런 거 말고요. 팔씨름에서요. 팔씨름으로 이기고 싶어요. 이기고 놀리는 오빠가 너무 짜증 나요.”
“아리야, 그러면 이 선생님이 팁 하나 가르쳐줄까?”
“팁이요?”
“응. 신체적으로 차이가 크게 나면 무슨 방법을 써도 이길 수 없지만, 비슷한 체격이면 이길 수 있어.”
“어떻게요?”
“아리야, 팔씨름은 넘어뜨리는 게임이 아니야.”
“그러면요?”
“당기는 게임이지.”
“당기는 게임?”
“줄다리기 알지?”
“네.”
“그거랑도 비슷해.”
“줄다리기···요?”
“잘 들어봐. 우선 경기 시작 전에 눈빛이 중요해. 상대가 약해 보이거나 기가 꺾어 보이면은 그땐 이미 승부는 끝난 거야. 서서 팔씨름을 할 경우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마치 배의 닻처럼 한 발을 최대한 뒤로 밀어줘야 해. 그리고 손을 잡는 게 중요한데 손가락으로 독수리 발처럼 세우듯이 꽉 쪼여서 잡는 거야.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신호가 울리고 처음 10초는 그냥 버티는 거야. 이때 팔목을 최대한 꺾어. 그러면은 웬만해서는 안 넘어가. ‘이상하다, 왜 안 넘어가지’하고 상대가 당황을 해. 그렇게 버티다 보면 상대 호흡이 깨지는 순간이 분명히 올 거야. 그때 온 힘을 다해 당겨. 그렇게 상대가 끌려오면, 그때 팔을 안쪽으로 구부려. 그럼 되는 거야.”」
*
“어···어···어···”
쿵!
“와~~~.”
“대박!”
“윤 변호사님, 조니워커 블루 가져오셔야 합니다!”
“김아인 변호사님 승!
‘감사합니다. 오학년 오반 오일남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