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태 사무장 (1)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늦은 오후, 피해자를 만나고 온 나중혁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퇴근 시각은 이미 지났지만, 이제부터 조서 쓰고 현장을 다녀오느라 보지 못한 파일들을 정리해야 했다.
“다녀왔어?”
“네.”
“어때?”
교통범죄수사팀은 교통사고와 관련된 범죄를 전담하는 팀으로 주 업무는 보복 운전, 보험사기, 뺑소니 범죄를 수사하는 일이다.
요새같이 차량 대부분이 블랙박스를 장착하고 다니고 사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세상에서 일반 교통사고는 굳이 탐문 수사하고 다닐 필요가 없지만, 앞서 말한 범죄들은 그렇지 않다.
저런 범죄들은 주로 카메라 없는 사각지대에서 벌어지거나, 카메라가 있다고 해도 식별하기 어려운 곳에서 벌어진다.
나중혁이 조금 전 만나고 온 피해자들은 그러한 사각지대에서 렌터카를 이용해 고의로 사고를 일으키고 병원에 누워있는 가짜 환자들이었다.
“상습범들인 거 같아요.”
“안 그래도 그거 툭 부딪혔는데, 전치 12주가 나왔다고 해서 이상하더라. 병원은? 병원은 어때?”
“병원은 관련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뭐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죠. 일단은 피해자 중에 제일 어린 애를 불러서 조사해보려고요.”
“보험사에서는 뭐래?”
“일단 자기네도 조사 결과를 보고 보험금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래야, 돈줄이 막히고 이것들이 위에 있는 놈을 불겠지. 그래, 그럼. 수고해. 나는 들어가 볼게.”
“벌써요?”
“응. 청에서 잠깐 들어오래. 전화로 하면 될 것으로 꼭 오라 가라. 거기 들렸다가 집에 들어가려고.”
“사모님 잔소리 듣기 싫다고 주말에 나오시면서 집에는 일찍 일찍 들어가시네요.”
“피할 때 피하더라도 얼굴 볼 때는 봐야 하는 게 부부야. 너도 결혼해봐라. 왜 그러는지 알 거다.”
“네. 하하.”
“아니다. 너는 결혼하지 마라.”
“에이- 또 왜 그러세요.”
“유부남의 운명은 둘 중 하나야. 용기 내어 이혼하거나, 아니면 ‘혼자 살았으면 어땠을까?’ 평생 궁금해만 하다가 죽거나.”
“아우- 근 십 년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우울한데요.”
“그러니까 넌 결혼하지 말라고.”
“그래도 전 해보고 싶은데···.”
“그래서 다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자기 거는 보물 상자인 줄 알고. 그래, 해. 싱글의 그 마음을 모른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것만은 꼭 기억해라.”
“뭐요?”
“내가 너한테 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하하. 알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제가 찾아뵙고 술 사겠습니다.”
“기다릴게.”
“네. 하하.”
“그래, 그럼 수고하고.”
“들어가십시오.”
“아, 맞다.”
결혼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 팀장이 사무실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딴 이야기를 하느라 원래 해주려고 했던 말이 이제 기억났다.
“그놈이 자백했대.”
“네? 누가요?”
“49번 국도 사건.”
문정숙과 김아인이 당한 뺑소니 사건이다.
“진짜요?”
“응. 검사실에서 추가 조사 지시 내려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자백했대. 검사 별명이 무슨 자백자판기라나 뭐라나. 아무튼 잘됐어. 시간 날 때 중혁이 네가 거기 피해자한테 연락해서 알려줘. 그놈이 변호사 선임해서 합의하자고 연락하겠지만서도.”
잘됐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 간다.”
---*---
“부장님,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응. 들어가.”
퇴근 시각이 삼십 분이나 지났다. 옆자리 상사가 퇴근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박충오 대리는 먼저 일어났다.
그가 먼저 퇴근하고 나서야 최성태는 6시 30분이 넘었음을 확인했다.
“유 과장.”
“네, 부장님.”
“오늘 김 변호사님 안 들어오시나?”
“아- 잘 모르겠습니다. 서 변호사님하고 오후 4시쯤에 외부 미팅 가셨어요.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들어오셔야 하는데 아무래도 늦어지시는 것 같아요. 김 변호사님한테 전하실 말씀이 있나요?”
“응? 아니야. 내가 직접 전할게.”
“네.”
징징-
때마침 울리는 유이헌의 휴대폰. 서지우로부터 들어온 문자.
[서지우: 유 과장, 회의가 길어져서 늦을 거 같으니까 ‘The Dynasty’ 파일만 찾아서 내 책상에 올려놓고 퇴근해.]
“부장님.”
“응?”
“방금 서 변호사님이셨는데요. 회의가 길어져서 늦으신다고 먼저 퇴근하라고 하시네요.”
“알았어. 고마워.”
최성태는 막내 파트너 변호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해줄 것이었다. 언제 들어오는 줄만 알면 더 기다려도 상관없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게 능사는 아닌 거 같다.
최성태는 휴게실로 향했다. 조금 오바하는 것 같기는 해도 마음먹은 김에 꼭 오늘 드리고 싶다.
오후에 회사 근처 백화점에서 사다 놓은 한우 세트를 꺼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직접 집에 배달해줄 생각이다.
---*---
은평구, 아리네 아파트.
까톡, 까톡···.
[아리: 이모님, 죄송해요. 회의가 길어져서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ㅠㅠ]
[이모님: 아유, 그럴 수 있지. 그깟 게 뭐 대수라고 울고 그래.]
[아리: 정말 죄송해요. 식사 못 하셨죠? ㅠㅠ 제가 밥 먹자고 하지 않았으면 식사하셨을 텐데···. 정말, 정말 죄송해요.]
[이모님: 아냐, 괜찮아. 어차피 요새 살이 쪄서 다이어트도 해야 해.]
[아리: 진짜, 진짜 죄송해요. 다음번에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 지킬게요.]
[이모님: 신경 쓰지 말아. 저번에 추석 때도 그렇게 큰돈을 줬으면서 무슨 밥을 또 산다고 그래. 먹었단 셈 칠 때니까, 아리는 집안일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아리: ㅠㅠ 감사해요. 그럼, 오늘은 바로 들어가세요. 다음에 제가 꼭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이모님: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 문자 보내고 일해. 그럼, 나는 여기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까.]
[아리: 네 ㅠㅠ. 조심히 들어가세요.]
같이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모님’ 정은주는 크게 실망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같이 먹을 수 있었어도 좋았겠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바쁜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할 마음은 없다. 자신의 노동에 이미 충분히 보상받고 있다고 여겼다.
나가기 전, 아파트 안을 둘러본 그녀의 시선에 쓰레기통이 걸린다. 각방에 있는 쓰레기들을 모으면 대충 꽉 찰 것 같다. 그것만 버리고 와서 퇴근할 생각이다.
정은주는 쓰레기들을 모았다.
---*---
[안녕하십니까. 수원중부경찰서 교통범죄수사과 나중혁 형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49번 국도 사건 가해자가 검찰 조사과정에서 뺑소니 혐의에 대해 자백했다고 합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마지막으로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오늘 언제쯤 퇴근하시나요?]
타입을 끝낸 나중혁은 자신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고 아리에게 보냈다.
검찰에 사건을 송치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수사를 멈추지 않았던 그였다.
김아인을 진료했던 병원 의사도 만나봤고, 문정숙 씨가 요양하고 있는 의정부 병원도 다시 찾아갔다.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뭐가 이상해서 그렇게 조사하고 다녔는지 그도 잘 몰랐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자기가 왜 그렇게 이 사건을 놓아줄 수 없었는지를.
그가 내린 결론은 김아리를 향한 관심이라 생각했다.
사고 직후 경찰서를 찾아와 애걸하던 그녀의 절박한 눈빛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꼭 가해자를 잡아주고 싶었고, 사건이 종결되었을 때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물론 지난번에 만났던 그녀는 이미 사건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지만, 그와 상관없이 나중혁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해주고 싶었다.
놈이 자백했다는 사실을.
그래야 그도 사건을 놔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혁은 김아리의 아파트를 찾았다.
헤어샵에 다니는 그녀가 이미 퇴근했거나 조만간 집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에······.
---*---
은평구, 김아리의 아파트.
주차장.
이제 막 주차하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나중혁의 시선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빌딩을 나오는 정은주의 모습이 잡혔다.
지난번에 성가시게 해드려 죄송했었다고 말하기 위해 차에서 내린 그는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그녀 뒤를 따라 걷다가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정은주는 나중혁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멈춰 선 나중혁은 돌아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순간 목 뒤의 수사 세포가 움찔한 것이었다.
‘빈집에 종일 계셨던 건가?’
‘아니면 오전에 오고, 오후에도 또 오시는 건가?’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성인남녀가 있는 집에 왜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이렇게 자주 오시는 거지?’
그에게 있어서는 그냥 궁금한 것들.
그냥 평범한 장면 속에서 이상한 점이 보였을 뿐.
나중혁은 잠시 차 안에서 그녀의 행동을 살폈다.
각종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아주머니는 분리수거함에 넣을 것을 넣은 후 일반 쓰레기용 함 뚜껑을 열어 본다. 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일반 쓰레기봉투를 그 옆에 세워놓은 뒤, 아파트 건물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으로 향한다.
그녀가 정문으로 사라진 모습을 확인한 나중혁은 차에서 내려 쓰레기장으로 걸어갔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아주머니가 바닥에 세워놓고 간 일반 쓰레기봉투를 살폈다.
‘성인용 기저귀!’
이거였다. 좀 전 정은주를 뒤따르던 중, 순간 가로등 조명 아래 비친 쓰레기봉투 안에 보였던 그것. 수북이 쌓여있던 성인용 기저귀.
‘누구 거지?’
김아인 씨의 어머니 문정숙 씨는 요양병원에 있었고, 이미 몇 달 치를 계산해 놓은 상태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데?’
온종일 집을 봐주시는 아주머니. 성인용 기저귀.
‘이건 집에 돌봐 줘야 하는 누가 있다는 건데···.’
나중혁의 추리가 거기까지 간 순간, 분명 좀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평소 감각이 좋은 그였음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당신 누구야?”
180cm에 90kg쯤 될까?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선이 굵은 얼굴은 면적만 넓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이목구비가 다 컸고, 팔다리 몸통이 다 굵었다.
한눈에 봐도 한주먹 하시게 생긴 분이시다.
어디 가서 싸움으로는 꿀리지 않는 나중혁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형사야?”
그의 직업을 맞췄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분 같지는 않다. (비록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수원중부경찰서 형사입니다. 그러는 물은 시는 분은 누구시죠?”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자는 대답 없이 한동안 그를 쏘아보더니만,
“우리 변호사님 집에서 나온 쓰레기는 왜 뒤지는 건지?”
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