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세상 (1)
「지난해, 성상납 및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된 여정남 전 MJ 그룹 회장의 재판이 예상치 못한 증인의 등장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열린 기일에 증인으로 출두한 장운성 전 MJ 인베스트먼트 사장은 검찰 측에서 제출한 페이퍼컴퍼니 목록과 역외계좌들에 관련해 여정남 전 MJ 그룹 회장이 모르고 있었다는 취지로 증언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장운성 전 MJ 인베스트먼트 사장의 증언은 허위이며, 공범으로 고소할 계획임을 발표했습니다. SBC 뉴스 이병수입니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미국에 있는 장 사장 아들한테 돈은 보냈고?”
“네, 어제 재판 끝내고 바로 송금했습니다.”
여정남의 질문에 황재수는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검찰이 장 사장을 조질 거니까, 방어 잘하고.”
“네. 어차피 장 사장 주머니로 들어간 돈이 아니라서 검찰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겁니다. 끽해야 4, 5년 형 나올 거고, 집행유예로 1년 안에 나올 수 있습니다.”
“구정택이는?”
“구 의원은 조용히 하고 있습니다만, 재판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면 움직일 겁니다.”
“흥. 아무튼 정치하는 놈들은 꼭 그렇게 간을 본단 말이야.”
“국민 눈 밖에 나면 힘이 없어지니까요. 어쩔 수 없이 여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나가면 배신때린 새끼들을 다 조져버릴 테니까, 구정택이한테 밑 작업 해놓고 있으라고 해.”
“예, 회장님.”
할 말을 끝낸 여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일어나시게요.”
“오래 있었더니 가만히 있어도 좀이 쑤셔 미치겠어.”
“최대한 빨리 나오실 수 있게 이제부터는 재판 진행에 속도를 내겠습니다.”
“그렇게 해. 아, 근데 아직도 못 찾았어? 누가 페이퍼컴퍼니하고 오프쇼어 계좌 목록을 유출한 건지?”
“예. 아직···. 알아내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꼭 알아내. 그 새끼는 내가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들어 주겠어.”
---*---
강남, 도산병원.
“정말 조직검사 안 할 거야?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또 쓰러져서 영영 의식이 돌아오지 안 거나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서지우가 고세윤을 찾는 이유는 그가 맨 처음 자신의 뇌에 이상한 점을 발견한 사람인 것도 있었지만, 그가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인 점도 한몫했다.
7년 전 그의 뇌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이후로, 서지우는 주기적으로 그를 찾아 검진을 받아왔다.
“악성종양 같지는 않다면서요.”
“CT나 MRI 상으로는 그래. 혈액에서도 아무것도 발견된 거 없고. 근데 크기가 커진 것도 사실이야. 언박싱해보기 전에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언박싱이요? 무슨 선물 상자처럼 말씀하시네요.”
“나한테는 그냥 복잡한 상자일 뿐이야. 솔직히 계속 비대해지면 어느 날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될 수도 있고, 기억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협박하시는 건가요?”
“응.”
피식.
“협박치고는 너무 정중한데요.”
“보통 이 정도만 해도 사람들은 기겁하고 뒤로 쓰러져. 서 변이 특이한 거지.”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벌벌 떨고 싶지는 않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결혼 안 할 거야?”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리고 가죠?”
“보호자가 없는 사람은 병원에서 싫어해.”
“왜요?”
“검사받다가 죽으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하하. 방금 상자 여는 것처럼 단순하다는 취지로 말씀하셔놓고 지금은 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나한테는 상자 같다고 했지. 단순하다고 한 적 없어. 뇌 까는 게 단순하다고 이야기는 신경외과 의사 있으면 내 앞에 데리고 와.”
“왜요?”
“한 대 짓패버리게.”
“만나면 데리고 올게요.”
민감한 주제. 당장 죽을병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몇 개월 뒤에는 죽게 만들 수도 있는 병.
정확하게 그게 뭔지 모르니까, 그도 답답했다.
그걸 환자에게 직접 말하려니 더 어렵다. 게다가 보호자도 없는 혼자인 환자에게.
도산병원 신경외과 과장 고세윤은 일부러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7년 전 머릿속에서 그것을 처음 발견한 이후, 꾸준히 검사를 받아왔다. 다행히 지난 7년간은 아무 문제 없었고, 변화도 없었다.
서지우는 의사가 말하는 경고의 의미를 정확히 인지했다.
꺼진 줄 알았던 자신의 머릿속 시한폭탄이 어쩌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이렇게 말해도 안 할 거지?”
“당장은요.”
“도대체 그런 긍정심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신이 귀띔이라도 해줬어? 지금은 아니라고?”
신이 있기는 한 걸까?
“3개월 뒤에 뵙겠습니다.”
“약속했어. 지금보다 더 커지면 바로 입원하는 걸로.”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3개월 뒤에 그렇게 커져 있다면 입원할 생각이다.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남은 시간이 알고 싶어서.
“그렇게 할게요.”
---*---
아리가 깨어나고 며칠 뒤, 회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커피숍에서 만난 최성태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건강검진 결과입니다.”
“건강검진···이요?”
“네. 이번에 김 변호사님이 입원하셨을 때 받았던 테스트들 결과를 김아인 명의로 바꾸면서 성별을 눈치챌 수 있을 만한 결과들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걸 왜···?”
최성태는 결심했다.
“저는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코끝이 찡해졌지만, 아리는 울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회사들은 보통 건강검진 결과까지 제출하지 않습니다만, 저희는 그래도 그냥 제출합니다. 서 변호사님께서 그런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시는 편이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 변호사님이 김 변호사님 건강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나한테···?’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혹시 서류 관련이나 다른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단순히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이 정도면 아리가 들키지 않도록 물심양면 도와주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아리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감사의 표시를 하자, 최성태 역시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지난번에 한우 세트를 전해주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절 왜 도와주시는 건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왜일까?
딸 예나 일을 도와줬고 응원해줘서?
상황이 딱하고 안돼서?
사람이 좋아서?
종합적으로 그런 이유가 모두 작용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변호사님의 존재가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어떻게 들으면 계산적인 말 같았지만, 최성태는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변호사도 아닌데···.”
“제가 아는 그 어떤 변호사님들보다 좋은 변호사님이 되실 것 같아서요.”
그녀가 주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
띠리링- 띠리링-
“네, 할아버니.”
-이제 괜찮냐? 너 때문에 내가···.
최성태 사무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온 아리. 이번에는 이중기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니.”
그 둘이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들킬 뻔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쓰러진 걸 병원으로 옮겨준 것 하면, 집에 있는 오빠까지 대신 챙겨주었다.
아리는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감사하면 술 사가지고 내려와야지.
“할아버니, 글 쓰셔야죠. 대표님이 겨우 해결해놨는데, 이제는 정말 쓰셔야 해요.”
-야, 내가 누구 때문에 글을 못 썼는데.
“제 핑계 대시는 거예요?”
-내가 네 핑계를 대지, 그럼 누구 핑계를 대. 내려와. 글이 안 써질 때는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풀리는 법이야.
“알겠어요. 이번 주는 일이 많이 밀려서 못 가고. 다음 주 주말에 내려갈게요. 대신 그때까지 꼭 뭐라도 하나 써놓으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너 올 때까지 하나 만들어 놓을게.
아리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불과 1년도 채 안 되기 전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해야지, 그럼. 내가 병원비도 다 대줬는데.
“제가 갚을게요.”
-됐어. 선금이라고 생각해.
“네? 무슨 선금이요?”
-그런 게 있어. 다음 주에 내려올 때는 홍어 무침으로 사 와. 알았지?
“네, 그럴게요, 할아버니.”
지금은 가족 같은, 아니 가족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똑똑똑.
“네.”
이중기와 통화를 마칠 무렵, 유이헌 과장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변호사님, 대표님이 찾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작가님, 서 변호사님이 찾으셔서···. 다음 주에 뵐게요.”
-알았어. 들어가.
아리는 전화를 끊고 서지우의 방으로 향했다.
---*---
<법무법인 해결>, 대표 변호사실.
“그게 뭔가요?”
“그러니까 김 변도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뭔지 모른다는 거지?”
“네. 처음 들어보는데요.”
“여전히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은 있는 거고?”
“네? 아···네 ···뭐. 그런 거 같습니다.”
서류를 삭제해도 기억하고 있던 막내 파트너 변호사조차도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서지우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가 뭔지 파악 못 한 아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대표 변호사를 바라봤다.
“그게 뭔가요?”
“아니야. 아무것도. 가서 일 봐.”
“···네, 그럼.”
“아, 김 변호사.”
“네.”
“이거는 병원에서 뭐라고 안 해?”
돌아나가려던 아리는 붙잡고 서지우는 책상 위에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점심에 최성태 사무장이 준 건강검진 기록이다.
최성태 사무장의 조언대로 유 과장에게 제출했는데, 서지우가 바로 본 모양이다.
“네. 빈혈이었던 같다고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왼쪽 해마가 비대하다고 한 소견은?”
“그것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6개월 뒤에 다시 검사해보자고만 했습니다.”
“그래?”
“네.”
“그럼 6개월 뒤에 검사받아 봐.”
“그러겠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아리는 대표 변호사실을 나왔다.
서지우는 결과 기록을 다시 한번 훑었다.
사실 그가 막내 파트너의 건강검진 기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삭제한 세상의 기억을 그가 잊어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라졌다.
이제 그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잘 된 것일까?
모르겠다.
‘근데, 비대한 오른쪽 해마체라니? 우연일까?’
애초의 이유가 사라졌지만, 서지우의 관심은 여전하다.
‘이제 삭제하면 기억하지 못할 건가?’
당장 실험해보고 싶지만, 그러지 않을 맘이다.
앞으로 삭제 능력을 쓰지 않을 생각이니까.
띠리링- 띠리링-
“응.”
-변호사님, 손님 오셨습니다.
“누구?”
“MJ 엔터테인먼트 여혜린 대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바꾼 과거 때문이었을까?
‘티빅스’ 런칭과 함께 순탄할 것 같았던 의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