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3)

바뀐 세상 (2)

“아빠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여혜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웬만한 사고에도 좀처럼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녀가 그런 표정으로 짓고 있다는 건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

“노인네 인맥을 과소평가했어. 이 정도면 다들 손절할 줄 알았는데.”

연말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다.

건강 핑계를 대며 재판을 계속 지연시켰고, 정작 기일이 열리면 검찰 측 증거를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식들까지 등을 돌린 꼴이라 모두가 그의 몰락에 베팅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기일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그의 밑에서 일했던 장운성 전 사장이 검찰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언을 하고 나섰다.

“장 사장의 약점을 쥐고 있나 보네.”

서지우의 추측에 여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런 듯한데, 그것만이 아닐 듯싶어. 형사소송 로펌을 바꾸길래, 나는 황재수를 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 같아. 황재수가 연초부터 서울구치소에 왔다 갔다 한다고 하더라고. 그전에는 젊은 여자 변호사가 들락날락한다고 하길래, 노인네 결국은 제 버릇 남 못 주고 꼬꾸라질 줄 알았는데···.”

노욕의 찌든 그라도 여전히 범은 범.

호락호락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늙은 발톱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심해. 아직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내가 너한테 페이퍼컴퍼니 목록이랑 오프쇼어 어카운트 자료를 넘겼다는 걸 언젠가는 알아낼 거야.”

믿을 만한 경로를 통해 자료를 유출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으리라. 증거를 구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컴패스는 서지우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MJ 엔터는 괜찮은 거고?”

“흐음- 일단 오빠를 잘 설득해야지.”

늙은 호랑이에 겁먹지 않도록.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이미 긴장한 얼굴은 오히려 더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지분을 파는 방법도 있어.”

“지분을 팔라고? 어떻게 얻은 건데. 너는 잘 몰라,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간 지를.”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를 말해주는 거야.”

경영권으로 방어하는 방법 중에.

“저런 아빠한테 빼앗길 바에는 다른 놈한테로 주라고? 아무한테도 안 줘.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10%도 안 되는 지분으로 쉽지 않을 텐데···.

“잘해봐.”

“너무 남 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 아니야?”

“응원이었어.”

“알아. 그나저나, 그 노인네가 이 펌도 가만히 안 둘 거야.”

“그건 내가 걱정할게.”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도 알려주러 왔어. 요새 바쁜 거 같아서.”

서지우는 여혜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언가 콕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지난해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관련해서 사건들이 많았는데, 그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자, 그 모든 사건이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면 그 시간들은 무엇으로 채워진 것일까?

서지우에겐 그 기억이 없다.

“뭘 그렇게 봐? 설마 다시 사귀자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해 나···.”

“남자친구가 있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

여혜린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 말했던 과거만 바뀌었을 뿐.

“그래 보여.”

“소개해 줄까?”

“아니.”

“왜?”

“헤어진 전부인 새 남자친구랑 알고 지내고 싶은 마···.”

데자뷔.

이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피식-

서지우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뭐야? 말을 하다가 말고.”

“갈게. 청첩장 보내.”

“흥.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데. 싫어. 안 보낼 거야.”

“좋을 대로.”

서지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한 행동이 세상의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살았을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역시 이제는 능력을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

---*---

서울중앙지방법원.

566호실, 제14 민사합의부.

“재판장님, 본 사건에서 원고와 피고 사이에 체결된 중재합의가 무효라는 원고 측 주장은 이유 없으므로 사건번호 2017다225084 대법원판결에 따라 원고 측이 제기한 본 소송은 기각되어야 합니다.”

*

“아, 이제 변호사가 다 됐는데.”

아리는 정도와 함께 저작권 분쟁 소송 관련 기일에 참석했다.

중재합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던 계약이었는데, 상대방 측이 해당 조항을 무시하고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건이었고, 원고 측을 대리한 <해결>은 국내 소송을 기각하고 중재합의대로 싱가포르 중재원에서 분쟁해결을 희망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특성상 <해결>은 소송보다는 합의나 중재 (그리고 그 외 특별한 방법) 등으로 분쟁 해결을 주로 하는 로펌이었다. 가끔 이렇게 소송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역시 상대 소송을 기각시키거나 취하하는 쪽이다.

조금 전 재판에서는 아리가 주도적으로 기일 변론을 진행했다.

변호사 시험은커녕 로스쿨도 나오지 않은 사람치고는 제법 훌륭한 변론이었다.

정도의 칭찬에 내심 뜨끔했지만, 아리는 천연덕스럽게

“제가 원래 법원 체질이라서···.”

라고 대답했다.

“어쭈구리.”

“농담이에요, 농담. 어떤가요? 기각할 것 같죠?”

“그런 분위기야. 다음 기일 전에 할 것 같아.”

“나이스.”

“수고했어. 여기까지 온 김에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갈까?”

“근처에 맛집이 있나요?”

“법원 근처에 있는 식당은 법원 근처만의 매력이 있지.”

“그게 무슨 매력인데요?”

“삼만 원 이하의 가성비 세트가 많다는 거. 하하.”

재판 기일이 끝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계단 쪽으로 향하는 정도와 아리. 바로 그때, 그들에게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김아인? 김아인 맞지?”

키 175cm, 몸무게 70kg. 들창코에 사각 턱. 부리부리한 눈.

‘머리카락은 훨씬 더 풍성했던 거 같은데······.’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 하지만 누군지 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작년 기준으로 국내 등록변호사 수는 약 3만 명.

매년 1,000명이 넘는 신규 변호사들이 배출되고 오빠가 다닌 한성대 로스쿨만 해도 졸업생의 60%인 60명 정도가 매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 말인즉슨 적어도 쉰아홉 명의 변호사가 오빠를 안다는 뜻이었고, 변호사 수로만 봤을 대충 0.2% 확률로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거는 적어도 1,000명씩 늘어나기에 매년 확률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거.)

“김학규!”

“김아인 맞구나! 너인 것 같았어. 근데, 너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너도 만만치 않은데, 뭐. 근데 너 머리가 왜 이렇게 빠졌어?”

“응? 아···응···. 안 그래도 약 먹어···.”

틈틈이 오빠의 앨범과 이메일, 문자들을 기억해 두었고 오빠가 다녔던 기간 동안 개최된 한성대 로스쿨 행사나 일정들을 조사해두었다.

지금 자신을 아인으로 착각한 남자는 오빠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지만, 그리 자주 연락은 안 하는 동기.

“그래? 야,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일부러 짓궂게 농을 친다.

길게 말하지 말고 가라는 의도.

“응···.”

“변론 기일?”

“응.”

“그래. 난 이제 막 끝났어.”

“아, 그래.”

“그래, 그럼. 수고해라.”

아리는 몇 발 옆에 떨어져 있는 선배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동기에게 빨리 가봐야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동기는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근데 너 괜찮은 거야?”

“응? 뭐가?”

“뺑소니 당해서 크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아, 그거? 괜찮아졌어.”

“아, 그래···.”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김아인.”

“응?”

“괜찮아진 거면, 동창회 나와. 다들 너 어떤지 궁금해들 해.”

“아, 그렇구나···. 알았어.”

“내 번호 있지? 내가 문자 할게. 가끔 로펌 들어간 애들끼리 따로도 만나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너는 어디 들어갔는지도 모르네? 명함 있으면 하나 줘라.”

“명함?”

정말 주기 싫었지만, 윤정도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댈만한 핑계도 없다. 아리는 가방에서 ‘<법무법인 해결> 김아인 변호사’ 박힌 근사한 명함을 건넸다.

“그래,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또 보자.”

---*---

그렇게 처음 보는 ‘동기’와의 위험한 조우를 간신히 넘기고 주차장으로 가는 도중,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던 정도가 물었다.

“동기?”

“네.”

“그러면 이제 서른하나, 둘? 아우- 심각하네. 약 먹기는 먹어야겠더라.”

“그렇죠?”

웃으며 대꾸했지만, 정도가 다음에 뭘 물어볼지 예측할 수 있는 아리는 조마조마하다.

“근데, 김 변 뺑소니 당했었어?”

“네.”

“언제?”

“한 1년 반 좀 전에요.”

“아-. 그런데 식물인간은 또 무슨 소리야?”

살짝 고민한 아리는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오빠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것을 밝히면 대화가 길어지게 되고, 대화기 길어지면 거짓말이 많아지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숨겼다가 다른 곳에서라도 듣게 되면 그게 더 곤란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몇 개월 의식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진짜?”

정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다. 몇 개월씩 의식 없이 누워있다가 멀쩡히 일어나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괜찮고?”

“네. 괜찮아요.”

“그러면 우리한테 이력서를 넣고 사고를 당한 거야?”

“네.”

“그러고 의식 없이 누워있다가 깨어나서 재활하던 중에 우리한테 연락을 받은 거고?”

“네.”

“와- 몰랐네. 그래서 돈이 필요했던 거구나.”

“네.”

“아, 잠깐. 김 변 어머님도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했지. 혹시 그러면 그때 사고로···?”

“네. 차에 같이 계셨어요.”

정도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 더 묻지 않았다. 큰일이기에 그런 식으로 꼬치꼬치 묻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그랬구나. 힘들었겠네.”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범인은 잡았고?”

“네. 잡았다는 거 같아요.”

“다행이네.”

“네···.”

정도는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사고에 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다행히 해당 주제는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아리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법무법인 해결>

“다녀오셨습니까?”

법원에서 돌아온 아리와 정도를 유이헌 과장이 맞이했다.

“응. 아직 퇴근 안 했네.”

“이제 하려고요.”

“서 변호사님은?”

“방에 계십니다.”

“오케이. 그럼 나는 기일 보고 하러 잠깐.”

복귀한 정도는 곧바로 대표 변호사실로 향했다.

“저도 같이 들어갈까요?”

“아니야. 나 혼자 들어가도 돼.”

“알겠습니다.”

정도의 거절에 아리는 자기의 방으로 가려 했으나,

“변호사님.”

유이헌 과장이 그녀를 불렀다.

“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제 손님이요?”

“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