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33)

사채꾼 우지만 (1)

“도와주세요.”

윤하가 찾아왔다.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몰라서 찾아왔어요.”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술집을 그만둔 윤하는 분당에 있는 샵에서 다시 헤어디자이너 일을 시작했다.

머리가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어도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잠시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본성을 깨닫고는 그 세계를 떠났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거머리가 붙었다.

“나올 때 전세금 빼서 마담 언니한테 빌렸던 마이킹 다 갚았는데, 자꾸 안 갚았다고 깡패들이 자꾸 찾아와서···흑흑흑.”

조리 있게 말을 하지 않아 전반적인 상황이 명확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말에 의하면 상황은 대충 그러했다.

일하기 시작하면서 마담 언니라 부르는 사람에게 삼천만 선급금을 받았다. 일하는 기간 선급금에 대한 이자는 없었고, 7개월 전 가게를 그만둘 때 원금 전부를 갚고 나왔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깡패들이 나타나 자기가 채권을 인수했으니까 돈을 갚으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마담 언니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가게 역시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인데다가, 같이 일하던 김인경을 배신했다는 소문까지 돌아 당시 알고 지내던 언니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어보니 느낌이 사기 같은데.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때요?”

“신고했고요. 했는데···.”

경찰은 술집 여자 마이킹 따위에 관심이 없다.

대충 접수만 받고, 수사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채권자로부터 보호해줄 마음도 없었다.

“흠.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요.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전문 로펌이라서 형사 사건은 수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윤하 씨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아가 보는 게 좋을 듯싶어요.”

“······흑흑.”

그렇게 설명하고 돌려보냈지만, 아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찌 됐건 예전 같이 일한 적이 있던 동생이고, 정도 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마음이 빚 같은 것이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아리는 정도의 사무실을 노크했다.

---*---

똑똑똑.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왜?”

“다른 게 아니라요. 조금 전에 누가 찾아왔었는데···.”

아리는 윤하가 찾아와 도움을 청한 사실과 그녀한테서 들은 자초지종을 정도에게 설명했다.

“자업자득이네. 남의 돈 등쳐먹으려 하니까, 자기 등에도 그런 게 들러붙는 거야.”

엄밀히 말하며 윤하가 그런 것이 아니다. 김인경이 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날 같이 나온 그녀도 한통속이었다.

“그래도 윤하가 아니었으면 해결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정도는 그런 막내 파트너를 힐끔 쳐다보고는 물었다.

“김 변, 혹시 그 여자한테 마음 있어?”

“네에? 그런 거 아닙니다.”

정도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곤,

“솔직히 그 아가씨 진술서가 도움이 된 거는 아는데, 그렇다고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죽을 뻔한 거를 구해줬다고? 애초에 빠뜨린 사람이 누군데. 또 그 여자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믿어? 김 변도 조심해. 툭 까놓고 말해서, 돈 빌려놓고 진짜 안 갚았는지도 모르잖아. 선급금 받은 거 안 갚고 튄 아가씨들 많을 거 같은데? 그리고 솔직히 그 세계라도 룰이라는 게 있을 텐데···. 갚았으면 송금한 기록 같은 게 남았을 거고, 그런 게 있는대도 채권자가 그렇게 나왔을 것 같지 않아.”

시큰둥한 말투로 조언했다.

다만, 아리는 윤하를 믿었다.

“그래도 만약 그 아가씨가 사실을 말하는 거라면요?”

“흐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겠네.”

“뭐요?”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봤잖아, 술집 아가씨들 일 관심도 없을 거고. 사기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도 없을 거고. 그러면 파산 신청해야지 뭐.”

“파산신청이요?”

“응. 느낌이 사채꾼들 같은데, 돈 안 갚으면 사람 쫓아다니면서 괴롭힐걸. 일도 못 하게 할 거고, 그럼 생활은 더 안 좋아질 게 뻔하지. 채무부존재 소송을 해볼 수도 있겠다만, 술집애들 상대하는 사채꾼들이 이기려면 뭔들 못하겠어, 증거도 위조하고 증인도 만들어내겠지. 괜히 소송했다가 채무가 있다고 나와버리면 더 곤란해져. 변호사 비용에, 이자에···. 그러니까 차라리 파산 신청하는 게 나을 거야.”

그렇게 되면 법적으로 빚을 탕감하게 되니까.

‘하지만, 있지도 않은 빚을 탕감하려고 파산신청을 한다고?’

아리는 동의하기 힘들다.

파산신청을 하게 되면 신용불량이 되고, 일을 구하기 힘들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특히, 정도의 말대로 정말 증거도 위조하고 증인도 만들어내는 악질이라면, 파산신청을 했다고 순순히 놔줄 것 같지도 않다.

---*---

“송 사장님, 좋게 사인하시죠. 송 사장님한테 이 땅 없다고 해서 죽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헤헤헤.”

덩치가 좋은 사내 둘을 병풍처럼 세워놓은 우지만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계약서를 들이밀자, 송국종 사장은 그를 씹어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봤다.

“너 이 새끼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아이고, 우리 송 사장님 독이 바짝 오르셨네.”

“내가 박진환 그 새끼한테 돈을 빌렸을 때는 이런 조건이 아니었어!”

우지만은 품에서 송국종과 박진환이 체결한 대출계약서를 꺼내 던지며 말했다.

“거기 밑에 특약 조건 보세요. ‘원금 및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였을 시, 본 계약상의 채권은 채무자의 동의 없이 제삼자에게 넘어갈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 채권을 인수한 자에 의해 이자율이 변경될 수 있다.’”

“흥. 누가 바보, 병신인 줄 알아? 그딴 특약 조건에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아이고, 그렇게 법을 잘 아시는 분이 우리 같은 사람한테 돈을 빌리시나요? 그렇게 따지면 애초 계약서상 이자도 법정 최대 이자를 넘어서는데, 왜? 그것도 법적 효력이 없다고 한번 해보시죠.”

우지만은 소파 뒤로 길게 누우며, 송국종을 조롱하듯 바라봤다.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던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송 사장님, 우리가 법적으로 할 때가 좋은 거야. 선 넘지 마.”

“고작 이자 몇 번 연체했다고 12억짜리 땅을 먹으려 들어? 흥, 이 사기꾼 새끼들.”

“말은 바로 합시다. 대출이 11억이나 끼어있는데, 그게 무슨 12억입니까.”

“내가 니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홍주완 그 새끼가 시킨 거잖아. 그 땅이 지금은 12억이지만, 5년 뒤에 도로 뚫리고 나면 못해도 다섯 배가 오를 땅이야. 근데 그걸 이딴 식으로 먹으려고? 웃기지 마, 내 배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못 넘겨.”

“진짜? 배에 칼이 들어와도 못 넘겨? 그건 해봐야 알겠는데. 야.”

우지만이 부르자, 뒤에 서 있던 놈 중 덩치가 좀 더 큰 남자가 품에서 정육칼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아우- 무식한 새끼 정육칼을 들고 다니네. 하긴 정육칼이 육고기 썰 때는 더 좋아요. 사시미칼보다.”

“흥. 내가 사업하면서 너 같은 놈 상대한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찔러. 찔러 봐.”

“와- 우리 송 사장님 생각보다 간이 크시네. 남자네. 남자야. 야, 봤지? 우리 같은 놈들한테 돈 빌려 쓰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거야.”

우지만은 깔깔거리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한순간에 표정이 돌변한 그는 갑자기 달려들어 정육칼을 송국종의 복부를 향해 깊숙이 찔러넣었다.

“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식겁한 송국종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헉헉헉.

터질 것 같은 심장. 가빠진 숨을 고르며 칼이 들어간 자리를 본다. 배에서 0.5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육칼이 박혀있다.

살에 박히지 않았다.

“열일곱 때부터 이 일을 시작해서 나도 별의별 놈을 다 만나봤거든, 당신 같은 사람은 몇이나 있을 것 같아? 가오를 잡으려거든 상대를 보고 잡아. 괜히 호기부리다가 배에 호스 끼고 살지 말고.”

어찌나 놀랐는지, 따뜻한 오줌이 터져 나와 바지를 적시고 있다.

“우리 송 사장님, 따님이 있었던가? 몇 살이더라···. 요새 초등학교 3학년이 몇 살이더라? 송 사장님 따님이 수정초 3학년이죠? 3학년 2반, 송나리.”

“너 이 새끼!”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야. 갈종길이한테 넘어갔으면 벌써 일 났어.”

“······.”

“자, 이 정도면 말귀 알아먹은 거 같고. 사인합시다. 우리도 이 일만 하는 게 아니니까.”

우지만을 한동안 노려보던 송국정은 그가 맨 처음 내민 양도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

우지만 일당이 사무실로 쓰고 있는 강남의 한 오피스텔.

굳게 닫힌 문 앞에 ‘스위트 크레딧’이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붙어있다.

“명준아, 송 사장 땅 계약서 사본 홍주완 사장한테 가져다주고, 잔금 받아와. 잔금 다 주면 양도해주겠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아까 송국종 사무실에서 우지만에게 정육칼을 건넨 덩치 큰 남자가 계약서 사본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자, 우지만은 남아있는 부하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경수야, 밥 좀 먹자.”

“뭐 시킬까요?”

“돈가스.”

“네, 알겠습니다.”

보스의 지시에 얼른 전화를 들어 음식을 주문하는 경수. 그가 주문을 마치자, 우지만은 그에게 맡겼던 일에 관해 묻는다.

“그거 어떻게 되고 있어? 라운딩에서 일했던 애 건.”

“정윤하 건이요?”

“응. 계속 쪼고 있지?”

“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조금 있다 저녁때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래, 인마. 나도 이 일 시작할 때는 돈 떼어먹고 추노한 술집애들 잡으러 다니는 걸로 시작했어.”

“예.”

“그런 애들은 가진 돈이 없어서 계속 따라다니면서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어야 해.”

“그런데요, 대표님?”

“왜?”

“가진 돈이 없으면 따라다녀도 의미 없는 거 아닌가요? 막말로 장기라도 떼서 팔 거 아니면.”

“아우- 이 새끼 무서운 놈이네. 장기 뗀다는 말을 무슨 돼지 콩팥 떼다 파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아니, 저는 그냥···.”

“이 바닥에도 레벨이라는 게 있어. 거기까지 가면 아주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이야. 우리는 그래도 대부업 신고도 하고 간판도 달고 있는 정식이야, 정식.”

“네, 알겠습니다.”

가짜다. 신고는 되어있지만,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있는 거고, 간판도 사업 신고 명의와 다르다.

“돈이 없으면 따라다녀도 의미가 없다고?”

“네.”

“아니지. 걔네들은 몸이 자산이야. 얼굴이 반반하잖아, 나이도 아직 괜찮고. 그런 애들은 가게 들어가면 바로 2, 3천 당겨주지.”

돈 나올 구멍이 있다는 말.

결국 다시 그 구렁텅이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다.

정말이지 추노꾼이 따로 없다.

“아- 그래서 계속 일하는 데 가보라고 하시는 거였네요?”

“그래야 그만두고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지. 아무튼 너무 세게 나가지도 말고 그렇다고 풀어줘도 안 되고. 서서히 옥죄어야 해. 몰이라고 생각하면 돼.”

“알겠습니다.”

딩동.

“야, 나가봐라. 식사 왔나 보다.”

당연히 식사가 온 줄 알고 부하는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있는 사람은 배달원이 아니다.

“누구···?”

“법무법인 해결의 김아인 변호사라고 합니다. 우지만 씨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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