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33)

잊고 있던 빌런의 재등장

종로구, 사직동.

정갈한 반찬들이 하얀 사기그릇 위에 담겨 나왔다. 김치, 콩나물무침, 감자채, 콩장, 고마구순무침, 미역줄기볶음.

그것들만 가지고도 방 한 공기쯤 뚝딱 해치울 수 있다.

그런데 생선전이 나오고 가지찜이 나온다.

살이 과하게 쫀득하지 않은 코다리찜까지.

아직도 메인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밥을 다 먹어버리게 생겼다.

잠시 뒤 간장으로 슴슴하게 간을 한 큰 낙지 한 마리가 올라왔다.

참깨와 파채, 홍고추로 치장된 요리는 정말이지 등장부터 후회하게 만든다.

좀 참았다 먹을걸.

“잘라드릴까요?”

두 개도 아니고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꼬고 있는 놈을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이 들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앞치마에서 K-가위를 꺼낸다.

싹둑싹둑.

좀 전의 자태는 사라졌지만, 지금이 더 먹음직스럽다.

“여기 음식이 좋다.”

“응. 나도 얼마 전에 청장님하고 한번 왔었어. 보기에는 이래도 옛날에는 정·재계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셨다네.”

아니나 다를까, 오래된 정치인과 재벌 회장 사인들이 액자에 담겨 한쪽 벽에 걸려있다.

“잘나가나 보다? 청장님하고 이런 데 와서 식사할 정도면.”

“아휴- 말도 마라. 요새 검찰하고 싸우고 있잖아, 수사권이니 뭐니 하면서. 솔직히 내가 경찰청에 들어온 거는 응? 편하게 응? 꿀 빨면서 응? 워라벨하려고 온 거잖아. 근데 이건 뭐 매일매일 검경 수사권 관련해서 보고서 쓰느라 미치겠다. 맨날 했던 말 이리 돌려 하고 조리 돌려 하고. 어차피 정치권 싸움인데. 정신없어.”

“미안하다. 바쁜 데 일 부탁하고.”

“일은 무슨 수사 팁 준 거 가지고. 근데, 그놈 사라졌다던데.”

그날 밤 이후 우지만은 행방을 감추었다.

“수사계 일이라 내가 꼬치꼬치 묻기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만 했는데, 좀 더 알아봐 줘? 수배를 내릴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고 아직 혐의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많이 없어서.”

“아니야.”

“그런데 그놈하고는 어떻게 얽히게 된 거야? 너 형사 안 하잖아. 아, 의뢰받은 연예인 중에 그놈한테 사채 끌어다 쓴 사람이 있는 거야?”

“아니야.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됐어.”

“하긴, 그 업계도 별의별 놈이 다 있지. 먹자.”

서지우는 녀석이 겁을 먹고 숨어버렸다고 여겼다.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인연의 끝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성격상 좀 더 확실하게 결말을 냈을 법도 한데···.

“아 참- 여정남 회장 풀려났더라.”

다른 빌런이 나타났다.

“이러니 구닥다리라고 해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아직도 진리인 거야. 야,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

“오빠, 미쳤어요? 어떻게 얻은 컨트롤인데 그대로 가져다 바치겠다고?”

질질 끌던 형사재판 1심이 끝났다.

검찰이 항소하겠다 했지만, 케이지 안에서 싸우는 것과 밖에서 싸우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유치장에 있었을 때도 제대로 힘을 제어하지 못했는데, 이제 나왔으니···.

여정남은 절대로 다시 케이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너도 준비해.”

“뭘?”

감정이 격해지니 반말이 튀어나온다. 어린 여동생 볼 면목이 없었는지, 여혜성은 여혜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곤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돌아오시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잖아.”

안다. 그래서 오빠 여혜성의 결정이 중요했다. 여혜린 혼자는 죽어도 이길 수 없다.

“정말 이렇게 병신같이 백기 선언할 거예요? 그 변태 노인네한테?”

“그 변태 노인네가 네 아버지야.”

“아버지! 아버지! 태어나게 해줬으면 다야? 그래서 어쩌라고요?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용서라도 빌겠다는 거예요, 지금?”

“말은 똑바로 해. MJ 엔터테인먼트 얻겠다고 지난 6년 동안 아버지 옆에서 알랑방귀 뀌고 세상에서 제일 착한 딸 흉내 낸 게 누군데.”

부정할 수 없다.

서지우와 이혼 후 여혜린은 MJ 엔터테인먼트를 얻기 위해서 소름 끼치는 아버지 옆에서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살았다.

“그러니까요! 그렇게 고생해서 얻었으면 싸워야지. 구치소에 나오자마자 고개 숙이고 아빠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넌 몰라.”

“뭘 몰라요? 이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오빠가 무능하다고 하는 거예요.”

여동생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던 여혜성은 불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봤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늙은 아비에게 무릎을 꿇으려는 거다.

자신이 없다.

무능하다

“차병호 대표가 아버지한테 붙을 모양이야.”

차병호, 에이스 인베스트먼트 대표. MJ 미디어 네트워크 지분을 여 씨 집안사람들 외에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 왜···?”

예상치 못한 정보에 길길이 뛰던 여혜린이 순간 얼어붙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상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잘나가는 MJ 엔터테인먼트와 달리 MJ 미디어 주가는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IT 사업을 하고 싶다며 그룹의 주력 사업 부분을 언론사랑 종합편성채널에서 IT 사업으로 바꾸면서, 트랜지션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와중.

그나마 주가가 심각하게 떨어지지 않는 건 MJ 엔터테인먼트에 갖고 있는 MJ 미디어의 지분 때문이었다.

“차 대표가 아버지 편에 서면 끝이야. 네가 다른 주주들을 설득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어.”

여혜린은 어금니를 물었다.

인정한다. 차병호 대표가 여정남의 손을 잡으면 끝이다.

“내가 차 대표님 만나볼게요.”

“소용없어.”

“난 오빠랑 달라요. 죽어도 아빠 밑에 다시 못 들어가.”

“누군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가는 줄 알아? 살고 싶으면 너도 살길 찾아. 그 자료들 네가 흘린 거지?”

여혜성은 눈치채고 있었다. 여정남이 비자금 조성을 위해 사용했던 페이퍼컴퍼니와 오프쇼어 어카운트 목록을 여혜린이 유출했다는 사실을.

“네 전남편한테 갖다준 거야?”

미디어 왕의 딸로서 그녀가 직접 풀 수 없었던 자료.

혜린은 서지우를 이용했었다.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아버지가 감옥에 계속 계시는 거면 모를까, 돌아와서 살피면 금세 알아채실 거야. 살고 싶으면 그놈 팔아.”

혜린은 혜성을 바라봤다.

비겁하고 무능한 오빠.

그룹의 수장직을 애초에 그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빠.”

“왜?”

“지금 안 싸우면, 그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기회 없을 거예요. 영원히.”

---*---

신사역 근처 한 횟집.

“이모, 여기 산낙지도 한 마리 주세요.”

모둠회 중짜 하나와 멍게 한 접시를 주문한 후, 정도가 산낙지를 추가하자,

“난 산낙지 무슨 맛을 먹는지 모르겠더라.”

로스쿨 동기 이재형은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이 초딩 입맛.”

“미끄덩거리는 게 식감도 안 좋고.”

“쫄깃쫄깃하잖아. 바다향도 나고.”

“바다향은 무슨···. 짠내지. 쫄깃쫄깃한 거는 낙지 말고도 많아. 솔직히 참기름, 소금 맛에 먹는 거잖아.”

“아- 이 새끼 왜 이래?”

먹기는 해도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재형. 정도가 한잔 산다고 해서 따라왔지만,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야, 니네 회사는 요새 좀 어떠냐? 여전히 잘 돼?”

“응. 매년 좋아지고 있다.”

“아- 좋겠다.”

“왜? 니네는 별로야?”

“우리는 경기를 타다 보니까, 요새 아주 죽을 맛이야. 게다가 이게 문턱이 낮잖아. 너도나도 부동산. 경쟁은 심해지는데 일이 없어. 기사보니까 엔터는 뭐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하던데.”

“응. 일이 많아.”

“니네는 사람 안 뽑냐?”

“왜? 니가 들어오게?”

“아니다. 됐다.”

“뭐야-. 말은 지가 먼저 꺼내놓고.”

때마침, 이모님이 차가운 소주와 함께 잘 손질한 멍게와 낙지를 먼저 가지고 왔다. 정도는 소주병을 열어 동기의 잔에 가져다 댄다. 이재형은 술잔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니네 대표가 뽑아주지도 않겠지만, 된다고 해도 못가지.”

“왜?”

“잊었냐? 우리 처제 니네 로펌에 이력서 넣다가 까인 거? 우리 처제 앞에서는 해결의 ‘해’자도 못 꺼내.”

처제라는 말에 정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법무법인 광현의 한소희. 정도도 잊지 않고 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러나 동기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면접을 약속했다가 지키지 못한 건 사실이었고, 그 사건도 종국에는 잘 해결되었기에.

“거기는 어떻게 됐어? 베트남 지사로 가라고 했다면서? 갔어?”

“처제? 안 갔어. 미쳤어. 거길 왜 가?”

“그럼 어디 갔는데.”

“유학 갔어.”

“유학?”

“응. 자비로 갔어. 아니지, 엄밀하게 말하면 장인어른 돈이지. 아무튼 광현 나와서 미국 갔어.”

“그랬구나.”

“야, 우리 처제 무시하지 마. 아직 끝나려면 3개월 남았지만, 벌써 대형 몇 군데서 오퍼 받았어.”

“누가 무시했다고 그래.”

“김앤강 갈 거 같아.”

“그래?”

정도가 계속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동기는 계속 더 자랑을 해댄다.

“엔터테인먼트 법 한다고 하더라. 기대해, 니네 경쟁자한테 가는 거야.”

“김앤강에 엔터 팀이 있었나?”

“있다고 하던데, 황재수 변호사님이 하는.”

“아- 거기는 간판만 걸려있지 거의 기업변호사지. MJ 전담.”

“익스펜드한다고 하던데.”

“그래?”

“아- 이 새끼 계속 표정이 떨떠름해. 왜? 우리 처제가 잘나간다고 하니까 배 아프냐? 아프겠지. 그런 인재를 놓쳤으니.”

“배가 아프긴 무슨···, 참나- 야, 니가 이 맛 좋은 산낙지를 안 먹는다니까 슬퍼서 그런다, 왜?”

---*---

<법무법인 해결>,

밤늦은 시각, 아리는 대표변호사실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네.”

“변호사님.”

“왜?”

“퇴근하려고요.”

서지우는 ‘그걸 왜 보고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막내를 쳐다봤다.

그 말을 하러 들어온 게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정윤하 사건 해결을 도와준 것에 대해 인사하러 문을 노크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기다렸다. 아리는 서지우가 자신을 부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을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말을 꺼냈다.

“뭐가?”

“정윤하 씨 사건···. 도와주셨다고 최 부장님한테 들었습니다.”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다.

대표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인사를 하고 나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 아리가 렉 걸린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 앞에서 우물쭈물하자, 그제야 서지우는 고개를 들어

“뭐 더 할 말 있어?”

라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네? 아뇨. 그럼 수고하세요.”

‘수고하세요? 미쳤냐? 김아리. 가게 들어왔냐?’

순간 당황한 나머지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대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고개가 이미 모니터 앞으로 원위치했다.

“·········.”

민망해진 아리는 종종걸음으로 문을 돌아섰다.

그런데, 방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의 등 뒤로 또박또박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함이 느껴지는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부터 개인사건 맡을 때, 나한테 먼저 보고 하고 해줬으면 좋겠어.”

“아···넵···.”

“여기 김 변호사 개인 사무실 아니잖아. 같이 하는 일하는 데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지만, 혼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아리는 몸을 반쯤 돌려 다시 한번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같이 일하는 데지.」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주는 뉘앙스가 좋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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