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3)

뻔뻔한 동기 (1)

[야, 김아인. 금요일 10시 한남부엇국. 늦게라도 와라. 이번에도 안 나오면 현탁이가 너네 회사 앞으로 갈 거래.]

지난번 기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법정 앞에서 마주친 동기는 그 후 문자를 계속 보내왔다.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피했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회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다.

좀 더 확실하게 끊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남자답게 차려입은 아리는 퇴근 후 한남동으로 향했다.

“야! 이게 얼마 만이야? 사고 났다던 거는? 괜찮아, 이제?”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보기에는 멀쩡하다?”

“그러면 지금 해결에 다니는 거야?”

“해결? 해결은 또 어디야?”

“해결 몰라? 엔터 쪽에서는 유명해. 연봉도 세고. 아마 들어가자마자 파트너 타이틀도 줄걸”

“진짜?”

“야, 근데 너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질문들이 쏟아진다.

아리는 능숙하게 무시할 거 무시하고 답할 것들을 짧게 짧게 처리했다.

준비하고 나간 자리이기도 했지만, 이제 오빠인 척하고 다닌 지도 1년이 넘었다. 단순히 넥타이 매는 법, 머리 만지는 법만 익힌 것이 아니었다.

술자리 남자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유심히 관찰해왔고, 틈틈이 오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해 공부를 끝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동기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아우 나는 죽을 것 같아. 정말이지 변호사일 체질에 안 맞는 거 같아.”

“그럼 관둬.”

“우리 아버지가 가만두시겠냐? 학비 얘기부터 결혼 비용까지 싸그리 다 청구하시겠지.”

“그러길래 왜 그리 일찍 결혼해서는···.”

“누가 하고 싶어서 했냐? 애가 생겼는데 그럼? 지우라고 하냐?”

“그러길래 왜 콘돔을 안 써서는···.”

“썼어, 이 새끼야. 불량이었던 거야.”

“그럼 고소해.”

“뭐로?”

“손해배상.”

“결혼하고 싶지 않은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바람에 내 인생 조졌으니까, 정신적 손해 배상하라고? 퍽이나 해피 엔딩이겠다.”

“미국이었으면 크게 한탕 할 수 있지 않겠냐?”

“‘솔직히 더 잘 나갈 수 있었는데, 처자식 생겨서 힘들어졌다. 니들이 배상해라.’라고 주장하면···.”

“당연히 ‘좆까. 병신아’ 하겠지.”

“그러면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내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에 배심원들 앞에서 네가 눈물을 흘리면서 증언을 하면···?”

“징벌적 손해 원 헌드레드 밀리언 달러! 땅·땅·땅! 잠깐, 너 콘돔 국산 썼어?”

“아주 소설을 써라. 이것들이 제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기는. 말은 그래도 나 우리 아내랑 아들 엄청 사랑한다.”

그렇게 초반에 아인(아리)에게 모였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른 걸로 넘어가는가 싶더니만···.

“김아인!”

느지막이 나타난 구현탁으로 인해 다시 쏠리게 된다.

“야, 너 왜 그렇게 늦게 왔어.”

“바빴어. 나 또 들어가 봐야 해.”

“또? 뭐야? 김앤강 다닌다고 지금 티 내는 거야?”

“그래도 우리 중에 대형 들어간 애는 얘밖에 없잖아.”

엄연히 말하면 동기 중에 제일 잘나가는 구현탁에게 쏠린 관심을 구현탁이 아인(아리)에게 돌렸다.

“야, 나 너 때문에 나왔어.”

어깨를 툭 치며 하는 말.

“나? 왜?”

“몸은? 괜찮은 거야?”

“응.”

오빠의 핸드폰 기록과 동기들과 주고받은 이메일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 그룹의 알파는 구현탁이었다.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외모도 준수하다.

그런데 단톡방 안에서 주고받은 문자를 통해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은근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투. 대놓고 왕따를 시킨다기보다는 농담처럼 한두 마디 툭툭 던지면서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해놓고, 막상 민감해하면 뭘 그런 거에 기분 나빠하냐며 사과받는 사람이 오히려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동기들이 그를 그렇게 떠받아줬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술 먹다가 네 얘기가 나왔는데, 학규한테 소식 듣고 내가 너 꼭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매운 친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결국 직접 연락한 적이 없다. 결국 딱 그 정도 사이라는 것이다.

아리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구현탁도 그녀의 눈빛을 인지했으나, 늘 그렇듯이 모른 척 넘어간다.

“안 그래도 사고 났다는 말 듣고 못 찾아가 본 게 미안해서 동창회에 좀 도와줄 방법이 없나 알아보려고 했거든. 근데 다행이네. 이렇게 멀쩡해서. 아, 맞다, 근데 너 해결 들어갔다며? 거긴 어떻게 들어갔어? 내가 듣기로는 거기 인터뷰 꽤 빡신 걸로 알고 있는데.”

‘사고 난 지 1년 반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흥.’

어쩌면 오빠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문제가 있을 거다. 사고가 나서 식물인간이 되도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거 보면.

그래도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사고 직후 병원에 있을 때 한두 번 찾아오기는 했다. 비록 사정이 나빠져 아리가 돈 빌리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서는 연락이 끊겼지만.

이것들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었다.

물론 찾아오지 않은 것만으로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다만, 오늘 술자리에 그를 부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결에 입사했다고 하니까 부른 것이었다. 인맥을 만들어 놓으려고. 식물인간이면 의미 없지만, 엔터테인먼트 전문 부티크 로펌이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딱히 오빠를 연민하지는 않지만, 아리는 그냥 그 사람들이 싫었다. 더는 이런 자리에 불려 나오지 않으려고 참석했다.

“해결이 그렇게 유명한 데야?”

구현탁의 말에 해결에 관해 잘 모르는 동기 하나가 다시 묻자, 다른 동기가 아는 척을 하고 나선다.

“유명하다니까.”

“1년 차 연봉도 김앤강 급으로 준대.”

“진짜?”

“진짜라니까, 내가 듣기로는···.”

“그거 구라라고 하던데. 소문은 그런데 실제는 그렇게 안 준다고 하던데.”

또 다른 동기가 끼어든다.

“아니야. 내가 아는 선배의 동기의 친구의 형이 예전에 거기 다녔었는데, 그때 이미 김앤강 수준으로 받았대. 인센티브도 장난 아니래.”

“그분 아직도 다녀?”

“아니.”

“에이- 그런 데를 왜 그만둬.”

“코인으로 대박 났으니까.”

“아- 그건 킹정이지.”

바로 그때,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던 구현탁이 다시 한번 관심을 아인(아리)에게 집중시켰다.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김아인, 너 얼마 받냐?”

동기끼리 연봉을 공개할 수도 있다. 친하면 충분히 술자리에서 오프더레코드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임은 그런 자리가 아니다. 동기 중에 로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배제하고 자기들끼리만 만나는 사실 자체가 증명했다. 피상적인 만남이라는 것을.

게다가, 구현탁의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다른 동기들의 표정에서도 명확했다. 자기의 연봉은 까고 싶지 않지만, 남의 연봉은 알고 싶은.

“왜? 공개하기 그래? 그럼 내 거부터 말해줄게. 나보다 위인지만 아래인지만 말해. 나는 입사할 때, 일억···.”

그동안 조용히 말을 아끼고 있던 아리가 구현탁의 말을 잘랐다.

“그게 왜 궁금한데?”

“응? 다들 궁금해하잖아. 왜 민감해? 그럼 안 해도 돼. 야,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아, 얘는 예전에도 그렇고 돈 이야기만 하면 이러더라.”

“돈 이야기?”

“알았어, 알았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비록 잠깐 같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아닌 척하면서도 자신은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잘했고 외모도 준수해서 늘 칭찬만 받고 살았다. 겸손해야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잘 알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늘 겸손한 척, 예의 바른 척하는 인간.

그래도 뼛속까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가식적인 놈.

이번에도 자기가 물어놓고 마치 대답하지 않는 아인(아리)을 쪼잔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재미있네.”

“응?”

“그럼 이렇게 하자.”

“뭘?”

“작년 누가 더 받았는지 까서, 적게 받은 사람이 많은 사람한테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술 받기.”

듣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제안.

아니나 다를까 아리의 제안에 동기들의 얼굴에 주름이 잡힌다.

웃긴다. 연봉으로 사람 등수를 매기려고 했던 놈들이 누군데.

“왜? 그건 싫어?”

아리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기들의 얼굴을 한번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도 선뜻 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내 연봉 깔 이유도 없네.”

그렇지만 아리의 도발에 구현탁이 넘어온다.

“좋아. 까자. 대신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계좌 까서 보여주는 걸로.”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대 로펌에 들어간 그는 절대로 ‘중간 바리’였던 김아인이 자기보다 많이 받을 리 없다고 단정했다.

아리가 잠시 머뭇거리자 구현탁은 더욱더 자기 추측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런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자신 없으면 지금 관둬. 그럼 그냥 이거 한잔 마시고 없던 일로 해줄게.”

거들먹거리며 마치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구는 구현탁. 녀석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담아 아리 쪽으로 밀며 말하자, 아리는 휴대폰에서 월급 입금 계좌 명세를 로딩한 뒤 테이블 위에 던졌다.

싸늘해진 분위기.

김학규가 조심스럽게 아리의 휴대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는···.

“헉!”

“왜? 얼만데?”

“나도, 나도. 오-!”

아리의 휴대폰을 돌려가며 확인한 동기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그제야 구현탁은 옆자리 동기로부터 휴대폰을 받아든다.

급격히 굳는 표정.

놀랐다.

사이닝보너스 1억 원, 월급 세후 930만 원, 그리고 인센티브 5,000만 원.

구현탁의 연봉 역시 어디 가서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아인(아리)가 받은 금액에 비교할 수 없다.

“하하하. 사실이었네.”

늘 하던 것처럼 구현탁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지 못하리라.

“까.”

아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요구했다.

“응?”

“네 거 까보라고.”

이런 장면을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다, 감히 평민 김아인 따위 자기한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그는 알 턱이 없었다, 자신 앞에 있는 동기(?)가 김아인이 아니라는 걸.

“하하. 그래 네가 이겼다. 김앤강도 이 정도는 안 준다. 야아-, 소문이 사실이었네. 해결이 유학은 안 보내줘도 급여만 놓고 보면 대형 못지않다는 거. 축하한다, 김아인.”

다시 한번 어영부영 넘어가 보려 했으나,

“꿇어.”

아리는 그냥 놔줄 생각이 없다.

“야, 동기끼리 왜 그래?”

“농담으로 한 얘기잖아.”

“꿇어.”

어차피 오늘 보고 다시 안 만났으면 하는 사람들, 그럴 수 없다면 나중에 보더라도 아는 척 안 했으면 하는 사람들.

이걸로 손절이다.

“하하. 알았어, 알았어.”

현탁은 자신이 따른, 맥주잔에 담긴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캬—

“오오-.”

짝짝짝.

삭막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더 오바하는 동기들. 그 모습이 더 우습다.

“됐냐?”

“되긴 뭐가 돼? 그 잔 니가 따른 거잖아. 꿇어. 꿇고 내 잔 받아.”

“야, 김아인! 그만하자. 친구끼리 그냥 농담한 거잖아!”

“그래, 아인아. 그만하자. 취했냐? 왜 그래?”

쾅!

아리는 소주병을 크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시발 존나, 사내새끼들이 이게 뭐냐? 가식이나 떨고 있고. 잘난 새끼 눈치나 보고 있고. 왜? 이 새끼가 김앤강 다니니까 뭐 친한 게 지내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거 같아서 그렇게 빨아주냐?”

“야! 너 말 다 했어?”

“입 닥쳐, 이 새끼야. 나 그렇게 됐을 때, 한 놈도 병원에 안 왔으면서, 나는 오늘 여기 왜 불렀냐? 왜? 죽을 줄 알았는데, 멀쩡하게 로펌 다니니까, 어떻게 된 건가 궁금해서? 우리 로펌이 돈 잘 준다니까, 나도 알아두면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동기니까? 병신들. 친목질 좋은데. 할 거면 진심으로 해. 이렇게 사람 간 보지 말고.”

아리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가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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