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3)

독이 발린 촉수 (1)

경복궁역 6번 출구로 나와 새문안로5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로 생긴 많은 건물 중에 볼품없는 놈이 하나 보인다. 넓고 근사한 로비 하나 없고 최첨단 보안시스템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모르는 얼굴이 들어갈라치면 비장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어디선가 나와 ‘어디 가시나요?’를 묻는다.

이곳이 김앤강의 최초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다.

40년 전 하버드 로스쿨 출신 김성무 변호사와 검사 출신 강철순 변호사가 비전을 갖고 시작한 로펌. 대한민국 전문 로펌 시대의 효시.

비록 로펌 인력의 대부분이 광화문역 근처 새로 지은 빌딩으로 이전했지만, 이 역사적인 빌딩에 남아있는 자들이 있다.

허름해 보여도 기운이 남아있다.

“어떻게 됐어? 만나는 봤어?”

문을 열고 들어간 구현탁은 황재수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파트너 변호사의 등 뒤로 보이는 경복궁의 비경이 그의 신경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여혜린이 옳았다. 용산 MJ 엔터테인먼트 사옥 대표실에서 보이는 뷰보다 매력적이다. 조선 시대 용들이 살았던 곳. 역사적인 장소에는 보이지 않는 그것이 있다.

“네, 만나봤습니다.”

‘어땠어?’라고 묻기 전에 신입 변호사가 필요한 정보를 바로바로 쏟아냈으면 좋겠는데, 기대가 컸다. 기운 때문인지, 파트너 변호사의 중압감 때문인지 말이 느리다.

“지금 다니는 로펌에 충성도가 큰 듯싶습니다.”

그도 한때는 로펌에서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였다.

거래대금이 몇천억 원 되는 딜(deal)도 성사시켜봤고, 뉴욕, 런던, 싱가포르 등 세계 주요 중재원에 서보기도 했으며, 유명 정·재계 인물의 형사 사건도 맡아봤다.

그러나 세월은 가는 법. 최고 중의 최고만 들어간다는 로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욕심도 있어야 하고, 정치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과감한 베팅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운이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황재수의 운은 이제 끝물이었다.

죽어가는 개에게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던가, 자신이 알아차리기 전에 주위에서 먼저 안다.

위에서 내려오는 굵직한 사건들은 몇 년간 그에게 배당되지 않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클라이언트들도 재배당되어 젊은 파트너들에게 넘어갔다.

그가 여혜린에게 쩔쩔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어쩌면 황재수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카우트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이지?”

“예.”

하지만 그런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구속된 여정남 회장이 그를 다시 찾았다.

클라이언트의 비극은 변호사의 희극이다.

황재수는 지난해 가장 많은 보수를 로펌에 벌어왔다.

그를 빼내기 위해 지저분한 일들을 직접 해야 했지만, 다시 올라갈 수 있으면 그쯤이야.

여정남이 MJ 그룹에 복귀하게 되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 만만치 않은 여식이 순순히 짧은 칼자루를 제 아비에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크크큭.

황재수는 웃음이 난다. 부녀의 싸움에 피가 많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에게는 득이 된다. 여혜린이 더 피 터지게 싸워준다면 고마울 뿐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황재수는 겁많은 여혜성보다는 여혜린을 응원했다.

물론 끝에는 여정남이 이겨야 한다.

긴 사투를 치르고 났을 때,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승자의 옆에 있어야 하니까.

그도 잘 안다. 이것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그리고 이곳 김앤강에선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떨어지는 것밖에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정남의 신임을 유지하며 그를 힘겨운 승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 동기에게 사건 하나만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구현탁도 비슷한 처지였다.

한성대 로스쿨 출신으로 이 다리 저 다리를 놓아 어떻게 대한민국 최대 로펌에 입사는 했다. 그러나, 사시 출신 선배들과 서운대 로스쿨 출신에 밀려 입사 1년 만에 ‘따까리’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동기들 앞에서는 김앤강 다닌다고 여전히 으스대지만, 속 빈 강정이다. 당장 내년 재계약 때 방출될 수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황재수의 호출은 마지막 기회였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

「“비리에 집중하는 게 전략적으로 좋다는 내부 의견이야.”

“여정남 회장 도장이 찍힌 합의서가 있어.”

“여 회장이 직접 찍은 게 아니라는 게 1심에서 저쪽 주장이었고, 법원이 받아들였어.”

“다른 증인들도 있어.”

“증거력이 약해. 중간에 합의한 증인도 나왔고.”

“증거력이 약한 게 아니라 성추행 사건 따위에 인력 쏟을 마음이 없는 거지.”

“그것도 맞아. 성추행 혐의 인정받아봤자, 실형 나오기 힘들어. 비리 혐의가 인정돼야, 같이 묶어서 어떻게 해보겠는데···.”」

“변호사님, 고기 앞에서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글거리는 불판 소리가 오히려 집중을 도와준다. 서지우는 며칠 전 검찰에 있는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 중이었다.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서류에 찍힌 본인 도장마저 부인당했다.

이제 게임은 공정함에 기대할 수 있는 판이 아니다.

하긴 언제 이 게임이 공정한 적이 있었나.

“아니야. 먹어.”

때마침, 벽에 붙어 있는 작은 TV에서는 여정남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볼륨이 작아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지만, 화면 밑에 나오는 캡션에 대충 어떤 뉴스인지 짐작이 간다.

「여정남 회장 복귀에 관심 쏠린 재계···MJ 그룹의 운명은?」

“그나저나 저거 어떡할 신 건가요?”

윤정도의 질문에 서지우는 아무 말이 없다.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모든 것에 답이 있는 그도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감이 오질 않는다.

조용해진 테이블.

정도는 여전히 말이 없는 선배의 얼굴을 쓱 보고 옆자리 아리를 힐끔 봤다. 아까부터 막내도 말이 없다.

“너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냐?”

“네? 뭐라고 하셨어요?”

“정말 딴생각하고 있었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구현탁에게서 들어온 문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왜 문자를 했을까?’

‘그 정도 했으면 내 의사를 분명하게 전한 거 같은데.’

‘능글맞은 성격인가? 능글맞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얼굴 붉힌 친하지도 않은 동기에게 사과 문자를 보낼 이유가 있을까?’

‘혹시 생각보다 오빠와 친했었나?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친했으면 적어도 한번은 병원이나 집에 찾아와 봤을 것이다.’

“사건 생각이요.”

“사건 생각? 무슨 사건? 뭐 골머리 아픈 거 있어?”

“아···이 작가님 일이요.”

“이 작가님?”

“네. 글을 빨리 쓰셔야 할 텐데, 걱정돼서요.”

“별것이 다 걱정이다. 우리가 하는 사건 중에 가장 영양가 없는 고민이야. 솔직히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지.”

“그렇죠? 헤헤.”

“먹어. 고기 쌓였어. 선배님, 선배님도 좀 드세요. 남자 셋이 한우집 와서 고기가 쌓이는 거 보는 것도 처음이네.”

아리는 불판에 쌓인 고기로 젓가락을 가져가며 서지우의 얼굴을 살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얼굴. 평소 무표정인 얼굴과는 다르다.

“변호사님도 무슨 고민 있으세요?”

“응?”

물음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서지우는 막내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정도도 같은 의문이 있다. 애초에 생각할 거리가 있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이런 술자리에 오지도 않을 사람이 와서는 고기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 생각하느라.”

“선배님도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서지우는 방금 아리와 정도의 대화를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방금 여기 김 변도···에이씨- 나 안 해요. 이럴 거면 그냥 이것만 먹고 사무실 다시 들어가시죠. 투뿔등심 앞에서 이건 예의가 아닌 거 아닌가요? IMF가 터진 것도 아니고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 있다고 하기로서니···.”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 근처 커피숍.

“그날은 미안했다.”

구현탁이 찾아왔다. 됐다고 했는데, 굳이 찾아와서는 다시 사과를 한다.

솔직한 심정은 한 번 더 쏘아붙여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 힘들 정도로 녀석은 정중했다.

“그리고 아픈 데 찾아가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

“너만 알고 있어라. 나 솔직히 김앤강 내에서 겨우 버티고 있어. 입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지난 1년 반 갖은 발악을 하고 있는데도 힘드네. 그래서 그랬다. 남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뭐? 이제 와서 친구라도 하자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되냐?”

뭐지, 이건?

“너 기억 안 나냐? MT 때 술 먹으면서 네가 나한테 한 말? 우리 변호사 되면 네 쌍둥이 동생 소개해준다고 했잖아.”

오빠가?

“난 지금이라도 네가 소개해준다면 만나볼 의향 있다.”

사양한다.

“됐어.”

“화가 많이 났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귀찮으면 더는 연락 안 할게.”

아리가 대답 없이 빤히 쳐다만 보고 있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려던 구현탁은 마치 이제 막 생각이 났다는 듯이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근데 혹시 니네 로펌에서 연예 매니지먼트 성추행 사건 같은 것도 수임해?”

잠시 망설인 아리, 그 질문에는 대답한다.

“수임해.”

“형사도 하는구나.”

“형사는 안 해.”

“아, 그럼 합의까지만 맡는 건가.”

아리는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표정으로 그를 다시 봤다.

“사실 나한테 개인적으로 들어온 사건이 있는데···. 내가 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회사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는 건이라서 말이야···.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여자애인데, 알고 보니까 연예인 지망생이었더라고···. 라일락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 꼭 좀 도와주고 싶은데···. 괜찮으면, 네가 한번 봐줄 수 있겠냐?”

---*---

“장 여사님 어제 일본으로 출국하셨다고 합니다.”

아비의 공격이 시작됐다. 포섭했다고 생각한 주주들이 하나둘씩 연락되지 않았다.

비서실장이자 사내 변호사인 차동균의 보고에 창밖 한강으로 보고 있던 여혜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뾰족한 손톱이 살들을 찌른다.

“마이클은? 마이클은 연락됐어?”

“그게···.”

답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모두가 그녀를 피하고 있다.

“나를 지지하는 지분은 몇 퍼센트인 거지?”

“대충···.”

“대충 말고 확실한 거!”

“···이사님이 갖고 계신 7% 포함해서 14% 정도 됩니다.”

“MJ 미디어 지분 팔면 어디까지 확보 가능해?”

“현 시세에서 18%~19%까지 가능합니다.”

“아빠는 얼마나 확보한 거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혜성 사장이랑 에이스 인베스트먼트 차 대표 지분만 가지고도 20%가 넘습니다. 예측건대 이미 35% 이상 흔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툭- 투툭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붙인 손톱들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다.

“회장님하고 합의를 보시는 것이···.”

“합의? 흥. 자기 등에 칼 꽂은 딸과 합의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여? 오빠처럼 무릎 꿇고 기어들어 가지 않는 한, 하나도 양보하지 않을 사람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뻥 뚫린 유리창 밖으로 한강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만, 사방이 막힌 느낌이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

“서지우 변호사님한테 연락해서 보자고 해.”

“네, 알겠습니다.”

똑똑똑.

그럴 필요 없다.

“이사님, 서지우 변호사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이미 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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