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발린 촉수 (2)
거대한 문어가 촉수를 내밀며 다가온다. 작은 놈이면 맞서 싸워보겠지만, 그러기엔 몸집 차이가 너무 크다.
다리 하나 정도는 끊어버려야 겁을 먹고 내버려 둘 텐데···.
섣불리 집게다리를 들어 올렸다가는 등을 내줘버리고 말게 된다.
그리고 등을 내주면,
끝이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서지우는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띠리링-
-네, 형님.
“호영아, 부탁할 일이 좀 생겼다.”
---*---
“사실 나한테 개인적으로 들어온 사건이 있는데···. 내가 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회사 누구한테 맡길 수도 없는 건이라서 말이야···.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여자애인데, 알고 보니까 연예인 지망생이었더라고···. 라일락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 꼭 좀 도와주고 싶은데···. 괜찮으면, 네가 한번 봐줄 수 있겠냐?”
“나도 내 맘대로 사건을 수임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아, 그래···. 난 또 네가 파트너라고 해서···.”
비꼬는 건지, 아니면 아쉬워하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아리는 구현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럼. 네가 따로 한번 만나봐 주지 않을래? 사건 수임 안 해도 좋아. 그냥 만나서 사정만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 괜찮은 듯싶으면, 그때 너희 대표한테 가서 물어봐 주면 고맙고.”
“···.”
“부탁이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사정만 들어봐달라고 하는데, 싫다고 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물론 너와는 아무런 연관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매몰차게 일어설 수도 있었겠지만, 아리는 그 정도로 매정하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본심이야 어떻든 간에 정중하게 사과까지 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차갑게 돌아서지 못했다.
“누구라고?”
“고맙다. 서윤, 오서윤. 내가 너한테 연락하라고 할게. 그게 불편하면 걔 연락처를 주고.”
*
근처 커피숍에서 구현탁을 만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아리는 그와의 대화를 되뇌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이 든다.
비록 그를 만난 건 며칠 전 동기생들 술자리에서 처음이었지만, 오빠 핸드폰에 남겨진 문자 내용이나 이메일에서 느껴진 인성은 절대 이런 일로 사과를 할 인물이 아니다.
아리는 인터넷 검색창에 라일락 엔터테인먼트를 타입했다.
신생 엔터테인먼트로 딱히 정보가 없다.
아리는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대표 이름과 연락처를 확인해 곧바로 전화를 걸어본다.
-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거기가 라일락 엔터테인먼트인가요?”
-네, 맞는데요.
“혹시 홍종구 대표님 계신가요?”
-누구요?
“홍종구 대표님이요.”
-왜 그러시죠?
“아, 회사 홈페이지에 오디션 신청란이 있던데, 이게 진짜인지 알고 싶어서요.”
-그거 진짜예요. 거기 신청서 작성하셔서 사진하고 보내주시면 연락드려요.
“누가요? 홍 대표님이요?”
-아니요. 홍 대표님은 그냥 대표님이고, 실무는 다른 분이 보세요.
“다른 분 누구요? 아, 제가 이런 데 사기를 좀 많이 당해봐서 좀 조심스러워서요. 누가 연락해주실 건지 미리 알려 주는 건 곤란하신가요?”
-박정우 실장님이 연락하실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딸깍.
다른 이름을 얻었다.
아리를 곧바로 검색창에 ‘박정우’라는 이름을 타입한다.
흔한 이름이라 너무 많은 결과가 떠오른다.
“흠.”
이번에는 ‘오서윤’이라는 이름을 타입했다.
결과는 비슷하다.
딱히 유용한 정보는 못 찾겠다.
‘역시 한번 만나봐야 하나? ···아!’
검색을 포기하기 직전, 그녀의 해마체 어딘가에서 저장된 기억이 신호를 보낸다.
아리는 검색창을 끄고, 회사 인트라넷 서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다!”
「Case file #12308J 박은영」
한번 나오는 이름이었다.
여정남 회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박은영 씨의 진술서에 한 번 언급되었다.
「-실장님께서 대표님이 찾으신다고 해서 대표님 방에 갔어요.
-어떤 실장님이요?
-제작부 실장님이요.
-그분 이름이 어떻게 되죠?
-박정우 실장님이요.」
그녀가 입사하기 전에 들어온 사건으로 대표 단독 사건이었다. 그러나, 로펌 직무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회사 서버 내에 있는 모든 파일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던 아리는 해당 사건 문서들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김진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단서들.
이제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온다.
띠리링- 띠리링-
-네.
“여보세요. 김진수 이사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구시죠?
‘있다! 김진수라는 사람이 라일락 엔터테인먼트에 있다는 말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번호를 착각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아리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찾은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리는 곧장 대표변호사의 방으로 향했다.
“변호사님, 방에 계시나요?”
“아니요. MJ 엔터테인먼트에 가셨는데.”
---*---
똑똑똑.
“이사님, 서지우 변호사님이 찾아오셨는데요.”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안으로 서지우가 들어오자, 차동균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안 그래도 만나자고 하려고 했어.”
“사족 없이 얘기할게. 지분 포기해. 그게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 옵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서지우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녀도 안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 다시 목줄이 차이느냐, 아니면 지분을 포기하고 전문경영인으로 나서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오너가의 자식이 기다리면 자기 것이 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건 확실하고?”
“그건 너한테 달렸지.”
“···.”
“왜? 자신 없어?”
자신 있다. 그만큼의 자신도 없었으면 애초에 아버지를 배신하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의 색안경이 두려울 뿐.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야?”
“PSG 캐피탈.”
“PSG 캐피탈? 헤지펀드? 그 펀드 공격적인 데 아니야? 정말 거기?”
문어의 관심을 돌릴만한 존재여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응.”
서지우의 확고한 대답에 여혜린은 더 반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줘야 할 것이 더 있어.”
“뭔데? 말해.”
“더 어려운 일이야.”
“말해. 이 회사 지분을 넘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으려고.”
서지우의 설명을 듣는 여혜린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는다.
두 번째 요청은 더 어려운 일이 맞았다.
“못하겠다면?”
“그럼 잡아 먹히는 수밖에.”
---*---
사무실에 돌아온 서지우는 PSG 캐피탈의 로건 폴슨에 전화를 걸었다.
-(네가 웬일이야?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고?)
링크인(Linkin)에 이름만 쳐도 직장과 연락처쯤은 쉽게 구한다.
로건 폴슨의 질문은 몇 년간 왕래가 없었는데 왜 지금 자신을 찾아봤냐는 질문이었다.
“(비즈니스.)”
-(비즈니스?)
“(응. 혹시 MJ 엔터테인먼트 인수할 생각 없어?)”
-(MJ 엔터?)
*
딸깍.
통화를 마친 서지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과거가 바뀌어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 사건이 없는 일이 되었어도, 태이는 그와 헤어졌고, 태이는 <타일러 앤 로즈>를 그만두었으며, 로건 폴슨은 그 원인이 서지우였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감정적이지만 동시에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런 알짜배기 기회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의도를 의심하겠지만, 자아도취가 심한 그는 서지우의 의도 따위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었고, 더 좋은 건 개인적인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더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문어의 주의를 끌기에 딱 좋은 프레데터이다.
이제 자를 다리를 찾아야 할 차례다.
똑똑똑.
“네.”
공교롭게도,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때마침,
“어, 들어와.”
막내가 적당한 다리를 들고 들어왔다.
“다른 게 아니라요. 박은영 씨 사건 관련해서 상의드릴 게 있는데요.”
---*---
김앤강, 황재수 사무실.
“어떻게 됐어?”
“잘 됐습니다.”
“김아인 변호사가 만나주기로 한 거야?”
“네.”
“잘했어. 나가봐.”
보고를 마친 구현탁은 황재수의 나가보라는 지시에도 잠시 서성였다.
“왜? 더 할 말이 있어?”
“혹시 무슨 사건 관련인지 설명해주시면 제가 좀 더···.”
“구 변호사.”
“네.”
“시키는 일이나 해. 알 거 없어.”
“···네, 알겠습니다.”
황재수가 구현탁에게 설명해 준 것은 없었다.
<해결>의 견고한 껍데기를 뚫고 들어갈 만한 적당한 틈을 찾고 있었던 그는 김아인(김아리)이 해결을 조인한 지 이제 1년 남짓 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던 중 우연히 김앤강 신입 변호사 중 구현탁이 로스쿨 동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고 뻗은 촉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면 연약한 틈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구현탁의 보고를 들은 황재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냥 무작정 훅 들어갈 생각은 결코 아니다.
그러다 날카로운 서지우의 집게 걸리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더욱더 구현탁에게 설명하면 안 된다.
혹시라도 잡혔을 때 끊고 가도 크게 데미지를 입지 않을 될 정도여야 하니까.
“구 변호사.”
“네.”
“알고 있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구 변이 김아인하고 했던 대화는 모르는 일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구현탁은 인사를 하고 파트너 변호사의 근사한 방을 나왔다.
황재수가 간과한 것은 구현탁 역시 그만큼 야망이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구현탁을 물리고, 황재수는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진수에게 전화를 건다.
-네, 변호사님.
“준비는 잘해두었습니까?”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든 말만 하세요.
“나중에 딴소리할 가능성이 1%라도 있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났습니다.”
-그럴 리 절대 없습니다. 워낙 약점이 많은 애라서요. 죽으면 죽었지, 입을 열지는 못합니다.
황재수는 다시 한번 고민한다.
실패했을 때 입을 최고의 데미지를.
최악의 경우, 즉, 만약 준비한 증인 오서윤이 가짜 피해자임이 발각이 되어도, 서지우 측에서 꼬투리 잡을 만한 증거는 없다.
「워낙 약점이 많은 애라서요. 죽으면 죽었지, 입을 열지는 못합니다.」
김진수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또 보고드리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황재수는 창문 밖 경복궁을 바라봤다.
인조 조명 아래 멋스럽게 빛나는 옛 건물들.
언제봐도 멋진 뷰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른다, 이런 자리에 오르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
그냥 성실하게 일하고 시키는 일만 잘하다 보면 이 자리에 오게 된다고?
크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당장 대한민국 재벌가 전과기록을 들춰봐라,
유명 정치인들과 장관들 과거 청문회 기록을 살펴봐라.
그들이 정말 성실하게 시키는 일만 잘하며 살아왔는지.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도태하고, 도태되면 잡아먹힌다.
그게 룰이다.
황재수는 촉수를 뻗었다.
서지우의 집게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