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3)

문어 다리 잡기 (1)

「“비자금 꺼내.”

“네?”

“오프쇼어 계좌에 있는 돈 풀어.”

“그러기에는 항소심도 있고, 아직 소송이 끝난 게 아니라서···.”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어?”

“검찰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돈을 움직이면···.”」

오프쇼어 계좌에 숨겨놓은 비자금을 꺼내 지분을 더 모으라는 여정남 회장의 지시가 있었지만, 황재수는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혜린이 정말 PSG 캐피탈에 자기 지분을 다 넘길까? 하지만 그 지분마저도 없으면 복귀는 영영 불가능인데?’

아니, 복귀만 불가능한 게 아니라 그냥 끝인 거다.

제아무리 경영에 뛰어나다고 해도 대주주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다. 당장은 PSG 캐피탈이 쉴드를 쳐줄지 몰라도, 2~3년 안에 단물만 쏙 빨리고 내팽개칠 게 뻔하다.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닐 텐데···. 그 정도로 제 아버지가 싫은 걸까?’

황재수는 여혜린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실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PSG 캐피탈이 들어온다면 골치가 아파지기에, 여혜린의 수가 진짜라면 여정남 회장의 지시대로 당장 지분을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오프쇼어 계좌들에 있는 비자금을 빼내서 국내로 들어와야 하는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검찰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현 상황에서, 아무리 바람이 우리 편으로 불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리스크가 있었다.

‘제 아버지에게 잡아 먹히기 싫다고 제 발로 굴 밖으로 나오겠다고?’

문어에게서 도망치려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수면 위로 올라간 격이다.

‘진짜 그런 짓을 한다고?’

똑똑똑.

여혜린의 속내를 추측해보려고 갖은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를 방해한 건

“누구야?”

“구정택입니다.”

---*---

똑똑-

아리는 구현탁이 자신의 서류철에서 NDA(보안유지계약)를 꺼내는 장면이 담긴 카페 CCTV 영상을 들고 대표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녹음은?”

“서하연 씨 녹음이요? 그것도 해두었습니다.”

이제 증거들은 다 모았다.

문어가 집게 안으로 촉수를 깊게 넣기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변호사님.”

“왜?”

“이것들을 법정에서 증거로 쓰기에는···.”

약하다. 몰래 사진 찍는 행위는 CCTV 영상에 명확하게 기록됐지만, 어떤 서류를 찍고 있는 것까지는 확인이 어려웠고.

의뢰인과 상담한 내용을 몰래 녹음한 걸 법원에서 증거로 내밀 수도 없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쓸 증거들 아니야.”

“법정에서 제출할 게 아니라면···?”

촉수를 끊고 나서 꿈틀대는 그걸 먹어 치우려면 필요하니까.

“김 변.”

“네.”

“네가 김 변을 믿어도 될까?”

“네?”

“김 변을 믿어도 되냐고?”

부드러운 표정과는 상반되게 말투는 심각했다.

대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아리는 상관없었다.

“네.”

서지우는 아리의 눈을 쳐다봤다.

진심을 들여다보려는 것이었다.

두근거렸지만 아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고작 3초 정도였으나 3분처럼 느껴졌다.

서지우는 그럼 믿겠다는 말 대신 미소로 대답했다.

그러곤,

“그러면 지금 내가 말해주는 주소로 가서 뭐 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서지우는 아리에게 호영이 있는 오성전자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김 변의 기억력에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지.”

---*---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황재수는 구현탁이 내민 휴대폰 속 NDA(기밀유지협약) 사진을 꼼꼼히 검토하고는 물었다.

“동기 녀석이 잠깐 통화를 하러 간 사이에 찍었습니다.”

황재수는 음흉한 짓을 해놓고도 자랑하듯 뻔뻔하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끝내는 주는 정보를 가져왔지만, 황재수는 구현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고작 2년 차 주제에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 하나 없이 보상을 달라는 놈의 태도. 눈치가 빨라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놈들이 언제든 수가 틀리면 배신하는 놈이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가지고 왔지?”

“네? 그게···필요하실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왜?”

“그전에 저한테 시키신 일도 그렇고···, 김아인에게 오서윤이라는 여자를 소개하라고 하신 것도 그렇고···. MJ 여 회장님 관련된 일 아닌가요?”

황재수는 구현탁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무엇에 관련된 일인지 설명해준 적이 없다.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떠보는 정보들을 추려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알아냈다고 한들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놈은 많지 않다.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놈이다.

“이런다고 내가 구 변을 어떻게 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네? 아, 네, 그럼요. 그냥 저는 변호사님이 필요로 하시지 않을까 해서···.”

“동기가 눈치 못 챈 거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제가 사진 찍을 때는 통화하느라 카페 밖을 완전히 나가 있었습니다. 등을 돌리고 있었고, 제가 사진을 다 찍고 나서 한참 뒤에나 들어왔습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욕심이 있는 놈들은 컨트롤하기가 편하다.

당분간 필요한 수족처럼 부려 먹을 놈이 필요하기는 했는데···

“구 변, 지금 있는 팀이 어디지?”

“소송팀에 있습니다.”

“소송팀 누구?”

“이재호 변호사님 밑에 있습니다.”

펌에서 승진하고 가장 먼 곳에 있는 놈들만 모여있는 곳.

“끝에 빈방 있으니까 내일부터 이리로 출근해. 이재호 변호사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뭐든 시켜주시면 잘하겠습니다.”

“목소리부터 줄여. 그런 태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변호사님.”

“시키는 일만 해. 다음부터 시키기 전에는 이런 짓도 하지 말고.”

한번은 운이 좋았을망정, 이런 짓을 계속하면 꼬리가 밟힐 수 있다. 황재수가 구현탁을 곁에 두려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거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더 들쑤시고 다닐까 봐.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네, 변호사님.”

“나 말고는 누구한테도 이 사건 관련해서 입도 뻥긋하지 마.”

“물론입니다.”

“김성무 변호사님이 물으셔도. 알았어?”

지금 황재수는 <김앤강>의 절대 권력자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구현탁은 내심 흠칫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

구현탁을 내보낸 황재수는 그가 들고 온 PSG 캐피탈과 여혜린 사이에 체결된 NDA를 유심히 검토했다.

컴퓨터에서 여혜린이 서명한 다른 계약서와 대조해본다.

사인이 일치한다.

계약서 내용 역시 가짜가 아니다.

그건 분명 지분 블록딜을 하기 위해서 사전 검토용 기밀유지협약서였다.

‘진짜였어! 제 아빠가 정말 그 정도로 싫은 거였어!’

좀 전까지 여혜린의 본심을 확신할 수 없었던 황재수는 곧바로 여정남의 오프쇼어 계좌를 관리하는 두바이 변호사에게 이메일을 작성했다.

메일의 내용은 복잡했지만, 본질은 단순했다.

「백 개 정도의 새로운 페이퍼컴퍼니 설립.

계좌들에 들어있는 자금을 해당 컴퍼니 계좌들로 이동.

해당 컴퍼니들을 이용해 MJ 엔터 지분 획득.」

그녀의 본심을 확인했다고 생각한 황재수는 여정남의 지시대로 돈을 움직였다.

---*---

“안녕하세요. 서 변호사님한테 오신다는 연락 받았어요.”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해결 김아인 변호사입니다.”

“호영입니다.”

서지우 변호사 가르쳐준 곳에는 아리보다도 어려 보이는 남자가 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전에서 게임·전자기기 판매를 하는 그는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그녀를 건물 내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에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등 각종 컴퓨터 부속들이 두서없이 쌓여있었고, 작동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아 보이는 기기들도 뒹굴어 다녔다.

윙—

그가 그것 중 하나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어딘가에서 팬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만, 꺼져있는 줄만 알았던 모니터들이

파밧—

눈을 떴다.

게임 화면에서 아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기계어들로 된 프로그램들까지.

정신없는 그곳에서 젊은 남자는 아주 편안하게 무언가를 타입하더니만,

“거기 있는 모니터 보시면 돼요.”

구석에 놓인 모니터를 가리켰다.

“저거 말씀이신가요?”

“네.”

그가 가리킨 모니터는 그리 구식은 아니었다. 나름 듀얼 모니터로 문서를 대조하며 보기는 편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모니터만 있었다.

키보드도, 마우스도, 심지어 의자도 없었다.

호영은 그 뒤에도 한동안 정신없이 무언가를 타입하고 난 뒤, 창고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키보드와 마우스 중 적당한 것을 골라 아리에게 챙겨주고는 자신이 앉고 있던 의자를 그녀에게 밀었다.

“여기 앉아서 이거로 하시면 돼요. 윈도우는 하실 줄 아시죠?”

“네···. 일반 사무직 정도는요.”

“그럼 됐어요.”

그녀가 의자에 앉자, 초록색이었던 모니터 화면이 윈도우 대기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바탕화면에 폴더 하나가 마법처럼 생성된다.

“이 안에 다 있어요.”

“이 폴더 안에요?”

“네.”

“저는 뭔지 몰라서 그냥 다 다운받았어요. 날짜 외에는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요.”

“네, 알겠어요.”

“다른 건 절대 건드리시면 안 돼요.”

건드릴 마음 없다. 건드리고 싶지도 않고.

“네.”

호영은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이 아리를 그 비밀스러운 창고에 두고 떠나버렸다.

전등조차 켜져 있지 않은 깜깜한 방.

말 없는 모니터들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후-.”

그녀는 크게 한숨 내쉬고, 호영이 액세스를 허락해준 폴더를 열어본다.

생소한 주소들끼리 주고받은 이메일들 그리고 그 이메일들에 첨부된 파일들.

그의 말대로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아리는 하나씩 열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고사양 컴퓨터만큼이나 그녀의 뇌 역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정보를 프로세스한다.

머릿속에 저장된 여정남 오프쇼어 계좌들, 관련자 이름, 주소, 그 외 정보들과 그녀가 눈으로 검토하고 있는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비교하는 중이다.

*

「“지금 이 메모리에 있는 자료들을 다 숙지해.”

“이 안에 뭐가 들어있나요?”

“여정남 회장이 비자금 만들 때 사용했던 페이퍼컴퍼니 목록하고 오프쇼어 계좌들.”

“···.”

“1년 전에 받은 거니까 지금은 아마도 돈을 다른 곳으로 다 빼돌렸겠지. 그랬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검찰을 통으로 매수했던가.”

“검찰을요?”

“그냥 해본 소리야. 검찰이 찾기 전에 움직였을 거야.”

“네···.”

“여기는 호영이라도 내가 하는 해커.”

“해커요?”

“가면 설명해줄 거야.”

“해커가요?”

“김 변이 할 일은 여기 있는 정보들을 그 AI급 기억력에 담아가서 호영이가 보여주는 자료들 속에서 여정남 회장의 비자금 경로를 찾아내는 거야.”

“비자금 경로···.”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수천 개의 가짜 명의를 이용해서 진짜를 감췄으니까. 그래서 검찰도 못 찾은 거고. 그래도 분명 그 안에 흔적이 있어. 할 수 있겠어?”

서지우가 하는 요청이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 못 했지만, 아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로부터 처음 받은 부탁이었기에.

“네.”」

*

네 시간쯤 뒤,

“찾았다!”

하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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