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는 김에 대가리까지 (3)
“경식아, 증거 나온 경로를 좀 알아봐. 분명 검찰이 그걸 제힘을 알아냈을 리가 없어. ”
“선배님,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경식아!”
검찰에 있는 후배도,
“구 의원님, 이번에는 정말 도와주셔야 할 때입니다.”
“이 사람아, 내가 무슨 힘이 있어. 회장님이 잘나갈 때 기수 노릇을 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구 의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회장님께서 구 의원님 선거에 ···.”
“어허, 황 변. 지금 협박하겠다는 거야? 황 변, 회장님 여태까지 이런 일 잘 넘겨오셨잖아. 그리고 이건 황 변호사 일이잖아.”
정치계 쪽 커넥션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줄을 잘못 선 것일까?’
황재수는 여혜린을 떠올렸다.
제 아비를 쳐내고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앉는 모습을 봤을 때 잠깐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제 아비와 같은 부류로 보는 듯했다.
‘그래도 그쪽에 섰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든다.
‘후회는 게임이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황재수는 마지막 수를 두기 위해 <에이스인베스트먼트> 차병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네, 황 변호사님.
“차 대표님, 오늘 중으로 찾아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언제가 좋을까요?”
---*---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진수 이사실.
“이번에는 갈망하는 눈빛을 한번 해볼까? 아니지, 아니지. 갈망. 갈망’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 간절하게 바란다는 뜻이야. ‘갈증’이 부족해서 간절한 상태를 말하는 거면, ‘갈망’은 이제 뭐가 부족한 줄 알고 그걸 원하는 상태인 거지. 얼마만큼 인생 전부를 걸 만큼. 우리 윤주는 뭔가를 갈망해본 적 없어? 혹시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 있어?”
똑똑똑-
한참 오디션을 보고 있는 중,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디션 중이야!”
늘 하던 대로 고함을 쳐서 돌려보내려 했지만,
똑똑똑
문밖에 있는 사람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짜증이 정수리까지 난 김진수가 문을 벌컥 열고 한소리 하려 했지만,
“오디션 중이라고······.”
그의 시야에 모르는 남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누구시죠?”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 있다. 그래서 낯이 익었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지금 좀 일이 바빠서 그런데···.”
“며칠 전에 황재수 변호사님과 구현탁 변호사를 만나셨죠?”
“네? 누구요? 이름들이 생소한데···.”
“아, 그러세요. 그러면 검찰로 바로 갈까요?”
슬쩍 떠보려 했지만 그럴 상대가 아니다. 김진수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들어오시죠.”
---*---
-어떻게 되고 있어?
“좀 전에 차병호 대표를 만나고 왔습니다. 어차피 여혜린 대표가 꾸민 일이고, 여혜린 대표가 원하는 건 MJ 엔터테인먼트니까,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날 때까지는 회장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지분으로 압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차 대표만 우리 쪽 편으로 만들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 대표는 뭐래?
“알겠다고 했습니다.”
-알겠다는 게 뭐야?
“제가 임시주총을 열면 저희 쪽에 서겠다는 의사를 여 대표에게 표시하겠다고 합니다.”
-멍청한 년! 딸년이라는 게 똥오줌 못 가리고 날뛰고···. 진작에 내쳤어야 할 것인데.
“일단은 너무 도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이번 일만 넘어가기만 하면···. 알았어, 끊어.
딸깍.
통화를 끊은 황재수는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얼마 없다.
김성무가 준 기한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임시주총까지 시간이 있을까?’
조급하게 굴수록 실수가 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느긋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근데 구현탁 이놈은 왜 아직도 보고를 안 하는 거지?’
애초에 여자 증인을 <해결>에 보내자는 계획은 서지우에게 여성 편력 있다는 정보에서 시작된 말이었다.
여 회장은 서지우에게 여자를 붙여 똑같이 당하게 해주겠다는 의도였다.
황재수는 여 회장의 계획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이 시점에 미인계라니···. 위험성이 높았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건 차라리 가짜 증인을 보내 서지우가 대리하는 피해자의 신뢰도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진수와 함께 일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구현탁을 통해 <해결>의 막내 변호사에게 접근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PSG 캐피탈 이야기가 나오면서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황재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 회장이 애초에 낸 아이디어를 다시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다만, 목표를 서지우가 아닌 <해결>의 막내 변호사로 잡았다.
경험이 없는 막내 변호사라면 계획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날 밤, 구현탁을 불러 김진수와 만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황재수는 구현탁의 보고를 기다렸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추잡한 계획이 이미 들통난 지도 모른 채.
징징- 징징-
황재수가 구현탁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들어왔다.
「서지수」
화면에 뜬 발신자명을 확인한 그는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황 변호사님. 서지우입니다.
“아, 그래, 서 변호사. 서 변호사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지금 사무실에 계신가요? 계시면 잠깐 올라가도 될까요? 상의드릴 말씀이 있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오전에 차병호 대표님 만나셨죠? 관련된 일입니다.
이제는 만나야 했다. 잠깐 망설이던 황재수는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
10분 뒤, 훤칠한 키의 서지우가 방으로 들어왔다.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말끔하다.
“관련된 일이라는 게 무슨 말이지?”
다급한 황재수는 인사치레 따위는 건너뛰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로 물으셨으니, 저도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후부터 차병호 대표님 동생분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는 요청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 외 에이스 인베스트먼트나 차병호 대표, 대표님 친척 가족 등에 대한 뒷조사도요.”
황재수는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흠. 바로 물으시길래, 서로 떠보는 거는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요.”
후배의 일침에 황재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경고 같은 요청할 때는 그만한 카드가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럼, 서 변도 변죽 그만 울리고 카드를 까지, 그래?”
코너에 몰린 그였기에 말투가 날카롭다.
서지우는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본 후 휴대폰 저장된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구 변, 잘 할 수 있겠어?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내가 구 변 확실하게 밀어줄게.”
“김 이사, 우리가 그전까지는 서먹서먹한 게 있었지만, 이번에 서지우 그 새끼만 보내버리고 나면 진짜 한번 제대로 친해져 보자고.”
“저야 영광이죠, 변호사님.”
···.」
그날 밤 구현탁을 데리고 김진수를 만나러 간 술자리.
서지우의 휴대폰에서 그 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흘러나왔다.
황재수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한다.
“아주 대범한 어쏘 변호사를 뽑으셨더라고요. 감히 파트너와 같이하는 술자리 대화를, 그것도 범죄를 논하는 자리의 대화를 증거 남기겠다고 자기 휴대폰에 저장할 정도로 대범한.”
며칠 전, 서지우는 구현탁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해결>의 서류를 몰래 훔쳐 찍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의도는 그에게 자백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황재수가 시켰다는 자백을.
그 자백으로 황재수를 압박하려는 의도였을 뿐인데···.
변호사 자격을 박탈시켜버리겠다는 서지우의 말에 놀란 녀석은 자기 살겠다고 선뜻 녹음 파일을 건네버렸다.
황재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수를 읽혔고 모든 수가 막혔다.
이제는 정말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차마 원하는 게 뭐냐고 말할 수조차 없다.
완벽한 패배다.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여정남 회장, 검찰 조사 중 긴급 구속.」
「국내 최대 로펌 김앤강, 더는 여정남 회장 변호하지 않는다. 담당 파트너 변호사 사임이 이유.」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 모 이사 검찰 조사 회피. 해외로 도주.」
「에이스 인베스트먼트, 여 회장 재판 중에도 MJ 엔터테인먼트 지분 추가 획득.」
“뭔 뉴스가 전부 MJ 그룹 관련 이야기이냐.”
핸드폰으로 포털 기사들을 넘기며 보고 있던 정도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잖아요.”
“잘됐지. 잘된 건데, 애초에 1심에서 이렇게 돼야 했었는데 말이야. 아, 수고했어. 들었어, 김 변이 고생 많았다며?”
누가 의뢰한 건이 아니었다.
박선후 변호사의 사촌 동생 일이기는 했지만, 지난 몇 주간 일들을 청구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서 변호사님이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에요.”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며칠 전에 퇴근할 때 선배님이 말씀하셨어. 김 변 아니었으면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진짜요?”
“진짜. 그 AI급 기억력 없었으면 일이 엄청 복잡해졌을 거라고 하셨어.”
정도의 말에 아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무튼 골머리 아픈 사건 또 하나 해결했다. 이래서 형사는 얽히지 않는 게 편해. 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수고해.”
정도가 떠나고 홀로 남은 아리는 방금 정도를 통해 들은 서지우 칭찬을 곱씹는다.
「김 변 아니었으면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그 AI급 기억력 없었으면 일이 엄청 복잡해졌을 거라고.」
뿌듯했다.
아리는 처음으로 정말 변호사가 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용산,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차병호 대표님 만났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뭘?”
“차 대표님한테 오빠 말고 나를 밀어주라고 했다면서?”
“여정남 회장 복귀의 싹을 완전히 자르려면, 당신 오빠보다는 당신이 안전한 선택이니까.”
“흥,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고?”
“미안함?”
“결국 부녀 사이 끊어놨잖아.”
반어법이었다. 여혜린은 고마웠다. 그런 아비와의 연을 끊게 해주어서.
서지우는 여혜린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약속은 아니야. 지켜보겠다고만 했지.”
“알아. 두고 봐. 앞으로 5년 안에 증명해낼 줄 테니까.”
서지우는 그런 여혜린을 쓱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증명해낼 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은 그녀니까.
“아, <퓨처리스틱 픽쳐스> 론 실버 대표가 만나재.”
“진짜? The Dynasty 프로젝트 투자 관련해서?”
“시간 날 때, <코즈모미디어> 임 대표님에게 연락하면 시간, 장소 정할 수 있을 거야.”
“서지우···.”
엄청 고마운 모양이다. 눈망울이 빤짝인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당신한테 특별히 잘해주는 거 아니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나 때문에 바뀐 세상, 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없어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