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33)

사랑의 계절

“아아- 사랑이 하고 싶다-”

냉 메밀 면발을 소스에 담그던 중, 깊은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내뱉었다.

“갑자기요?”

정도의 고해성사에 좋은 이야깃거리라도 발견한 양 창현이 물었다.

“미치도록 하고 싶다-.”

“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뜻대로 잘 안 되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니?”

“가서 만나세요. 만나면 되잖아요.”

“가서, 어딜 가서 만나? 어디서? 하루 12시간을 매여있는 곳에는 이렇게 남자들밖에 없는데.”

정도의 푸념에 앞에 앉은 아리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 이 상황이 웃길 때가 있다.

처음에는 이런 주제가 나올 때도 속으로 뜨끔했는데 이제는 익숙하다.

“동기나 친구분 중에 소개팅해 줄 만한 분 없으세요?”

“이미 다 해줄 사람 했고, 받을 사람 받았지. 야, 그것도 좀 웃긴 게. 내 동기 중의 한 명은 자기가 아는 여자 동생을 지 동기들한테 다 소개해준 거 있지. 솔직히 한 번 소개해줬으면 그 모임에서 다른 동기한테 소개해주는 거는 조금 그런 거 아냐? 뭐, 소개팅 한번 한 거라고는 하지만, 좀 그렇잖아?”

“쓰읍-.”

“왜?”

“아, 그거 애매하네요.”

“그렇지?”

“내 여사친을 내 친구에게 소개했는데, 둘이 잘 안 돼서, 또 다른 친구에게 소개했는데, 둘이 또 잘 알아.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또 생각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고.”

“기분 이상하다니까. 나랑 이번 주에 만났는데, 다음 주에 내 친구랑 만나. 이상하지 않겠냐?”

“그것 좀···.”

정도와 창현이 열띤 토론을 하는 사이, 묵묵히 냉 메밀 샐러드를 먹고 있던 이헌이 한마디 끼어든다.

“그런데 결혼정보회사 같은데 등록하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응?”

“거기 등록하면 거기 회원들끼리 돌아가며 데이트해보는 거 아니에요. 연말에는 매칭 안 된 회원들끼리 파티도 하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그거는 모르는 사람들끼리니까.”

“제가 아는 형님, 누나는 제가 소개해줬을 때는 서로 별로라고 하더니만, 몇 년 뒤에 우연히 같은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했다가 매칭돼서 결혼했어요.”

“진짜?”

“자기들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하던데요.”

“와- 신기하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뭐 그런 건가? 아무튼, 그건 내가 하는 얘기랑은 조금 다르지. 그니까,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소개팅을 누구한테 받았는데, 별로래서 ‘노’를 했어. 근데, 그 여자가 다음 주에 우리 김 변을 만나는 거야. 어때, 이상하지 않아?”

“그게 뭐가 어때서요? 변호사님이 거절했다면서요. 그리고 뭘 한 거도 아니고 그냥 만나서 밥만 먹은 건데.”

“그니까, 뭘 한 거는 아닌데, 그냥 기분이 좀···. 김 변, 김 변은 어떨 거 같아? 말 좀 해봐. 나만 이상한 거야?”

정도가 지원을 요청해보지만, 아리는 주제에 별 관심 없다.

“이상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뭐 대답이 그래. 김 변, 딴생각했지?”

했다.

‘머리를 조금만 더 기르면 다른 스타일링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기르면 걸릴까?’ 하는 조금은 짜릿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저는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래? 아, 여기서 나만 꼰대 되는 거야?”

“사람의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거잖아요. 내가 평생 사랑할 사람이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 또 심오하네, 김 변. 느낌 있는데. 그렇지, 그건 맞지. 사람의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거지. 아, 김 변이 사람 또 사람 설레게 하네.”

“제가요?”

“오케이. 그럼 나도 김 변의 조언대로 가리지 말고 만나야겠다.”

정도의 선언에 듣고 있던 창현이 다시 끼어든다.

“좀 전에 제가 만나시라고 하시니까, 하루 12시간 남자밖에 없는 회사에 묶여서 만날 사람 없다고 하셨잖아요.”

“방금 유 과장이 해답을 줬잖아.”

“제가요?”

“응.”

“언제요?”

“방금. 결혼정보회사.”

---*---

서지우는 오랜만에 춘천의 암자를 찾았다.

“네놈이 웬일이야? 요새는 맨날 지 부하들만 보내고 통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만.”

“글은 잘 쓰고 계세요?”

“이놈이, 어디서 나한테 시애미 짓을 하려고 해. 잘 쓰고 있다, 왜?”

“잘 안 써지나 보네요.”

“이 자식이 진짜!”

들켰다. 펜이 잘 나가질 않는다.

서지우가 손에든 봉투를 흔들자 ‘쨍그랑’하고 병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한잔하시죠.”

“에게- 누구 코에 부치려고 고작 두 병을 사 와.”

“한 병만 하고 올라가야 해요.”

“안 그래도 기사가 안 가고 저기 있는데, 웬일로 네 놈이 술 얘기를 꺼내나 했다.”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이중기는 벌써 잔을 챙겨 툇마루에 앉았다.

술을 즐길 줄 아는 노인이다.

짝으로 쌓아놓고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몇 병 없을 때는 조금씩 음미하면 마신다.

초여름 바람 소리, 벌레 소리를 들으며 마신 것이 이제 병 바닥을 보인다. 서지우는 본론을 꺼냈다.

“글 쓰시기 힘드세요?”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자꾸···.”

“힘드시면 쉬셔도 된다고요.”

욕을 하려던 이중기는 ‘쉬셔도 된다.’라는 말에 멈추고 서지우를 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공 대표님이랑 얘기를 나눴어요.”

“무슨 이야기?”

“아무래도 어르신이 요새 글 쓰시는 게 힘드신 것 같다고.”

“내가 언제 그랬는데? 이놈이 제멋대로···. 그래서? 그랬더니 공국현이가 뭐래?”

“정말 그러시다면 아쉽지만 계약 해지를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진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중기가 안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사라진 후, 이중기는 번아웃 같은 것이 온 듯했다.

서지우는 왠지 자기 책임인 것 같아 미안했다.

비록 자신의 이야기였지만, 이중기 작가의 창작물.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적어도 이중기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었다.

“공 대표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한 거 아니었어?”

“어르신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다는 걸 눈치채고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셨어요.”

“다른 프로젝트?”

“네, MJ 엔터에서 투자하기로 결정했나 봐요.”

그렇게 된 데에는 서지우의 입김이 작용했다.

“넷플릭스(Net-flicks)는? 거기하고도 계약이 된 거 아니었어?”

“어르신이 오늘 확답을 주시면, 그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이중기는 그제야 왜 서지우가 찾아왔는지 알았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런 적이 없었는데···. 분명 멋진 이야기가 서두부터 결말까지 다 내 머릿속에 있었는데,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야. 정말이야. 심지어 내가 다 쓴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자네, 그런 기분 알아? 차라리 기억이 전혀 없으면 좋겠는데, 분명 뭐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기분. 답답해.”

“···죄송합니다.”

“응? 자네가 왜 죄송해?”

지우는 자기가 한 삭제 행위 때문이라 여겼다.

“그냥요.”

“싱겁기는. 그럼, 수고 좀 해줘. 정말이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어. 자꾸 그 없어진 기억에 집착하게 되니까, 글이 더 안 나가.”

“알겠습니다. 그럼 영화사 청아랑 계약 해지하고 넷플릭스 계약 건도 해결하겠습니다.”

이중기는 마지막 잔을 마시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은 안도감에 내쉬는 숨이었고, 나머지 반은 미안함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

“나 한동안 찾지 말아.”

“가시는 곳만 말씀해주십시오.”

“알았어. 그건 김 변한테 말해둘게. 근데, 요새 김 변은 어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어르신.”

“왜?”

“저번에 병원 일도 그렇고, 어르신은 왜 그렇게 김 변호사한테 신경을 쓰세요? 그러신 분 아니잖아요.”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세심하고 배려심 많고.”

“윤 변호사나 그전 막내 변호사들은 이 정도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인간관계라는 것이 말이야. 서로 통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 있어. 김 변하고는 나는 통하는 게 있지.”

“술이요?”

“허허허.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지난번 병원에서 있었을 일을 물어봤지만, 이중기는 대충 얼버무렸다.

지우는 더 깊게 캐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말해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잘 쉬시다 오세요. 저는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에이- 소주 한 병이라, 감질나게. 너는 인마 감질맛나는 놈이야.”

“계약 해지 완료되면 문자로 보고드릴게요.”

“알았어.”

서지우는 이중기 작가를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다.

---*---

‘사랑?’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아리는 문득 아까 점심에 정도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지난 1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남자로 살아온 그녀는 순간 공허함이 들었다.

후회나 아쉬움이 아니었다.

현재에 익숙해져서, 아니면 이제 살만하니까, 그래서 드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욕구 같은 것이었다.

까톡.

[정인: 뭐해?]

[아리: 회사.]

[정인: 회사?]

아, 맞다. 정인이는 모르지.

[아리: 샵.]

[정인: 헤어샵을 회사라고 하니까 웃기다.]

[정인: 아, 나 다른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거 아니다.]

[아리: 알아.]

[아리: 왜?]

[정인: 주말에 뭐해?]

[아리: 주말에? 아무것도 없는데.]

[정인: 일없으면 나랑 놀러 가자.]

[아리: 병원은? 병원은 어떻게 하고?]

[정인: 아는 선배가 하루 봐주기로 했어.]

[아리: 그렇게 해도 돼?]

[정인: 그 선배도 개인병원 하는데 내가 저번에 봐준 적이 있거든. 해준다고 했어. 그리고 피부과라서 응급환자도 없고 주말에는 피부관리 받으러 오는 손님들만 있어서 괜찮아.]

[정인: 놀러 가자, 아리야. 응? 응? 응?]

가고 싶다.

하루 정도 김아리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리: 어디 갈 건데?]

[정인: 멀리는 못 가고. 근교에 좋은 데 없을까?]

[아리: 나 1박2일은 안 돼.]

[정인: 왜?]

집에 돌봐야 할 오빠가 있다.

든든한 이모님이 계시지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부탁할 수 없었다.

[아리: 일요일에는 출근해야 해.]

[정인: 진짜? 힝ㅠㅠ]

[아리: 토요일 날 놀자.]

[정인: 오랜만에 너랑 1박2일 여행 가고 싶었는데···. 일요일에 정말 뺄 수 없는 거야.]

정말 가고 싶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여행 가고 싶다.

[아리: 미안. 안 될 것 같다.]

[정인: 야, 그럼 그건 어때?]

[아리: ?]

[정인: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호캉스]

[아리: 호캉스?]

[정인: 그건 괜찮지 않아? 그냥 서울 호텔에서 묵고 너는 바로 회사 출근하면 되잖아. 1박2일 같지 않은 1박2일.]

호캉스···.

재미있을 것 같다.

서울에 있는 거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리: 그래, 그럼. 토요일 날 오후쯤 만나서 하루 묶고 다음 날 일찍 헤어지는 걸로 하자.]

하루쯤 휴가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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