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33)

엇갈린 작대기 (4)

까톡.

[실장님, 안녕하세요, 저 아리에요.]

[오빠한테 방금 번호 받아서 연락드려요.]

[잘 계시···.]

띠리링- 띠리링-

문자를 마저 다 쓰기도 전에 전화가 들어왔다.

“여보세요.”

-아리?

“안녕하셨어요?”

-어, 그래. 나 송세연이야. 알지? 예전 Zoom 엔터 있을 때.

고민 끝에 문자를 넣었다.

‘못 전해 들은 척 연락하지 말까?

외국에 나갔다고 할까?

아프다고 할까?’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떠올려봤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 됐건 전에 데뷔할 마음이 없냐고 여러 번 제의했던 분이었고, 이제는 클라이언트의 매니저였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송 팀장님이 남수지 씨의 매니저가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물론 샵에서 남수지 씨를 본 적은 있다.

담당이 아니라서 자주 보지는 못했고, 샵에는 주로 로드매니저랑 왔기 때문에 송세연 팀장과 함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매니저 일 관두셨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하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간 일이 어떻게 됐든 이렇게 인연이 다시 이어진걸.

“그럼요. 기억하죠. 어떻게 지내세요?”

-나 매니저 일 다시 해.

“아, 그러세요.”

-응. 전에 얘기했지? 내가 배우 남수지 매니지한다고.

“들었던 거 같아요.”

-응. 수지가 얼마 전에 소속사를 옮겼거든, 원래는 그냥 과수원이나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하게 됐네. 그러는 아리는? 아리는 어떻게 지내? 샵에 전화하니까 그만뒀다고 하더라.

“네.”

-그럼 다른 데로 옮긴 거야?

“옮겼다가 지금은 좀 쉬어요.”

-그래?

“네.”

-잠깐 쉬는 거야?

“원래는 그랬는데···공부 좀 해볼까 해서요.”

-공부? 무슨 공부?

“부끄러운데, 이제라도 대학을 가볼까 해서요.”

-아, 진짜? 멋진데?

“그냥···더 늦기 전에 해볼까 해서요.”

-의외네. 근데 늦었다는 건 없어,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가장 적기지. 진짜 멋지다, 아리야.

“고맙습니다.”

-그럼 헤어 쪽 일은 이제 안 하겠네.

“네.”

-아, 다른 거는 아니고 수지가 샵 바꾸려고 하던 중이었거든. 근데 대화 중에 우연히 네 이름이 나와서 찾아봤어. 근데 사람 인연 참 신기하다. 너희 쌍둥이 오빠가 수지 변호사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니까. 나 진짜 놀랐잖아, 수지가 너희 오빠 사진 보여줬을 때. 완전 똑같이 생겨서.

“히히. 많이 닮았죠?”

-응. 나는 너인 줄 알았다니까.

뜨끔. 전화 통화여서 다행이다.

아리는 천연덕스럽게 넘어갔다.

“저 진짜 싫다니까요. 사람들이 헷갈릴 때.”

-헷갈리겠던데. 너무 똑같이 생겨서.

“아, 싫어.”

-하하. 하긴 나 아는 언니는 쌍둥이도 아닌데, 나이 들어갈수록 자기 남동생이랑 똑같이 생겨져서 스트레스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 오죽 싫었으면 수술한 데.

“저도 그러고 싶을 정도예요.”

-하지 마. 아리 예뻐.

“고마워요.”

-오빠도 예쁘고.

“실장님!”

-그래도 수술은 하지 마. 아리 얼굴 매력 있으니까. 혹시 공부하다가 연기해보고 싶은 마음 있으면 연락해. 요새는 나이 들어서도 시작하는 사람들 있어. 해보고 싶으면 말이야.

“네.”

-오랜만에 좋네. 보고 싶었던 사람하고 연락도 닿고. 목소리 들어서 반가웠어.

“저도요.”

-언제 한번 만나서 밥 한번 먹자.

“네, 언제든 연락주세요.”

-그래, 그럼. 또 연락해.

“네-.”

딸깍.

통화를 끝낸 아리는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연을 이어가는 게 좋은 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끊어낼 수도 없는 관계.

좋게 좋게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수밖에.

아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남수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

딸깍.

“뭐래?”

세연이 아리가 통화하고 있을 때, 수지는 세연의 옆에 있었다.

“이제 샵에서 일 안 한대.”

“진짜?”

“응. 공부한대.”

“공부?”

“대학 가려고 공부하는 중이래.”

“몇 살이신데?”

“몇 살이겠니?”

“아, 그렇지 김 변님하고 쌍둥이시지. 깜빡했다. 대학 준비하시는 거야?”

“그렇대.”

“멋지다.”

“응. 그렇다고 해줬어.”

“멋지기는 한데···. 이제 나는 어떻게 힝-”

실망한 수지의 미간 위로 주름이 살짝 파였다.

“뭘 어떡해?”

“악플 사건도 윤 변호사님한테 넘어갔다며? 이제 김 변님 만날 기회가 없는 거잖아.”

“아니지. 오히려 잘됐지.”

“왜?”

“윤 변호사님이라는 좋은 중간다리가 생겼잖아. 어차피 김 변님이 네 사건 맡는다고 네가 직접 물어볼 수도 없잖아. 근데, 이제 윤 변호사님을 통해서 김아인 변호사님에 관해 물어볼 수도 있고, 잘하면 식사 자리 같은 것도 마련해볼 수도 있고.”

“진짜?”

“내가 물어볼게.”

“언니···.”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만들어서 떠먹여 줄 테니까.”

“고마웡, 언니-”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

“좋은 아침.”

“굿 모닝입니다.”

“김 변 출근했어?”

“김 변호사님 오늘 오전에 외부 미팅 있으셔서 거기 들렀다가 오실 건데요.”

“아- 그래?”

“무슨 일이신데요? 급하신 거면 문자 남겨볼까요?”

“응? 아니야. 오전에 들어오지?”

“네. 보리 프로덕션이라 금방 들어오실 거예요.”

“그럼, 그때 내가 얘기할게. 급한 거 아니야.”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정도는 출근하자마자 막내 파트너를 찾았다.

외부 미팅 참석하느라 늦어진다는 정보를 듣고는 본인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윤.”

서지우가 그를 불렀다.

“네, 변호사님.”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정도는 서지우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The Dynasty 프로젝트는 어떻게 잘 팔로우하고 있어?”

“네. 캐나다 프로덕션 설립 완료됐고요. 이재운 PD로 총괄 프로듀서도 가닥이 잡혀서 다음 달부터 바빠질 듯합니다.”

“촬영 시작되면 그래도 급한 거는 어느 정도 정리되겠네.”

“네.”

“요새 바빠?”

“뭐 늘 그렇죠.”

“다른 게 아니고 내가 미국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한윤정 건 때문인가요?”

“응. 그냥 이메일로 주고받으려고 했는데, 뭐가 급하게 많이 진행되는 모양이야. 한 3일 정도 다녀오려고 하는데, 그 사이에 법원 기일이 하나 잡혀있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그래 줘야 할 것 같아.”

“네.”

돌아나가려던 정도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슬쩍 던졌다.

“변호사님.”

“응.”

“그러지 말고 저희 한 명 더 뽑는 거는 어떨까요?”

“변호사?”

“네.”

“왜? 일이 많아?”

“일이 많죠. 많기도 한데, 그것보다도 매년 일이 더 늘어나고 있는데, 사람 하나 더 뽑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빈 사무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실 서지우도 비슷한 생각을 최근에 한 적이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해외 출장을 요청했는데, 당장 보낼 사람이 없어서, 요청을 수용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가게 되게 생겼다.

변호사 수를 늘리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그래. 그러자.”

“진짜요?”

“그러자며?”

“너무 쿨하게 승낙을 하셔서 한번 더 물어봤습니다.”

“급한 거 아니니까, 공고 내고 천천히 인터뷰 봐서 괜찮은 사람 뽑아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변호사님. 이번에도···여자 변호사는 안 받으실 건가요?”

말은 안 했지만, 모두가 아는 사실.

서지우도 안다.

그러나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 대답한다.

“나 그런 적 없는데.”

“에이- 계속 안 뽑으셨잖아요. 증거가 있는데.”

“우리랑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지. 일부러 안 뽑은 적은 없어.”

“진짜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장난스럽게 건넨 말인데, 서지우의 표정이 서늘하다.

“아니요. 늘 안 뽑으시길래···.”

“이번에는 그럼 여자 변호사로 뽑자고.”

“진짜요?”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믿기지 않지만, 그만해도 감지덕지.

정도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대표 변호사실을 나왔다.

*

“웬일이시지?”

“왜요?”

서지우의 방을 나온 정도는 유이헌 비서 과장의 자리로 다가갔다.

“아니, 여자 변호사를 뽑자고 하셔서.”

“네?”

“유 과장, 법조 신문이랑 각 대학 로스쿨에 공지 때려야겠어.”

“저희 충원하나요?”

“응. 내가 이번에도 여자 변호사는 거르실 거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글쎄 이번에는 여자 변호사를 뽑자고 하시네. 물론 그래놓고 나중에 딴소리하실 수도 있지만.”

“말씀은 안 하셨으면 몰라도 딴소리하실 분은 아니잖아요.”

“그니까. 그래서 내가 놀랐잖아. 그전에는 내가 비슷한 제안을 하면 빈말로도 그런 말씀 안 하셨는데.”

“이번에는 진짜 여자 변호사를 뽑으려고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

“왜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거지? 흠···.”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바로 채용 공지 올리겠습니다.”

“그래죠.”

“생유.”

할 말을 끝내고 드디어 자신의 방으로 가려는 정도를 이헌이 다시 불렀다.

“아, 변호사님.”

“왜?”

“김 변호사님 출근하셨어요.”

“아, 그래? 오케이.”

출근 후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정도가 이번에는 막내 파트너의 방으로 향했다.

---*---

똑똑똑-

“김 변.”

“네, 변호사님.”

“보리 프로덕션이랑 아침에 미팅했다며? 잘했어?”

“네.”

“거기 사무실도 진짜 좋은데.”

“그렇더라고요.”

“거기 대표가 우리 고등학교 선배야.”

“들었어요.”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정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다름이 아니고, 이번 토요일에 뭐해?”

“이번 주말에요? 별거 없는 거 같기는 한데···왜 그러세요?”

“아니, 수지 님께서 시사회 티켓을 두 장 줬어. 김 변이랑 같이 오라고. 주말에 일없으면 같이 가자.”

“수지 씨가요?”

“응.”

아리는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감이 왔다.

“죄송해요. 토요일은 어머니 병원에 가봐야 해서.”

“하루종일?”

“네. 동생이랑 가기로 해서 오래전부터 약속해둔 거라서.”

“그래?”

“네.”

“쩝. 할 수 없지 뭐.”

정도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하다.

“다른 분하고 가세요.”

“김 변이랑 오라고 했는데···.”

“말이 그런 거죠. 설사 다른 사람 데리고 왔다고 뭐라고 할까요. 데이트하실 분 데려가세요.”

“그래도 되겠지?”

“그럼요. 설마 뭐 남수지 씨가 제가 보고 싶어서 선배님한테 시사회 티켓을 줬으려고요.”

“그렇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다른 사람 찾아봐야겠다.”

다시 밝아지는 정도.

“그럼 이거 두 장 다 내가 갖는다.”

“네.”

“오케이. 그럼 누구랑 갈지 고민 좀 해봐야겠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보리 프로덕션 대표님이 내일 저녁 식사 같이하자고 하셨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 나 내일은 안 돼.”

“어? 바쁘세요?”

“응. 나 결정사에서 해주는 첫 소개팅이 내일 저녁이야.”

“진짜요?”

“응. 상대가 개인 병원 하는 의사라서 평일 저녁밖에 시간이 없다네.”

“아···. 건승을 빌겠습니다.”

“건승은 무슨. 다녀와서 후기 전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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