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33)

남과 여 (1)

미국, LA.

한윤정 계약 건으로 할리우드를 찾은 지우는 짬을 내어 민태이를 만났다.

“(뭐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빌리 아일리시를 연상시키는 종업원이 지우에게 방긋 웃고는 사라지자, 태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인기가 좋네. 나이가 적든, 많든.”

“잘 지내?”

서지우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베스퍼를 한 모금하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응, 좋아. 넌?”

“그럭저럭.”

“여전히 바쁘고? 아, 참. 너 머리는? 괜찮은 거지?”

괜찮다고 해야 하나? 하긴, 아직 까지는 아무 일 없으니까.

괜찮다며 신경 쓸 거 없다는 제스처를 하고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 친구하고는 잘 지내? 사이나이 병원 의사라는 친구.”

“브라이언?”

“응.”

“잘 지내. 음···사실 나 청혼받았어.”

말할까 말까 살짝 고민한 태이는 결국 털어놓았다.

“축하해. 결혼하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기는 뭘 몰라?”

“모르니까 모르겠다고.”

“넌 그게 문제야. 항상 잘 사귀다가 청혼만 받으면 망설이는 거.”

“문제기는 뭐가 문제야. 사귀는 거랑 결혼은 다른 거니까 그렇지. 같이 있으면 좋지만 ‘평생 같이 살 사람이 이 사람이다’ 하는 느낌이 없는데 털썩 청혼을 받을 수도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 받아줄 거야?”

“서지우, 너 자꾸 그럴래. 지난번하고 이건 다른 이야기라고.”

괜히 한번 놀려본다.

친구로 돌아온 그녀가 편하다.

“그러는 넌? 여전히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고?”

“애초에 그럴 권리가 남자한테 있었던가?”

“핑계는···. 권리를 묻는 게 아니라 의지를 묻는 거였어. 야, 저 아가씨가 계속 너 본다. 귀엽게 생겼네. 잘해봐.”

‘빌리 아일리시’가 그들의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자, 태이가 또 한 번 놀린다.

“아니면 내가 소개해줄까? 진짜 괜찮은 사람 아는데.”

“만나는 사람 있어.”

의외의 대답에 민태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짜?”

“왜? 소개받기 싫어서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아···하긴···서지우가 그런 남자는 아니지. 누구?”

“말하면 알고?”

“숨기는 거야?”

“바에서 만난 여자.”

“바? 서울?”

“내가 어디 도쿄 살아?”

“한국 여자?”

“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냥. 너는 한국 여자랑 잘 안 어울린다고 늘 생각해서.”

“왜?”

“한국의 커플들을 매일 전화한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 하고. 너는 그런 타입이 아니잖아.”

“내가 그런 타입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너 그런 타입이었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레이철 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정말 의왼데. 네가 누굴 사귄다는 거.”

“방금 소개해준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건 그냥 한 소리. 네가 안 한다고 할 줄 알아서. 아, 물론 진짜 사람은 있어. 너랑 잘 어울릴 것도 같고. 어때? 한번 만나 볼래?”

“기억상실증이야? 방금 만나는 사람 있다는 말 못 들었어?”

“그 사람 계속 만날 거야?”

“내일 헤어져도 오늘은 내 여자친구인 건 사실이지.”

“그럼 내일 만날래?”

“은유법이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내일 같이 점심 하기로 했는데, 그냥 나와. 그냥 얼굴만 보는 거지 뭐. 정식으로 소개 같은 게 아니고.”

“하하하. 그냥 나오라고 했으면 갔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정말 못 가겠네.”

“아니, 너 그냥 나오라고 했어도 안 나왔어.”

사실이다.

바로 그때, ‘빌리 아일리시’가 물병을 들고 다가와 반쯤 차 있는 컵을 가득 채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저 아가씨 너한테 관심이 많네. 내가 이렇게 앞에 앉아있는데도 꼬리를 치는 거 보면. 그래서 언제 돌아가?”

“원래는 내일이었는데, 삼일 정도 더 있을 거 같아.”

“잘됐다.”

“안 만나.”

“그 얘기 아니거든. 브라이언이랑 같이 한번 보자고. 모레 저녁 어때?”

“전부···.”

하마터면 ‘전부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서지우는 얼른 주제를 바꿨다.

“전부 뭐?”

“스케줄 확인해보고 연락해줄게.”

“진짜?”

“왜?”

“너답지 않아서.”

“뭐가?”

“그냥 해본 말이었어. 너 친분 쌓으려고 누굴 만나는 사람 아니잖아.”

“그럼 관두든가.”

“아니야, 아니야! 만나. 만나줘! 여자친구 사귀고 변한 건지, 아니면 변하려고 해서 여자친구를 만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서지우 좋은데. 좋아. 모레 7시, 장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확정 아니야. 스케줄 보고 확인해준다고 했어.”

“확정 안 해줘도 돼. 어차피 우리 둘은 만날 거니까. 서지우.”

“왜 불러?”

“좋다.”

“뭐가?”

“그냥. 바뀐 서지우.”

바뀐 거 맞다. 지우는 변해보려 한다. 바뀐 세상에서는···. 그전에 딱히 행복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진짜 안 만나볼 거야?”

“스케줄 확인하고 얘기해준다니까.”

“아니, 브라이언 말고. 제니퍼.”

“제니퍼? 혹시 나 소개해주겠다고 한 그 사람.”

“응.”

서지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빌리 아일리시’를 불렀다.

머리끝이 형광인 그녀는 그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륵 달려왔지만, 그가 원한 건 체크뿐인 걸 알고는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네 진짜 반쪽.”

‘내 반쪽···.’

“그래서? 제니퍼가 내 반쪽이라고?”

“운명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혹시 또 알아? 저 형광 머리 아가씨를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서 만나면 연인이 될지도.”

“결혼할 때가 됐나 보네.”

“왜?”

“운명 타령하는 거 보니.”

둘이 잔을 비우는 사이, ‘빌리 아일리시’가 영수증을 지우에게 건네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영수증에는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서지우는 넉넉하게 팁을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라스베가스에 우리가 결혼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태이가 물었다.

“끔찍했어.”

서지우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끔찍했다니? 뭐, 마치 해본 사람처럼 얘기한다, 너? 나랑 결혼했으면 끔찍했을 거라는 거야 지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바뀐 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서지우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더는 능력을 쓰지 않을 거라고.

---*---

결혼정보회사 <세렌디피티>는 첫 만남을 주선할 때, 회원 정보를 서로에게 자세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사진과 이름, 그리고 직업 정도만 알려주었다.

일종의 보안이자 그들의 철학이었다.

첫 만남은 일단 순수하게(?) 사람을 보라는 뜻이기도 했고, 계속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아, 저도 그 드라마 진짜 좋아하는데!”

“진짜요?”

“네.”

정도와 정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강남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결혼정보회사의 소개로.

“근데 배우 누구 닮으신 것 같아요.”

“네? 누구요?”

“남수지 씨 닮았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어머, 나 남수지 씨 진짜 팬인데.”

“진짜요?”

---*---

며칠 뒤,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정도는 비서팀 이헌과 창현에게 정인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풀고 있다.

“나는 내가 젊고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 생각하면 할 수로 그날 괜찮았던 거 같아.”

“그럼 다시 만나보실 생각이신 거예요?”

“응.”

“그러기로 했어.”

“근데 거기 결정사는 좀 특이하네요. 보통은 직장, 학교는 물론이고 부모 직업에 자산까지 다 공개하고 만나는데.”

“그래? 나는 또 처음이니까. 다 이렇게 하는 줄 알았지.”

“아니에요. 완전히 다 공개하고 계산 다 하고 만나는 거예요. 거기가 특이한데요.”

“창현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사촌 형이 결정사 엄청 다니거든요.”

“그래?”

“네.”

“그런데 사진은 보여줬을 텐데, 예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으면서 나가셨네요.”

“아니, 뭐, 누가 MD가 해주는 첫 주선은 거절하는 거 아니라고 하더라고. 처음부터 까탈스럽게 하면 진짜 괜찮은 회원들은 안 소개해준다고.”

“그건 맞는 건데.”

정도의 이야기에 창현이 맞장구를 쳤다.

---*---

퇴근한 아리는 샤워한 후, 오빠를 체크 했다. 기분 탓인가, 살이 좀 찐 거 같다. 다시 한번 이모님에게 감사하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까톡.

정인에게 문자가 들어왔다.

[정인: 나 오늘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선한 남자 만났다.]

[아리: 진짜? 어땠어?]

[정인: 솔직히 별 기대 없이 나갔거든.]

[정인: 처음 해주는 주선 거절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냥 똥 밟는 셈 치고 나간 거였거든.]

[아리: ㅎㅎㅎ 아 웃겨. 야, 똥 밟는 셈 치고 나가는 건 또 뭐야?]

[아리: 그런 걸 왜 나가?]

[정인: 너도 알잖아. 내가 키 크고 퇴폐미 있는 남자 좋아하는 거.]

[정인: 너희 대표 같은.]

[정인: 근데 사진 보니까, 약간 범생이 타입? 범생인데 노는 척하려는 듯한 그런 느낌. 아무튼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

[아리: 근데 막상 만나보니까 괜찮았어?]

[정인: 어! 어떻게 알았어?]

[정인: 역시나 외모는 내 스타일 아닌데, 의외로 괜찮더라.]

[정인: 변호사라고 해서 약간 재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없어 보이고. 오히려 약간 맹해 보였다고 할까.]

변호···사?

워낙 좁은 업계. 아리는 순간 뒷덜미의 털이 서는 느낌이 들었다.

[아리: 변호사였어?]

[정인: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아리: 응.]

[정인: 그럼, 내가 진짜 별로라서 그랬나 보다. 사실 마지막까지도 안 나갈까 고민했거든.]

[아리: 어디 사무실?]

[정인: 사무실? 로펌?]

[정인: 어디 다닌다고 했더라?]

[아리: 주선사에서 안 가르쳐줬어?]

[정인: 응. 여기는 시스템이 조금 특이하더라고. 첫 번째 만남 때는 안 가르쳐주고, 두 번 만나겠다고 하면 자세한 걸 알려줘.]

[아리: 그럼 오늘 만나서 안 물어봤어?]

[정인: 안 물어봤네. 솔직히 다시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아닌 거 같아서. 그냥 넘어갔지.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근데 왜?]

[아리: 아, 그냥. 아인이가 아는 사람인가 해서.]

[정인: 아, 맞다. 아인이가 변호사였지. 네가 하도 얘기를 안 해서 완전 까먹고 있었다.]

[정인: 그러게! 아인이한테 물어보면 될 걸 그랬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아리: 벌써 다음 만나는 날짜를 정한 거야?]

[정인: 응. 원래는 MD 통해서 정해야 한다고 하던데, 아니 글쎄, 자기가 엔터 쪽 일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

엔터?

[정인: 그래서 영화 시사회 같이 가자고 하길래, 좋다고 했어.]

[아리: 영화 시사회?]

[정인: 응, 이번에 남수지 나오는 영화 새로 개봉하잖아? 그거 VIP 시사회 티켓이 있다고 같이 가재, 이번 주말에.]

···

[아리: 혹시 그 시사회 영화 제목이 <뒤바뀐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니?]

[정인: 응, 맞아!]

사실 아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그 사람 이름이 윤정도니?’였다.

묻지 않았다.

‘근데 네가 그 사람 이름을 어떻게 아니?’라고 되물으면 마땅히 해줄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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