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33)

가면 (1)

“이번 작품은 어떤 내용인지 기정 씨가 설명해주시겠어요?”

“음. 이번 작품은 한 열혈 경찰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판사의 몸에 빙의하게 되어 범죄자를 직접 추적하고 심판한다는 내용으로, 요새같이 답답한 뉴스들이 많이 나오는 시국에 가볍게 보실 수 있는 코믹 드라마입니다.”

“지난번 작품이 크게 히트를 쳐서 이번에도 시청자들의 기대가 큰대요. 혹시 시청률 공약을 거실 생각은 없으세요.”

“시청률 공약이요?”

“네.”

“뭘 걸지? 뭘 걸면 좋을까요? 홍대에서 1,000명하고 프리허그?”

“아, 저기서 매니저님이 안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네요. 하하하. 기정 씨가 프리허그를 한다고 나타나면 그날 홍대는 교통 대란이 날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 하하하.”

*

신작 드라마 관련해서 매체 인터뷰가 끝나고 안기정은 매니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한번 보겠다고 빌딩 앞에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던 소녀들이 우르르 다가오자, 기정은 귀찮은 내색 없이 인사를 건네며 그들이 건네주는 선물을 받아든다.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오빠, 멋져요.”

“고마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기정은 경호원들이 떼어놓기 전까지 한참을 서서 인사를 하고 나서야, 케이 엔터 이동주 대표가 기다리고 있는 검정 밴에 올라탔다.

“역시 대스타는 다르네. 여유가 있어.”

“아- 아닙니다.”

“기정 씨.”

“네.”

“기정 씨, 내가 얼마나 기정 씨 팬인지 모르죠?”

“하하. 모르겠는데요.”

“증명하게 해줘요.”

“뭐를요?”

“내가 기정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네에? 하하하. 대표님, 왜 그러세요.”

이동주는 영입하려는 배우에게 짧게 어필은 한 후, 그의 매니저와 대화를 나눴다.

“하 실장님, 우리랑 해요. 내가 어느 매니지에서 제시하는 것보다 좋은 조건으로 제시할 테니까.”

“사실 그냥 독자 회사를 차리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그 연차쯤 되면 다들 회사 차리는 걸 고려하는데···. 하 실장님, 기정 씨 할리우드 가야죠. 한국에서만 놀기에는 기정 씨 능력이 너무 아깝잖아. 이번에 윤정이 할리우드 스튜디오랑 계약한 거 알고 있죠?”

“뉴스로 보기는 봤는데···.”

“거기서도 탑급. 그냥 동양의 인기 배우로 캐스팅된 게 아니라 진짜 할리우드 A급 수준으로 개런티 받았어요.”

“아, 진짜요?”

“원하면 계약서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리고, 이건 극비인데, 우리 케이 엔터 미국 CAA랑 MOA 체결했어요. 그냥 형식적인 게 아니라 주식 스와프도 있을 거고. 들어오기만 하면 하 실장님에게도 지분 약속드릴 수 있어요.”

지분이라는 말에 하일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지분이요?”

“올해 케이 엔터 좋은 일 많이 있을 거예요. 기정 씨가 케이 엔터 온다고 하면 케이 엔터에는 당연히 경사겠지만, 기정 씨하고 하 실장님에게도 분명 좋은 일이 될 거야. 시너지. 응? 시너지!”

힘주어 말한 이동주는 하일구의 손을 꽉 잡고는 본인의 롤스로이스 차에 올라탔다.

하일구는 이미 설득당했다.

---*---

“아니, 도대체 어쩌다가······?”

아리는 정도, 창현, 충오와 함께 이헌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았다.

시비가 붙어서 다쳤다는 말만 듣고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상처에 차마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다.

“술집에서 나오다가 외국인들하고 시비가 붙었어요.”

오히려 밝은 쪽은 이헌이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부어있는데도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외국인?”

“네.”

“경찰에 신고는 했고?”

“네, 했는데. CCTV도 없고 외국인이라서 잡기 힘들 것 같대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대한민국에 CCTV가 그 가게 하나밖에 없나, 사방에 깔린 게 CCTV인데. 외국인이라면 관광객? 그러면 더 신속하게 수사를 해야지. 어디 술집이야?”

별일 아닐 거로 예상하고 온 정도는 이헌의 몰골에 사뭇 놀랬다. 그리고 회사 동료를 그렇게 만든 얼굴 모르는 상대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헌이 오히려 그런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이미 신고도 했고···.”

“아니야. 형사 사건도 변호사 끼면 분위기가 달라져. 그리고 최 부장님 통해서···.”

“아니요! 괜찮아요. 술 먹고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제가 칠칠치 못했죠. 진짜 괜찮아요.”

정도가 최성태 부장을 언급하자, 이헌은 화들짝 긴장하며 손사래를 쳤다.

정도는 이헌이 창피해서 그런다고 여겼다.

“근데 혼자 있었던 거야?”

“네.”

“아니, 술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왜 술집에 혼자 갔어?”

“그러게요. 헤헤.”

“웃음이 나오냐? 웃음이 나와?”

“쪽팔려서 그렇죠.”

“쪽팔린 거는 알고? 그 근육 키워서 다 무슨 소용이야? 이렇게 맞기나 하고.”

“변호사님, 근육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러 명한테 당했다잖아요.”

“알아. 그냥 화가 나서 그렇지. 아, 근데 어떤 새끼들이야, 진짜. 아이 씨 내가 다 열이 받네.”

“죄송합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보기보다 그렇게 말이 안 다쳤어요. 의사 말이 코뼈도 주저앉은 게 아니라서 수술 안 해도 될 것 같데요. 헤헤.”

“그래도 웃고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회사 걱정하지 말고 몸 잘 추스르고 푹 쉬고 나와. 서 변호사님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

병원을 나온 <해결> 식구들은 기분이 편치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은 유 과장의 상태에 걱정과 분노가 들었다.

“아니, 어떤 새끼들이야, 사건 터진 지 일주일 정도 됐는데도 얼굴이 저 정도면 진짜 심각했던 거 같은데.”

“보니까 팔도 다치신 거 같던데.”

“그니까. 아, 근데 유 과장은 또 왜 저렇게 밝아.”

“그냥 우리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미안할 건 또 뭐야?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

“근데 그렇죠. 저도 회사에 말하기 민망할 것 같아요. 다 큰 어른이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고 하면.”

“저건 싸움 수준이 아니지, 다구리지.”

“그렇기는 한데···.”

“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중 아리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왜?”

“서류.”

“서류?”

사무실에서 가지고 나온 서류를 병문안 선물 봉투 안에 잠깐 놔뒀는데, 깜빡하고 병실에 두고 나와버렸다.

“먼저들 가세요.”

“왜?”

“사무실 나올 때, 사건 서류 하나를 가지고 나왔는데, 유 과장님 병문안 선물 봉투 안에 넣고는 깜빡하고 안 챙겨서 나왔어요.”

“그래? 기다릴게. 다녀와.”

“아니에요. 어차피 방향도 다 다른 데요, 먼저들 가세요.”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내일 봐.”

“네, 내일 봬요.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주차장에서 인사를 하고 아리는 병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

다시 찾은 이헌의 병실. 들어가려는 순간, 안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들어갈까 하다 아리는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 병실에서 나왔다.

그는 아리를 보지 못했지만, 아리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느낌이 살짝 이상하다. 고개를 갸우뚱 움직인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헌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사람처럼.

그는 방금 나온 사람으로부터 받은 듯한 무언가를 숨기듯이 감추고는 물었다.

“아, 변호사님! 안 가셨어요?”

“깜빡 두고 간 서류가 있어서요.”

아리는 선물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아, 그러셨구나.”

“그럼 갈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그냥 나가려고 했던 그녀는 마음을 바꾸고 그냥 물었다.

“근데 방금 나간 사람은 누구예요?”

“네? 누구···? 아, 방금 나간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병실을 잘못 찾은 거 같아요.”

“아···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쉬어요, 유 과장님.”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아리는 더 묻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

강남, 안기정의 아파트.

띠리릭-

“잘됐어?”

하일구가 들어오자, 이제 막 씻고 나온 안기정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잘됐어. 야, 근데 조심 좀 해. 너 중요한 시기야.”

“잔소리 그만해. 그 새끼가 성질을 건드렸어.”

“성질을 건드렸든 아니었든 간에 너 이러다 터지면 진짜 나락이야.”

“그러니까 비싼 돈 떼주며 매니지 쓰는 거지.”

“너 나니까 이거 막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못 맡겨.”

“알았어.”

안기정은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생각해봤어?”

“뭘?”

“이동주 대표 제안.”

“근데 케이 엔터 들어가는 게 진짜 좋은 거야? 그냥 원래 계획했던 대로 독자 회사 차리지? 뭘 굳이 20퍼센트씩 떼죠. 어차피 매니지 없어도 일 들어오는데.”

“미국 가야지.”

“난 모르겠어. 성가셔.”

“야. 이 좁은 땅에서 진짜 니 재능 썩힐 거야? 큰물에서 놀아야지.”

“쩝.”

안기정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듯하다.

“알았어. 형 맘대로 해.”

“오케이, 그럼 자리 만든다.”

“맘대로 하라니까.”

알아서 하라는 손짓을 한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옷방으로 향했다.

“이 밤에 또 어디가?”

“그냥 좀 답답해서. 잠깐만 나갔다 올게.”

“야, 그냥 좀 집에 있지? 문제 생긴 지도 얼마 안 되는데.”

“거기 안 가. 다른 데 갈 거야.”

“야, 안기정.”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기정은 하일구의 조언을 무시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

다음 날, 법무법인 해결.

아리는 어제 이헌이 한 말을 떠올렸다.

「방금 나간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병실을 잘못 찾은 거 같아요.」

아니었다. 분명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그날 일’이며 ‘사과’며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클럽 킹덤.”

아리는 어제 얼핏 들은 상호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했다.

정식 사이트나 기사 같은 건 없었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커뮤니티 같은 곳에 언급된 글이 있다.

「클럽 킹덤 멤버십 있어야 들어가나요?」 라는 제목의 게시판 글.

이헌이 폭행을 당했다던 술집인가 싶어 글을 읽어내려가던 아리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드랙쇼’, ‘소주방’, ‘찜방’ 등 생소한 단어들과 함께 언급된 그 단어.

“게이클럽···.”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리는 왜 그렇게 이헌이 감추려고 했는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클럽 킹덤의 위치를 확인했다.

띠리링- 띠리링-

-안녕하십니까, 용산경찰서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해결의 김아인 변호사라고 합니다. 뭐 좀 여쭤보려고요.”

-네, 말씀하세요.

“지난주에 클럽 킹덤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 신고 접수,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나 확인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담당 형사님이 누구시죠?

“그게 당담 형사님한테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폭행 사건이라고 하셨나요? 신고인이 누구죠?

“피해자요. 유이헌.”

-피해자 대리인 되시나요?

“네.”

-잠시만요.

···

-그런 신고 접수된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저희 서에 신고하신 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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