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33)

식구라면 (2)

“이게 정말 유 과장이 원하는 거야? 원하면 변호해줄 수 있어.”

서지우의 제안에 유이헌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의 인사였고 포기의 의사였다.

“고맙습니다.”

“잘 생각해. 합의하면 끝이야.”

“네.”

“안기정에게 돈을 노리고 접근한 쪽이 된다는 말이야.”

유이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억울함.

하지만 그게 그의 인생이었다.

“저희 아버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세요. 어머니는 교회 집사님이시고요.”

“부모님은 모르시나?”

“아시면 연을 끊으실걸요.”

서지우는 이헌이 무엇을 걱정해서 합의하려 하는지 이해했다.

“변호사님은 어떻게 아셨나요?”

최성태로부터 유이헌이 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기 어려웠다.

섬세한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쪽 성향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은 해본 적 없었다.

게다가, 동성 성폭행 사건이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조차도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고민이 길 필요는 없었다.

성향이 어쨌든 건 간에 자신의 비서가 당한 일이었다.

“평소 술도 잘 안 마시는 친구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전치 4주가 나왔다는데, 믿을 수가 있나.”

“헤헤.”

“웃음이 나와?”

“대표님, 저 이제 잘리나요?”

서지우는 이헌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대한민국법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고 있어. 로펌에 6년쯤 일했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

“정말 이렇게 덮을 거야? 유 과장 인생이니까 내가 더는 개입하지 않겠지만, 합의하면 사과나 처벌은 어려워질 거야.”

“대표님.”

“응.”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할 수는 없어요. 솔직히 평생 커밍아웃할 마음, 아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끄러워요. 제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바꿀 수 있다면 저도 바꾸고 싶습니다. 누구는 방송에 나와서 게이 프라이드니, 인권이니 하는데, 저는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평생 이렇게. 합의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대표님.”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고인다.」

---*---

안기정의 아파트 안으로 매니저가 들어오자, 기정은 케이 엔터테인먼트 일에 관해 물었다.

“어떻게 됐어?”

“케이 엔터? 해당 조항 삭제하기로 했어. 내가 말했잖아.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하게 될 거라고.”

“그럼 가서 사인만 하면 되는 거야?”

“응. 모레 오전에 가서 사인만 하면 끝. 그러면 케이 엔터에서 바로 기사 낼 거야.”

“귀찮게. 그것도 그냥 형이 하면 안 돼?”

“그 정도는 본인이 해야지, 인마. 삼십 분이면 끝날 일을.”

“알았어. 대신 이번에는 그런 거 없지? 갔는데 저번처럼 갑자기 계약 조건 수정한다느니 해서 시간 끄는 거?”

“없어. 완전히 픽스했어. 만약 그러면, 그때는 케이 엔터 손절하고 회사 차리자.”

“진짜다?”

“그러자니까. 그렇게 말 바꾸는 회사랑 할 수는 없지?”

“오케이.”

용건이 끝난 안기정이 재킷을 챙겨 아파트 밖으로 나가려 하자, 하일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너 또 어디가?”

“놀러.”

“야, 너 조심해, 인마. 사고 친 지도 얼마 안 돼서. 너 지금 중요한 시기야.”

“거기 안 가.”

“그럼 어디 가는데?”

“민욱이 만나러 가.”

“진짜야?”

삐리릭-

안기정은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아파트를 나섰다.

---*---

머리가 아프다.

이모님을 보내드리고, 오빠를 체크한 뒤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누그러뜨리니 온종일 긴장했던 목과 어때가 조금 풀리는 듯하다.

샤워하고 나온 아리는 따뜻한 카모마일 차와 함께 회사에서 지우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김 변호사는 유 과장의 그런 성향을 이해해? 솔직히 나는 못 하겠는데.”

“이해하지 못한다고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똑같이 보호받아야 할 권리도 있고요.”

“진짜 그럴까? 다른 사람들도 김 변의 의견에 동의할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자가 처벌도 받지 않고 저렇게 버젓이 스타 짓을 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으로요.”

“결국 김 변은 유 과장을 생각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복수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네.”」

‘내가 복수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진짜 그런 걸까?’

아리는 왜 서지우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는지 곰곰이 집어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냥 화가 난다.

도저히 분해서 참기가 힘들 정도로.

뭐라도 해야지 잠이 올 듯싶다.

아리는 컴퓨터를 켰다.

이런 짓을 해본 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지만, 이거라도 해야 잠이 올 것 같다.

‘임금님이 귀는 당나기귀-’

아리는 익명의 게시판을 찾았다.

그리고는 타입을 시작했다.

실명만을 제외한 채 누구라도 안기정을 추측할 수 있도록 그의 실체를 고발하는 글을 쓴다.

마지막으로 게시글을 올리기 전,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인터넷에 올린 글은 내뱉은 말처럼 박제가 되어 도로 담을 수 없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잠시 머리를 식힐 예정이다.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아닌지 잠시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때,

머리를 식히기 위해 멍하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있는데···.

「안기정 게이래?

기사 떴음.

이태원 게이 바 다닌다고.

진짜임?

기사링크: http://homoilbo.real.anus69/itaewonfreegay」

그녀의 염원이 닿았을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기사가 올라왔다.

클릭.

「최근 FA 시장에 나온 유명 남자 톱스타, 이태원 게이 바 다닌다.」

---*---

「유명 톱스타, 게이설에 곤혹. 소속사는 아직 입장 무(無)」

「이태원 게이 바 관계자, “유명 배우 A 씨 우리 가게 자주 온다.”」

“이거 누가 맨 처음 기사 올린 건지 당장 찾아내.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데려와!”

기사 하나의 파급력은 무서웠다.

24시간도 채 안 돼서 비슷한 내용의 기사들이 많이 본 뉴스란의 상위권을 차지했고,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글들이 각종 게시판에 쏟아졌다.

케이 엔터 이동주 대표는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에게 소리를 쳤다.

“피해자의 형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안기정에 성폭행을 당한···.”

“야!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니라, 맨 처음 기사 올린 사람을 알아보니까···.”

“야, 피해자는 무슨 피해자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허위야, 허위.”

“그런데요, 사장님.”

사장의 윽박에 홍보팀 팀장이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왜?”

“사진은 어떡할까요? 플랫폼에서 내리기는 했는데, 캡처돼서 퍼지고 있어서···.”

“고소해. 그것들 캡처해서 싸 그리다 고소한다고 해. 서 변호사한테 연락해. 서 변호사 로펌에서 이런 거 잘하니까. 거기서 대응하게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기사 올린 기자 상대로 고소도 진행하라고 해. 허위사실이랑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100억 원 청구하겠다고. 어디 내 배우한테 함부로 입을 놀려, 이 새끼들이. 싹 다 고소해!”

---*---

법무법인 해결.

모두가 퇴근한 시간.

병원에서 퇴원한 유이헌 과장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는 서지우를 찾았다.

“변호사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유 과장은 내 취향은 아니야.”

이미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을 찾아온 줄 눈치챈 지우는 농담을 던졌다.

“후훗. 대표님 농담하시는 거 처음 보내요.”

“농담 아닌데. 진짜 내 취향 아니야.”

이헌은 그런 대표가 고마웠다.

상사로서 항상 존경하던 사람.

그래도 언제나 냉정했는데, 그런 그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 같아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어렸을 땐, 애가 차 앞에서 갑자기 뛰어들면 애가 죄송하다고 해야 하고 사과해야 했어. 차가 학교 앞 골목에서 과속한 것임에도 말이야. 지금은 법이 바뀌었어. 학교 앞에서 차는 무조건 서행하게 되어있지.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유 과장의 성향 이해 못 해.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해하려고 노력할 생각도 없고.

유 과장의 성향은 나한테 관심 없는 먼 나라 종교 같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관심은 없지만, 존중은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누가 그러더군, 이해하지 못한다고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인간으로서 똑같이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나한테 믿으라고 하지만 않으면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왜?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가?”

“아니요. 정말···모든 사람이···그 정도만 생각해줘도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정말이요.”

진심이었다.

스스로를 이 세계의 이방인이라고 여기는 유이헌은 내쫓기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서지우를 찾아온 것은 그가 설사 ‘이 세상의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결정한 거야?”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

“늦었지.”

“죄송합니다. 근데 꼭 이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 과장.”

“네.”

“내가 진 케이스 봤어?”

못 봤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

---*---

며칠 뒤, 케이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이동주 대표는 그가 가지 모든 힘을 동원해 안기정에 관한 기사들을 내렸고,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삭제했다.

물론 전부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게이 바에 간 건 작품 때문이고 여자 동료 배우들과 함께 간 것이라는 반대 기사로 대충 소문을 잠식시킬 수 있었고, 이제 소송 압박을 통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잡을 예정이었다.

“서 변, 잘 왔어. 마침 상담할 문제가 있었는데. 하하하, 그때 계약할 때 서 변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우리끼리 있어서 하는 말이야. 알지? 일단 안기정 관련해···.”

“더 말씀하시기 전에 제 말씀을 먼저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기정 배우 관련 일입니다.”

서지우는 이동주 대표의 말을 끊었다.

“응? 아, 홍 팀장이 미리 얘기했구나? 그러니까 내 말은···.”

“고소할 겁니다.”

싸늘한 서지우의 표정에 이동주 대표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안기정 배우를 상대로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동성 성폭행 사건.”

이제 물음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주름이 대신한다.

“서 변호사, 그 사건 맡으면 어떻게 되는 줄은 알지? 자네 이 바닥에서 일 못 해.”

“한때 케이 엔터를 변호했던 사람으로 마지막 조언을 드리죠. 그런 협박하실 시간에 어떻게 대응하실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희 쪽은 이미 충분한 증거가 있으니까요.”

“서 변!”

“엔터 쪽 변호사 말고 형사 변호사를 찾아 보여야 할 겁니다.”

“내가 걔한테 그런 성형이 있는 거 모르고 뽑은 줄 알아? 그래도 데려온 거야. 서 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감이 좋으시다고 여겼는데, 이번에는 실수하신 듯싶습니다.”

냉정하고 건방진 서지우의 태도.

같은 편 변호사일 때는 좋지만, 상대방 쪽에 서니 기분이 뭐 같다.

이동주는 다시 한번 경고를 날린다.

“내가 이 바닥에서 아는 비밀이 한 둘인 줄 알아? 안기정이는 물건이야. 이 바닥이 원래 그래. 이상한 또라이들 많고, 미친놈들도 많고. 몇십억짜리 계약이 걸려있는데도 지 남친 바람났다고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년, 아내가 있는 데도 이 여자 후배, 저 여자 후배한테 집적거리는 놈, 술만 먹으면 동료 후배고 스태프가 폭력을 해대는 개. 근데 여기는 인기가 짱이야. 똑같은 짓을 해도 인기가 많으면 용서가 돼. 면죄부라고. 서 변도 알잖아?”

“압니다.”

서지우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미친놈이 제 식구를 건드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반대편에 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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