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머리 (5)
「“근데 누가 아프세요? 할아버님?”
“아니. 있어, 젊은 양반. 아무튼 내가 한번 물어보고 부탁할게요.”」
단지 밖에서 아파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우지만은 오늘 오전 정은주 이모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남자용. 젊은 양반. 아픈 사람이 집에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젊은 남자라고?”
젊은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기저귀를 차야 할 만큼 젊은 남자가 그 집에 정말 존재한다면, 그건 삼 년 전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김아인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아인은 매일 같이 그 집에서 나와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은가?
“누구지? 누가 있는 거지?”
“네?”
분명 이상한 점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콕 집을 수가 없다.
바로 그때, 아파트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이모님이 시야에 걸린다.
“오늘은 먼저 퇴근하시네요.”
간혹 정은주가 먼저 퇴근할 때가 있었다. 며칠 관찰한 결과, 그럴 때는 보통 김아인이 평소보다 늦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나 좀 들어갔다 올게.”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아파트 안에. 김아인 보이면 바로 문자 해.”
“지금 안에 그 여자가 있을 텐데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여자가 그 안에 있는 게 맞다.
“있으면 문을 열어주겠지.”
---*---
-내가 그 환자 차트를 좀 받아봤는데. 정말 신기해. 자네와 딱 반대야. 마치 비대한 부분을 서로 바꾸면 정상이 될 것 같아. 진짜 신기하네. 허허허.
퇴근 무렵.
고세윤 의사가 전화해 잊고 있었던 정보를 상기시켜주었다.
“신기해서 전화하셨어요?”
-그거랑 저번에 말한 논문 발표에 자네 케이스를 쓰는 것 관련해서 동의 좀 얻으려고. 자네가 그랬잖아, 그런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서면 동의를 구하고 하는 게 좋다고. 병원장한테 말했더니, 아예 탬플릿 같은 걸 만들면 좋겠다고 하네. 그거 하나 만들어 줘.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다시 업무로 돌아가려는 찰나, 이번에는 또 다른 어른이 방해를 놓는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기억이 안 나.
라스베가스에 간 이중기였다.
“어디세요?”
“라스베가스.”
“아직도 거기세요?”
“여기오면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어.”
“그래요?”
“무심한 새끼. 대답 한번 무미건조하기는. 나 들어갈 거야.”
“들어오세요.”
“소주 준비해놓고 있어.”
“봐서요.”
딸깍.
고세윤과 이중기가 완전히 흩트려놓은 집중을 다시 잡은 순간,
똑똑똑-
이번에는 막내 파트너 변호사가 들어왔다.
“왜?”
“도현승 씨 사건 관련해서 지시하신 내용증명문 초안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어. 거기 두고 가.”
“네.”
“아, 김 변호사.”
초안을 두고 나가려는 그를 서지우가 불러세웠다.
“형법 319조가 뭐지?”
“네?”
“왜? 기억 안 나?”
“아니요. 나는데요. 형법 제319조 1항, 사람의 주거, 관리하는 건조물, 선박이나 항공기 또는 점유하는 방실에 침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항, 전항의 장소에서 퇴거요구를 받고 응하지 아니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기억력은 그대로다.
고세윤과 이중기로부터 걸려온 전화 때문에 문득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완전기억능력은 요새도 잘 작동하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말이야. 혹시 김 변,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도 기억나?”
“네? 그게 뭐죠?”
어리둥절한 표정.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이제는 그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만약 내가 지금 가져온 내용증명용 서류를 삭제하면, 기억할까?’
실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만둔다.
“아니야. 나가 봐.”
“네.”
---*---
대표 변호사실을 나온 아리는 의아했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실없는 질문을 할 사람이 아닌데, 물어놓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뭐지?”
“뭐가요?”
혼잣말을 지나가던 이재희 변호사가 들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선배님, 저 술 사주세요?”
“어? 아···오늘 약속이 있어서···. 미안, 다음에 사줄게.”
“다음에 꼭 사주셔야 해요.”
“응. 그래 알았어.”
아리는 재희의 부탁을 거절하고, 이모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모님, 저요.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많이 늦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먼저 들어가셔도 돼요.
수고하셨어요^^.]
---*---
“뭐? 아인이가 과외했던 아이라고?”
퇴근 후, 아리는 집 근처 카페에서 정인을 만났다. 쉐라톤 호텔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시간이 맞아 아리를 보고 가기 위해 기다렸다.
“응.”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그러긴 뭐라고 그래. ‘아- 재희구나. 많이 컸네.’ 했지.”
“그러니까 뭐래?”
“‘기억 못 하시네요.’ 하더라고.”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해결>에 첫 공식 여자 변호사인 이재희 변호사는 김아인이 대학 시절 과외를 했던 학생이었다.
그 아이가 어느덧 자라 변호사가 되었고, 하필이면 같은 로펌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솔직히 딱히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아인의 노트나 기록들을 다 뒤져봤지만, 이재희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과외 학생에 대한 기록 같은 걸 했을 리도 없지만, 했어도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잘 기억나지 않는 척해야지 뭐.”
다시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정인.
“너 불안해 보여.”
괜찮다는 눈빛으로 화답하는 아리.
하지만, 그녀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인생을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다.
“아직은 괜찮아. 야, 나 생각보다 괜찮은 변호사야.”
“안 그래도 정도 씨가 그러더라. 너 괜찮은 변호사라고.”
“진짜?”
“응.”
아리는 뿌듯했다.
비록 가짜로 시작했지만, 인정받는 느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언젠가는 멈춰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인이는 좀 어때?”
“똑같지 뭐.”
“그래?”
“응.”
“주말에 한번 놀러 갈게.”
“아니야. 괜찮아.”
“놀러 갈게.”
“알았어. 나 이제 가봐야겠다.”
“그래, 그럼.”
아리와 정인은 커피숍을 나왔다.
---*---
압구정, <해결> 근처 맥줏집.
정도와 술을 마시고 있는 재희.
“진짜? 김한테 과외를 받았었다고?”
“네.”
“야, 그런 인연이 또 있었네. 아! 혹시 알고 지원한 거야?”
“저 사실 오빠, 아니 김 변호사님 좋아했었어요.”
“진짜?”
“네. 헤헤.”
“뭐야? 그럼 그거 다 거짓말이었네. 면접 때,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둥, 해결사가 되고 싶다는 둥 한 거.”
“아- 아니에요. 그거 다 진짜였어요.”
“에이- 아닌 거 같은데. 좋아했던 과외 오빠가 있어서 지원한 거 아니야?”
“아이- 아니에요.”
“진짜야? 표정 보니까 마음이 남아있는 거 같은데. 아니야?”
“뭐 조금. 살짝. 그런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있었네!”
“아이- 살짝. 조금. 다시 만나면 좋겠다 정도? 진짜 그뿐이었어요.”
“아직도 마음이 있네, 있어. 잘해봐. 내가 알기로는 김 변 싱글이야. 아니지, 여기 들어와서 누구 사귄 걸 본 적이 없네.”
“진짜요?”
“응.”
“남수지 씨가 관심 있어 했잖아, 김 변한테.”
“진짜요? 배우 남수지가요?”
“응. 근데 김이 별 관심이 없었어.”
“왜요? 남수지 예쁘잖아요.”
“예쁘시지. 마음씨도 얼마나 좋은데. 나는 그래서 김이 게이인 줄 알았잖아.”
“게이세요?”
“아니, 아니. 게이인 줄 알았다고. 그런 사연이 좀 있어.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게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고요?”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오해를 했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아-.”
“잘해 봐. 혹시 또 알아? 김도 이 변한테 관심이 있을 줄?”
“아닌 거 같아요.”
“왜? 벌써 고백했어?”
“아니요. 고백은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응? 진짜?”
“네. 못 알아보셨어요. 10년 전인가? 오래되기는 했어도 기억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한 6개월 넘게 아인 오빠랑 과외했었거든요.”
“얼굴이 그때랑 많이 변했나 보네. 혹시 성형?”
“아-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쌍까풀도 제 거에요. 그냥 그때 기억이 별로 없으신 거 같아요. 그러실 것도 같아요. 한창 재미있는 대학교 1학년 때시니까, 그때 과외한 고딩은 뭐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겠죠. 아예, 과외 했던 기억도 없으신 것 같더라고요. 제 앞에서 억지로 기억나는 척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도.
“김 변이 기억을 못 했다고?”
“네, 헤헤.”
“에이- 아니야. 김 변 기억력이 어떤 기억력인데.”
“아니에요. 진짜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니야. 김 변 완전기억능력이야. 포토그래픽 메모리.”
“진짜요?”
“응. 몇 번이고 내 눈으로 목격한 사실이야. 내일 물어봐. 법전 통으로 외우고 있으니까. 조례, 규칙까지 싸그리 몽땅.”
“진짜요?”
“응. 믿지 못하겠으면 확인해보라니까.”
“그럼 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을까?
잠시간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
같은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을 유추하는 중이다.
“모르는 척한 거네.”
“네?”
“모르는 척한 거야. 일부러.”
“왜요?”
“그건 바로···김 변도 이 변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지.”
“네?”
“백퍼. 내가 이런 데는 또 촉이 좋아요. 로코 매니아잖아. 일부러 기억 못 하는 척해서 관심을 끌려는 거야. 벌써 이 변이 약간 실망한 거 같잖아. 나중에 아는 척하겠네.”
“설마요.”
“아니야. 취중에 한번 본 백 페이지 넘는 시나리오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 사람이 6개월이나 과외한 학생을 모를 리가 없지. 한눈에 얼굴을 못 알아봤을 수는 있어도.”
“정말이에요? 백 페이지 넘는 시나리오를요?”
“응. ‘기억 속의 당신을’이라고 이중기 작가님이 쓰신.”
정도의 설명에 이재희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일부러 모른 척한 거라고? 그럼 아인 오빠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
은평구 신라아파트 102동 1301호.
철컥, 철컥.
구식 자물쇠.
오 분쯤 씨름한 우지만이 아파트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조용히 내뱉어본다.
“실례합니다.”
좀 더 크게 말해본다. 혹시라도 누군가 있다면 실수로 잘못 들어온 연기를 하려는 의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
집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지하 주차장이 없는 아파트 단지.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거나, 외부인은 모르는 비밀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집안에는 김아리가 있어야 한다.
근데 없는 것 같다.
조용히 화장실부터 확인한 우지만은 작은방들을 열어봤다.
아무도 없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이제 안방을 열어본다.
끼이익-
바닥에 누군가 누워있다.
움직임이 없다.
아주머니가 언급한 그 젊은 남자 환자인 모양이다.
우지만은 조심히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다.
‘누구지?’
모르겠다. 바싹 마른 것이 아픈 지 오래돼 보인다.
‘누구지?’
우지만은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자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유심히 관찰했다.
“아!”
그리고는 드디어 알아챘다.
“김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