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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의 자취방은 연희동 구석이었다. 홍대에서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지만 버스를 타고는 다섯 정거장 이상을 가야 하는 곳이라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세이라는 버스 노선을 따라서 이동하지 않았다.
홍대와 연희동 사이에는 산이 하나 있다. 버스 노선은 이 산을 돌아서 간다. 하지만 세이라는 산을 넘었다.
군 복무 시절, 학철은 산악 행군을 해 보았다. 산악행군은 평지를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을 딛는 것 자체도 힘이 들지만 오르막을 오를 때는 숨이 턱 밑까지 차고, 내리막을 걸을 때는 무릎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세이라에게 산이라는 건 평지보다도 더 쉬운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기계도 이렇게 빨리 산을 타지는 못할 거 같은데.’
휙휙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나무를 보면서 학철은 이런 생각을 했다.
“쉿!”
한순간 세이라가 멈췄다. 뒤따르던 리얀도 멈춰 섰다. 학철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숨을 죽였다.
“여기, 저쪽에 군부대가 있어요.”
세이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산 정상에 군부대가 보였다. 철조망으로 보호되고 있는 높은 담장의 실루엣이 보였다.
“예. 여기 방공부대가 있어요.”
“방공부대? 방공부대가 뭐죠?”
세이라가 학철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헬기 같은, 비행해 오는 적을 요격하는 장비가 있는 부대요.”
학철은 나름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군사지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설명했다.
“그러니까 용기사를 격추시킬 수 있는 무기가 있는 부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네요.”
세이라가 리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여기서부터는 군부대니까 조용히 이동한다. 들키지 않게 주의하도록.”
“예, 그렇게 할게요.”
“학철!”
“예, 알겠습니다!”
리얀이 이름을 부르자 학철은 반사적으로 군대식 답변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군부대가 있는 거랑 조용히 이동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학철은 세이라의 뒤를 따라서 소리 없이 이동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분명 부대에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 병사가 산을 넘고 있는 사람에게 별다른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조용히 이동한다고는 했지만 이동 속도는 매우 빨랐다. 학철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세이라를 따라잡는데 모든 체력을 소모해야 했다.
마침내 큰길에 닿았을 때, 학철은 녹초가 되었다. 온몸이 땀에 젖고 숨이 차서 눈앞에 별이 떠다닐 지경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빨리 이동하죠.”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고르고 있는 학철을 둘러매었다.
그리고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학철은 여유 있게 서울의 야경을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서울의 밤은 아름다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빛도, 멀리 야근을 하고 있을 사무실의 조명도, 마치 밤하늘을 밝히는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런 생각 하는 게 낫지. 머리 터지고 총 맞아 죽는 사람 생각해 봐야….’
학철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세이라는 익숙한 동네로 접어들었다. 학철의 자취방 부근이었다.
“저기인가요?”
세이라가 학철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촌. 그중에 한 빌라 반지하. 학철은 그렇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학철의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아침에 나설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매트리스 하나, 컴퓨터 책상 하나, 컴퓨터, 의자, 그리고 밥상 하나.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지저분한 상태이긴 했다.
“엉망이죠? 죄송해요. 누가 올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나와 세이라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야전에서 전투를 벌였다. 야전 천막에 비한다면야 이 정도면 궁궐이나 다를 바 없다, 학철.”
리얀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에서 가장 깨끗한 곳인 매트리스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이라는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학철은 자연스럽게 컴퓨터 책상에서 의자를 끌어서 리얀과 세이라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데 자이스 장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나, 분명히 봤어요. 자이스 장군 머리통이 펑! 하고 날아가는 걸 봤다고요!”
자리를 잡자마자 학철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세이라. 아직도 적을 앞에 두고 허둥거리고 있느냐?”
“아뇨. 이제는 알아요.”
“그래? 그럼 학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
리얀이 말하자 세이라는 숨을 가다듬은 뒤 학철을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학철. 조금 전에 본 건 자이스 장군이 아니었어요. 움직임이 완전히 달랐다고요. 자이스 장군은 이곳 생활을 하면서 몸이 망가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아까 그 대머리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음… 그럼 쌍둥이? 닮은 사람? 뭐죠?”
“마법이다, 학철. 마법.”
“마법?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마법으로 자이스 장군을 되살렸다는 거죠?”
학철이 말하자 리얀은 한숨을 쉬었다.
“학철. 잘 들어라. 죽은 자는 죽은 것이다. 그 어떤 마법도 죽은 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말했잖아요. 우리가 본 대머리는 자이스 장군이 아니었다고요.”
“그렇다. 자이스 장군처럼 보이도록 외형을 마법으로 조작한 것이다.”
“음… 왜요?”
학철은 언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하러 외모를 바꾸지? 자이스 장군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던데. 대머리고.’
“학철. 너희도 수인족이 있지 않은가?”
리얀이 물었다. 학철이 ‘수인족’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리얀은 설명을 시작했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짐승의 형상을 한 자들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소, 돼지, 토끼, 양, 말, 이런 짐승들 말이다.”
“도마뱀을 빼먹으셨어요.”
“그래. 도마뱀. 자신들은 스스로를 용족이라 부르지만.”
“소도 있고, 개, 돼지도 있어요.”
“그런 짐승의 형상을 한 자들 말이다.”
“…모르겠는데요?”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다른 두 세계의 다른 종족에 대한 대화였다. 제대로 이어가기가 어려운 대화이기도 했다.
“잠깐만요.”
학철은 PC를 켰다. 아무래도 이미지를 보면서 대화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건가요?”
학철은 검색엔진에서 ‘수인족’이라고 친 후,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리얀과 세이라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검색 결과는 다양했다. 황소 머리를 한 인간 미노타우르스, 토끼 귀를 가진 꼬마, 독수리 얼굴에 날개가 달린 여자, 그리고 호랑이 형상의 사내까지.
“너희와 함께 사는 수인족은 이토록 다양한 것이냐?”
리얀이 이미지를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아뇨. 이건 전부 상상이에요. 없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수인족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요.”
“아….”
리얀은 탄식했다.
“학철. 이곳의 세계지도를 보여줄 수 있느냐?”
리얀이 부탁했다. 학철은 간단하게 세계지도를 찾아 모니터에 띄웠다.
“그래… 이곳은 큰 대륙 몇 개로 이루어져 있구나. 내가 온 곳은 12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대륙의 크기도 이곳보다 훨씬 작다. 그리고 수천 개의 섬나라가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곳은 문화와 풍토가 내가 온 곳보다 다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수인도 없는 것이겠지.”
리얀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학철. 아까 자이스 장군처럼 보였던 녀석, 분명 수인족이었어요. 그 도약력, 지붕을 뜯어버리는 악력, 모두 다 수인족의 능력이었다고요.”
학철은 자신을 어깨에 둘러메고 뛰어다니는 세이라의 힘도 못지않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총알 튕겨낸 것도 그렇겠죠?”
학철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물론이다. 총탄은 빠르지만 가볍다. 인간의 피부는 쉽게 관통할 수 있겠지만 두꺼운 수인족의 피부라면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좀 전에 본 수인족은 총탄을 튕겨내었을 뿐만 아니라 불꽃까지 일었다. 그 정도 피부라면… 아마도 도마뱀일 것이다.”
“도마뱀 종족은 자기들을 용족이라고 불러요.”
세이라가 리얀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용족이건 도마뱀이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동물이 이곳에도 있다는 점이 신기하긴 하구나. 나는 차원을 이동했으니 완전히 다른 생명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3년 전에 이곳을 오가며 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흑마법사가 일부러 이곳을 골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리얀 님 살던 곳하고 환경이 비슷한 곳으로요?”
“그렇다. 그리고 부유한 곳으로 골랐으리라. 이곳은 내가 여지껏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거대한 부를 소유한 곳이로구나.”
리얀은 이렇게 말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특히 이 기계. 영상을 전송하고 또 보여주는 이 기계.”
“예. 컴퓨터라고 해요.”
“그래. 컴퓨터. 이건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마치….”
리얀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화면이 스크린세이버로 바뀌었다. 스크린세이버는 요즘 학철이 꽂혀 있는 아이돌 ‘마셰라’의 이미지였다. 학철은 당황해서 얼른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린세이버를 끄려고 했다.
“잠깐!”
리얀은 소리치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았다. 학철은 움찔해서 마우스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공주…? 일리스 공주!”
리얀이 마셰라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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