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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학철은 놀라 되물었다.
방은 지하철처럼 꾸며져 있었다. 긴 좌석이며 손잡이까지 꽤나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지하철처럼 방을 꾸민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몸종을 데리고 자겠다고 말하는 리얀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저를요? 저랑요? 둘이?”
‘갑자기 훅 들어온다’는 표현이 있다. 학철은 리얀이 갑자기 훅 들어온다고 느꼈다. 전혀 생각도 못 해본 발상이었다.
‘몸종을 데리고 자겠다니? 이게 무슨 말이지?’
카운터에서 챙겨준 입욕제와 적어도 오늘 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콘돔을 만지작거리며 학철은 당황했다.
“학철. 당연하지 않느냐? 나는 너를 금화 1천 개를 주고 고용했다. 내 잠자리 시중을 들라 하는 것이 잘못되었느냐?”
리얀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투로 팔짱을 끼고서 학철에게 말했다.
“어, 저, 그게….”
학철은 당황했다. ‘잠자리 시중’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당황하지 마라, 학철. 세이라가 말하는 것, 듣지 않았느냐? 다른 곳에서는 금화 10개로 일가족을 몸종으로 고용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금화 1천 개라면 그 가족이 받은 금액의 100배다. 그렇다면 그만한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학철이 당황하고 있는데 리얀은 이렇게 말했다.
“아, 저, 그, 뭐, 그야 그렇지요.”
학철은 현금 100억 원의 가치를 생각했다. 물론 수수료며 세금이며 떼고 나면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큰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학철. 너에게는 금화 1천 개의 가치가 있다. 나는 일전에 다른 대륙에서 길잡이 하나를 금화 1천 개에 고용한 적이 있다. 너는 이곳에서 나에게 이곳의 길 안내는 물론이고 문화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위로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얀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학철은 호기심이 일었다.
“어? 그래요? 그럼 그, 길 안내 해 준 길잡이 몸종은 어떻게 됐나요?”
“나를 잘 섬겼지. 자! 그럼 농담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여기 앉을 테니 너희는 거기 앉아라.”
리얀은 종자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되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침대에 앉으면서 말했다. 학철과 세이라는 침대 맞은편에 설치된 지하철 의자에 앉았다. 세이라는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가 신기한지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 길 안내만 해 주고 금화 1천 개 받은 몸종, 어떻게 됐어요?”
학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자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었어요?”
학철이 끈질기게 물었다. 몇 번을 물어보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답변해 주려니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학철, 너에게 같이 자자는 말을 했을 때부터 농담이었다.”
“노, 농담요?”
리얀이 농담을 한 적이 있었던가?
“뭐냐? 학철! 설마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냐?”
타이밍 좋게 리얀이 학철을 비난했다. 학철은 잠깐이었지만 정말로 리얀과 한 방에서 같이 밤을 보내야 하는 걸까 고민했기 때문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걸 내가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나하고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자려고 생각했다니! 무례한 것! 몸종 주제에 무엄하다!”
“저, 그런 거 아닌데요….”
하지만 이 말은 입가를 맴돌 뿐, 리얀에게 닿지 못했다.
“리얀 님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몸종 주제에 리얀 님에게서 여성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리얀 님의 매력이 강력하다는 뜻 아닐까요?”
세이라가 학철을 보면서 말했다. 놀리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농담은 그만하자고 했다. 하지만 듣기에는 좋은 말이로구나, 세이라.”
“듣기 좋은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리얀 님 매력이 우리가 살던 세계에서도 충분히 통했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어허. 그만하라니까.”
리얀은 싫지 않은지 미소를 지으며 세이라에게 말했다. 세이라도 미소로 화답했다. 학철은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아주 적절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학철. 이 방에 있는 저 손잡이의 용도는 무엇이냐?”
리얀이 천장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이 방은 테마가 있는 방인 건데요, 그러니까….”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취향을 설명하려니 힘이 들었다. 왜 감옥이나 지하철처럼 꾸며진 방에서 잠을 자고 싶은 건지,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취향인 건지, 학철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지하철이 있어요. 그러니까 철로를 깔고 그 위를 달리는 차인 거지요. 그런데 그 차가 지상으로도 다니고 지하로도 다니고 그래요.”
“사진을 보여다오.”
리얀이 청했고, 학철은 기차와 지하철 이미지를 찾아서 리얀에게 보여주었다.
“신기하구나. 강철로 된 길을 만들고, 그 위에 동그란 바퀴가 달린 거대한 차량이 달린다니. 그런데 톱니로 만들어야 미끄러지지 않을 것 같은데, 동그란 바퀴가 매끄러운 철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이냐? 이 바퀴가 철로 위에서 미끄러져서 헛돌지는 않느냐?”
리얀이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의문이었다.
“그러게요. 이 기차하고 지하철 바퀴가 톱니바퀴가 아닌데 철로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움직이는 건….”
아마 마찰력 때문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확실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검색을 해봤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됐다. 그만두거라. 정확한 답을 찾을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너는 그저 이곳 문화를 대충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 주는 거로 족하다.”
어쩌면 리얀은 나름 위로를 하겠다고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학철은 어쩐지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지하철이 있고, 이 방은 그 지하철을 모방한 공간이라는 건 이해하겠다. 그렇다면 이 손잡이는 지하철의 객실에 설치된 것을 모방한 것이겠구나.”
“…그렇죠.”
힘 빠진 목소리로 학철이 대답했다.
“괜찮다. 의기소침해하지 마라. 내가 아무리 마법사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라 해도,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보다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금화 1천 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운 내거라.”
학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내일 일을 의논해 보자. 어떻게 해야겠느냐?”
리얀은 학철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홍 대표와 연락을 해야겠지요. 홍 대표와 사장이 경찰과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모여서 회의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세이라가 의견을 냈다.
“그렇겠지. 그러면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홍 대표와 연락이 되면, 학철이 내일 아침에 장소를 정해서 사장과 홍 대표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장소는 학철이 고르거라. 안전한 모텔을 골랐으니, 안전한 회의 장소도 고를 수 있겠지. 어때? 믿어도 되겠느냐?”
“장소 고르는 거야 그렇게 어렵진 않죠.”
“좋아. 믿겠다. 그러면 학철은 내일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3인분 식사를 준비하거라.”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하지만 금화 1천 개를 받기로 했고, 좀 전에 세이라가 훔친 현금도 있으니 까짓 아침 식사, 준비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학철. 하나만 묻자. 아까부터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그게 무엇이냐?”
리얀이 물었다. 그제야 학철은 자기가 뭔가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건 입욕제예요. 그러니까 욕조에 물을 받고요, 거기에 푼 다음 목욕을 하는 거요.”
“입욕제는 안다. 내가 살던 곳에도 입욕제는 있었다. 그거 말고, 지금 왼손에 쥐고 있는 것 말이다.”
학철은 손에 쥔 콘돔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와서 치우기는 늦었지?’
답변을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콘돔이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미성년자도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게 콘돔이다. 특수형 콘돔은 미성년자가 살 수 없긴 하지만.
“피임기구요.”
학철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답변을 했다.
“줘 보거라.”
학철은 리얀에게 콘돔을 건네주었다. 리얀은 포장을 뜯은 다음 콘돔을 손에 쥐었다.
“고무로구나. 아주 정밀하게 잘 만들었구나. 내가 온 곳에서는 동물의 창자로 피임기구를 만들었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콘돔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동물의 창자요? 돼지 오줌보로 축구공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창자로 콘돔을….”
“궁금하면 나중에 다시 묻거라.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
리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세이라도 따라 일어섰고, 학철도 덩달아 섰다. 물론 창자로 콘돔을 만드는 법을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나는 이 세계의 입욕제를 시험해 보겠다. 학철. 오늘은 됐다. 가서 푹 쉬거라. 그거 나한테 주고.”
리얀이 손가락으로 학철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입욕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학철은 입욕제를 건네주었고, 리얀은 그것을 받아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끝인가요?”
학철이 세이라에게 물었다.
“들었잖아요? 리얀 님이 가서 쉬라고 했어요. 그러면 가서 쉬시면 되는 거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학철은 방을 떠나기 전에 궁금한 것 하나를 해결하고 싶었다.
“저, 그런데요, 아까 말한 몸종, 길 안내해 주는 대가로 금화 1천 개 받기로 했다는 그 사람요. 그 사람 어떻게 됐어요?”
학철은 그 몸종의 운명이 궁금했다. 어쩐지 그 몸종의 운명을 자신도 따르게 될 것만 같았다.
“죽었죠.”
세이라가 말했다.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죽었어요?”
학철은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세이라의 답변이 꼭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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