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홍대 가다-44화 (44/100)

- 44 -

“우시준? 우시준 맞죠?”

학철이 어깨에 여자 하나를 둘러멘 남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우시준이라는 말을 듣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다 왔어, 가히 씨.”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깨에 둘러멘 여자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그런데 대표님, 어쩌다가 우시준하고 영혼이 바뀐 거예요? 교통사고? 아니면 전생의 인연? 뭐죠?”

가히는 학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연이어 쏟아냈다. 우시준과 꼭 닮은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히가 하는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학철은 가히를 보고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철이 보기에 가히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훨씬 예뻤다. 170은 되어 보이는 큰 키와 늘씬한 다리도 보기에 좋았다.

“학철. 입 다물어요. 침 흐르겠어요.”

세이라가 학철의 귀에 속삭였다. 학철은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닫았다.

“이봐.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가히 씨가 예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면접 보러 온 스무 명 중에서 가히 씨가 제일 예쁘다고들 했지. 그래서 뽑았거든. 예쁘다고 해서.”

남자의 거친 음성을 듣자 학철은 오금이 저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위협했던 대머리 자이스 장군의 음성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와! 진짜 우리 대표님 맞네요? 솔직히 긴가민가했거든요. 얼굴이 우시준하고 너무 똑같아서요.”

가히는 자신이 예뻐서 뽑혔다는 사실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저, 그런데 저 두 사람, 누군가요?”

학철이 작은 소리로 세이라에게 물었다.

“이야기하면 좀 복잡해요.”

“학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우시준 얼굴을 한 남자가 학철에게 물었다.

학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자이스 장군 얼굴을 한, 자신을 납치한 바로 그 남자일 것이라는 짐작은 갔다. 하지만 우시준과 똑같은 외모 때문에 누군지 안다는 말을 선뜻하기는 힘들었다.

학철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밧줄을 타고 리얀이 내려왔다.

“상황 정리는 좀 미루자. 학철. 지금 우리는 바로 도망쳐야 한다. 뛰지 않고 걷는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굳이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 없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세이라가 따랐고, 학철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시준 얼굴을 한 사내와 가히도 바로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가히가 학철에게 말을 걸었다. 학철은 가히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예, 말씀하세요.”

학철은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그쪽 이름이 학철, 맞죠?”

“예, 학철입니다. 오학철.”

“그래요, 학철 씨. 나 누군지 알죠?”

가히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학철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나하고 만난 적이 있었나?’

이렇게 예쁜 여자가 친절하게 뭔가를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다단계. 아니면 종교 포교. 하지만 가히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기억 안 나요? 미해. 홍미해.”

가히가 말했다. 학철은 잠시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홍미해.

학철의 헤어진 여자친구 이름이었다.

“미해… 아니, 저기 가히 씨, 미해를 어떻게 알아요?”

학철은 놀라서 이렇게 되물었다.

“어머. 진짜 기억 못 하시나 봐요? 섭섭하게.”

가히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짐짓 토라진 척을 했다. 학철은 당황했다. 다단계도 아니고 종교 포교도 아닌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경험이 그리 흔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홍대에서 봤잖아요. 미해랑. 2층 테라스. 기억 안 나요?”

“아….”

테라스, 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밤이 있었다.

그날 밤, 미해가 밤늦게 전화를 했다. 아마 자정 즈음이었을 것이다. 미해는 취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홍대에 있는 술집 위치를 알려주고는 당장 오라고 했다. 급한 일이려니 했다. 학철은 그야말로 대충 얼굴만 씻고 미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2층 테라스가 있는 술집이었다.

술집에서는 미해와 미해의 친구들이 학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아마 셋, 아니면 넷이었을 것이다.

미해가 원한 건 술자리 계산이었다. 아마 남자친구 자랑을 하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학철은 현금이 별로 없었다. 미해는 짜증을 냈고, 학철도 짜증을 냈다. 결국 기억에 남은 것은 크게 다툰 기억뿐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미해의 친구들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날 미해가 학철 씨 얼굴 보여준다고 얼마나 유세를 떨었는데요. 그때는 우리 중에 미해만 혼자 남친 있었거든요.”

“아, 그랬던가요?”

학철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계산을 안 해줬다고, 모양 빠진다고 짜증 냈던 미해가 떠오르는 것도 불쾌했고, 현금이 없어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서글펐고, 그보다 본질적으로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미해랑은 헤어지셨죠?”

가히가 얄밉게도 아픈 질문을 던졌다. 참으로 해맑은 표정이었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어쩜 이리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건지 학철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됐네요.”

학철은 고개를 돌리면서 대꾸했다. 저런 밝은 표정 앞에서 어두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건가요? 아니, 그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가히가 물었다.

“아. 저, 지금 상황이요….”

학철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멈췄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학철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지어낼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 여자가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저보다는 많이 아시죠? 그냥 아는 것만이라도 말해줘요. 예?”

“좀 복잡한데….”

학철은 대충 이렇게 말하면서 넘어가려고 했다.

“복잡해도 좋으니까 이야기해 줘요. 예?”

가히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분명 가히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는 여자이지만 동시에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예쁜 여자이기도 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는데요… 저기, 저 외국 분들하고 얽힌 일인데, 외교 문제인지 뭔지, 좀 알기 어려운 일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학철은 나름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리얀 일행을 외국인이라고 표현한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히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원하는 답이 아닌 것이다. 잠시였지만 학철은 이렇게 예쁜 여자를 실망하게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진짜….’

학철은 결국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졌다. 오직 상대방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왜 이렇게 초라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외모 때문에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부끄럽기도 했다.

“가히 씨. 그, 총소리 들으셨지요? 혹시 누가 공격한 건지 아세요?”

비록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학철은 오히려 이렇게 역으로 물어보았다. 가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총소리였어요? 엄청 시끄럽긴 했는데.”

역시나 가히는 학철만큼도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화장만은 완벽했지만 말이다.

“일단 우리, 합류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저도 거기서 이야기를 들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지금 상황요.”

학철은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알았어요. 그런데요, 학철 씨. 그럼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세요.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 대표님이 우시준하고 영혼이 바뀌게 된 건가요?”

가히는 이렇게 묻고는 눈을 끔뻑였다.

“여, 영혼이 뒤바뀌었다고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다 알아요. 우리 대표님 목소리, 말투, 다 그대로던데. 어떻게 된 거죠? 예?”

가히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고서 물었다.

가히가 대표라고 부른, 우시준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세이라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다지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학철은 가히의 질문에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조금 전에는 외국인이니 외교 문제니 하고 얼렁뚱땅 대답하긴 했지만 마법사라는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우시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사람은 날 납치한 그 사람이 맞아. 그런데 영혼이 뒤바뀌었다고? 그건 분명히 아냐. 마법이겠지. 그런데 무슨 마법이지? 외모를 우시준으로 바꾸는 마법인가? 리얀이 그런 마법도 쓸 수 있었나?’

학철이 고민하고 있는데 가히가 다시금 눈을 끔뻑였다. 학철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간절하게 답을 원하는 표정을 외면하고 싶은 남자가 있을까 싶었다.

‘사실대로 말해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마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저도 진짜 모르겠어요. 솔직히 당황스러워요. 어제부터 도대체 믿기 어려운 일이 계속 벌어졌거든요.”

“어제부터요?”

“예. 저기 외국 분들이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온 게 어제거든요.”

“어? 학철 씨,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해요?”

미해가 친구들에게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같은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 휴학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거든요.”

“아, 어쩐지….”

가히는 뭔가 알겠다는 듯 학철을 슬쩍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학철은 발가벗고 서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도대체 미해가 뭐라고 말했는지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6300

© 김상현

※ 본 전자책은 <툰플러스>가 저작권자와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