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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초면이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 나라면 그런 걱정 안 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제정신이야? 정보부가 죽을 때까지 우릴 따라올지도 모르는데 걱정 안 하겠다니?”
사장이 꼭 미친놈을 대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룩칼에게 쏘아붙였다.
“나라면 말이야, 정보부 놈들을 걱정하겠어. 만약 햇살 용역을 노린 게 정보부라면, 정보부 놈들은 모조리 내 손에 죽을 테니 말이야. 최후의 한 명까지. 크크크.”
룩칼이 싸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섬뜩한 웃음소리에 사장은 얼른 고개를 숙여 룩칼을 외면했다.
“룩칼. 그건 일단 놈들이 누구인지, 또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저기요, 우리가 노리는 게 흑마법사 아니었나요?”
리얀이 이야기하는데 학철이 끼어들었다.
“그렇다. 흑마법사가 죽을 때까지. 그것이 너하고 맺은 계약이다.”
“그런데 햇살 용역은 흑마법사의 부하들이죠?”
“그렇다.”
“그럼 아까 그 사람들, 우리하고 같은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아요? 그러니까, 흑마법사를 노린다고요.”
“어, 그래. 학철이 말에 일리가 있네. 그래. 그래서, 놈들 정체가 뭐라고 생각해? 응?”
사장이 뭔가 희망을 봤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하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만약 그들이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 전 전자 장비를 가지고 우리가 탄 승합차를 추격하고, 또 총까지 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리얀이 말했다. 그러자 학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검지로 룩칼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흑마법사를 노린 누군가가 있고요, 그들은 우리의 정체를 모른다고 한다면… 놈들이 햇살 용역 건물을 공격하고, 또 우리도 노린 게 말이 되지 않나요?”
학철은 자신이 세운 이론을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들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맞아. 학철이 말이 일리가 있어.”
침묵을 깨고 사장이 말했다.
“한 번 생각해 보자고. 그러면 흑마법사를 노릴만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겠어? 내가 보기엔 말이야, 혹시 리얀 님. 리얀 님 동료 중에 누군가가 정보부하고 손잡고… 정보부 특수부대를 보낸 게 아닐까 싶은데….”
사장은 리얀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리얀은 사장의 말을 듣고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리얀 님보다 먼저 이곳에 올 사람이 있을까요? 그보다는 흑마법사 부하 중에 누군가가 배신해서 이곳 정보부하고 손을 잡았다고 보는 게 더 그럴싸하지 않겠어요?”
세이라가 말했다.
다들 이론을 하나씩 내놓다 보니 정리가 되질 않았다.
“아직은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다. 하지만 조만간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대로 쫓기면서 흑마법사를 추적할 수는 없다.”
리얀은 현재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지금 결론 못 내리겠다는 거, 알겠어, 알겠어. 그럼 인제 어쩌지?”
사장이 홍 대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리얀 님 의견을 들어보지요.”
홍 대표가 말했다.
“우선 주인장은 햇살 용역 건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소. 홍 대표도 같이. 룩칼. 햇살용역건물은 우리가 전리품으로 접수하겠다. 전리품을 넘기겠다는 건 내가 이 사람들과 한 약속이다.”
리얀이 말했다.
“패장이 전리품을 두고 뭐라고 하겠소? 맘대로 하시오. 명의이전을 원한다면 차명으로 되어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오. 다만 인감과 서류, 등기 문서가 그대로 있어야 할 텐데… 가히 씨. 사무실 서류 정리, 잘 돼 있지?”
룩칼이 가히를 보며 말했다.
“그럼요. 제가 매일 정리했는걸요.”
“그럼 주인장은 홍 대표와 가히를 대동하고 햇살 용역 건물로 돌아가야 할 것이오. 건물 명의를 이전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소.”
“리얀 님. 지금 햇살 용역 현장은 경찰로 가득합니다. 구급차에 소방차까지 출동한 상태고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셔야 할 것이오. 홍 대표. 전리품은 나의 약속이었고, 전리품을 얻도록 돕고 수수료를 받겠다고 약속한 것은 홍 대표였소. 나는 홍 대표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내가 틀렸소?”
리얀은 꽤 강경한 태도로 홍 대표를 몰아붙였다.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요. 하지만 전리품, 그러니까 건물 명의를 이전하는 건 지금 아니라도 언제든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조금 전에 들으니 건물의 명의는 차명으로 되어있다고 했고, 그렇다면 누구든 건물의 명의를 가로챌 수 있을 것이오. 당연히 부근에서 기회를 보다가 가장 먼저 서류를 손에 넣어야 할 것이오. 홍 대표. 이건 내 약속과 관련된 문제고, 나는 그 무엇보다도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홍 대표는 썩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리얀의 말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 룩칼이라는 분은….”
“룩칼은 나와 함께 갈 것이오.”
리얀이 선언하듯 말하자 룩칼은 좀 당황한 눈치였다. 사장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잠깐. 저 우시준 닮은 친구, 우리랑 가야 하는 거 아냐? 아까 보니까 저 사무 보는 아가씨가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 이봐, 아가씨. 이 사람이 햇살 용역 대표 맞지?”
“그런데요, 아저씨. 저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가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학철은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려 있었던 가히가 맞나 싶어서 살짝 놀랐다.
“아니, 아가씨. 내가 나이도 많고, 또 사장이니까 그러는 거지.”
“나이 많고 사장이라고 막 반말해도 되는 건가요?”
“아가씨, 페미니스트야?”
사장이 마치 군사독재 시절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빨갱이냐고 묻는 투로 물었다. 가히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허, 하는 탄식을 냈다.
“사장님? 저기요, 사람을 대할 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대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아가씨가 뭐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제 이름, 한가히에요, 한가히. 게다가 자기주장을 한다고 페미니스트냐고 묻다니!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 좋아하는 여성은 아무도 없어요.”
가히는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학철은 가히가 사장의 말에 자극을 받아서 공포심을 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히 씨. 내가 원칙이 하나 있는데 말야, 그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나를 미워해도 딱 한 사람의 여자만 날 좋아하면 된다는 원칙이야.”
사장은 여전히 반말로 말했다.
“엄마? 아니면 와이프?”
가히가 빈정거렸다.
“아니. 신사임당.”
사장은 돈 세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가히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학철은 그래도 사장이 농담을 하는 걸 보니 기운을 차리긴 했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누구예요?”
세이라가 불쑥 학철의 귀에 대고 물었다.
“음… 우리가 쓰는 화폐 중에서 제일 고액권에 그려진 사람이요.”
“아, 돈에 초상화 그려진 사람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왕인가요? 여왕?”
세이라가 물었다. 학철은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신사임당.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뭘 한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전쟁 때 적군을 격퇴했다거나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거나 아니면 한글을 만든 왕이라거나 하는 정도의 업적은 떠오르질 않았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학철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세이라도 더 이상 궁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리얀 님. 룩칼하고 뭘 하려는 거야? 동향을 만났으니 고향 이야기라도 하려는 건가?”
사장이 물었다. 아무래도 사장은 햇살 용역 대표와 떨어지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소. 건물 명의를 이전하는 문제는 잘 해결될 것이오, 사장. 안 그렇소, 홍 대표?”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따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뭡니까?”
이번에는 홍 대표가 리얀에게 물었다.
“여기, 우리가 타고 온 승합차를 빌려야겠소. 이 승합차에 나와 세이라, 룩칼, 그리고 학철이 탈 것이오.”
“예? 저요?”
학철은 리얀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학철은 승합차 운전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학철의 지식도 필요하다. 특히 군사문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학철은 지금 모여 있는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군필자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리얀 님. 도대체 뭘 하시려고….”
“홍 대표.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오직 흑마법사를 찾기 위함이오. 나는 그 조건으로 전리품을 약속했소. 일단 전리품을 챙기시오. 나는 그사이에 내가 할 일을 계속하겠소.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소?”
리얀은 홍 대표의 질문에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문제가 있지요. 지금 햇살 용역 건물을 경찰이 수색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니 리얀 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리얀 님의 마법은 누구보다 강력하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전리품을 정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홍 대표.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말이오. 전리품은 홍 대표의 몫이오.”
리얀은 딱 잘라 말했다.
“좋습니다. 그게 약속이었으니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룩칼이라는 분, 저분이 필요합니다.”
홍 대표가 룩칼을 보며 말했다. 룩칼은 그저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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