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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얀은 거미가 천장으로 올라간 순간 예상을 한 모양이었다. 침착하게 손에서 피를 내어 자신의 앞에 붉은 안개를 만들어냈다.
성체 거미가 리얀을 향해 모든 체중을 실은 공격을 가했다. 리얀은 피를 계속 흘렸고, 피가 만들어내는 안개의 장벽은 점점 두꺼워졌다.
투웅!
크고 묵직한 소리가 리얀의 바로 앞에서 울렸다. 거미의 움직임은 리얀이 만들어낸 붉은 안개 벽에 막혔다. 하지만 거미가 모든 힘을 다한 앞다리의 발톱이 장벽을 통과했고, 발톱 끝이 리얀의 배에 깊숙하게 박혔다.
“흡!”
리얀이 몸을 뒤로 빼자 배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리얀!”
“리얀 님!”
쟈론과 세이라가 절망적인 소리로 리얀을 애타게 불렀다. 학철은 굳어버렸다. 리얀이 피를 흘리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로 피를 흘리는 것은 처음 보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리얀의 표정이었다. 분명 배에 거미의 발톱이 박혀 구멍이 뚫렸지만 리얀의 표정은 평소의 무표정 그대로였다.
“깊지 않다! 치명상이 아니니 허둥거리지 마라!”
리얀은 이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배에 피를 흘려 넣어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리얀은 움직일 수 없다. 장이 제자리를 찾기 전에 움직였다가는 어떤 꼴이 되는지 보았기 때문에 리얀이 못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쪽이다!”
쟈론이었다. 쟈론은 거미가 리얀을 끝내려 다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미를 향해 전력을 다한 공격을 쏟기 시작했다. 세이라도 측면에서 공격했고, 이 틈을 노린 쇠뇌 사수들의 지원사격도 이어졌다.
슉슉!
두 발의 독화살이 성체 거미의 배에 박혔다. 하지만 독이 통하는 것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미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거미는 화살이 박힐 때 움찔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다! 빨리 해치워!”
리얀은 바닥에 누워서 쟈론과 세이라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알아! 나도 안다고!”
쟈론이 투덜거렸다. 조금 전까지 밝게 빛나던 바닥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법의 유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쏴! 쏴!”
장철중 소령도 쇠뇌 사수들에게 목이 터지라 외쳤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건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이제 끝입니다!”
“화살, 다 쐈습니다!”
마지막 화살까지 날려버린 쇠뇌 사수들이 외쳤다.
이제 남은 희망은 쟈론과 세이라가 시간 내에 성체 거미를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독화살 맞은 거 맞아? 이 녀석, 느려지질 않아!”
“더 세진 거 같은데요?”
거미의 앞발을 상대하고 있는 쟈론과 세이라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희망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면… 대한민국에 저 괴물이 나가게 된다. 저것들이 번식을 한다면, 그건 국가적 규모의 대재앙이 될 거야.”
학철은 장철중 소령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장철중 소령은 학철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된다면, 홍대에서 몇천 명 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어.”
장철중 소령은 수류탄을 넣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설마, 그걸 터트리실 생각은 아니죠?”
학철이 장철중 소령에게 물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하지만 이대로 가치 없는 죽음을 맞을 수는 없어.”
장철중 소령이 쟈론과 세이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싸움은 여전히 호각이었고, 거미도, 쟈론과 세이라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다만 바닥의 붉은 기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원래는 저거 불로 간단하게 퇴치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여기가 지하 깊은 곳이고, 밀폐된 공간에 기름이 가득 차 있어서 불을 쓰지 못해서 고생하는 것뿐이고요.”
학철의 말에 장철중 소령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학철은 조금 전에 들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저기서 싸우고 있는 세이라가 그랬어요. 전쟁 중에는 목숨을 걸고 자기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친다고요. 제가 보기에 소령님도 그러신 거 같아요.”
장철중 소령은 여전히 침묵했다.
“제가 물어봤어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냐고. 그랬더니 그러더라고요. 목숨을 걸었으니까 목숨을 잃었다고요. 제 생각은 그래요. 살아야 뭐든 하지 않겠어요? 싸우거나, 죽거나, 어느 쪽이거나요.”
학철은 장철중 소령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싸움을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장철중 소령의 표정에서는 그저 비장한 각오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학철!”
이제는 그럼 불에 타서 죽거나 거미 먹이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얀이 학철을 불렀다. 학철은 누워있는 리얀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채워라.”
리얀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이걸… 채우라고요?”
“내 피로 채우란 말이다. 지금 나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학철은 리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생수병을 받았다. 그러자 리얀은 단검을 내밀었다.
“이걸로 내 손바닥을 가르고 피를 내라.”
“저, 그런데 지금 얼굴이 창백해요. 입술도 파랗고… 피를 더 흘리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학철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조금 전 거미에게 공격당해 배에 구멍이 뚫려서 흘린 피도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법이고 전투고 흑마법사고 뭐고 간에 과다출혈로 먼저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위험하지 않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대로 모두 다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그러니 어서!”
리얀이 학철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대로 다 죽을 셈이냐! 어서!”
학철은 조금 전 장철중 소령의 원대한 자살 계획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지금 리얀에게도 같은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싶었다. 하지만 장철중 소령과 리얀은 입장이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거지?’
학철은 혼란스러웠다.
“학철! 저길 봐라!”
리얀이 거미줄 위에 빛나고 있는 붉은 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빛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어서!”
리얀이 학철을 쏘아붙였다. 학철은 리얀의 눈빛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단검을 쥐고 리얀의 손바닥을 갈랐다. 피부가 마치 두부 자르는 것처럼 쉽게 잘렸다. 그러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얀은 주먹을 쥐었다. 피가 주먹 아래쪽으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학철은 생수병 입구를 대고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조심하며 피를 받았다.
퍽!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학철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울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미의 공격을 방어해낸 쟈론이 천장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세이라!”
쟈론은 세이라의 이름을 외치며 공중에서 몸을 틀어서는 천장을 밟고 거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세이라는 쟈론의 의도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거미야! 나한테 집중해! 등 쪽은 안전하니까! 알겠지!”
세이라는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을 다정하게도 거미를 향해 늘어놓으면서 갑자기 맹렬하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살벌한 공격이었다. 어쩐지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챙! 채챙! 챙! 챙!
세이라의 연속된 공격을 거미가 방어하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꽹과리 소리처럼 연이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쟈론은 두 손을 모아 칼을 쥐고는 거미의 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천장을 밟고 뛰어내리는 속도와 체중을 모두 실은 그야말로 필사의 공격이었다.
‘제발… 제발…!’
학철은 리얀의 피를 받으면서도 쟈론의 공격이 성공하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쩡!
고막이 멍할 정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철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패였다.
거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앞발을 놀려 모든 힘을 다한 쟈론의 공격을 방어해냈고, 덕분에 쟈론은 이번엔 벽 쪽으로 튕겨 나간 후, 간신히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쟈론의 이번 공격이 아무 효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거미의 앞발 하나가 마치 폭발
한 것처럼 끊어져 버렸다.
“됐어! 승기를 잡았….”
쟈론이 자신만만하게 외치려는 순간, 세이라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꺅!”
세이라는 뒤로 한 바퀴 돌아 거리를 만들어 거미의 공격을 회피했지만 출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상처는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해서 배까지 이어졌다. 제대로 깊게 베인 모양이었다. 피가 순식간에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학철! 피를 뿌려! 어서!”
리얀이 말했다. 리얀은 세이라를 치료하라는 말이라 생각하고 세이라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쪽은 위험하다! 바닥에 뿌려! 어서!”
학철은 바닥과 세이라,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잠시 생각했지만 결론은 곧 나왔다.
‘이번 공격은 성공해야 할 텐데….”
학철이 피를 바닥에 뿌리며 생각했다. 희미하게 꺼져가던 붉은빛은 되살아났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바로 그때,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장철중 소령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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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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