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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한테 듣긴 했는데, 진짜네? 학철이, 학철이 맞구나?”
여자 요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해야….”
미해. 홍미해. 학철의 헤어진 여자친구였다.
“뭐야? 아는 사이야?”
진 팀장이 미해에게 물었다.
“예, 아는 사이에요. 아무 사이 아니고요.”
미해는 딱 잘라서 선을 그었다. 굳이 학철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 됐다고 들었어. 그런데 여기서 일하는 줄은 몰랐네.”
가히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랬지.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거 아냐. 나, 본사에서 일해. 지금은 파견 나왔어.”
미해는 ‘본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학철은 알지 못했고, 안다고 해도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그랬지. 우리 요원들을 누가 잠재워 버리지 않았으면 굳이 파견까지 오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요, 세이라?”
진 팀장이 누워있는 세이라를 보며 말했다.
“저보고 뭐라 그러지 마세요. 저는 제 일을 했을 뿐이에요.”
“뭐라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한 거지. 안 그래?”
진 팀장이 미해에게 동의를 구했다.
“예. 그리고 덕분에 옛날 알던 사람도 다시 보네요.”
미해는 전혀 반갑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하긴 반가울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평생 다시는 보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았을지 모를 사이니까.
“그래. 그건 그렇게 넘기고, 지금은 일부터 하자. 일단 다들 모여주세요. 그사이 업데이트된 정보 말씀드릴게요.”
진 팀장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부우우욱!
역시나 우렁찬 방귀 소리와 함께 세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하하하하! 소리 한 번 우렁차네! 어때? 시원하지? 난 진짜 개운하더라고.”
“닥치세요.”
쟈론과 세이라는 이렇듯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진 팀장 쪽으로 향했다. 리얀도 함께 했다. 그 옆에 학철이 섰고, 장철중 소령은 부대원들을 확인한 뒤 마지막에 진 팀장 앞에 섰다.
“먼저 흑마법사 관련 정보를 좀 알려드릴게요. 이건 미해가 찾았으니까 미해가 브리핑해.”
진 팀장이 말한 후 자리를 내주었다. 미해는 태블릿PC를 들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신성일이라는 이름은 다들 익숙하실 거예요. 흑마법사가 우리 정보부에 접촉해 온 이후, 흑마법사가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차명이에요. 흑마법사는 이 이름으로 건물을 사고, 사업체를 운영했어요.”
“그런데 하필 신성일이 뭐야. 가짜 이름 티 내는 것도 아니고.”
학철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미해는 살짝 눈을 흘겼지만 못 들은 척하고 브리핑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신성일 이름으로 진행했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았을 거라고 봤어요. 계좌이체든 계약서든 뭐든요. 그런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흑마법사가 다른 차명을 찾았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필 오늘 햇살 용역 건물을 털었잖아요? 그래서 나온 서류들 뒤지다 보니까 서류가 나오더라고요.”
“그 부분은 게스트하우스 사장하고 홍 대표가 찾는 데 도움을 줬어요. 물론 가히 씨가 서류 정리를 해 줬고요. 민간인들 쓴 게 좀 모양새가 좋진 않은데, 아무래도 손이 딸리다 보니까 정규요원 말고 I.O 손을 빌려야 할 상황이었어요.”
진 팀장이 미해의 설명에 부언하고는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학철은 위화감을 느꼈다. 민간인을 일에 투입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될 부분을 굳이 설명할 때는 보통 뭔가를 숨기고 싶을 때라는 걸 학철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학철이 생각하는 사이, 미해가 설명을 이어갔다.
“예상대로였어요. 햇살 용역은 원래 신촌 일대에서 활동하던 폭력조직을 흑마법사가 인수한 거였어요. 그런데 원래 그 조직폭력배들이 사용하던 차명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으로 제가 파봤죠. 그랬더니 바로 여기, 햇살 기획 관련된 명세표가 나왔어요. 여기 공사할 때 사용한 중장비 대금이며 사룟값 같은 거요.”
성체 거미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었을 때 때 오툴이 ‘본사에서 온 요원이 뭔가 찾아냈다’라고 했던 말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때는 상황이 급박해서 무시했지만 꽤 중요한 정보이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어요. 햇살 용역에서 사용하는 차명, 그러니까 폭력조직이 사용하던 차명 부동산 거래 내역이었어요.”
“결론부터 말할게요. 흑마법사는 이즈파크 빌딩을 샀어요.”
미해의 말을 진 팀장이 마무리했다.
“이즈파크 빌딩을? 그거, 수백억 원 할 텐데?”
장철중 소령이 경악했다. 하지만 학철은 마법사들이 대량의 금을 마법을 이용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긴장 상태 때문에 금값이 오르기도 했으니까 팔기는 쉬웠을 것이다.
진 팀장은 이 대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즈파크 빌딩이면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죠? 어젯밤에 여기 학철하고 함께 옥상에 올라가 본 적 있어요. 주변 정찰하러요.”
세이라가 말했다. 그러자 학철은 세이라의 품에 안겨 이즈파크 옥상에 올랐던 아찔한 기억이 떠올랐다. 인상을 구기거나 몸서리를 치고 싶었지만 미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그나저나 이즈파크 빌딩 옥상에 올라갔던 게 바로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인데 꼭 몇 개월 전에 일어난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즈파크 빌딩 지하에요.”
세이라가 말을 보탰다. 지하에서도 정확하게 방향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세이라였다.
“여기가 이즈파크 빌딩 지하라고?”
“예.”
장철중 소령의 질문에 세이라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세이라의 능력을 눈으로 봐서 알고 있는 장철중 소령은 세이라의 말에 수긍했다.
“더럽게 오래 걸었는데 거리는 얼마 안 되네. 홍대 놀이터에서 이즈파크 빌딩까지면 한 500미터 되나?”
“빙빙 돌아서 왔잖습니까, 대장님.”
장철중 소령의 말에 부대원 하나가 말을 더했다.
“소령이 지적한 부분이 맞소. 여기까지 오는데 흑마법사는 너무 깊게 땅을 팠소. 그렇다면 당연히 파낸 흙을 처리해야 했을 것이오. 나는 흑마법사가 차원이동문을 사용하여 이곳의 흙을 다른 곳으로 보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리얀이 말했다.
“아마… 그랬겠죠. 그랬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중요한 건 흑마법사가 이즈파크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지금 흑마법사가 있는 곳이 바로 이즈파크 빌딩 지하일 거라는 점이에요.”
진 팀장은 허둥거리고 있었다. 학철은 정신감응 마법을 모르지만 그럼에도 진 팀장이 차원이동문 이야기를 자꾸 회피하려고 한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죽은 거미 뒤에 저기 문 보이시죠? 저 문으로 나가면 지하통로가 나와요. 아마 이즈파크 빌딩하고 이어져 있을 거예요.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지원 병력을 모아서 이즈파크 빌딩을 점령하는 거예요.”
“저는 흑마법사가 이즈파크 빌딩에 은신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해요. 그리고 흑마법사의 나머지 수하들도 함께 있을 거라고 보고요.”
진 팀장과 미해가 한마디씩 했다.
“그럼 저 문으로 나가서 일단 통신부터 해야 할 것 같군. 본사에 지원요청 해야지. 필요하다면 국방부 협조 얻어서 수방사 병력 지원받을 수도 있고, 경찰에 요청해서 경찰특공대를 부를 수도 있고. 진 팀장, 어떻게 할 생각이요?”
장철중 소령이 진 팀장에게 물었다.
“국방부나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좀 곤란해요. 이 일은 기본적으로 극비에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세계인이 마법을 쓰면서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이 일반에 알려지면 큰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진 팀장이 답변했다.
“그럼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건가?”
장철중 소령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 지금 상황 설명은 충분히 드린 것 같고요, 일단 나가서 우리 팀 재정비할 거예요. 장 소령님이 남은 병력들 정비해주시고, 장비 보충받으시면 될 거 같아요. 이즈파크 빌딩에 거미는 없으니까 화기는 마음껏 쓰실 수 있어요. 리얀 님 하고 세이라 님은 내부 정찰을 해 주시고, 학철 씨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두 분을 지원해주시면 돼요. 질문 있어요?”
“알겠소. 이제 여기서 나간다는 건데… 그럼 어디로 나간다는 거지?”
장철중 소령이 질문했다.
“그야 우리가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죠. 저 문을 통해서 나가는 건 호랑이 입으로 굴러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자기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일 텐데, 온갖 함정에, 거미 같은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고요.”
진 팀장이 친절한 말투로 설명했다. 장철중 소령은 이야기를 듣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 그럼 이제 저 문을 통해서 홍대 놀이터 쪽으로 가서….”
“아니. 그렇게 하지 않겠소, 진 팀장.”
리얀이 진 팀장의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진 팀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에테르의 방벽은 멀리 있을 때 돌파하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 가까운 거리라면 돌파할 수 있소. 나는 이미 저 문 너머를 정찰했소. 그리고 진 팀장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도 알고 있소. 그러니 이제 연극은 그만두시오.”
리얀이 단숨에 말했다. 진 팀장은 꼭 팩트폭행을 당한 네티즌이 지을 법한 얼굴을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세이라! 문을 열어라!”
“예!”
세이라가 죽은 거미의 사체 너머에 있는 문을 열었다. 쟈론이 옆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칼날을 쥐었다.
- 끼이이이…
무거운 금속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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