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새로운 삶의 시작(1권) (2/42)

1장 새로운 삶의 시작

새로운 삶의 시작

수백 개의 차원계 중 네오스라는 곳이 존재했다.

그 세계는 거대한 땅덩어리 하나와 그것을 둘러싼 바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큰 땅덩어리를 사람들은 모두 칸 대륙이라고 불렀다.

칸 대륙은 대륙의 동서를 관통하는 드래곤 산맥으로 인해 두 개로 나뉘고, 기후에 따라 또다시 분리되었다. 즉, 드래곤 산맥 위쪽에 있는 대륙을 동서로 나눠 동쪽은 여름의 대륙, 서쪽은 봄의 대륙이라 부르고 산맥 아래쪽에 있는 대륙 또한 각각 겨울의 대륙, 가을의 대륙이라 불렀다. 한데 각각의 대륙은 1년 내내 계절이 변하지 않고 각 대륙이 가진 이름과 같은 계절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드래곤 산맥.

칸 대륙을 둘로 나누는 기준이자 거대한 산인 드래곤 산맥은 말 그대로 드래곤들이 사는 곳이었다.

도마뱀을 확대해 놓은 모습이라고 하는 드래곤들이 사는 드래곤 산맥은 사계절을 모두 지닌 신비한 곳이었다. 드래곤들이 사는 곳이기에 그곳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많은 자원과 여러 가지 농사를 하기에 좋은 기후인 드래곤 산맥 주위에는 거대한 도시가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드래곤 산맥 위에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허공에 떠 있었는데 그곳은 드래곤들이 회의를 하는 곳이자 마계, 천계, 정령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현 칸 대륙의 정세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혼란기였다. 봄의 대륙을 제외한 세 개의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터져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 갔다. 지금은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암흑의 시기인 것이다.

가을의 대륙에 있는 팔란 왕국의 작은 시골 도시인 팔레인. 지금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도시... 팔레인이 있던 곳은 황량하기만 했다.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의 브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들... 신, 드래곤, 정령왕 등등 많은 존재들이 인간계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신이나 마왕같이 인간계에 있기에는 그 힘이 너무 큰 존재들은 인간계에서는 그 힘이 반감되었다. 또한 창조주인 주신을 비롯한 최상급 신 네 명은 인간계로 내려올 수조차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차원계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팔란 왕국은 작은 시골 도시가 사라진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래곤이 작은 마을 하나만 부수고 그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이제 팔레인이라는 지명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대지가 되어버린 팔레인에는 혹 드래곤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요 근래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어두운 밤.

하늘 위에 뜬 두 개의 달이 두 개의 눈동자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터벅!

팔레인이 있던 곳으로 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황량한 대지가 되었지만 팔레인의 입구를 알리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반쯤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나무가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였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쓸고 간 팔레인 마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것은 매우 젊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 사내는 긴 흑발에 흔치 않은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마족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가 마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의 그림자가 나무를 지나 입구에 드리워졌다.

“다녀왔어... 레이나.......”

남자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나라는 이름을 너무도 슬프게 부르는 이는 시엔이었다. 이제는 혼돈의 정령왕인 다크로얀이었지만.

터벅터벅.......

‘여기서 큰 발짝으로 백 보.’

시엔... 아니, 로얀은 마음속으로 한 발, 한 발 숫자를 세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170 정도의 작은 키가 190에 육박했고, 원래 은발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흑색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게다가 훤히 뚫려 있었던 눈에는 검은색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가 있었다.

“백.......”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백 보, 그리고 오른쪽으로 일곱 발짝... 레이나가 살고 있었던 처크 할아버지의 대장간이 있던 위치였다.

역시나 대장간이 있던 곳은 너무도 황량하기만 했다. 짓궂은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 대지 위에 앉아 있던 흙먼지를 내쫓았다.

“레이나... 오빠가 돌아왔어. 동생 얼굴도 그릴 줄 모르는 나쁜 오빠가 돌아왔어.”

휘오오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숨막히는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리게 만드는 목소리로 먼저 간 동생을 부르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그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로얀은 허리를 숙여 바닥의 흙을 한 줌 쥐었다.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펴자 손에 있던 흙먼지가 바람에 휘날려 사라져 갔다.

“.......”

흙먼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십자가 두 개와 기다란 나무작대기 하나가 바닥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터벅터벅.......

로얀은 뭔가에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세 개의 흙더미에 각각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한 군데에는 그저 작대기 하나만 꽂혀 있었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무덤임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세 개의 무덤 앞에는 비석처럼 보이는 나무판자가 바닥에 꽂혀 있었다.

나의 절친한 친구 시엔과 그의 가족이 여기 잠들다.

그의 친구 얀이.

추신:넌 신을 싫어했으니까 작대기 하나로 십자가를 대신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얀... 단도술의 귀재이자 은빛 여우 얀이라는 이름으로 용병 세계에서 유명한 그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레이나의 편지를 읽어준 사람이었다. 얌체같이 읽어줄 때마다 얼마간의 돈을 요구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털썩!

로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대지를 두드렸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슬픔 때문인지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그는 손을 들어 세 개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을 쓰다듬었다.

자신은 겉으로는 얀을 친구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얀은 언제나 웃으면서 그를 친구라고 불렀다. 물론 그도 얀을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했다. 얀은 정말 시원시원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비석을 쓰다듬던 그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널 믿어도 될까......?”

그는 두려웠다. 얀도 만약 자신을 속인,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로얀의 중얼거림에 하늘이 화답이라도 하는 듯 어느새 밤이 지나고 타오르는 태양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얀은 떠오르는 그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가득 태양이 담겼다. 드래곤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존재라면 몰라도 평범한 생명체들은 태양을 정면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얀의 육체는 전대 다크로얀의 힘을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눈동자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감각은 극도로 발달했고, 이전에는 기억할 수 없었던 다섯 살 이전의 기억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로얀은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르륵!

태양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것일까?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얼굴 선을 타고 흘러 내렸다.

로얀은 떨리는 손을 그 물줄기에 가져다 댔다. 흙을 만지느라 메말랐던 손바닥이 물줄기가 타고 들어오자 환하게 빛났다.

“이게 눈물인가?”

그가 말을 하는 순간 태양은 원래의 둥근 모습을 다 보이려 하고 있었다.

“레이나... 오빠도 이제 해를 볼 수 있어. 오빠도 이제 투명한 눈물을 볼 수 있어.”

주르륵!

“하지만 오늘만 너를 위해 눈물 흘릴게. 너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을 죽일 때까지만이니까.......”

솟아오른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고개도 하늘로 향했고, 그의 외침도 하늘을 뚫을 듯 허공을 갈랐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황량한 마을 안에서 그의 영혼은 괴로워했다.

“큭, 으아아아아......!”

* * *

[너는 다크로얀의 이름을 받았으나 정령왕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너의 힘을 나누어 묶어두었고 너에게 네 개의 목숨을 주었다. 목숨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봉인이 풀릴 것이고 너는 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봉인이 풀리는 순간 너는 진정한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될 것이다.]

로얀은 팔레인을 떠나 말을 타고 3일을 꼬박 달려야 도달하는 도시인 그란티로 향하고 있었다. 무한한 수명을 얻은 그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도 드래곤이기에 단명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다시 살아나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량하게 변한 팔레인을 보는 순간 레이나의 억울한 죽음이 가슴 가득 차 올랐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또 한 번 레이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그란티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변화된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과 힘을 모두 물려받은 로얀은 그 외에도 전대 다크로얀이 미처 말하지 못한 정보들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이것은 로얀이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할 때마다 알아서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정말 신기한 기능이었다. 단점이라면 한 번 들었던 것은 똑같은 의문을 가져도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로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 살 하나 없는 새하얀 손... 손이 변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훨씬 유약해진 듯했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과거 용병일 때의 실력이 상급 검사였던 데 비해 너무도 강해져 있었다.

로얀이 느끼기에 지금 자신의 실력은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중급의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와 그냥 검사와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장 구분되는 것이 소드 마스터는 검날에 기를 덧씌우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인한 육체는 바디 체인지라는 것을 겪게 되면서 얻게 된다. 바디 체인지란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뼈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을 말했다. 이 육체는 웬만한 독도 통하지 않았고 피부도 질긴 가죽 같은 단단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란티로 향하는 숲길을 걸으며 로얀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소드 마스터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바디 체인지를 겪었다는 증거가 너무도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옷은 바디 체인지를 겪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바디 체인지를 겪으면 입고 있던 옷이 엄청난 열기에 모두 재로 변하기 때문이다.

정말 보물 같은 옷이 아니라면 분명 재가 되었어야 했으나 그의 옷은 멀쩡했다. 참고로 그의 옷은 가죽을 이어 만든 흔하디흔한 여행복이었다. 가죽으로 기워 만든 싸구려 하드레더에 가죽 신발... 그 어딜 봐도 신기한 마법무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또한 처크 할아버지가 주었던 롱 소드 두 자루도 그대로 허리에 매여 있었다. 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깨끗이 손질했기에 아직도 광택이 났다.

검은 쇠로 만들었으니 재가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옷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옷이 타지 않은 이유를 머릿속으로 생각해 봐도 전대 다크로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 궁리를 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전대의 다크로얀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 힘이 봉인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에 네 번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죽을 때마다 강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던 로얀은 그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전대 다크로얀의 말 때문이었다.

[한 번의 목숨을 잃을 때마다 보다 강한 힘을 얻겠지만, 너는 그 대신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할 것이다. 또한 네 번의 목숨을 다하면 너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힘을 묶어서 봉인해 둔 것은 나와 같은 절차를 밟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힘을 천천히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네 번째 죽음을 겪은 뒤에 찾아오는 시련을 이기지 못한다면 너는 나와 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 네오스라는 차원계는 사라질 것이다.]

로얀은 고개를 저으며 처음 자신이 했던 생각을 지웠다. 만약에 레이나에 관한 기억을 잃는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로얀은 전대 다크로얀이 말한, 차원계를 붕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전대 다크로얀의 지식과 기억을 종합해 생각해 보았다. 한데 그러고 나서 보니 전대 다크로얀이 행한 죄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한 차원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없앴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문득 어떤 두려움이 일었다. 도대체 다크로얀이라는 정령왕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타탓!

이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대충 정리된 그는 힘차게 발을 굴렸다. 그의 발이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달리는 말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로얀이 있는 가을의 대륙은 몬스터가 잘 출현하지 않는 대륙이었기에 그의 발길을 잡는 것은 없었다. 빠르게 나아가는 그의 신형 주변으로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비껴 지나갔다.

* * *

로얀이 도착한 그란티는 도시라는 명칭이 붙은 마을답게 팔레인과는 달리 거대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로얀은 성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서 검문을 하는 경비병에게 용병패를 보여주고 무사히 통과한 로얀은 우선 옷가게로 향했다.

5실버가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칸 대륙에서의 화폐 단위는 100코퍼에 1실버이고, 100실버에 1골드, 100골드에 1레보였다. 1실버면 4인 가족의 평민 한 가구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가 제일 처음 의류점으로 간 것은 바디 체인지를 하면서 키가 커지고 덩치도 불었기에 원래 입고 있던 옷이 꽉 끼어서였다.

그는 간편한 여행용 옷을 몇 벌 사고는 의류점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여관을 찾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다 ‘풀잎’이라는 여관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로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육체는 피곤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피곤했기에 잠이라는 이름의 휴식이 필요했다.

다음날, 로얀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용병일 때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렇게도 했지만 그는 오늘 갈 곳이 있었다. 바로 용병길드였다.

마법사 길드도 컸지만 역시 가장 거대한 조직은 용병길드였다. 용병길드는 어느 나라를 가도 있었고, 그들은 서로 간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용병길드에는 용병왕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그는 칸 대륙의 세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칸 대륙에 있는 검사들을 대충 종합해 보면 소드 마스터가 백 명이었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세 명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얼마나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세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란티에 말뚝박고 운영되어 온 용병길드의 두꺼운 나무문이 열리며, 거대한 나무에 매미가 붙은 듯 초라해 보이는 작은 종이 가늘게 떨렸다.

딸랑!

“와하하하......!”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하하......!”

용병길드 안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손에는 거품을 가득 문 맥주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병들로 일거리가 날 때까지 이곳에 눌러 붙어 있는 존재들이었다.

뚜벅뚜벅.......

나무 바닥을 울리며 로얀은 이곳 용병 길드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용병들은 그런 그의 얼굴만 힐끗 쳐다보곤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호오, 못 보던 얼굴이구먼. 용병일을 하려고 왔는가?”

그란티의 용병 길드장을 맡고 있는 마크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드워프 못지 않은 수염을 가지고 있는, 체구가 큰 사람이었다.

마크도 과거 용병생활을 했고, 십 년 전 용병길드의 길드장을 맡은 이후 수많은 용병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그의 눈은 정확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로얀이 이미 오랫동안 용병생활을 해왔다는 건 알아보지 못했다. 로얀의 손에 굳은살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법사라고 보자니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어 그런 것도 아닌 듯했기에 로얀이 용병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깊이 잠겨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로얀은 열세 살 때 팔레인에 왔던 상인을 따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크를 만나 그는 용병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용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작은 사건을 계기로 그는 마크에 의해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그가 처음으로 검을 휘두른 대상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었다.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전쟁터에서 만난 얀과 함께 몬스터를 잡으며 용병일을 했다.

물론 용병길드에서 의뢰를 받는 것은 모두 얀의 몫이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로얀의 성격 탓이었다. 그때 그들의 파티에는 이리아도 함께였다.

어쨌거나 어렸을 적에 단 한 번 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로얀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에 마크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로얀은 복수의 대상이 드래곤인 만큼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은 사실 별거 없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폭주해 버렸기에 미친 듯이 싸움만 했던 것이다.

“용병왕은 드래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뭐......?”

전쟁터에서만 살았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던 로얀은 마크를 향해 그렇게 진지하게 물었고, 그 단 한 마디에 소란스럽던 용병길드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갑자기 사일런트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게다가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용병길드는 그만 발칵 뒤집혀졌다.

“큭큭, 푸하하하......!”

“푸하하하! 크크.......”

마크도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리 용병왕이라고 해도 어린 해츨링을 잡을 수 있을 정도네. 성룡과는 동수를 이루거나 죽겠지. 물론 동수를 이룰 확률은 희박하지. 대부분 죽는다고 봐야 돼.”

“드래곤... 역시 강한 건가.”

로얀은 여전히 표정의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마크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용병왕부터 시작해야겠군.”

그는 지금 상태에서 수련을 쌓아 힘을 기를 작정이었다. 목표를 정해 점점 힘을 키워갈 생각인 것이다. 그의 처음 목표는 용병왕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은 용병왕이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지 결코 용병왕이라는 칭호가 탐이 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길드 내에 있는 용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로얀의 중얼거림을 들은 용병들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쾅......!

“이 빌어먹을 자식이! 용병을 뭘로 보는 거야!”

용병 중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얀의 말은 용병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모두 용병왕을 동경했고, 용병왕은 그들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웬 젊은 녀석이 모욕하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얀은 그런 그들의 태도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용병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인상 좋게 웃던 마크도 로얀의 말에 기분이 상해 인상을 구기며 용병길드 벽에 붙어 있던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의 윗부분에 ‘붉은 산적 퇴치’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A급 의뢰지. 혼자 완수한다면 용병왕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지. 됐지? 어서 꺼져.”

마크의 말에 일어났던 용병들도 로얀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두목의 목을 따오면 되는 건가?”

“그, 그렇지.”

갑자기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 마크는 말을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순간 로얀의 몸이 거대해 보였던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용병길드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다른 용병들은 좋은 안주거리가 생겨 즐겁게 웃으며 술잔을 나누었지만 단 한 사람, 마크만은 굳은 얼굴로 로얀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녀석이 진짜 산적 두목의 머리를 들고 삐걱이는 문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멍하게 있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로얀의 얼굴을 지웠다.

용병길드를 나선 로얀의 머릿속에는 종이에서 보았던 한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도끼 레드’라는 이름의 남자의 얼굴이.......

* * *

사박사박.......

가을의 대륙이라는 이름답게 붉은 낙엽이 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흡사 낙엽의 비가 내린 것만 같았다. 낙엽의 비가 고여 흘러내리는 강... 로얀은 그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산적들의 소굴이 있는 붉은 산은 가을의 대륙을 대표하는 나무인 단풍나무만이 자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산의 이름을 따 산적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정한 듯했다.

산적에 대한 정보는 돈이 드는 정보길드보다는 역시 왕국의 병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란티의 용병길드에 있는 의뢰들은 대부분이 마을 근처에서 일어나는 것일 게다. 그런고로 산적들로 인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란티를 지키는 경비대 병사들이었다.

한 경비병에게 붉은 산적들에 대해 묻자 그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온갖 불평과 함께 산적들에 대한 정보를 쏟아놓았다.

붉은 산은 그란티에서 서쪽으로 한참 가면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둥근 산으로 하늘이 맑게 갠 날에는 그란티에서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한데 그곳은 정말 좋은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붉은 산만의 독특한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국경과는 거리가 멀었고, 발목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는 단풍 때문인지 몬스터도 살지 않았다.

붉은 산에 성을 세우면 적이 침입했을 때 상당히 든든할 거라는 걸 그란티의 영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온한 이곳에 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거니와 성을 짓는 데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붉은 산을 붉은 산적들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붉은 산적들의 두목은 붉은 도끼 레드라는 남자였다. 그는 매우 뚱뚱한 체격에 거대한 체구를 자랑했고, 이름 앞에 붙은 명호답게 도끼를 매우 잘 썼다. 배틀 액스라는 양날의 거대한 도끼를 쓰는 그는 액스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그에 근접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강한 힘과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 산적들은 붉은 도끼 레드를 중심으로 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을 약탈했는데, 간혹 도시인 그란티에서 나오는 상인들을 습격해 물품을 강탈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란티에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지만 산적들의 소굴에 올라가기도 전에 번번이 병사들만 잃을 뿐이었다.

그란티도 변방에 위치한 도시인지라 병사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발목까지 찬 단풍에 발이 묶여 있을 때 위에서 화살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져 병사들을 패퇴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매번 당하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 그란티의 영주는 결국 용병길드에 의뢰를 청한 것이다.

“저기인가?”

산 중턱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로 된 성벽을 본 로얀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곳이 붉은 산적들의 소굴인 듯했다.

사박사박.......

로얀은 멀리 보이는 산적들의 소굴을 보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 * *

붉은 산적들은 지리적 요건을 좀더 많이 이용하기 위해 단풍과 같은 색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붉은색으로 염색했고 옷도 붉은 색상을 입었다. 덕분에 그들의 몸에서 원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동자밖에 없었다.

붉은 산 중턱에 위치한 산적 소굴에는 높은 망루가 하나 있었다. 입구 쪽에 위치한 이 망루에는 지금 세 명의 산적이 둘러앉아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망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적들의 집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점심 준비가 한창인 것이다.

주사위를 든 사내가 두 개의 주사위를 손 안에서 흔들다 잽싸게 말아 쥐었다.

“홀!”

“짝!”

다른 두 사람이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치자 주사위를 든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펼쳤다.

“홀이다.”

“하하하! 어서 내놔!”

“크흐흑, 젠장!”

짝이라 외쳤던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동전을 내던지듯 떨구었다. 그는 오늘 일진이 안 좋다고 생각하며 망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의 눈썹이 꺾어졌다.

“왜?”

“무슨 일이야?”

여전히 바닥에 앉아 주사위 도박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물음에 그는 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오고 있어.”

“뭐?”

“에이! 돈 잃었다고 무슨 수작 부리냐?”

“아냐! 진짜라고!”

장난으로 받아넘기던 두 산적은 동료의 격한 반응에 몸을 일으켜 망루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단풍의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누구지?”

“영주 영감이 용병길드에 의뢰했다던데, 용병이 아닐까?”

“에라, 이 멍청아! 용병 혼자 어떻게 오냐?”

하긴 그의 말도 맞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용병이라도 산적들을 처리하려면 동료가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붉은 산적들은 소규모의 어중이떠중이 산적이 아니었다. 혼자서 쳐들어오는 것은 죽여 달라고 오는 것과 같았다.

“그럼 뭔데?”

“여행자 같은데?”

한 남자가 여행자라고 칭하자 다른 두 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행자? 흐흐흐.......”

이곳으로 들어오는 여행자는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호박이었다. 세 명의 산적들은 호박이 끝까지 굴러 들어오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여행자들은 그들에게는 특별 보너스요 짭짤한 용돈이었던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난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요 근래에는 붉은 산적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드문지라 산적들은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박사박.......

흑발의 사내는 단풍을 헤치고 망루 바로 앞에까지 도달했다. 산적 소굴의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흐흐흐! 오랜만에 돈 좀 만져보자. 어서 문 열어!”

그의 말에 다른 산적 두 명이 문을 잠그고 있는 나무를 들어 올렸다.

쿵......!

문 주위는 항상 그들이 낙엽을 번갈아 가면서 쓸었기에 문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열렸다.

* * *

단풍의 강을 거슬러 올라 산적들의 소굴 앞에 도착한 로얀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소굴 안쪽에서 세 명의 산적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모두 붉은 머리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척 봐도 그들이 산적인 걸 알 수 있게 생겨 먹었다.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는 그들은 로얀의 주위를 빙 둘러싼 후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세 명 중 정면에서 검을 겨누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말했다. 얼굴은 얼마 전 그들이 가지고 놀던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하게 생겼는데, 인상이 무척이나 더러운 남자였다.

“흐흐흐... 남자 몸 더듬는 건 기분 더러우니깐 좋은 말 할 때 가진 것 전부 내려놔.”

“말로만 듣던 오크인가?”

“뭐, 뭐야!”

“킥!”

로얀의 말에 네모 얼굴의 사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다른 두 명의 산적은 키득거리며 웃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세 산적의 반응에도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붉은 도끼 레드라는 녀석의 목을 가지러 왔다.”

“.......”

순간 키득거리던 두 산적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던 산적도 굳어버렸다.

석화마법에라도 걸렸던 것 같던 그들은 순식간에 마법이 풀린 듯 인상을 버럭 쓰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젠장! 오늘 아무래도 정신 나간 놈이 왔나 보다!”

“키득! 그냥 죽이자.”

“내가 뒤질게.”

네모 얼굴의 사내가 검을 들고 로얀을 향해 걸어왔다. 그것을 보고 로얀은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 모습에 네모 얼굴의 사내는 그가 모든 것을 체념했기에 그런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크크크... 죽기 전에는 꽤 사내답구먼.”

로얀의 몸을 뒤지던 산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섬광이 번뜩였다.

스걱!

촤아아아......!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선홍색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와 함께 어깨에서부터 잘려 아직도 검을 쥐고 있는 산적의 팔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런 산적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로얀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끄아아악......!”

“이런! 목을 베려고 했는데, 어쩌나? 눈으로 보는 것에 아직 적응이 안 돼서 말이야.”

“어, 어떻게......?”

“죽어라!”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뒹구는 동료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은 두 산적이 검을 힘껏 움켜쥐고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걱, 스걱!

촤아아아......!

후두둑!

핏방울이 비가 되어 낙엽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로얀은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을 더 뽑아 날카롭게 빛나는 롱 소드를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감겨 있는 그의 눈 때문에 그의 심정을 알 순 없었지만 그는 너무도 침착해 보였다.

사박사박.......

천천히 눈을 뜬 로얀은 붉은 산적들의 소굴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운 좋게 팔 하나 잘린 것으로 그친 네모난 얼굴의 사내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삐이이......!

그는 원독에 사무친 눈으로 로얀의 등을 쏘아보았다.

로얀은 등 뒤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사박......!

그의 귓가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전쟁터를 누빈 맹인 검사였다. 그랬기에 그는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크로얀에 의해 생긴 눈은 시력이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했고, 감각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졌다.

로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에겐 이제 시력이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눈이 있었지만 싸움에서는 아직 빛이 없는 것이 편했다.

그는 롱 소드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다가올 바람에 대비했다.

“침입자다!”

“죽여라!”

“와아아아......!”

족히 백 명은 될 듯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서부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는 긴장감 어린 그들의 땀 냄새까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죽는다!’

이것이 그가 맹인 검사로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사바박......!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많아봐야 다섯 명!’

스걱!

피핏!

“끄아악......!”

누군가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날카로운 로얀의 롱 소드가 손목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 뒤로도 롱 소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끊임없이 빛을 뿌렸다.

스거걱!

“끄아악......!”

후두둑!

산적들이 뿌리는 피는 비가 되어 단풍을 두들겼다. 붉은 빗물이 나뭇잎에 모이기도 했고 천천히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리기도 했다. 오늘따라 단풍이 더욱 붉게 보였다.

‘오른쪽 밑에서 위로 일직선!’

스걱!

촤아아......!

긴 검을 하늘 높이 들어 내리치려던 산적이 갑자기 턱밑에서 솟아오른 검날에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반으로 쪼개진 산적의 머리통, 그 단면이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꺼꺽......!”

얼굴이 쪼개진 산적은 두 개가 된 입술을 오물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내뱉으며 쓰러졌다.

사박!

사바박......!

‘겁먹은 건가?’

산적들의 공격이 없었다. 그들은 로얀이 움직일 때마다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로얀은 싸우면서 자신의 몸이 상당히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 중급의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뒈지고 싶으냐? 물러나는 놈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그 굵직한 목소리가 붉은 도끼 레드라는 놈의 것이라는 걸 직감한 로얀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의 주위는 온통 붉은색이었다.

“너의 목을 가지러 왔다.”

“크하하하! 별 미친놈을 다 보는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죽여라!”

“와아아......!”

‘대장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사기가 충전된다.’

우웅......!

스거걱!

촤아아......!

로얀은 눈을 뜬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손끝에서 족히 세 명의 육체는 지나간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모두 허리를 갈라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검에서 푸른색 오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소, 소드 마스터다!”

“으아아아!”

푸른색 오러를 알아본 산적들은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끄응......!”

붉은 도끼 레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침음성을 흘렸다. 하나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아무리 날아다니는 소드 마스터라 해도 자신의 부하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아직도 백 명이 넘었다.

“상대는 하나다! 모두 공격해라!”

“하, 하지만 상대는.......”

겁에 질린 산적들의 눈동자를 보던 로얀은 붉은 도끼 레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목을 내놔라.”

“크윽, 이런 미친놈! 우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잊었느냐!”

웅성웅성......!

그가 말하는 비장의 무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산적들이 일순 동요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 속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와아아아......!”

다시 사기가 재충전된 그들은 일제히 로얀에게 달려들었다. 흡사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모습이었다.

“어리석군.”

후웅!

스거걱!

촤아아......!

스거걱!

쏴아아......!

후두둑!

피가 하늘을 물들이고 잘린 수십 개의 사지가 춤췄다. 그리고 산적들과 붉은 도끼 레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어떻게 양손에서 오러를......!”

로얀은 양손에 들린 롱 소드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러를 두 개의 무기에 나누어 담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레드의 중얼거림에도 로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의 목을 원한다.”

그 말에 수하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자 레드의 안색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그는 급히 자신의 품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마법 스크롤이었다.

“흐흐흐... 쓰기엔 아깝지만, 너도 이제 끝이다!”

찌이익!

“파이어 볼!”

그가 스크롤을 쓴 것으로 보아 아무나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상급의 마법 스크롤임을 알 수 있었다.

스크롤이 찢어짐과 동시에 3서클에 해당하는 파이어 볼이 발사되었다. 사람 머리보다 큰 커다란 화염구가 생성되자마자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로얀은 처음 보는 마법에 잠시 눈이 흔들렸으나 이내 이전과 같이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양손의 검을 엑스 자 형태로 만들어 파이어 볼을 막기 위해 들어 올렸다.

쾅......!

츠츠측!

로얀은 낙엽을 으깨며 멀찍이 밀려났다. 그리고 파이어 볼이 그의 오러와 부딪치며 소멸한 직후,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거대한 배틀 액스를 든 붉은 도끼 레드였다.

레드는 로얀이 파이어 볼을 막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작전은 파이어 볼을 소멸시킨 직후 시야가 가려진 로얀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팟!

부우욱!

덩치에 걸맞게 레드의 몸에서는 좀더 색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가랑이에서부터 머리까지 정확히 반쪽으로 허공에서 갈라져 버렸다.

“나에겐 여러 개의 눈이 있다.”

로얀이 바닥에 내려서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윽.

로얀은 레드의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사사삭!

그들은 두려움에 빠져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었다. 손에 들려 있던 무기는 바닥을 구른 지 오래였다.

로얀은 붉게 물든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파이어 볼을 막을 때 붉은 불빛이 마치 눈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에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다크로얀의 눈을 가진 너는 어떠한 것도 따라할 수 있다. 단, 너의 봉인이 얼마만큼 풀렸느냐에 따라서 따라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으며, 한번 흡수한 기술은 일단 쓰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봐야 사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기술을 훔쳐 몸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원하는 때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일회용이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당히 유용한 기술임에는 틀림없었다.

“기술을 훔친다.......”

그의 머릿속에 파이어 볼에 관한 마법적 수식이 원래부터 그가 익히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로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화르륵!

“커컥!”

“마, 마검사!”

그의 몸 주위로 커다란 화염의 구가 생겨났다. 그러자 산적들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지만 로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르륵, 화르륵!

여러 개의 화염구가 그의 몸 주위에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리인가?”

화염의 구는 다섯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스윽.

로얀은 화염의 구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산적들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화르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 개의 화염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으, 으아아아!”

콰카카캉!

“으아아아......!”

타오르는 불길에 살아남은 산적들은 이지를 상실했는지, 광기에 휩싸인 채 로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스거걱.

촤아아......!

로얀의 검에는 인정이 없었다.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눈이 없었다.

그날 붉은 산은 정말 붉게 타올랐다. 때마침 가을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붉은 산이 모조리 불탔을 것이다.

시원한 가을비를 맞으며 붉은 산적의 소굴 속에 로얀은 홀로 서 있었다.

쏴아아......!

그는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툭! 툭!

그의 손아귀에 있던 롱 소드 두 자루가 힘없이 낙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왜지......?”

로얀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산적들을 죽인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인간이 아닌 정령왕이 되어버린 것일까? 이젠 정말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말인가?”

이상한 감정과 함께 회의감이 들었다.

쏴아아아......!

“레이나... 난 이제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거야.......”

그때 처음으로 로얀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 * *

쏴아아......!

그란티의 높은 하늘에서 빗물이 세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가을의 냄새를 머금은 빗방울이었다.

이 빗속에서도 그란티의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정지!”

“.......”

경비병의 말에 비 때문에 검은 머리가 착 달라붙은 로얀이 멈추어 섰다. 이미 용병패를 보여줬는데도 가지 못하게 하다니... 그는 경비병을 응시했다. 비 때문인지 로얀의 눈빛은 섬뜩했다.

“그, 그건 뭐지?”

경비병의 말속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로얀은 그가 가리킨 쪽으로 눈을 옮겼다.

똑똑......!

그가 들고 있는 주머니에서 붉은 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는 원래 색이 그런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로얀은 주머니에서 시선을 떼고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붉은 도끼 레드의 목.”

“.......”

로얀의 말을 들은 경비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가 멍한 표정을 띄운 채 어색한 걸음으로 길을 열어주자 로얀은 빗속을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가 용병길드에게 의뢰했고, 레드의 수급을 가져온 사람은 용병이었기에 길드장에게 수급을 넘겨줘야 했다. 그러면 길드장이 수급을 받아 영주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로얀이 그란티로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히 용병길드였다.

딸랑!

빗소리 때문에 애처롭게 들리는 방울소리를 뒤로하고 로얀이 용병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용병들이 자리를 꿰차고 술잔을 들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똑, 또옥!

그들의 시선은 로얀이 쥐고 있는 주머니 쪽으로 가 있었다.

뚜벅, 뚜벅......!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마크도 펜을 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곳에 조각 미술관이라도 차린 걸까?

쿵!

“붉은 도끼 레드의 목이오.”

마크의 굳은 몸이 로얀의 그 한마디에 풀렸다. 용병은 눈칫밥을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용병들도 그제야 몸이 풀린 듯 로얀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 그런가? 저, 정말 해냈군.”

“.......”

로얀은 마크가 서류를 정리하는 선반 위에 레드의 수급을 올려놓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크는 정말 이 남자가 레드의 수급을 가지고 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고 보니 로얀이라는 이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외모의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는 블랙 드래곤과 마족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마족이 이런 식으로 중간계를 돌아다닐 리는 없을 테고.......

“호, 혹시... 드래곤... 헙!”

마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다 입을 급히 두 손으로 막았다.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드래곤의 진짜 정체를 발설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흠칫!

온몸을 떨던 마크는 자신의 목 언저리에 닿은 섬뜩한 검날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그는 로얀이 드래곤이라 단정지었다. 그리고 자신은 금기를 어겼으니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로얀의 입이 열리고 너무도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그 추악한 도마뱀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꺼꺽!”

마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살기 때문이었다. 살기의 소용돌이가 마치 심장을 붙잡고 영혼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로얀이 검을 거두자 그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다시 물었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그, 그럼 인간이십니까?”

“.......”

마크의 떨리는 목소리에 로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인간이던가?’

아마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이제 정령왕인 것이다.

로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마크는 이번에는 다른 하나의 경우인 그가 마족이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이제 용병왕에 가까워진 건가?”

그는 마크가 자신을 드래곤이라 생각한 뒤부터 반말을 쓰고 있었다. 그 말 하나가 그의 신경을 얼마나 건드렸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물어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마크는 로얀을 중간계를 여행하는 특이한 마족이라 단정지었다. 그러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크는 그것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용병왕이 되시려면 엄청난 적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누구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 말에 로얀은 의아해 하며 마크를 바라보았다.

“인간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곳에서 살아남으십시오.”

“그것이 어째서 용병왕에 가까워지는 길이라는 건가?”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용병왕이지요. 도중에 관두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이 의뢰를 꼭 한번 해보십시오.”

그는 말과 함께 무언가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로얀에게 건넸다.

그것을 조용히 훑어 내려가던 로얀의 눈이 한곳에서 멈췄다.

엘레나 폰 크라우드! 팔란 왕국의 공주인 그녀를 해적들의 손에서 구출하라는 것이 의뢰였다.

마크는 로얀이 서류를 다 읽었을 때쯤에 입을 열었다.

“엘레나 공주님은 해적왕 라이던이 이끄는 유령해적단에 납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왜지?”

일국의 공주를 해적들이 납치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해적단이 강해도 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순 없었다.

“험험! 이곳은 처음이시군요. 가을의 대륙에는 이론 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론 제국은 가을의 대륙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죠.”

마크는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설명을 이었다.

마크의 말처럼 가을의 대륙에는 이론 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한데 이론 제국의 황제는 대륙 통일에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정복전쟁을 일으켜 주위의 작은 나라들을 모두 흡수했다. 그로 인해 이제 가을의 대륙에 남은 나라는 이론 제국과 팔론 왕국을 제외하면 힘도 없는 소국뿐이었다.

팔란 왕국을 정복하려던 이론 제국의 황제는 대륙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정벌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권위보다 앞서는 교황이 명분없는 전쟁을 당장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이다.

팔란 왕국은 이론 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큰 나라였지만 국왕이 평화주의자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론 제국의 황제는 교황으로 인해 중간에 멈춰버린 팔란 왕국의 정복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야망이 너무나 컸던 이론 제국의 황제는 명분이 될 만한 거리를 생각하던 중 팔란 왕국의 공주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해적왕 라이던에게 영토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어떤 계약을 맺었다.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엘레나 공주는 납치되던 그날도 바다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많은 기사들이 공주를 호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적들의 수가 많았던 것도 그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해적왕 라이던이 소드 마스터였기 때문에 공주의 호위기사들로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론 제국과 계약을 맺었다고 짐작되는 유령해적단이 어째서 가장 쉬운 방법인 공주를 죽이는 것을 택하지 않고 납치하는 것을 택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엘레나 공주가 해적들에게 납치당하자 팔란 왕국의 국왕은 분노했지만 이론 제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건 이론 제국이 바라던 것을 들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론 제국은 팔란 왕국이 먼저 공격해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 보복의 명분으로 왕국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팔란 왕국의 국왕은 즉시 해적들이 있는 곳으로 병사들을 파병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싸움에 A급 용병 세 명과 B급 용병 열 명을 고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한 용병 중 B급 용병 한 자리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말인즉 의뢰를 맡으려면 B급 용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A급 용병과 B급 용병은 돈 문제를 떠나 사람을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로얀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용병 등급 같은 건 상관없다.”

“그, 그럼......?”

“의뢰를 받아들이겠다.”

로얀은 공주를 구출하는 것에는 관심없었다. 그는 자신과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해적왕 라이던과 붙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마크는 로얀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B급 용병패를 건넸다. 안 그래도 갈 사람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용병패와 함께 돈이 든 주머니도 건넸다.

“산적 의뢰의 보상금입니다.”

로얀은 용병패를 품속에 넣으며 돈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반짝이는 금색 동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5골드... A급 의뢰치곤 상당히 낮은 금액이었다. 그란티의 영주는 재정이 넉넉지 않았고 산적을 퇴치하는 의뢰였기에 금액이 적은 것이다.

로얀이 돈주머니를 품속에 넣으려 할 때 마크가 펜을 들며 그에게 물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용병패를 주었으니 패의 주인에 대한 신상을 적어놔야 했다. 신상이라고 해봐야 이름과 주 전공밖에 적지 않았지만.

로얀은 그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크로얀.”

마크는 ‘다크로얀’이라는 이름 앞에 ‘흑안’이라는 글자를 덧붙였고, 그의 허리에 있는 검 두 자루를 흘깃 보고는 ‘검사’라고 적었다.

“5골드군.”

로얀은 이번 의뢰의 보수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왕국에서 온 병사들도 있다는데 용병의 보수가 너무 높아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의 말에 마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것이... 단풍기사단 5백 명만이 갑니다.”

“적의 수는?”

“대, 대략 2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2천 대 5백, 이미 승부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게다가 해적과 해상전이라니, 정말 무모한 싸움이었다.

“험험! 단풍기사단은 모두가 중급 검사 이상입니다. 대부분이 상급이죠.”

“적군.”

아무리 그래도 수가 너무 적었다. 국왕의 단풍기사단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컸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마크는 로얀이 혹시나 의뢰를 거절할까 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팔란 왕국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죠. 그 중 한 사람이 단풍기사단의 단장입니다. 또한 이번 싸움에 궁정 대마법사께서도 오시죠. 아! 해적들에게서 빼앗은 보물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보상에 해당되죠.”

로얀은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갈 생각이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로얀의 이 한마디에 마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일이 술술 잘 풀렸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눈앞의 사내가 마족일 거라는 생각은 날아가고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