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엘레나와의 만남
엘레나와의 만남
흑섬의 돌산에 여신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햇빛을 받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그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폰 크라우드. 팔란 왕국의 공주이자 로얀이 구출해야 하는 의뢰의 대상이었다.
엘레나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마른 편인 가느다란 체구에 신이 정성을 들여 조심스럽게 만든 듯한 이목구비... 가을의 대륙에서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160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눈을 뿌려놓은 듯한 새하얀 피부는 그녀가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랫동안 동굴 안에 갇혀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새하얀 치마는 더럽혀져 있었지만 여타 귀족가의 아가씨와는 달리 그녀는 동굴을 나서며 맨 먼저 옷을 털거나 외모를 가다듬지 않았다. 그녀가 맨 처음 밖으로 나와 한 일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메리슨이 있었고 레토가 앞장서서 호위하고 있었다. 세리나와 레인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단풍기사단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엘레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녀는 동굴을 빠져나오기 전 메리슨과 레토가 되도록 앞을 보지 말라고 부탁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에 시체가 뒤엉켜 있었고 피는 강을 이루고 있었다.
엘레나의 발끝에도 피가 살짝 닿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투정부리는 것은 여기까지 자신을 구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레나 공주는 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무척이나 고운 소녀였다. 올해 18살이 되는 그녀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뚜벅뚜벅.......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자 메리슨과 레토는 제발 그가 공주 앞에 나서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모습이 너무도 섬뜩했기 때문이다.
검은 흑발을 길게 드리운 그는 다크로얀이었다. 전신에 피칠을 한 그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전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로얀은 엘레나 공주 앞으로 걸어갔다.
“일 끝났으면 이제 가지.”
그는 너무도 피곤해 잠이 몰려왔다. 때문에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한데 그렇게 차갑게 내뱉고 뒤돌아 가는 로얀을 엘레나가 작은 입술을 열어 붙잡았다.
“감사해요. 로얀이라고 했던가요?”
흠칫.
함선을 향해 걸어가려던 로얀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귓가를 간질인 부드럽고도 맑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소녀의 목소리......!
엘레나는 메리슨에게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천 명의 해적들 사이로 혼자 뛰어든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앞의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 감사의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스윽.
덥석!
로얀은 뭔가에 홀린 듯 멍한 눈을 한 채 다시 뒤돌아 걸어오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와락!
그리고 그가 그 손을 끌어당기자 가냘픈 소녀인 엘레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그의 품에 안겼고, 그 갑작스런 사태에 주위의 기사들과 사람들 모두 굳어버렸다.
로얀은 자신의 품에 안긴 엘레나의 긴 머리카락을 오른손을 들어 쓰다듬었다. 검의 파편이 다닥다닥 박힌 왼팔은 축 늘어진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엘레나가 밝고 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공주로서 이런 무례한 행동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힘껏 로얀을 밀치려던 그녀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저미는 듯한 목소리에 그만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
말 한마디에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슬프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엘레나는 로얀의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슬픔과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파편이 박힌 채 축 늘어진 그의 왼팔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왜 그런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챙......!
“로얀 군! 당장 떨어지게!”
아무리 로얀이 이번 임무의 일등공신이라 할지라도 일국의 공주를 안은 건 죽어 마땅한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피가 엘레나 공주의 옷에도 옮겨 묻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던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듯했다.
“로얀, 그녀는 레이나가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 정지된 시간은 깨져 버렸다. 멀리서 싸늘한 표정을 지은 얀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본다고 알 수는 없었지만 부드럽고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목소리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똑같았다.
“나를 믿어. 그녀는 엘레나 폰 크라우드. 맞죠, 공주님?”
엘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얀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얀과 엘레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얀은 로얀의 부탁을 받고 몇 번 그의 마을에 가본 적이 있었다. 자유분방한 그였기에 로얀이 언제 한번 들러 동생이 잘 지내고 있는지 봐 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레이나와 엘레나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슬픔 속에 빠져 있는 친구를 어서 꺼내주기 위해 싸늘한 표정으로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허허! 자네 너무 피곤한 것 같으이. 그 상처도 어서 치료해야겠네.”
메리슨이 다가와 로얀의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그의 왼팔을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는 그의 팔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탁!
로얀은 메리슨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얀이 자신에게 이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또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레이나, 그 아이는 하늘에 있었지.......’
피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발자국으로 남긴 채 해안가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엘레나의 눈동자가 그 뒷모습을 밝혀주었다.
* * *
쏴아......!
투퉁!
파도에 떠밀려 배 밑이 돌에 부딪혔다.
작은 배 한 척이 바다에 떠 있었고 그 위에 얀이 올라타 있었다. 배 위에는 커다란 보따리도 가득 실려 있었다. 그가 해적들에게서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떠나려는 얀을 로얀이 배웅해 주고 있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왼팔 때문에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얀은 배 위에서 로얀을 보며 외쳤다.
“너 처량하게 계속 그럴래! 드래곤 목 따온다며! 어서 팔부터 치료하고 함선으로 돌아가봐.”
“넌 어디로 가지?”
“흐흐... 이 몸은 이제 여름의 대륙으로 간다. 너를 만나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결정했다. 네가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마. 기대해!”
“그늘이라... 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으이구, 그놈의 궁상은! 아무튼 여름의 대륙에서 기다리마. 나의 이름이 대륙에 퍼질 테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얀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 공주님은 결단코 레이나와 닮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고. 레이나가 훨씬 예뻤다고. 쿡쿡... 그럼 난 간다!”
얀은 배 안에 있던 두 개의 노를 양손에 들었다. 그리고 휘적휘적 노를 저어 어느 정도 바다로 나간 뒤 돛을 활짝 펼쳤다. 힘든 전투를 마친 그들을 신이 인도해 주려는지 바람은 순풍이었다.
얀이 탄 배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로얀은 해안가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
세 척의 함선은 다시 몬드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단풍기사단이 절반이나 죽었기에 함선이 세 척이나 필요하진 않았지만 비싼 함선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배를 움직일 사람이 없어 놔두고 가지만, 해적들의 배도 조만간 왕국에서 회수해 갈 것이다.
세 척의 함선에 용병을 포함한 240여 명이 나누어 타다 보니 꽤나 널찍했다.
로얀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뱃머리 근처에 있는 돛대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왼팔엔 흰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스윽.
로얀의 왼팔 위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로얀의 얼굴 앞에 누군가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져다 댄 것이다.
“앉아도 되나요?”
보랏빛 머리카락의 주인은 엘레나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로얀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그녀는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었다.
엘레나 공주는 로얀이 고개를 들긴 했지만 자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자 어색하게 웃으며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침묵이 답답했는지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해적을 천 명이나 상대하신 거예요?”
“.......”
로얀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 있을 동생과 너무도 똑같은 음성을 가진 그녀가 계속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로얀의 그런 무신경한 반응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엘레나는 이번에는 사적인 질문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저... 레이나라는 분은 연인이세요?”
“동생이다.”
처음으로 대답을 했지만 그 음성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엘레나는 로얀이 공주인 자신에게 반말을 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드디어 대답해 줬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엘레나는 밝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동생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
“동생 분이 사시는 곳은 어디예요?”
“동생은 이 세상에 없다. 더 이상 묻는다면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베겠다.”
살벌하게 말하는 로얀이었지만 엘레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엘레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동안 동생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돼요?”
로얀이 동생에 관한 이야기에만 대답을 했기에 엘레나는 또다시 그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그녀도 어째서 일개 용병인 로얀에게 이렇게 관심이 가는지 알지 못했다. 영혼의 이끌림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 사이엔 뭔가 단단한 인연의 끈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스오오.......
로얀의 전신에서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엘레나를 고려해서인지 살기는 상당히 미약했다.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흠칫!
“흑.......”
돌연 로얀의 전신을 감쌌던 살기가 허공으로 산화해 버렸다. 엘레나가 그의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녀가 떨구는 이슬을 본 순간 로얀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미, 미안하다.”
“흑.......”
로얀이 평생 몇 번밖에 하지 않은 ‘미안하다.’라는 말이 그의 입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 말에 더욱 서글프게 울었다.
“나, 나와 레이나는 팔레인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
로얀이 레이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엘레나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로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이 거짓이기라도 했던 듯 그녀는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로얀은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만 묻지. 어째서 나에게 온 거지?”
그는 어째서 공주인 엘레나가 하찮은 용병이 있는 이곳까지 직접 왔는지 묻고 있었다.
빙긋.
“당신이 너무 슬퍼 보였어요. 그런데 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헤헷, 어서 이야기해 주세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레이나와 너무 똑같은 음성을 가진 엘레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그였다. 그 와중에 오빠라는 말까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면 그 혼란은 급증할 것이다. 복수를 위해 택한 길, 누구에게도 깊은 정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엘레나가 또다시 자신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게 아닌가!
로얀은 레이나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줬다. 레이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한데 그 아이와 닮은 엘레나가 눈물을 글썽이자 로얀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마음대로 해라.”
엘레나는 다시 생글거렸고 로얀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처음 만난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 *
쏴아아아......!
끼룩끼룩......!
갈매기가 로얀과 사람들의 귀환을 반겨주며 노래를 불렀다.
함선이 줄줄이 몬드의 항구에 정박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반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몬드를 다스리는 영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배가 정박한 직후 제일 먼저 거기에서 내려왔다. 그 뒤를 따라 엘레나가 내려왔고, 뒤이어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한데 로얀의 뒤를 따라 배에서 내리는 엘레나 공주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답하기는커녕 무슨 죄를 지었는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로얀의 과거를 모두 들은 엘레나는 자신의 단순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의 아픈 기억을 들쑤셔놓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로얀 형과 공주님... 무슨 일 있었어요?”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렌이 메리슨과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허허, 글쎄다.......”
“만약 그가 공주님에게 또 한 번 무례를 범한다면 목숨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겠다.”
메리슨은 웃음으로 넘겼고 레토는 그렇게 차갑게 내뱉으며 검에 새겨져 있는 왕국의 문양을 쓰다듬었다.
덜커덩, 덜커덩.......
“와아아아......!”
휘이익!
배에 실린 반짝이는 보석은 용병들이 내렸고, 기타 여러 가지 짐들은 단풍기사들이 내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항구도시 몬드의 시민들은 휘파람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반겼다.
처음 조건대로 용병들이 해적들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나눠 가졌지만 얀이 워낙에 많이 들고 간 터라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로얀은 보석 하나 챙기지 않고 부둣가를 걸었다.
뚜벅뚜벅.......
“와아아아......!”
사람들이 로얀 앞으로 달려들며 그에게 환영의 뜻을 내비쳤지만 그의 몸에서 은은히 퍼져 나오는 살기와 번뜩이는 눈동자에 모두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타탁!
“자, 잠깐만......!”
로얀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려 하자 엘레나가 급히 달려와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녀를 에워싸려 하자 뒤따르던 레토와 단풍기사들이 달려와 급히 사람들을 막았다.
로얀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기사들 속에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수, 수도까지는 같이 가실 거죠?”
그녀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외치는 소리에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그렇게 무사히 공주 구출 의뢰를 마친 로얀은 5일 정도를 소비해 팔란 왕국의 수도인 팔란에 도착했다. 용병의 보수라든지 임무를 완료한 보고를 하려면 수도로 가야 한다는 용병길드장의 말 때문이었다.
보수는 받을 생각이 없었고, 이제 용병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보고 같은 것도 필요없었다. 하지만 그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엘레나의 마지막 말 때문에 결국 수도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 어차피 새로운 검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거대한 도시인 수도 팔란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에 엘레나는 로얀에게 죽은 동생에 대해 물은 것을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항구도시 몬드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던 이후 레토와 단풍기사단이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럴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로얀은 기사단과 멀리 떨어져 용병들과 함께 오고 있는 중이라 쉽사리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엘레나 공주는 수도 팔란에 도착할 때까지 로얀에게 사과를 하지 못했다. 아니, 사과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로얀은 도착 직후 국왕 레이언 폰 크라우드를 만났다. 그가 친히 용병들에게 작위를 하사하고 보수를 주기 위함이었다.
A급 용병인 레인은 작위는 거부한 채 돈만 받아서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렌과 세리나도 작위를 받지 않고 봄의 대륙에 있다는 빛의 숲으로 가버렸다.
빛의 숲은 엘프들이 사는 곳으로 세리나의 고향이었다. 렌은 음유시인으로서 엘프들의 삶과 그곳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렌은 로얀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꼭 놀러 오라며 손을 흔들던 렌의 모습이 로얀의 머릿속에 기억되었다.
로얀을 포함해 살아남은 B급 용병은 모두 다섯 명. 이 중 세 명이 작위를 받고 한 명은 레인처럼 돈만 받고 떠났다.
로얀은 다른 용병들보다 훨씬 높은 작위를 주겠다는 국왕 레이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많은 대신들과 기사들이 반발했지만 국왕 레이언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아무래도 아버지 레이언의 성격을 물려받은 듯했다.
로얀은 기사의 작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단 하나, 왕성의 대전에서 국왕의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주 잠시 그의 발걸음을 지연시켰을 뿐이다.
다그닥, 다그닥.......
덜그럭!
팔란의 거대한 시장거리를 걷던 로얀 옆으로 커다란 마차가 지나갔다. 로얀은 부서진 검을 대신할 무기를 사기 위해 팔란의 왕성을 나와 시장으로 직행한 것이었다.
왕에게 보수로 검을 청했다면 얼마든지 좋은 검을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갑갑한 왕성과 동생을 생각나게 하는 엘레나 곁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동안 용병생활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이번에 검을 사는 데 모두 쓸 생각이었다. 검을 살 생각을 하니 순간 해적들의 보물을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이윽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선 로얀은 검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고개를 젓고는 다른 대장간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국의 수도라서 그런지 마을은 거대했고 대장간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반나절이 지났다. 그동안 로얀이 둘러본 대장간의 수만 해도 다섯 개나 되었다. 도시가 워낙에 크다 보니 대장간을 찾는 데 걸린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 많은 대장간 중 마음에 드는 검이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그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검들뿐이었다. 이때만큼은 보수를 받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결국 어두워질 때까지 검을 구하지 못한 로얀은 오늘 하루를 묵을 여관을 찾으러 가던 중 몇 채의 큰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 낡은 대장간을 발견했다.
“여기에도 없다면.......”
이제 팔란에서는 둘러보지 않은 대장간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여기에도 마음에 드는 검이 없다면 다른 마을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로얀이 마지막으로 찾은 대장간은 다른 대장간과 마찬가지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간판이 없었고, 수도에 있는 대장간치고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작고 아담했다.
뚜벅뚜벅.......
대장간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허허! 첫 손님이구먼.”
로얀의 발걸음 소리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아무래도 대장간의 주인인 듯했다. 로얀은 그를 스윽 훑어보고는 벽에 걸려 있는 무기를 보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군.”
“허허! 드워프 처음 보나?”
모습을 보인 이는 드워프였다. 작은 키에 듬직한 체구, 겨울의 대륙에만 살며 술을 좋아하고 작은 키와 수북한 수염이 특징인 드워프라는 종족이었다. 한데 이곳 주인은 드워프 중에서도 꽤나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드워프 노인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 드워프도 아닌데......?”
“.......”
로얀에게 느껴지는 그의 기운은 보통 드워프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운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히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친숙한 기운이라면?
또 드워프가 인간의 마을에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더군다나 드워프가 하는 가게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릴 텐데 너무도 한적했다. 처음 이 드워프가 로얀을 맞이했을 때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이 가게가 오늘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검을 사러 왔습니다.”
“허... 내가 뭐라고 생각하나?”
드워프는 로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정령.”
로얀의 짤막한 대답에 드워프 노인은 일순 안면을 굳히더니 곧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자네, 정체가 도대체 뭔가?”
한눈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라면 결코 인간일 리 없었다.
“인간이 아닌 자. 검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로얀은 상대가 훨씬 연장자이기에 말을 높였다.
“허... 내 수십만 년의 세월을 살면서 자네 같은 인간은 처음이구먼. 맞네, 난 정령이지. 아, 검이라고 했나? 잠시만 기다리게.”
자신의 정체를 정령이라 밝힌 노인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안으로 들어갔다.
“땅.”
어둠 속으로 사라진 정령 노인을 보며 로얀이 작게 내뱉은 말이었다.
잠시 후 정령 노인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왔다.
쿵.......
끼이익!
“열어본 지가 오래돼서 삐걱거리는군.”
정령 노인이 상자를 열자 뽀얀 먼지와 함께 검 두 자루가 나타났다. 하나는 새하얀 검집에 담겨 있는 검이었고 하나는 칠흑 같은 빛을 뿜어대는 검집에 담겨 있는 검이었다.
로얀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검들은 로얀이 이제까지 본 검 중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의 명검으로 보였다.
“보통 검이 아니군.”
“끌끌... 바로 맞췄네. 하나는 성검 에리오네고 다른 하나는 마검 다크리온이라네.”
“성검과 마검이라.......”
성검과 마검! 성검은 천계의 신들이 만든 검을 뜻했고, 마검은 마계의 마왕들이 만든 검을 뜻했다.
무한한 세월을 산다고 할 수 있는 신과 마왕들 중에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 중 몇몇 천계의 신과 마계의 마왕은 무기나 갑옷 등 뭔가를 제작하는 취미를 가졌다. 하지만 고귀한 신이나 자존심 강한 마왕들이 망치를 두드리는 모습에 다른 신과 마왕들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보였기에 그들은 그 취미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취미 생활로 인해 한때 세상에 다섯 개의 마검과 다섯 개의 성검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역시나 오랜 세월에 걸쳐 신과 마왕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물건답게 그것들은 드래곤의 무기가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강도와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보통 드워프에게 무기를 만들라고 시키지만 그렇지 않은 드래곤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가기에 별종이라 불릴 만한 특이한 드래곤이 많았다. 드워프의 모습으로 변해 무기를 직접 제작하는 드래곤들도 그 중 하나였다.
중간계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이 만든 물건보다 뛰어난 마검과 성검이 두 개씩이나 눈앞에 있었으니 로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도 용병생활을 하면서 마검과 성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파는 건가요?”
마검과 성검의 가격을 매기자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온다. 아니,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었다.
성검 에리오네는 전설의 금속인 오르하리콘에 천사의 깃털을 첨가해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마검 다크리온 역시 전설의 금속 오르하리콘에 마왕의 뼈를 넣어 만든 검이었다.
성검과 마검은 강도만 단단할 뿐 다른 파괴력이나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설혹 신의 육체라도 벨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끌끌... 돈은 걱정 말고 골라보게. 단! 성검이든 마검이든 자신의 주인을 가린다네. 만약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팔이 타들어 갈 걸세.”
많은 사람들이 성검과 마검을 얻었으나 그것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검은 빛을 가장 많이 지닌 사람을 주인으로 택했고, 마검은 어둠을 가장 많이 지닌 존재를 주인으로 택했다. 정령 노인은 로얀을 호기심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두 개의 검을 모두 선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어둠과 빛을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존재는 없었다.
“뭐? 허허허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네. 성검은 빛을, 마검은 어둠의 속성을 지닌 검이라네. 검이 선택할 정도로 강한 두 개의 기운을 동시에 몸에 지닌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만약에 말입니다.”
“끌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두 개의 검을 공짜로 주지.”
정령 노인의 말이 끝난 직후 로얀은 손을 뻗었다.
턱!
스릉.......
그가 처음 잡은 검은 성검 에리오네였다.
에리오네가 뽑히자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보통 검보다 검폭이 좁고, 길이는 평범한 롱 소드보다 조금 긴 데다가 끝이 유난히 뾰족한 검이었다. 에리오네의 검신엔 부드러운 곡선이 검 끝까지 새겨져 있었고, 그립 위에는 깃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웅웅.......
에리오네가 맑은 검명을 토해 내었다.
“호오! 에리오네가 자네를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구먼. 축하하네.”
성검 에리오네를 왼손에 쥔 로얀은 이번엔 오른손을 마검 다크리온을 향해 뻗었다.
“그, 그만두게!”
턱!
로얀이 마검을 손에 쥐는 순간, 정령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르릉.......
에리오네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마검 다크리온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길이는 비슷했지만 검폭은 훨씬 넓었다. 그리고 양날이 매우 날카롭게 서 있어 베기 위해 만든 검임을 알 수 있었다.
다크리온의 검신엔 피가 잘 빠져나가게 두 줄로 굵은 선이 파여 있었고 그립 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눈알같이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웅웅.......
검붉은 다크리온의 검신이 떨렸다. 에리오네가 터뜨린 검명이 맑고 잔잔했다면 다크리온의 검명은 매우 거칠었고 팔이 떨릴 정도로 힘이 넘쳤다.
정령 노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헉!”
성검과 마검을 한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 로얀의 팔이 이전과 다름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붙어 있는 것에 정령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다 그것들을 부딪쳐보려 했다. 그러자 정령 노인이 손을 휘휘 저으며 다급히 말렸다.
“자, 잠깐......!”
멈칫.
“......?”
“두, 두 개의 검은 성질이 워낙에 상극이라 부딪치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네.”
정령 노인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다 다시 검집에 넣었다.
로얀은 두 자루의 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정령 노인이 공짜로 준다고 했기에 더욱 흡족했다.
“자, 잠깐! 잠시만 기다리게!”
인사를 하고 대장간을 나서려는 자신을 붙잡은 정령 노인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로얀은 마검과 성검을 각기 다른 옆구리에 찼다. 검집에 들어 있는 상태였음에도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닿지 않으려고 웅웅거리며 울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찬 것이다.
“휴우... 이것도 들고 가게나.”
안에서 다시 나온 정령 노인이 그에게 건네준 건 망토였다. 갈색 천으로 만든 듯한 그것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수수한 모양으로 평범의 극을 달렸다. 하지만 그 크기가 무척이나 커서 190에 육박하는 로얀이 둘러도 발목까지 내려올 것 같았다.
“이것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군요.”
“허허! 내가 만든 거라네. 가져가게.”
“정말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가져가게나. 내 수십만 년을 살면서도 자네처럼 특이한 인간은 처음 봤으니까 말일세.”
정령 노인의 말을 들은 로얀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장간을 나섰다. 문 밖으로 나가 망토를 둘러본 로얀은 그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로얀이 빠져나간 대장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때, 대장간 깊숙한 곳에서 매우 어린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혹시 노환이라도 드신 거 아니에요?”
“허허허, 노환이라니... 팔러 나온 것도 다 팔았으니 가게를 정리하고 그만 가봐야겠구나.”
“피이! 노환이 아니고 뭐예요? 성검과 마검을 준 것도 모자라 땅의 숨결이라는 할아버지의 작품도 주셨잖아요.”
“두 개의 검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않느냐.”
“우우우! 정령왕씩이나 되는 할아버지의 물건이 보통 물건이에요? 역시 노환이야.”
“끌끌... 그러는 너는 7만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느냐.”
“윽! 정확히 7만 하고 천 살이에요! 훠, 훨씬이 아니라구요!”
“허허허... 그러시오, 할멈?”
“꺄아아! 그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칫, 칫! 저 갈 거예요.”
할멈이라는 소리에 격하게 반응하던 소녀의 음성은 정령 노인의 다음 말에 잠잠해졌다.
“그 인간을 따라갈 셈이냐?”
“.......”
“갈 생각이구나?”
“누, 누가 간다고 했어요! 흥!”
정령 노인은 소녀가 그 말과 함께 이곳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인간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을 게 분명한 소녀는 틀림없이 그를 따라갔을 것이다. 이미 몇만 년을 봐왔으니 아마 자신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허허, 녀석도 참. 응? 허허허허......!”
정령 노인은 대장간을 둘러보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놔뒀는지 로얀의 가죽 주머니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들어 있었다.
땅의 정령왕인 그에게 있어 금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 * *
끼익!
“어서 오세요.”
뚜벅뚜벅.......
어리게 보이는 소녀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쏜살같이 튀어나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교육을 잘 받은 듯했다.
그녀의 모습을 뒤로하고 로얀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곳은 입구와는 달리 중년의 여인이 맡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의 주인인 듯했다.
“1인실 하나.”
빙긋.
“용병이신가 보군요. 1실버입니다.”
역시나 비쌌다. 1실버라니......!
밤이 늦은 데다가 수도라 그런지 방이 빈 곳이 없었다. 게다가 공주의 무사 귀환 파티가 3일간 열리는 덕분에 다른 날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결국 그는 호화로워 보이는 거대한 여관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숙박비는 너무도 비쌌다.
여비로 1실버만을 남겨두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정령 노인에게 모두 줘버렸기 때문에 그의 수중엔 현재 딱 1실버밖에 없었다.
딱.
1실버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로얀은 여주인이 건네주는 키를 받았다.
“이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뚜벅뚜벅.......
끼익!
이층의 복도를 따라 걷던 그는 가장 안쪽의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었지만 안은 정말 호화스러웠다. 사치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쿵.
문을 닫은 로얀은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았다. 푹신한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왔다.
펄럭.
그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고 허리에 찼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풀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스르릉.......
먼저 다크리온을 뽑은 로얀은 드워프 모습을 한 정령 노인에게서 선물받은 망토를 집어 들어 그 검을 닦기 시작했다. 망토를 선물한 정령 노인이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할 정도의 행동을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희대의 보물이 헝겊 쪼가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로얀은 전쟁터에서나 어디서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할 때에는 검을 다듬었다. 그랬기에 숫돌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필수였다.
망토로 다크리온을 닦던 로얀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는지 품속에서 작은 숫돌을 꺼냈다.
치치칙......!
오르하리콘으로 만들어진 마검 다크리온의 검신은 숫돌로 갈 필요가 없었지만 로얀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아기를 돌보는 엄마처럼 정성 들여 검을 손질했다.
웅웅.......
다크리온이 싫은지 검명을 토해 냈지만 로얀에게 그런 건 먹히지 않았다.
치치칙......!
날카로운 다크리온의 검날에 죄없는 숫돌만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 * *
“뭐?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정말 기막히게 예쁜 여자가 걸려들었대.”
“호오... 얼마나 예쁘기에?”
커다란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던 로얀은 정령왕이 되면서 이전보다 더 발달한 청각으로 인해 곤혹스러웠다. 이 호화스러운 방은 이층 복도 구석의 여관 건물 뒤편에 있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어두운 뒷골목과 맞닿아 있었다. 카운터에 있던 여주인이 로얀이 용병처럼 보이자 이런 곳에 방을 내준 듯했다.
로얀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동네 건달들의 말소리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달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두 명의 건달은 로얀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빛이 없는 골목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작은 키의 건달은 프란이었고, 빼빼 마른 데다가 키만 멀대같이 큰 건달은 시폰으로 팔란의 골칫거리들이었다.
평소 귀가 얇고 떠들기 좋아하는 프란이 잡혀 있다는 여자에 대해 말하자 꺼벙한 시폰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완전 천사 같은 얼굴인데, 제길! 상품 가격이 떨어진다고 손가락 하나 못 건드리게 한다니까.”
“와아, 그 정도라니......!”
그들의 두목은 눈이 매우 높았다. 그런 그가 상품이 상급이라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 여인의 미모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근데 살짝 돈 년이야.”
“뭐?”
“자기가 이 나라의 공주라고 계속 외치는 거야.”
“킥, 공주라면 지금쯤 파티 장... 커컥!”
시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층에서 이곳까지 뛰어내린 로얀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얀은 언제 착용했는지 몸에는 땅의 숨결을 두르고 양 허리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매달고 있었다.
시폰은 183 정도의 꽤나 큰 키였지만 지금 그는 190에 육박하는 로얀의 손에 들려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로얀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내해라.”
“네놈은 뭐냐!”
“너, 너는.......”
스릉, 웅웅.......
역시나 시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당당하게 외치던 말 많은 프란도 굳어버렸다. 로얀의 검집에서 빠져나온 다크리온이 푸른 오러를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죽일 듯했기 때문이다.
“커컥! 어, 어딜 안내......?”
“조금 전에 말했던, 여자가 잡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이, 일단... 이, 이 손을.......”
쿵.
“케켁!”
시폰은 지면으로 내려오자 기침을 토하며 붉게 달아올라 있는 목을 쓰다듬었다.
스윽.
웅웅.......
“따, 따라오십시오.”
오러를 머금은 다크리온이 약간 움직이며 빛을 뿌리자 눈치 빠른 프란이 급히 나서서 로얀에게 허리를 굽실거렸다. 비굴한 모습을 보인 프란은 로얀을 그들의 아지트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서 걸어갔다.
혼자 남겨진 시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엔 아직도 로얀의 섬뜩한 눈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뚜벅뚜벅.......
“여깁니다.”
몸을 떨며 앞서가던 프란의 말에 로얀은 바닥을 보았다.
그를 안내하던 프란은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고, 다시 그 집 안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바닥에 깔린 커다란 담요를 치우고 나타난 작은 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후웅.......
퍽.
“컥!”
쿠당탕!
로얀은 자신을 안내해 준 프란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그가 방구석에 처박히는 것을 본 로얀은 바닥에 있는 작은 문을 당겨 열었다.
끼익!
화르륵.
문을 열자 밑으로 향하는 긴 계단이 나타났고, 벽에 붙어 있던 횃불이 그의 등장을 반겼다.
뚜벅뚜벅.......
딱딱한 돌로 된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로얀의 얼굴은 싸늘했고, 그의 눈동자는 횃불보다도 더 이글거렸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로얀의 귓가로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가깝게 울려왔다.
“헤헤! 두목, 이거 만져 보기만 하면 안 될까요?”
“이 새끼가! 이년만 팔아넘기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단번에 청산할 수 있단 말이다!”
“쩝, 그래도 너무 아쉬운데요.”
“키킥!”
뚜벅뚜벅.......
건달들의 말을 들은 로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그는 작은 나무로 된 문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너머에서 건달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음성으로 짐작컨대 일당은 모두 네 명.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모두 네 명의 것이었다.
스르릉.......
검집에 넣어두었던 다크리온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웅웅웅.......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
콰가각!
중급 소드 마스터가 뿜어대는 오러의 힘을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문이 감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무문이 힘없이 부서져 나가고 로얀의 시야로 문 너머의 광경이 빨려 들어왔다.
거대한 탁자를 중심으로 네 남자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술을 마시는 중이었는지 방 여기저기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탁자 위엔 불그스름한 육포가 널브러져 있었다.
“웬 놈이냐!”
“누구냐!”
뚜벅.
웅웅.......
로얀의 다크리온이 거친 검명을 토해 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지하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런 그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며 말하는 건달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로얀의 눈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너무도 가냘파 보이는 소녀는 족쇄에 매인 천사처럼 쇠사슬에 묶여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나 폰 크라우드. 이 나라의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이렇게 더럽고 퀴퀴한 곳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오면서 저항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상해 있었다. 게다가 숨소리조차 미약해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빠득.
로얀의 입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지하의 방 안을 잠식했다.
웅웅.......
다크리온이 주인의 기분을 읽었는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처음 여관에서 엘레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설마 했었는데 정말로 그녀가 이곳에 잡혀 있는 것이었다.
“모두 죽인다.”
지독한 살기를 풀풀 흘리고 있는 로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사람의 그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뭐, 뭐?”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고 건달들에게 다가가며 말하는 로얀의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둘 초점을 잃어갔다.
스거걱.
푸화화확!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들의 눈동자에 맺힌 초점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세 건달은 찍소리 한번 못 해보고 모두 운명을 달리했다.
“으아아아!”
남은 건달 한 명이 품 속에서 짤막한 대거를 꺼내 로얀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괴성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스걱.
“끄아아악......!”
대거를 쥔 손목이 절단되어 피를 뿌리며 술병과 육포가 널려 있는 탁자 위로 뒹굴었다.
부우욱!
그리고 다크리온이 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푸화화확!
허리가 잘린 건달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하지만 로얀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엘레나를 향해 걸어갔다.
스거걱.
굵은 사슬은 다크리온에게 저항 한번 못 해보고 힘없이 떨어졌다. 쇠사슬을 잘라낸 로얀은 조심스럽게 엘레나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으음.......”
그의 손길을 느낀 엘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이미 건달들의 비명소리로 인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가 깨어나자 그녀의 얼굴에 가 있는 자신의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막았다.
그녀의 하얀 손이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피부 위로 이슬이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오빠.......”
말라버린 그녀의 입술이 힘없이 열리며 흘러나온 목소리에 로얀의 심장이 뛰었다. 그 목소리가 아련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레이나의 목소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로얀이 그렇게 떠나버리자 그에게 끝내 사과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파티가 한창인 떠들썩한 분위기를 틈타 몰래 왕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로얀을 찾기 위해 팔란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단지 로얀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한데 후드를 눌러 쓰고 혼자 다니는 그녀를 건달들이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건달들은 그녀의 후드를 벗겨보고는 급히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건달들의 완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격한 저항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 건달들은 평소에도 아무 여자나 잡아 노예시장에 팔기로 유명한 악질적인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난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힘이 다했는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너무 지친 그녀는 로얀을 보자 마음이 풀려 잠이 든 것이다.
스윽.
로얀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흘러내린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는 작게 속삭였다.
“미안... 다시는 널 잃지 않겠어. 다시는!”
레이나와 너무나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엘레나를 보며 로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얀은 엘레나를 등에 업고 붉은 피가 뿌려져 있는 어두운 지하를 조용히 빠져나갔다.